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을지로의 흔적

을지로 서점을 나선 지훈은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2014년 3월의 페이지였다.

'한강 공원 벤치에 앉아 구름을 봤다. 옆에 할머니가 앉아있었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위로가 되었다.'

서점 주인의 갸웃하던 표정이 떠올랐다. "너무 오래 전 일인데..." 그 말이 맴돌았다. 10년이면 많은 사람이 서점을 지나간다. 특별히 기억할 만한 이유가 없는 한.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근거 없이. 그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자신만 듣지 못하는 것처럼.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6시 15분. 해는 아직 지지 않았지만, 건물들 사이로 햇빛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을지로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6년간 지훈은 회사와 집, 그 사이의 자동차 안에서만 살아왔다. 서울의 거리는 낯선 타인의 것처럼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 검색했다. 한강 공원 벤치. 결과가 너무 많았다. 지훈은 다시 일기장을 읽었다. 구름을 본다. 할머니. 침묵. 이것뿐이었다. 그래도 지훈은 걸었다. 광화문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승객들이 밀려들어왔다. 회사원들, 학생들, 노인들. 지훈은 그들의 얼굴을 처음으로 자세히 봤다. 누군가는 핸드폰 화면만 보고 있었고, 누군가는 창밖을 보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냥 눈을 감고 있었다.

영등포역에서 내렸다. 한강 공원 입구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지훈은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벤치가 곳곳에 있었다. 강을 바라보는 벤치, 나무 아래 벤치,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목의 벤치. 어느 것이 일기 속의 벤치일까?

강을 바라보는 벤치 중 하나에 앉았다. 수십 개의 벤치가 있었지만, 이곳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 위로 흰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정말로. 마치 일기장이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지훈은 옆자리를 바라봤다.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할머니가 여기 앉아있었을까. 10년 전 3월, 봄이 시작되는 날씨에. 그 할머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지훈은 일기장을 가슴에 안고 강을 봤다. 한강은 흘렀다. 물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마치 시간처럼.

어느 순간 지훈의 눈가가 따뜻해졌다. 눈물이 아니라 햇빛 때문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다. 지훈은 눈을 감았다. 사람들이 산책하고 있었다. 연인들이 손을 잡고 지나갔다.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그 모든 것이 지훈의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지훈은 얼굴을 돌렸다.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벤치 등받이가 그의 등을 지탱했다. 차갑고 묵묵한 무언의 지지. 할머니의 침묵이 이런 것이었을까.

강바람이 불었다. 지훈의 머리를 헤쳤다. 함께 날아온 것이 있었다. 버드나무 솜. 하얀 솜이 공중을 떠다니며 천천히 내려왔다.

지훈은 손을 들었다. 솜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스쳐 지나갔다. 닿기 전에 날아가버렸다. 다시 손을 뻗었다. 또 다른 솜이 내려왔다. 이번엔 손등에 닿았다. 부드럽고 가벼웠다. 마치 누군가 살짝 손을 건드린 것 같은 감각.

그 순간 의심이 생겼다. 일기 속 장면이 너무 정확했다. 구름, 할머니, 그리고 버드나무 솜. 이것이 우연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이 모든 것을 남겨두었다면?

그때였다. 바람에 섞여 들려오는 목소리. 낮고 차분한 음성이 가까워졌다.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한 여성이 산책로를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그녀는 지훈을 지나칠 때 잠깐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이 지훈을 관통했다. 낯선데 낯설지 않은, 마치 누군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

여성은 계속 걸어갔다. 지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점점 작아지는 그 실루엣. 그리고 갑자기 지훈은 빠르게 일기장을 펼쳤다. 2014년 4월의 페이지.

'버드나무 솜이 하늘을 떠다닌다. 나는 손을 뻗어 잡아본다. 누군가는 이것을 잡을 때 뭘 생각할까. 누군가는 혼자라고 느낄까. 아니면 누군가와 함께라고 느낄까.'

지훈의 손가락이 멈췄다. 호흡이 얕아졌다. 이 문장을 읽고 있는 자신. 그리고 이 문장을 썼던 누군가. 1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같은 벤치에서, 같은 솜을 잡으려던 두 손.

확신이 밀려왔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32층 어딘가에서, 아직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지훈은 벤치에서 일어섰다. 옷을 털었다. 버드나무 솜 몇 개가 셔츠에 붙어 있었다. 마치 증거처럼. 마치 만남의 흔적처럼.

다시 걸었다. 한강 공원을 떠났다. 영등포역으로 돌아갔다. 지하철을 탔다. 강남역에서 내렸다. 자동으로 발길이 회사 방향으로 향했다. 아니다. 지훈은 스스로를 제지했다.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강남역 버스 정류장.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퇴근길 버스를 기다리는 직장인들. 지훈은 그들 사이에 섰다. 익숙한 냄새. 익숙한 모습들. 하지만 다르게 느껴졌다.

버스가 왔다. 지훈은 탔다. 창가 자리. 버스는 움직였다. 서울의 거리가 창밖으로 흘러갔다. 지훈은 일기장을 펼쳤다. 2014년 5월의 페이지.

'32층에서 일한 지 6개월이 지났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얼굴을 정말 봤다. 그 사람의 이름은 지훈이었다. 우리는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그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지훈이 나를 봤을까? 아니면 나는 그냥 배경의 일부였을까?'

지훈의 손이 떨렸다. 페이지를 놓을 뻔했다. 2014년 5월. 그때 자신은 32층에 있었다. 6개월 차 신입이었다. 그때 자신은 누군가를 봤을까. 정말로 누군가를 봤을까.

지훈은 버스 창밖을 봤다. 을지로가 다가오고 있었다. 골목들이 보였다. 그곳에 무언가가 있었다. 누군가가 있었다.

버스가 멈췄다. 을지로 정류장. 지훈은 일기장을 들고 일어섰다. 창밖을 봤다. 을지로. 익숙하지 않은 거리. 하지만 낯설지 않은 기분.

지훈은 내렸다. 거리를 걸었다. 골목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노을이 물드는 을지로. 간판들이 하나둘 불이 켜졌다. 카페, 서점, 작은 식당들.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도서관을 찾아 골목 깊숙이 들어갔다. 좁은 길을 따라, 한 발 한 발.

간판을 찾았다. 정말로 있었다. '마음의 자국'. 목재로 만든 낡은 간판. 마치 누군가 손으로 정성스럽게 만든 것처럼. 지훈은 손을 뻗어 문을 밀었다.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갔다. 책의 냄새. 포근한 불빛. 그리고 한 여성이 카운터 뒤에서 지훈을 보고 있었다. 40대 초반. 다정하고 침착한 눈빛. 한강 공원에서 본 그 여성이었다.

여성이 입을 열었다.

"들어와."

그 목소리. 낮고 차분한 음성. 지훈은 일기장을 들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그것을 쥐고 있었다. 버드나무 솜이 여전히 셔츠에 붙어 있었다. 증거. 만남의 흔적. 그리고 지금 마주한 이 여성이 정말로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당신이...?"

지훈이 말을 꺼냈다.

여성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10년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10년의 고독과 선택과 새로운 삶의 흔적이.

"안녕. 다시 만났네."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낮고 차분한 음성. 마치 누군가를 기다린 사람의 목소리처럼. 지훈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시 만났다. 그 말은 자신이 누군가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기억이 없었다.

"미안합니다. 저는..."

"처음이 아니야."

여성이 카운터에서 나왔다. 천천히, 마치 시간을 확인하듯 움직였다. 지훈은 여성의 얼굴을 살펴보려 했지만,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10년 전의 누군가. 32층의 누군가. 자신이 외면했던 누군가.

"2014년 5월. 회의실 앞이었어. 넌 회의에서 나왔고, 누군가가 넌 '신인의 치고는 잘했다'고 말해줬어. 넌 고개를 끄덕였지. 아무 표정도 없이.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널 봤어. 네 눈 속에 뭔가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지훈의 가슴이 철렁했다.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아니, 기억이 아니었다. 일기장의 페이지들이 떠올랐다. 자신에 대해 쓰인 수십 개의 페이지들. 자신을 관찰했던 누군가의 눈빛. 그리고 그 순간이 일기에서 읽은 것처럼 생생하게 복원되었다. 회의실 앞. 누군가의 시선. 그것이 자신을 본 것인지, 자신이 본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그 순간.

"이름은?"

"이수진."

이수진. 일기장의 손글씨로 적힌 그 이름. 현실의 사람. 카운터 앞에 서 있는 40대 초반의 여성. 지훈은 천천히 일기장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이수진이 자신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수진에게 보인 것이었다. 10년 동안.

"이거... 당신 거죠?"

이수진이 일기장을 봤다. 그녀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과거와 현재가 한 순간에 겹쳐지는 표정으로.

"어디서 찾았어?"

"32층 책상 서랍에서. 새벽에."

"그럼 다 읽었어?"

지훈이 대답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읽지는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읽었다. 자신에 대해 충분히 읽었다.

이수진이 지훈을 안으로 초대했다. 카운터 옆 작은 테이블. 따뜻한 조명 아래 책들이 쌓여 있었다. 창밖으로는 을지로의 저녁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 지훈은 앉았다. 이수진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사이에는 일기장이 놓여 있었다.

"처음엔 왜 찾아온 거야? 내 기억이 났어?"

"아니요. 처음엔... 일기를 읽으며 당신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처럼."

이수진이 웃음을 흘렸다. 아픈 웃음이 아닌, 정말로 무언가를 이해하는 웃음이었다.

"그게 바로 그거야. 내가 기대했던."

지훈은 일기장을 펼쳤다. 2014년 5월의 페이지. '32층에서 일한 지 6개월이 지났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얼굴을 정말 봤다. 그 사람의 이름은 지훈이었다.'

"이 날을 기억해요?"

이수진이 페이지를 봤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 후로 나는 매일 널 지켜봤어. 넌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넌 뭘 먹고 있는지, 넌 누군가와 말을 나누는지."

이수진이 일기장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2014년 6월. '지훈이가 오늘도 밤 10시까지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만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 다음, 그 다음 페이지들. 같은 내용이 반복되었다. 지훈에 대한 관찰. 지훈에 대한 염려. 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거리. 이수진은 그 페이지들을 빠르게 넘겼다.

"계속 같은 내용이 반복되었어. 넌 날마다 일했고, 나는 날마다 널 봤어. 그것뿐이었어."

지훈은 이수진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 속에는 10년의 시간이 정말로 담겨 있었다. 절망과 선택과 새로운 삶의 모든 것이.

"그리고 8월이 왔어."

이수진이 일기장을 넘겼다. 지훈이 이미 본 페이지. '32층에서 보낸 마지막 날.' 그 아래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왜 떠나셨어요?"

"못 버티겠었어. 이곳의 모든 것이. 넌 그걸 몰랐겠지만, 나는 매일 죽고 싶었어. 침묵 속에서. 누군가 나를 본다는 기대 속에서.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았어."

이수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멈췄다. 아직 그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일기를 남기셨어요?"

"혹시 모르니까. 혹시 누군가가 내 흔적을 찾을지도 모르니까. 누군가가 내 말을 들을지도 모르니까."

이수진이 지훈의 손을 봤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넌 찾았어."

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일기장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2014년 8월 16일 이후. 하지만 거기엔 글씨가 없었다. 완전히 빈 페이지. 그 다음 페이지도. 그 다음도. 모두 비어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떠난 후로는 안 쓰셨어요?"

"쓸 수 없었어. 그 다음은 다른 이야기니까. 내가 아니라 내가 되기 위한 시간이니까."

이수진이 일어섰다. 카운터로 돌아갔다.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책들이 가득 차 있었다. 초록색 표지의 책. 파란색 표지의 책. 주황색 표지의 책들.

"이거 봤어?"

이수진이 책 한 권을 들었다. 2010년에 출판된 시집. '2010년, 서은에게'라는 헌정문이 있는 그 책이었다.

"네, 을지로 서점에서 봤어요."

"이건 내가 쓴 시집이야. 이 책을 내고 난 후 나는 3년을 로펌에서 버텼어. 3년 동안 누군가를 기다렸어. 그리고 마지막에 넌 나를 봤어."

이수진이 책을 지훈에게 건넸다.

"이 책 속 '침묵'이라는 시 읽어봤어?"

지훈은 책을 펼쳤다. 페이지를 찾아갔다. '침묵'. 제목 아래 짧은 글귀가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침묵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이라는 것을 언제쯤 알게 될까.'

지훈이 읽고 있을 때, 도서관의 문이 열렸다. 한 노인이 들어왔다. 70대로 보이는 남성. 그는 지훈을 보고 잠깐 멈췄다가, 이수진에게 인사를 했다.

"진 씨,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할아버지. 오늘도 일찍 왔네요."

노인이 책장 쪽으로 갔다. 지훈은 그 모습을 봤다. 자연스러운 인사. 오랫동안 이어져 온 관계의 모습. 32층에는 절대 없는 것들.

이수진이 지훈에게 돌아봤다.

"이곳은 그런 곳이야. 누군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는 곳."

지훈은 일기장을 들었다. 버드나무 솜이 여전히 셔츠에 붙어 있었다. 한강 공원의 증거. 만남의 흔적.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그것과 같은 무언가가 자신에게 남겨지고 있었다.

"지훈이는 여기 앉아 있어도 돼. 원하는 만큼 책도 읽고. 누군가와 침묵을 나눠도 좋고."

이수진이 지훈의 옆에 앉았다. 사이에는 여전히 일기장이 있었다. 창밖으로는 을지로의 저녁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간판들의 불빛이 더욱 밝아졌다.

지훈은 시집을 계속 읽었다. 한 페이지, 또 한 페이지. 이수진의 목소리가 글 사이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절망 속에서도 누군가를 바라봤던 그 목소리.

그리고 갑자기 지훈은 깨달았다.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이. 회사 밖에서. 32층 밖에서. 누군가와 함께 침묵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

휴대폰이 울렸다. 정태호였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울렸다. 박현준이었다. 받지 않았다. 또 다시. 김영미였다.

이수진이 물었다.

"받지 않아?"

"아니요. 지금은...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이수진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빈 페이지. 완전히 빈 그 페이지에 이수진이 손가락을 올렸다.

"이건 너를 위한 거야."

"뭐가요?"

"미래. 넌 지금부터 이 페이지를 채워나가면 돼. 어떻게 살아갈지. 누구와 함께 시간을 견딜지. 그게 너의 일기가 되는 거야."

지훈은 빈 페이지를 봤다. 그 위에 날짜가 없었다. 2024년도 없고, 특정한 월일도 없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 있는 것처럼. 아니, 이제 시작되는 것처럼.

지훈의 휴대폰이 또 울렸다. 이번엔 다른 번호였다. 최소은이었다. 신입 변호사. 지훈은 받았다.

"지훈 선배? 지금 어디세요? 정태호 파트너님이 계속 물어봐요. 당신 어디 간 거냐고."

지훈의 손이 떨렸다. 최소은의 목소리 뒤로 사무실의 소음이 들렸다. 야근의 현장. 자신이 6년간 있던 그곳. 밤 11시를 넘긴 사무실.

"최소은이, 지금 시간이 몇 시야?"

"11시 20분이요."

지훈은 잠시 침묵했다. 휴대폰 너머로 최소은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사무실의 소음. 프린터 소리. 누군가의 한숨. 자신이 6년간 만들어낸 그곳.

"나도 그 시간에 있었어. 6년 동안. 그런데 아무도 날 보지 못했어."

"선배... 이게 무슨..."

"가. 지금 당장. 일은 내일 하고."

"선배... 아..."

"최소은이. 누군가와 침묵을 나눌 시간이 필요해. 너도, 나도, 모두. 가."

지훈이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내려놨다. 이수진이 그것을 봤다.

"처음이야?"

"뭐가요?"

"누군가를 챙기는 게."

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빈 페이지를 다시 봤다. 그곳에 뭔가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펜이 없었다. 이수진이 서랍에서 오래된 만년필을 꺼냈다. 검은색 잉크. 오래된 펜. 마치 10년 전 이 펜으로 일기를 썼던 것처럼.

지훈이 펜을 들었다. 빈 페이지 위에. 첫 글자를 썼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보였다.'

펜을 멈추고 다시 생각했다. 그것이 더 정확했다. 자신은 누군가를 본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인 것이었다. 10년을 기다리며 자신을 본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이 옆에 앉아 있었다.

펜을 다시 들었다. 문장을 이었다.

'그것이 10년 전이었지만, 지금 나는 그것을 이해한다. 침묵이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 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펜을 내려놨다. 검은 잉크가 종이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확실하게, 돌이킬 수 없게. 이수진은 지훈의 옆에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그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침묵.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

창밖으로 을지로의 밤이 완성되었다. 간판의 불빛. 거리의 사람들.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걸어가는 그들. 그 누구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모르면서.

지훈은 그것을 이제 알았다. 32층 밖에서. 낡은 일기장과 함께. 그리고 누군가의 침묵 속에서. 펜을 놓으며,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수진을 바라봤다. 그녀도 지훈을 보고 있었다. 말이 아닌 눈빛으로. 10년을 기다린 그 눈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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