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5시 42분
새벽 5시 42분, 지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정태호'라는 이름이 떴다. 지훈은 울음을 무시했다. 1분 뒤 다시 울렸다. 또 정태호였다. 지훈은 화면을 어두워지게 놔뒀다.
2분 뒤. 3분 뒤. 5분 뒤.
여섯 번째 울음이 울렸을 때, 지훈은 휴대폰을 들었다가 내려놨다. 을지로 거리에서 도서관을 향해 걸어가던 그 결정은 이미 내려졌다. 그런데 가슴이 철렁했다. 정태호는 롯데로펌의 절대 권력자다. 그 사람이 새벽부터 자신을 부르는 것은 단순한 업무 지시가 아니다.
지훈은 회사로 돌아갔다.
32층은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새벽이라는 개념이 없는 공간이었다. 기록실 문을 열고 2014년 인사 기록을 뒤졌다. 손가락이 떨렸다. 다섯 번의 부재중 전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정태호가 자신을 부를 때는 선택지가 없다. 가거나, 망하거나.
기록실의 형광등 아래서 지훈은 2014년 5월부터 8월까지의 인사 명단을 찾았다. 그 시기 32층에는 총 47명이 있었다. 그 중 이수진과 같은 팀에 속한 사람은 4명. 지훈은 손가락으로 이름을 짚었다. 김준호. 현재 대형 로펌 파트너. 박현준. 현재 과장. 이혜정. 현재 퇴사. 연락처를 찾아 가능한 사람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만날 수 있을까?'
김준호의 답장은 30분 뒤에 왔다.
'강남역 지하 카페. 오후 3시.'
박현준의 답장도 곧 들어왔다.
'형, 뭐 있어? 오후 5시는?'
---
오후 3시 5분, 지훈은 강남역 지하 카페에 도착했다. 어두운 조명 아래 김준호가 이미 앉아 있었다. 10년이 지났는데도 얼굴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만 눈 아래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성공의 대가를 얼굴에 새긴 사람의 모습이었다.
"오랜만이네."
"그래. 10년 만인가."
지훈은 김준호 맞은편에 앉았다. 커피 잔이 식고 있었다. 김준호는 지훈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낯설었다. 호기심과 경계가 섞여 있었다.
"급하게 연락 준 걸 보니, 특별한 일이 있나?"
지훈은 일기장을 꺼냈다. 테이블 위에 놓았다. 낡은 검은색 표지. 2014년 1월이라고 적힌 그것.
김준호의 눈이 반응했다. 아주 작은 반응이었지만, 지훈은 포착했다.
"이 일기장을 알아?"
"아니. 왜?"
김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일기장에서 눈을 피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작게 떨렸다.
"이 안에 당신에 관한 기록이 있어."
지훈은 천천히 말했다. 손가락으로 일기장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 2014년 7월 15일. 필체는 부드러웠다.
'김준호 선배가 오늘 점심을 혼자 먹었다. 샐러드만. 매번 그렇게 먹는다. 옆 테이블에 앉은 후배들이 그를 보며 웃었다. 그는 웃지 않았다. 그냥 먹었다. 그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되는 건가.'
카페 안의 소음이 멀어졌다. 지훈은 김준호의 얼굴만 봤다. 김준호는 일기장 페이지를 응시했다.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더 크게 떨렸다.
"누구 일기야?"
"2014년에 32층에 있던 사람. 당신과 같은 팀이었던 사람."
"이름은?"
지훈이 대답하기 전에, 김준호가 먼저 말했다.
"이수진."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며 김준호의 얼굴이 변했다. 주름이 더 깊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깊어졌다. 그가 눈을 감고 다시 떴을 때,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뭔가 무너지는 것처럼.
"그 사람? 왜 갑자기?"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5초. 10초. 카페의 배경음악만 들렸다.
"이수진이 이 일기장을 썼어?"
"응."
"언제?"
"2014년. 당신들이 같은 팀에 있을 때."
김준호는 일기장에서 눈을 돌렸다. 창 밖을 봤다. 강남역 지하 통로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는 오랫동안 그들을 바라봤다.
"그 사람은 어디 있어?"
"을지로에 있어. 도서관을 운영 중이야."
"도서관?"
"응."
김준호의 코에서 숨이 나왔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소리였다.
"2014년 8월에 그 사람이 회사를 그만뒀어. 갑자기. 아무도 이유를 몰라. 파트너들도, 누구도. 그냥 안 나온 거야. 그리고..."
김준호는 말을 멈췄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강남역 지하 통로의 사람들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지훈의 가슴이 철렁했다.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그 흰 페이지.
"당신은 왜 그 사람을 찾아?"
"그냥... 이 일기를 읽고."
"이 일기가 뭐라고 써 있는데?"
지훈은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2014년 6월.
'32층은 무섭다. 아니, 무서운 게 아니라 죽어있다. 우리 모두 죽어있는데 숨만 쉬고 있다. 한지훈이라는 후배를 본다. 6년을 여기서 일했대. 6년을 이렇게. 그의 눈을 봤다. 완벽했지만 비어있었다. 내가 저렇게 되면 안 되는데. 아니, 이미 나도 저렇게 되고 있는데.'
카페 안이 고요했다. 지훈은 자신의 이름이 일기장에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다. 이제 그 사실이 노출되었다.
김준호의 얼굴이 지훈을 향했다. 그 눈에는 낯선 감정이 떠 있었다.
"너 왜 이러는 거야? 뭐 하는 거야? 회사로 돌아와. 지훈, 이건 위험해."
"위험해?"
"그 사람이 왜 그만뒀는지 알아? 왜 도서관을 운영하는지?"
"모르지."
"그것도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 사람이 32층을 나갔다는 거야. 그리고 그 길로 가면 너도... 너도 나갈 수 있다는 거야."
지훈은 김준호를 바라봤다. 10년 파트너 생활로 성공한 이 남자의 얼굴에는 공포가 있었다. 자신도 한때 가졌던 그 공포.
"요즘 넌 뭔가 달라 보여. 회사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와. 너 최근에..."
"누가?"
"김영미가. 넌 요즘 뭔가 이상하다고. 업무 태도가 예전 같지 않다고."
지훈은 침을 삼켰다. 자신의 변화가 이미 조직에 포착되어 있었다. 김영미는 로펌의 신경계다. 모든 움직임을 감시하고 보고하는 조직의 신경 세포. 그녀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은, 정태호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정태호가 너를 불렀어?"
지훈이 대답하지 않자, 김준호가 알아챘다.
"불렀구나. 몇 번?"
"여섯 번."
"그럼 이제 가야 해. 지금이라도. 정태호가 여섯 번을 부르면, 일곱 번째는 최후통첩이야."
---
지훈이 카페를 나왔을 때는 오후 4시 37분이었다. 강남역 지하 통로에는 사람들이 파도처럼 흐르고 있었다. 모두 같은 표정이었다. 지쳐있으면서도 누군가에게 쫓기는 그런 표정.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보지 않고도 알았다. 정태호였다. 일곱 번째다.
지훈은 전화를 받았다.
"파트너 사무실로 와."
"지금 가겠습니다."
통화가 끊겼다. 지훈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32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
정태호의 사무실은 32층 한쪽 끝에 있었다. 창밖으로 서울 전체가 보이는 자리. 지훈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사무실 안은 조용했다. 정태호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지훈을 보면서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최근 소송 성과가 떨어졌더라."
그것이 첫 마디였다. 질문이 아니었다. 선언이었다.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문제 있나?"
"없습니다."
정태호가 지훈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수진의 일기장에 쓰인 표현이 정확했다. 그것이 32층의 눈이었다.
"로펌은 성과로 평가된다. 성과가 없으면 자리가 없다. 그 규칙은 변하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넌 최근에 뭔가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더라. 그게 뭐지?"
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상관없어. 뭐든. 하지만 그것이 성과에 영향을 주면 안 돼. 이 자리는 그럴 만큼 관대하지 않아."
정태호는 다시 서류에 눈을 돌렸다. 명시적인 마지막 말은 없었다. 그렇기에 더 위험했다.
"내일 아침 9시, 내 사무실로 와."
지훈의 주머니 속 손가락이 경직되었다. 동시에 기억이 소용돌이쳤다. 2014년 여름,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을 들었을 누군가의 모습. 그 사람의 눈빛. 그 사람의 떨리는 손. 지훈은 그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마치 자신이 그 순간을 직접 목격한 것처럼.
"그때 결정을 내린다. 넌 32층에 남을 수도 있고, 나갈 수도 있고, 완전히 다른 제안을 받을 수도 있다."
정태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 가."
지훈은 사무실을 나왔다. 복도의 형광등 아래서 숨을 고르려 했지만 실패했다. 내일 아침 9시. 그 시간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박현준이 나타났다. 청바지와 셔츠 차림. 야근을 마친 모습이었다.
"지훈, 요즘 뭐해?"
박현준의 목소리에는 호기심과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왜?"
"자꾸 이상해. 회사 사람들이 다 그래. 넌 뭔가 달라졌어. 그 일기장 때문이야? 그 일기장이 뭐야?"
지훈은 박현준의 얼굴을 봤다. 젊은 후배의 눈에는 자신이 예전에 가지고 있던 그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생존의 공포. 승진의 욕망. 그리고 자신이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불안감.
"그냥... 예전 동료의 일기야."
"예전 동료? 누구?"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훈은 들어갔다.
"10년 전에 그만뒀던 사람. 이수진, 이혜정, 그리고 당신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
박현준의 눈이 커졌다.
"뭐? 여러 명이?"
"응. 그 시절 우리 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박현준은 문 앞에 남겨졌다. 지훈은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1층으로.
1층에 내렸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김영미였다.
"한지훈, 정태호 파트너가 뭐라고 했어?"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요즘 넌 뭔가 다르다고. 회사의 분위기를 해치고 있어. 넌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
"알겠습니다."
"모르는 것 같은데. 성과를 내놓거나,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다른 길을 가야 해. 이 자리는 그럴 만큼 자비롭지 않아. 정태호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솔직하게 말해."
지훈은 침을 삼켰다. 김영미의 목소리에는 진짜 위협이 담겨 있었다.
"내일 아침 9시에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결정? 무슨 결정?"
"모르겠습니다."
"넌 정말 위험해. 정태호가 그런 말을 하면, 이미 결정이 난 거야. 넌 나갈 준비를 해야 해."
통화가 끊겼다. 지훈은 강남역 지하 통로 한가운데 섰다. 사람들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모두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다른 회사, 다른 집, 다른 삶.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박현준이었다.
"지훈, 너 어디야?"
"강남역 지하."
"정태호 만났어? 무슨 얘기했어? 회사 분위기가 이상해. 김영미가 자꾸 누군가를 찾아다니고, 너를 찾아다녀. 뭐 일어난 거야?"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박현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훈? 너 있어?"
"여기 있어."
"뭐라고 했어? 정태호가?"
지훈의 숨이 가빠졌다. 손이 떨렸다. 발걸음이 불규칙해졌다. 강남역 지하 통로의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방향을 잃고 있었다.
"박현준."
"뭐?"
지훈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박현준의 불안한 숨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자신의 숨소리였다.
"지훈?"
긴 침묵이 흘렀다. 지훈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내일 봐."
지훈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일어났다. 을지로로 가야 했다. 도서관이 닫혀 있어도 상관없었다. 이수진에게 이것을 말해야 했다.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그리고 그것을 되찾을 수 있는지.
을지로의 골목은 밤 10시 40분의 조용함으로 가득했다. 작은 카페 몇 개, 낡은 건물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마음의 자국' 도서관.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지훈은 문을 열었다.
이수진은 책장 정리를 하고 있었다. 밤 늦은 시간인데도 여전히 일 중이었다. 그녀는 지훈을 보고 손을 멈췄다.
"왔구나."
"네."
"정태호를 만났나?"
지훈은 깜짝 놀랐다. 자신이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이수진은 웃었다.
"내가 있을 때도 그랬어. 너 같은 사람이 로펌을 벗어나려고 하면, 그들은 바로 안다. 그리고 움직인다."
"맞습니다."
"정태호가 뭐라고?"
"내일 아침 9시에 결정을 내리겠다고. 해고, 승진, 또는 다른 제안."
이수진의 표정이 변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현실이 되니 다르다는 듯이.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아니요."
"그건 정태호가 정한 거야. 넌 선택할 수 없어. 선택지만 받을 뿐이야."
지훈은 이수진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10년 전의 자신의 모습이 비쳐 있는 듯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수진이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몇 권의 책을 훑어보다 한 권을 꺼냈다. 오래된 책이었다. 표지가 해진 책. 그녀는 그것을 지훈에게 건넸다. 제목은 『불안은 나의 연인』이었다.
"이 책을 함께 읽어 보자."
"함께?"
"응. 여기서. 매주 목요일 밤 이 시간에."
지훈은 책을 받았다. 표지 안쪽에는 빼곡한 밑줄과 메모가 있었다. 이수진의 손글씨였다.
"2014년에 내가 가장 많이 읽은 책이야. 이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어. '나는 두려움으로 가득했지만, 그것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니었다'는."
"그래서 나갔어요?"
"내가 나간 게 아니라, 그들이 나를 밀어냈어. 성과가 떨어졌거든. 그리고 내가 밤 12시에 웃음이 나왔어. 의뢰인 서면을 쓰다가 갑자기 웃음이 나온 거야. 그걸 본 파트너가 내게 물었어. '뭐가 웃겨?' 그리고 나는 답했어. '살아있는 게 웃겨요'라고."
이수진이 카운터로 갔다.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노트였다. 빈 노트였다.
"내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가 비어 있었지?"
"네."
"그건 내가 쓸 수 없었던 거야. 2014년 8월 28일, 마지막 날. 나는 그날 뭘 해야 할지 몰랐어. 그래서 비워뒀어. 하지만 지금은 그 페이지를 채울 수 있어. 너도 할 수 있을 거야."
이수진은 노트를 지훈에게 밀었다.
"이건 너를 위한 거야. 여기 앉아서 천천히 써 봐."
지훈은 노트를 들었다. 손이 떨렸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일단 여기 앉아 있어. 넌 아직 쓸 시간이 있어."
이수진이 따뜻한 차를 내왔다. 지훈은 마셨다. 그리고 노트에 펜을 댔다. 손가락이 경직돼 있었다. 펜이 종이 위에서 맴돌았다. 기억이 소용돌이쳤다. 2014년 여름, 이 책상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같은 노트에 같은 고민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결국 이곳을 떠났다. 지훈은 그 흔적을 따라가려고 했다.
첫 글자는 '2024년 11월 15일'이었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두려움과 마주했다. 내일 아침 9시, 나는 선택을 해야 한다. 32층으로 돌아가거나, 이곳에 머물거나. 또는 완전히 다른 길로 가거나. 정태호가 뭘 제시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지훈은 펜을 멈췄다.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미완성의 문장 위에서 펜이 맴돌았다. 목이 메었다. 눈이 따뜻해졌다.
"다 쓸 필요 없어."
이수진이 말했다.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미완성이어도 괜찮아. 우리는 모두 미완성이거든. 내가 그랬고, 너도 그럴 거고."
이수진은 지훈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그 온기만으로 충분했다. 지훈은 그 침묵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을지로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도서관 밖에서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멀리 32층의 불빛이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도서관의 불빛은 다른 종류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불빛. 누군가를 맞이하는 불빛.
지훈의 손은 이수진의 손 안에서 온기를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 위의 노트에는 여전히 미완성의 문장이 남아 있었다.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정태호'라는 이름이 떴다. 내일 아침 9시를 앞둔 밤, 또 다른 부재중 전화.
지훈은 화면을 어두워지게 놔뒀다. 이수진의 손을 놓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