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버스 안에서 손이 떨렸다.

32층행 버스의 뒷좌석. 지훈은 일기장을 펼쳤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2014년 2월 15일.

그 순간, 작성자의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동시에 자신이 외면해온 기억들이 소용돌이를 이루며 올라왔다. 가슴이 철렁했다. 숨이 얕아졌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오늘 회의에서 실수했다. 파트너에게 야단맞았다. 누군가는 내 옆에서 웃음을 참았다. 그래도 저녁에 을지로 서점에 갔다. 낡은 시집을 샀다. 100원짜리였지만, 누군가는 이것을 사랑해서 남겨둔 거라고 생각했다. 책 귀퉁이에 '2010년, 서은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소중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쉽게 버려지는 걸까.*

지훈은 눈을 감았다. 버스가 강남역 교차로에 멈췄다. 창밖으로 강남의 거리가 흐릿하게 보였다.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같은 페이지를 다시 읽었다.

*을지로 서점이 어디에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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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로펌 32층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8시 45분이었다. 회의는 9시에 시작됐다.

지훈은 책상에 일기장을 살짝 집어넣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박현준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항상 그랬다. 지훈을 따라잡으려는 욕망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눈이 마주쳤을 때 박현준은 미소를 지었다.

"아, 지훈이. 어제 잘 쉬었어?"

그 미소 아래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경직된 무언가.

정태호가 들어왔다. 파트너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 그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지훈 팀이 이겼습니다. 상대방의 법리 해석이 약했고, 우리의 증거 자료가 명확했다. 이번 판결은 판례로 남을 겁니다."

박수가 나왔다. 모두가 지훈을 쳐다봤다. 그 순간 지훈의 눈은 박현준을 찾았다.

박현준의 표정이 멈춰 있었다. 입술은 박수 박자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지만,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눈이 지훈을 통과해서 어딘가 더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순수한 공허함. 마치 무언가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듯한 표정.

지훈은 갑자기 숨이 막혔다. 목을 누르는 것 같은 감각이 들었다. 손가락이 경직되었다.

*혹시 내 얼굴이었나.*

자신이 매일 아침 거울에서 본 얼굴. 하지만 거울에는 항상 뭔가 있었다. 계산이나 의지 같은 것. 박현준이 지금 하고 있는 표정은 그런 것들을 모두 벗어던진 얼굴이었다. 그것이 정말 다른 사람의 표정일까, 아니면 자신이 보고 싶지 않던 자신의 모습일까.

지훈은 화장실로 나갔다.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얼굴을 봤다. 박수를 받은 직후의 얼굴. 승리 직후의 얼굴. 거울 속 자신의 얼굴과 박현준의 절망이 겹쳐졌다.

손을 씻고 나왔다. 회의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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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되자 지훈은 김영미를 찾았다. 그녀는 32층의 중간 계층이었다. 변호사이면서 동시에 파트너들의 믿음을 받는 사람.

"2014년쯤에 여기서 일하던 사람 중에 이수진이라는 사람 있었어?"

김영미의 표정이 변했다. 오래 전의 기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의아함이었다.

"이수진? 왜 갑자기? 그 사람... 오래 전에 그만뒀는데."

"언제쯤?"

"음... 2014년 말? 겨울이었던 것 같은데. 왜 그 사람을 찾아?"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정확히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수진이라는 이름이 지금 이 순간 현실의 누군가와 연결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냥... 궁금해서."

"아, 그 사람 좋은 사람이었어. 조용하고. 근데 그 일이 있었잖아."

"무슨 일?"

김영미의 눈빛이 변했다. 마치 지훈을 스캔하는 것처럼. 그 시선 속에는 호기심만 있지 않았다. 조금의 경계도 있었다.

"응? 너 그 얘기 안 들었어?"

지훈은 침묵했다. 그 침묵이 대답이 되었다.

김영미는 한숨을 쉬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그 사람이 어떤 건으로 그만뒀는데, 자세한 건 몰라. 다만... 그 일 이후로 정태호가 변했어. 그 전엔 좀 더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그 이후로는 정말 냉정해졌어. 그리고..."

그녀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

"박현준이가 그 건으로 정말 힘들어했어. 그 당시에 박현준이가 그 건을 담당했거든. 정확히 뭔진 몰라. 다만 그 이후로 박현준이는 계속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보였어. 지금도 그렇고."

지훈의 심장이 빨라졌다.

"그 일이... 혹시 누군가 피해를 입은 건가요?"

"몰라. 정태호도, 박현준도 아무도 말 안 해. 그냥 조용히 사라진 일이야. 근데 너 왜 이렇게 관심 있어? 혹시..."

김영미는 지훈을 자세히 봤다.

"혹시 그 사람과 뭔가 있었어?"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도 거짓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일기장 속 누군가의 손글씨. 그 사람의 고통. 그리고 이 회사의 누군가가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별로 중요한 건 아니고.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있어서."

"아, 그럼 괜찮아. 근데 너 요즘 좀 다르긴 해. 일에 집중이 덜 되는 것 같고."

"아니야."

지훈은 웃음을 지었다. 완벽한 웃음. 박현준이 하던 그런 웃음. 그 순간 자신이 얼마나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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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경, 지훈은 을지로로 나갔다. 회사에서는 요청이 없었다. 신입들을 지도하는 시간이었지만, 그것도 미루고 나갔다. 위험한 신호였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을지로 서점은 강남역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였다. 지훈은 버스 안에서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손가락이 떨렸다.

*2월 15일. 을지로 서점에서 100원짜리 시집을 샀다. 누군가의 사랑이 담긴 책이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선물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먼저 누군가의 책이 되어보고 싶다. 누군가가 나를 읽을 때 위로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책이.*

지훈은 눈을 감았다. 일기장의 필체가 떠올랐다. 여성의 필체였다. 정확하고 차분했지만, 동시에 뭔가 떨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을지로에 내렸을 때는 오후 4시였다. 서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좁고 낡은 건물.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구조였지만, 그 건물이 확실히 존재했다. 간판은 벗겨져 있었고, 창문은 어두웠다. 하지만 문은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책의 냄새가 났다. 오래된 책의 냄새. 습기와 종이와 시간의 냄새. 그 냄새 속에서 지훈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발을 들이는 듯한 착각을 했다. 동시에 일기장의 감정이 다시 밀려들었다.

시집 코너는 가장 뒤쪽에 있었다. 지훈은 그곳으로 걸어갔다. 발밑이 삐걱거렸다. 시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대부분 낡은 책들이었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어 있는 책들.

책장을 따라 손가락을 굴렸다. 원하는 책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찾아봤다. 여전히 없었다. 지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찾으시는 책이 있으신가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였다. 70대일 것 같은 할머니. 얇고 주름진 손. 하지만 눈은 밝았다.

"100원짜리 시집요. 파란 표지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책 말이에요? 어제 손님이 사가셨는데."

지훈의 몸이 경직되었다.

"어제요?"

"응. 젊은 여자분이셨어. 그 책을 보더니 한참을 들었다 놨다 하시더라고. 결국 사가셨어."

할머니는 지훈을 자세히 봤다. 마치 그를 꿰뚫어보는 것처럼. 눈이 흔들렸다.

"혹시... 당신이 그 책의 주인을 찾는 건가요?"

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순간 일기장의 감정이 또 올라왔다. 누군가가 자신이 남긴 책을 찾고 있다는 것. 그 책을 통해 누군가와 연결되고 있다는 것.

할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 책은 원래 우리 딸이 운영하는 곳에서 나온 책이에요. 손님들이 남겨두고 간 책들 중 하나였는데, 내가 이 서점에 가져다놨거든."

"딸분이 운영하는 곳이요?"

"응. 을지로 안길에 있어. 우리 딸 박소은이가 직접 운영하고 있어. 정말 좋은 공간이야. 손님들이 와서 책도 읽고 차도 마시고. 거기 다니는 손님 중에 혹시 당신이 찾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할머니는 종이에 주소를 써주려 했다. 그 순간 지훈이 물었다.

"그곳에는 이수진이라는 분이 다니고 있나요?"

할머니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지훈을 더 자세히 봤다. 경계심이 눈에 떠올랐다.

"당신이 그 사람을 아는 건가요?"

"아니요. 다만... 찾고 있어서."

"찾고 있다고? 그 사람이 당신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

할머니의 질문이 지훈을 관통했다.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이 정말 누군가를 찾고 있었어요. 우리 딸이 그 얘기를 했어. 그 사람이 쓴 일기 같은 걸 잃어버렸대. 그걸 찾으려고 이 서점도 다니고, 우리 딸 운영하는 곳도 계속 다닌다고. 혹시... 당신이?"

지훈의 손이 떨렸다.

"당신이 그 일기장을 가지고 있는 건가요?"

지훈은 일기장을 꺼냈다. 할머니의 눈이 커졌다.

"맞네. 그거 그 사람 것이 맞아. 우리 딸이 묘사한 그대로야. 그럼 당신이..."

"이수진을 만날 수 있을까요?"

할머니는 종이에 주소를 써주었다. 손이 조금 떨렸지만, 글씨는 또렷했다.

"을지로 안길 42번지. '마음의 자국'이라고 해. 사람들이 마음을 나누는 공간이야. 우리 딸 박소은이가 운영하고 있어. 그 사람은 거기서 일하고 있을 거야."

지훈의 눈이 떨렸다.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그 안의 문장들이 모두 연결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책이 되고 싶다는 말.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싶다는 말. 그것이 정말 이수진이 남긴 말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위로하고 있다는 것.

"고마워요."

지훈은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서점을 나왔다. 손에 들린 것은 메모지와 일기장.

을지로의 거리는 차갑고 어두웠다. 저녁이 빠르게 내려앉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롯데로펌의 내선번호였다. 정태호였다. 목소리는 차갑고 정확했다.

"지훈이. 지금 어디야? 회의가 있었는데."

"죄송합니다. 회사로 돌아가겠습니다."

"5분 안에 내 사무실로 와. 그리고 알아둬. 너 최근 태도 문제로 파트너들 사이에서 얘기가 나오고 있어. 이번 건 경고야. 다음엔 없다."

전화가 끊겼다. 정태호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경고. 그것은 협박이기도 했다. 회사의 논리였다. 자리를 지키거나 떠나거나.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훈은 을지로의 거리에 서 있었다. 강남역으로 향하는 버스가 지나갔다. 회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마치 박현준이 하듯이. 마치 자신이 6년간 해온 것처럼. 절망을 숨기고 웃음을 짓고 자리를 지키고.

하지만 지훈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정태호의 경고가 귀에 맴돌았다. 그리고 동시에 일기장 속 누군가의 목소리도 들렸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소중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쉽게 버려지는 걸까.* 그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와 겹쳐졌다.

을지로 안길 42번지. 마음의 자국.

지훈은 한 발을 내디뎠다. 강남역과 반대 방향이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회사로 돌아갈 수도 있었던 선택지는 사라졌다. 정태호의 경고도, 파트너들의 시선도, 박현준의 절망도 이제 멀어지고 있었다.

지훈은 걸었다. 을지로 안길을 따라 깊숙이. 번지수를 찾으며. 도서관을 향해. 그 안에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을지로 안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건물들이 낡아 있었고,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번지수를 따라 세었다. 30번지. 35번지. 40번지. 그리고 42번지 앞에 멈췄다.

하지만 그곳에는 도서관이 아닌 폐가가 있었다.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고, 문에는 '폐점'이라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

지훈의 손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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