# 아침 6시, 32층 사무실은 여전히 어둑했다.
지훈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박현준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책상 위에 소송 서면만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의자는 뒤로 밀려나 있었다. 옆자리 신입에게 물었다.
"박현준이는?"
"어제 밤새 있었어요. 새벽 4시쯤 화장실 다녀오더니 지금도..."
지훈이 사무실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야근실. 32층에서 가장 고독한 장소. 회의실 옆 독방처럼 생긴 곳에서 박현준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얼굴은 옆으로 향해있었고, 입에서 얕은 숨이 나왔다. 셔츠는 구겨져있었고, 넥타이는 책상 위에 떨어져있었다. 손가락 끝은 까맣게 변색되어있었다. 볼펜을 들고 있던 손.
지훈은 자신의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박현준의 어깨 위에 살며시 덮었다.
그 순간이었다.
일기장이 책상 모서리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지훈이 놓고 간 일기장. 박현준의 손 바로 앞에서 멈췄다.
지훈의 심장이 멈췄다.
손이 떨렸다. 일기장을 집어올려야 했다. 지금 당장.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박현준이 이미 깼을 수도 있었다. 어제 저녁 이후로, 지훈이 모르는 사이에 박현준이 몇 페이지를 읽었을 수도 있었다.
'2014년 6월의 기록. 오늘 누군가와 거의 대화를 나눴다. 그 사람도 나처럼 혼자인 것 같았다.'
그 '누군가'가 박현준이라면. 만약 이수진이 박현준을 관찰했다면. 그리고 박현준도 같은 방식으로—
지훈은 일기장을 집어올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박현준이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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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3시. 을지로 도서관.
박현준의 전화였다. 지훈은 이수진과 앉아있던 테이블에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다음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도.
10분 뒤, 박현준이 을지로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도서관의 오후 빛이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먼지가 떠다니는 그 빛 속에서 박현준은 지훈을 보았다. 그리고 지훈이 마주보고 앉은 여자를 보았다. 40대 초반, 검은 옷을 입은 여자. 얼굴에 주름이 있었고, 눈이 고요했다.
박현준이 다가왔다. 천천히가 아니라 빠르게. 지훈의 옷깃을 잡았다.
"이게 뭐야? 정태호가 너 찾고 있는데, 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지훈이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박현준의 손이 더 세게 잡았다.
"그 일기장, 누구 거야?"
지훈은 말하지 않았다.
"왜 안 말해? 누구 거야?"
"..."
"나도 알고 싶어. 넌 뭘 찾는 거야? 정말 궁금해. 왜냐하면 나는 지금 파트너 승진만 생각하고 있는데, 넌 뭔가 완전히 다른 걸 찾고 있는 것 같거든."
박현준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지훈은 처음으로 그것을 들었다. 박현준의 진짜 목소리. 그 아래에 있던 것. 6년을 같은 회사에서 일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던 것.
"혼자인 거지?"
박현준이 계속했다.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넌 혼자가 아닌 줄 알았어. 항상 뭔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나는 계속 너를 따라가려고 했어. 근데 넌 어디론가 가고 있고, 나는 자리에 남겨져 있어. 파트너 승진, 그런 거... 다 소용없는 건가?"
지훈은 박현준을 보았다. 진짜로.
그 순간, 박현준이 지훈을 밀어냈다. 약간의 폭력성을 담아. 지훈이 테이블 뒤로 비틀거렸다.
"미안해, 현준이."
지훈의 말에 박현준의 얼굴이 굳었다.
"뭐가 미안한데? 나한테서 뭘 숨기고 있어? 왜 내게만 말을 안 해?"
이수진이 일어섰다. 조용히. 그리고 도서관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이런 것들을 알고 있었다. 이런 대화들. 이런 침묵들.
지훈은 박현준을 안아주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사람을 안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을지로 도서관이었고, 그들이 안고 있던 것은 6년의 경쟁이었고, 파트너 승진이었고, 성과였다.
지훈은 팔을 내렸다.
"신경 쓰지 마. 넌 넌대로 해."
박현준이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도서관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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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15분. 을지로 도서관.
지훈은 혼자였다. 이수진은 2층 사무실에 있었다. 지훈은 일기를 펼쳤다. 2014년 6월. 박현준이 입사한 지 3개월 된 시점.
'오늘 누군가와 거의 대화를 나눴다. 회의실에서 선배가 신입을 다그치고 있었다. 신입은 자료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고 혼났다. 그런데 그 신입의 눈을 봤다. 정말 혼자인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없지만, 적어도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훈은 그 신입이 누구인지 알았다. 박현준이 입사했을 때를 기억했다. 첫 회의에서 박현준은 지훈을 보고 있었다. 계속. 마치 뭔가를 배우려는 듯이. 그리고 지훈은 박현준을 모르는 척했다. 자신도 그렇게 배워왔으니까.
일기장의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7월. 8월. 박현준의 이름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들이 있었다.
'이제 떠나야 할 것 같다. 이 자리에서 누군가를 구하려고 했지만, 결국 나 자신을 구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8월 15일. 마지막 항목.
'32층에서 보낸 마지막 날. 누군가는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누군가와 함께 이 시간을 견디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언젠가 누군가가 이 기록을 읽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나는 혼자가 아니었던 셈이다.'
지훈은 책장을 넘겼다. 남은 페이지는 비어있었다. 마지막 장도, 그 다음 장도. 모두 하얀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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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 32분.
박현준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지훈의 외투가 그의 어깨 위에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옆으로 향해있었고, 입에서 얕은 숨이 나왔다.
지훈은 박현준의 자리를 본다. 책상 위에는 여전히 소송 서면이 쌓여있었다. 그리고.
일기장이 박현준의 손 위에 있었다.
지훈의 눈이 커졌다.
박현준의 손가락이 일기장의 등을 만지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느끼려는 듯이. 아니, 이미 느끼고 있는 것처럼.
지훈은 박현준의 얼굴을 봤다. 자는 얼굴. 하지만 뭔가 달라 보였다. 눈꼬리에 물이 맺혀있었다. 말라버린 눈물. 밤새 흘렸던 눈물.
지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박현준이 읽었다. 일기장을 읽었다. 전부를 읽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몇 페이지만. 하지만 충분했다. 충분히 알기에.
박현준은 어디서 울었을까. 2014년 6월의 기록에서? 아니면 마지막 페이지에서? 아니면 그 빈 페이지들을 마주했을 때? 지훈은 박현준의 눈물이 떨어진 정확한 지점을 알고 싶었다. 그것이 박현준이 무엇을 깨달았는지를 알려줄 것 같았으니까.
그 순간, 지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정태호였다.
"한지훈. 지금 내 사무실로 와."
지훈이 박현준을 본다. 박현준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손은 여전히 일기장 위에 있었다.
"네, 지금 가겠습니다."
지훈이 말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박현준의 손. 그 손이 일기장을 쥐고 있는 한, 지훈은 알 수 없을 것이었다. 박현준이 뭘 읽었는지. 박현준이 뭘 느꼈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박현준이 지훈에 대해 뭘 알게 됐는지.
일기장은 더 이상 지훈의 것이 아니었다.
지훈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박현준의 손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일기장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종이가 스르르 소리를 냈다. 박현준이 움찔했다. 하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일기장을 들고 나가야 했다. 정태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32층의 사무실에서, 최종 결정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지훈은 알고 있었다. 그 결정이 뭘 의미하는지. 선택이 아니라 통보일 거라는 것을. 파트너 승진을 앞두고 있는 누군가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보일 수 없다는 것.
하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박현준의 얼굴을 다시 봤다. 자는 듯하면서도 자지 않은 표정. 눈꼬리의 눈물은 이미 말라가고 있었다. 뺨에 얼룩만 남아있었다. 밤새 얼마나 울었을까. 일기장의 어느 부분에서부터 눈물이 났을까. 이수진의 어떤 말이 박현준의 가슴을 쳤을까.
"현준이."
지훈이 속삭였다. 박현준은 반응하지 않았다.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아니면 깬 척하고 있었다. 지훈이 떠나가기를 기다리면서.
지훈은 일기장을 들고 박현준의 자리를 떠났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봤다. 박현준이 눈을 뜨면 어떤 표정을 할까. 일기장이 없어진 것을 알면 뭐라고 말할까. 아니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모르는 척할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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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층 정태호의 사무실. 아침 6시 58분.
정태호는 창문을 통해 서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벽 햇살이 강남의 건물들을 비추고 있었다. 여전히 깜깜한 거리도 있었고, 이미 밝아오는 곳도 있었다. 시간은 다 같은데, 누군가는 아직 자고 있고 누군가는 이미 깨어있었다.
"들어와."
정태호가 말했다. 지훈이 문을 열었다.
"앉아."
지훈이 앉았다. 정태호는 여전히 창문을 보고 있었다.
"넌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질문이었지만, 질문 같지 않았다. 진술이었다.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영미가 보고했어. 넌 최근 2주일 동안 근무 시간의 절반을 회사 밖에서 보냈다고. 소송 준비는 뒤로 미루고, 왜 그런 짓을 해?"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넌 롯데로펌의 어소시에이트 변호사야. 파트너 승진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야. 이런 시점에 뭘 하는 거야?"
정태호가 드디어 돌아섰다. 지훈을 바라봤다. 눈빛이 차가웠다.
"일기장이 있다고 들었어. 누가 쓴 일기야?"
지훈은 일기장을 들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었다. 정태호가 그것을 본다.
"그거."
정태호가 손을 내밀었다.
"줘."
지훈은 주지 않았다.
정태호의 얼굴이 경직됐다. 10년을 이 회사에서 일하며 한 번도 거역당해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지훈도 알고 있었다. 정태호의 손을 거절하는 게 뭘 의미하는지.
"한지훈. 난 지금 질문하는 거 아니야. 명령하는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줘."
"줄 수 없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정태호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탁. 탁. 탁.
"넌 파트너 승진이 안 될 거야."
단호했다. 더 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는 목소리였다.
"대신 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첫 번째, 내일 자진 퇴사. 두 번째, 그 일기장을 내게 주고 지금처럼 행동하지 말고 일에만 집중해. 그러면 어소시에이트 자리는 유지해줄 거야. 파트너는 아니겠지만."
정태호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있어. 박현준이 있지. 그 친구가 요즘 좀 이상하던데, 넌 그 친구한테 뭔가 말했어? 아니면 그 일기장에 그 친구 이름이 나와?"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 박현준이가 이 일기장의 내용을 알고 있어?"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그 친구가 어제밤 새벽까지 회사에 있었거든. 누군가가 봤어. 야근실에서. 뭔가 중요한 걸 읽고 있는 것처럼 보였대. 혹시 그게 이 일기장 아니야?"
지훈의 손가락이 일기장의 모서리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일기장이 회사의 기밀정보를 담고 있다면, 그건 법적 문제가 될 수 있어. 예를 들어, 직원 괴롭힘이나 비위생적 근무 환경 같은 것들이 적혀있다면 말이야. 그리고 만약 박현준이가 이걸 읽었다면, 그것도 문제가 될 수 있고. 넌 그 친구를 조직에서 내보낼 준비가 되어 있어? 왜냐하면 넌 그 친구를 이 일에 연루시킨 거니까."
정태호의 말이 정확했다. 지훈은 박현준을 이미 연루시켰다. 일기장을 놓고 간 것으로. 박현준이 읽게 한 것으로. 정태호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명시했다. 직원 괴롭힘, 비위생적 근무 환경. 이수진이 기록했던 것들. 그것이 밖으로 나가면 회사에 미칠 타격.
지훈은 순간 흔들렸다. 박현준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박현준을 지키려면 일기장을 포기해야 했다.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고 정태호의 손에 일기장을 내주어야 했다. 그것이 박현준을 보호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수진의 기록은 사라질 것이었다. 누군가의 절망과 희망이 담긴 그 기록이. 그리고 박현준이 밤새 읽으며 울었던 그 진실이.
"생각할 시간이 있어?"
"없습니다."
지훈이 말했다.
"지금 선택하세요."
정태호의 눈썹이 솟아올랐다. 그 대답이 예상 밖이었던 모양이었다.
"뭐라고?"
"일기장은 줄 수 없습니다."
"그럼 퇴사하겠다는 거네."
"예."
지훈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인지 타인의 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니, 그것은 박현준이었다. 박현준의 눈물이었다. 박현준의 침묵이었다. 박현준이 밤새 일기장을 읽으며 흘렸던 모든 것이 지훈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박현준을 남겨두고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책감인지, 그것도 함께.
정태호가 웃었다. 짧고 날카로운 웃음이었다.
"정말 한심하네. 넌 6년 동안 뭘 했어? 파트너 승진을 코앞에 두고 이렇게 낭비하다니."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넌 지금 최고 시점을 버리고 있어. 넌 아직 젊아. 다른 로펌으로 가도 이력서에 얼룩이 질 거야. 이 자리를 버리면 넌 끝이야. 알아?"
지훈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너 같은 놈이 나가면 다른 직원들도 생각하기 시작할 거야. 나한테 도전하는 놈들. 이 조직을 흔들려고 하는 놈들. 넌 그런 걸 생각 안 해?"
지훈은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넌 박현준을 봤어? 그 놈은 뭔가 다르더라. 지난밤 새벽까지 소송 자료 정리하고 있었어. 누군가가 봤대. 그게 진짜 변호사지. 넌 박현준처럼 해. 알겠어?"
박현준.
지훈의 가슴이 철렁했다. 박현준이 새벽까지 회사에 있었던 건 소송 자료 때문이 아니었다. 일기장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지훈이 외투를 덮어줬을 때, 박현준의 손은 이미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밤 시간 동안 박현준은 그 빈 페이지들을 마주했을 것이다. 이수진이 32층을 떠난 후의 모든 시간들을. 박현준이 혼자였던 모든 순간들을.
지훈은 정태호의 거짓말을 간파했다. 새벽까지 소송 자료를 정리했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정태호는 박현준이 일기장을 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협박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다. 박현준을 조직에서 내보내겠다는 위협으로. 직원 괴롭힘이나 비위생적 근무 환경 같은 기밀정보가 새어나갔다는 이유로.
"이제 나가."
정태호가 손을 휘저었다.
"인사팀에 가서 퇴직 서류 작성해. 급여는 당월 분까지 준다. 상여금은 없어. 이해했어?"
지훈이 일어났다.
"그런데 한 가지."
정태호가 다시 말했다.
"그 일기장. 혹시 회사의 기밀정보를 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어. 내가 조사해볼까?"
협박이었다. 명백한 협박. 정태호는 일기장의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훈이 일기장을 놓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정태호는 충분히 위협을 느낄 수 있었다.
지훈은 일기장을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회사의 기밀정보 따위는 없었다. 대신 누군가의 절망이 있었고, 누군가의 희망이 있었고, 누군가의 사랑이 있었다. 하지만 정태호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에게는 오직 조직의 질서와 자신의 권력만 보일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지훈이 말했다.
"일기장은 회사의 기밀과 무관합니다."
"그렇다면 괜찮네. 나가."
지훈이 돌아섰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한지훈."
정태호가 다시 부었다.
지훈이 멈췄다.
"넌 이제 롯데로펌의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넌 절대로 다른 변호사들의 본보기가 될 수 없어. 알겠어? 넌 실패한 거야. 넌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은 틀렸어. 이제 그 결과를 감수해. 그게 인생이야."
---
엘리베이터는 내려가고 있었다.
32층에서 1층으로.
지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봤다. 일기장을 들고 있는 모습. 6년 동안 이 회사에서 입고 있던 슈트. 이제 더 이상 변호사가 아닌 누군가의 모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24층. 문이 열렸다.
김영미가 들어왔다. 지훈을 보고 눈이 커졌다.
"한지훈? 이시간에 뭐 하는 거야?"
"퇴사합니다."
"뭐?"
"정태호 회장과의 면담을 마쳤습니다. 인사팀에 가서 서류를 작성하겠습니다."
김영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잠깐, 잠깐. 뭐가 일어난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너는..."
"죄송합니다."
지훈이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였다.
"근데 그 일기장이..."
김영미가 물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이미 내려가고 있었다. 지훈의 대답을 들을 수 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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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로비. 아침 7시 34분.
강남역 쪽으로 나가는 출구 앞에서 지훈은 멈췄다. 회사를 나가면 이 모든 게 현실이 될 것이었다. 퇴직. 경력 단절. 다른 회사에서 받을 이력서의 낙인.
그리고 박현준.
지훈은 휴대폰을 꺼냈다. 박현준에게 메시지를 쓰려다 손을 놨다. 뭘 쓸 수 있을까. 미안해? 고마워? 대신 뭐해? 박현준의 전화를 받지 않고 있는 이유를 지훈은 알 수 없었다. 회사에 남기로 결정한 건지, 아니면 지훈을 피하는 건지.
지훈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신발끈을 다시 묶고, 일기장을 들었다. 2014년 8월 15일. 이수진이 32층을 나간 날. 그 다음 장부터는 모두 비어있었다. 쓰여진 것도 없고, 날짜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서, 지훈이 그 빈 페이지들 위에 뭔가를 쓰기 시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현준이 읽은 그 기록들을 이어가면서.
지훈은 강남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
정오. 32층 사무실.
박현준은 눈을 떴다.
지훈의 외투가 여전히 자신의 어깨 위에 있었다. 따뜻했다. 낡은 외투였지만 따뜻했다.
손에 일기장이 없었다.
박현준은 천천히 일어났다. 책상 위를 봤다. 지훈의 물건이 아무것도 없었다. 펜도 없고, 메모도 없고, 사진도 없었다. 마치 지훈이 처음부터 여기에 없었던 것처럼.
박현준은 지훈의 외투를 들었다. 외투 안주머니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작은 포스트잇.
"미안해, 현준이. 그리고 고마워. 같은 자리에 있어줘서."
박현준의 손이 떨렸다. 포스트잇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들고는 가슴에 안았다.
32층의 다른 변호사들이 출근하기 시작했다. 박현준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지훈의 자리는 이미 누군가 다른 사람이 앉아있을 것이었다. 아니면 내일쯤 앉아있을 것이었다.
박현준은 지훈의 외투를 접었다. 정성스럽게. 마치 누군가 중요한 선물을 다루듯이.
그리고 포스트잇을 다시 읽었다.
"같은 자리에 있어줘서."
박현준은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 수 없었다. 32층의 누군가가 이미 자신을 보고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박현준은 눈물을 삼켰다. 대신 지훈의 포스트잇을 지갑에 넣었다.
그리고 소송 서면을 다시 펼쳤다.
하지만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박현준은 펜을 들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지만, 펜을 들었다. 그리고 종이 위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소송 서면이 아닌 다른 것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밤새 일기장을 읽으며 깨달은 것들을.
손이 움직였다. 천천히. 마치 처음 글을 배우는 아이처럼.
박현준은 종이 위에 글을 썼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다음 줄.
"같은 자리에 있어준 누군가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그것으로 충분했다."
박현준은 펜을 놨다.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글씨는 명확했다. 자신의 것이었다.
박현준은 종이를 바라봤다. 자신이 쓴 글씨. 자신의 목소리. 처음으로 자신의 것으로 쓴 말.
그리고 천천히 일어났다.
정태호의 사무실로 가지 않고, 휴게실로 향했다.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얼굴. 지난밤 울었던 자국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박현준은 거울 속의 자신에게 물었다.
너는 뭘 하고 싶어?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박현준은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지훈이 남겨둔 것, 그 포스트잇 한 장이 박현준에게 묻고 있었다. 너는 정말 이 자리에 남고 싶은가. 아니면 지훈처럼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가.
박현준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름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선택이 시작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박현준은 주먹을 쥐었다. 천천히. 결정하듯이.
---
을지로. 오전 9시 42분.
'마음의 자국' 도서관의 문은 아직 닫혀있었다. 지훈은 계단에 앉아 일기장을 들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을지로 골목을 밝히고 있었다.
지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러 통의 메시지가 들어와있었다.
최소은: "선배, 어디 가셨어요? 회장님이 찾으시는데..."
김영미: "지훈, 이건 좀 심한데. 회사에 돌아와. 우리 이야기 좀 하자."
박현준: "......"
메시지는 없었다. 대신 전화를 걸었다가 끊겼다. 그리고 또 걸었다가 끊겼다. 박현준은 지훈의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회사에 남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지훈을 피하면서.
지훈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도서관의 문이 열렸다. 이수진이 나왔다.
"어제 밤에 못 왔네. 괜찮아?"
"퇴사했습니다."
이수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지 않은 웃음이었지만, 진정한 웃음이었다.
"그렇구나. 어땠어?"
"모르겠습니다."
지훈이 대답했다.
"아직도?"
"네.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이수진이 지훈의 옆에 앉았다. 둘 다 을지로 골목을 봤다. 아침 햇살이 거리의 오래된 건물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아. 앞으로 천천히 알아가면 돼."
"박현준이 일기장을 읽었습니다."
지훈이 말했다.
"알았어. 어떻게?"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울었어요."
이수진이 일기장을 봤다.
"그럼 이제 일기장은 넌 것도 내 것도 아니네."
"네."
"누구 것일까?"
지훈은 생각해봤다. 누구 것일까. 이수진이 10년 전에 쓴 것이고, 지훈이 발견한 것이고, 박현준이 읽은 것이고, 이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읽을 것이고.
"아무도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훈이 말했다.
"그래. 그런 거 있지. 누구 것도 아니면서 모두의 것인 것. 그게 기억이야.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우린 혼자가 아니었던 거고."
이수진이 일어났다.
"들어올래? 오늘 손님들이 꽤 많을 것 같아."
지훈이 일어났다. 일기장을 들었다. 그리고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갔다.
---
정오. 32층 사무실.
박현준의 책상 위에는 여전히 소송 서면이 쌓여있었다. 하지만 그 옆에는 새로운 종이 한 장이 놓여있었다. 펜으로 쓴 글씨. 박현준의 글씨.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같은 자리에 있어준 누군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박현준은 그 종이를 바라봤다. 자신이 쓴 글씨. 자신의 목소리. 처음으로 자신의 것으로 쓴 말.
박현준은 천천히 일어났다. 종이를 들었다. 그리고 정태호의 사무실로 향했다.
복도를 걸으면서도 박현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종이를 쥔 손. 자신의 결정을 담은 손.
박현준은 정태호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정태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현준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