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훈련센터의 대형 모니터에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시안 탁구 선수권 대회, 남자 단식 결승은 중국의 왕리펑 선수가 스웨덴의 칼손을 4-1로 제압하며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한준호는 모니터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화면 속 왕리펑의 얼굴이 떠올랐다. 2019년. 세계 랭킹 1위. 미래에서 만난 그 선수의 모습이 정확히 20년 전의 이 시점에 뉴스로 중계되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기억 속 왕리펑은 더 차갑지 않았나? 인터뷰 때 눈빛이 더 날카롭지 않았나? 지금 화면 속 그의 표정은 미세하게 다르다. 승리의 만족감이 얼굴에 묻어난다. 미래의 왕리펑은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완벽함만 남겨두고 모든 것을 제거한 얼굴이었다.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라켓을 잡는 모양으로. 공을 임팩트하는 모양으로.
"4-1이라고?"
한준호가 중얼거렸다. 모니터에는 왕리펑이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장면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 표정, 그 자세는 기억과 일치했다. 하지만 그 미세한 차이—그것이 뭔가 크게 틀렸다는 신호를 보냈다.
"왕리펑 선수는 이번 대회에서 놀라운 성장을 보여줬습니다. 특히 준결승에서 일본의 이토 선수를 상대로 보여준 스피드와 스핀 컨트롤은 기술의 새로운 경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준결승. 이토 선수. 한준호의 눈이 반짝였다. 그 경기에서 왕리펑이 사용했던 특수한 백핸드 드라이브. 미래에서 본 그 기술이 정확히 이 시점에 처음 선보여지고 있다.
감각 회복 훈련 시작 이후 처음으로 느껴지는 명확한 반응이었다.
"현재 왕리펑 선수의 세계 랭킹은 2위입니다. 올해 말 세계선수권에서 1위 탈환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세계선수권. 올해 말. 1999년 11월. 한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그 대회의 준결승에서 자신이 왕리펑을 만난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손가락이 더욱 강하게 움직였다. 공을 치는 동작. 백핸드. 포어핸드. 스매시. 모든 것이 손끝에 살아났다. 70% 손실 상태지만, 남은 30%의 감각이 기억을 따라가고 있었다.
"또한 왕리펑 선수는 이번 인터뷰에서 자신의 철학을 밝혔습니다."
화면이 전환되었다. 왕리펑이 인터뷰석에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를 깔끔하게 묶고, 표정은 차분했다. 감정 표현이 거의 없는 얼굴.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이 내 철학입니다. 매 경기에서 실수 없이 최고의 플레이만 하는 것. 그것이 챔피언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한준호는 웃음이 나왔다. 아니, 한숨이었다. 완벽함. 미래에서 본 왕리펑의 가장 큰 약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2019년 세계 선수권 결승전. 왕리펑이 8-9로 앞서고 있던 상황. 매치 포인트를 잡은 상황. 그러나 그 한 점을 따내지 못했다. 왜인가? 왕리펑이 실수했기 때문이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압박감 속에서 백핸드 스매시를 오버했다. 공이 엔드라인을 넘어갔다. 10-9. 그리고 그 다음 한 점은 한준호가 따냈다. 11-9. 그리고 결승.
한준호의 손이 주먹으로 쥐어졌다. 기억이 맞다. 완벽하게 맞다.
"1년 후면 된다."
한준호가 중얼거렸다. 손가락을 펼쳤다. 아직도 감각이 둔했지만, 며칠 전보다는 분명히 회복되고 있었다.
"1년 후 세계선수권에서 왕리펑을 꺾는다.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 말은 너무 크게 나왔다. 훈련센터의 복도에까지 울려 퍼졌다.
"준호?"
박수진 코치가 수건을 들고 복도에서 나타났다. 그녀의 눈이 모니터에 있는 왕리펑의 인터뷰 화면을 스쳤다.
"뭐 해? 경기 끝났잖아."
박수진이 가까워졌다. 그녀의 시선은 한준호의 표정에 머물렀다. 2주 전의 절망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무언가 다른 것이 들어와 있었다.
"박 코장."
한준호가 말했다.
"감각만 회복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TV를 보니까 기억이 정확하다는 걸 확인했어요. 왕리펑이 4-1로 우승했다는 것도, 준결승에서 이토를 상대로 한 경기 내용도, 모두 내 기억과 일치해요."
박수진이 한준호의 손을 살펴봤다. 손가락이 살짝 펴져 있었다.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네."
박수진이 한준호의 손을 더 자세히 들었다. 손가락 끝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신경 신호가 되살아나는 신호였다. 그녀는 한준호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눌렀다.
"통증은?"
"조금 있어요. 따끔거리는 느낌."
"좋은 신호야. 신경이 깨어나고 있다는 뜻이야."
박수진이 손을 내려놨다. 한준호의 손가락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감각만으로는 부족해요. 기억도 필요하고, 신체도 필요한데, 이 세 가지가 모두 모이면—"
한준호가 말을 멈췄다. 박수진의 표정이 변했기 때문이다. 냉철한 과학자의 표정이 사라지고, 뭔가 더 무거운 것이 들어와 있었다.
"준호."
박수진이 한준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감각이 회복되는 건 좋은 일이야. 하지만 한 가지 잊지 마."
박수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신체는 기억을 완벽하게 따라갈 수 없다는 거. 넌 이미 경험했잖아. 손가락 70% 손실. 그게 뭐였어? 완벽한 기억이 불완전한 신체에 갇혔을 때의 고통이야."
"그렇지만 회복되고 있잖아요."
"45% 정도면 충분해. 그 이상을 욕심내지 마. 완전한 회복은 없어. 의학적으로도, 신경학적으로도 불가능해."
박수진이 한준호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여기가 핵심이야. 불완전한 감각 속에서 완벽한 기억을 구현하려고 하면 넌 다시 부상을 입어. 그건 신체적 부상이 아니라 정신적 부상이 될 수도 있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거야. 그게 진정한 강함이다."
박수진이 손을 내렸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그리고 한 가지 기억해. 손가락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하지만 마음은 거짓말을 할 수 있어."
박수진이 돌아갔다. 한준호는 TV 화면을 다시 봤다. 왕리펑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완벽한 미소. 감정을 숨긴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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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훈련장은 조용했다. 탁구대 위에 공들이 조금 남아 있었다.
한준호는 라켓을 집어 들었다. 탁구대를 마주했다.
혼자 훈련하기 시작했다. 강한 드라이브는 아니었다. 45% 손가락으로는 불가능했다. 대신 정확한 드라이브였다. 공이 탁구대 위에서 튀어오를 때마다, 한준호는 공의 회전과 속도를 감지했다. 그 정보를 기억의 데이터베이스에 대조했다.
'이 회전이면 상대는 블록으로 나올 거야. 그러면 내가 카운터 드라이브로…'
공을 치고 있는 와중에도 한준호의 머릿속은 경기를 분석하고 있었다. 미래 기억과 현재의 감각이 겹쳐졌다.
그런데 손가락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신경이 과민해지는 느낌. 마치 누군가 손가락 안쪽을 뜨거운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한준호가 라켓을 놨다. 손가락을 펼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떨림만이 아니었다. 통증이 있었다. 신경이 깨어나면서 생기는 통증.
'완벽해야 한다.'
한준호가 다시 라켓을 집어 들었다. 공을 다시 쳤다. 더 강하게. 더 정확하게.
통증이 더 심해졌다. 손가락 끝이 저렸다. 마치 누군가 손가락을 꼬집는 듯한 느낌.
'아직 부족하다. 더 강하게.'
한준호가 공을 더 강하게 쳤다. 라켓이 공을 맞출 때마다 손가락에서 신경통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손가락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켰다. 라켓을 놓쳤다.
한준호가 손을 움켜잡았다. 손가락이 쭉 펴지지 않았다. 경련이 계속되고 있었다.
'안 돼. 완벽해야 한다. 왕리펑을 이겨야 한다.'
한준호가 손을 펴려고 애썼다. 하지만 손가락은 말을 듣지 않았다. 신경이 과부하 상태였다.
"준호?"
목소리가 들렸다. 한준호가 돌아봤다.
훈련장 문 입구에 이석우가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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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뭐 해? 왜 미래를 안다고 하는 건데?"
이석우가 한준호에게 다가왔다.
"왕리펑을 꺾는다고 했어? 1년 후에? 어떻게 알아?"
"이석우, 그건—"
"너 뭔가 숨기고 있어. 그리고 그게 위험해 보여."
이석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무게가 있었다.
"난 너를 봤어. 경기 중에. 손가락이 안 좋아지기 전에도 넌 뭔가 다르게 싸웠어. 마치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이미 아는 것처럼. 그리고 지금도."
한준호가 대답하지 못했다.
"경기에서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알아?"
이석우가 한발 더 가까이 왔다.
"그 과정에서 너 자신을 잃지 않는 거야. 그리고 지금 넌 이미 잃어가고 있어."
한준호의 손이 떨렸다. 여전히 경련이 풀리지 않고 있었다.
"미래를 안다는 건 좋은 능력일 수도 있어. 하지만 그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그럼 넌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건 능력이 아니라 감옥이야."
이석우가 탁구대에 라켓을 내려놨다.
"한 판 해."
"뭐?"
"한 판 해. 지금."
이석우가 탁구대 맞은편으로 갔다. 라켓을 집어 들었다.
"넌 미래를 안다고 했지. 그럼 내가 어떻게 나올지 알겠네. 그럼 날 이겨. 미래가 정해진 대로."
한준호가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못 이겨?"
이석우가 공을 집어 들었다.
"아니면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은 거야? 그래서 넌 날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 거야?"
이석우가 한준호를 바라봤다.
"그럼 그게 자유야. 넌 지금 이 순간을 선택할 수 있어. 미래가 아니라. 그게 진짜 능력이야."
한준호의 손이 떨렸다. 여전히 경련이 풀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떨림은 두려움과 결의가 섞여 있었다.
한준호가 라켓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아팠다. 신경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라켓을 놓지 않았다.
이석우가 서브를 넣었다. 빠른 드라이브. 한준호는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라켓이 공을 맞췄다. 손가락에서 통증이 터져 나왔다.
공이 탁구대를 넘어갔다.
이석우가 강하게 쳤다. 한준호는 블록으로 막았다.
공이 탁구대를 오갔다. 약한 공들. 45% 손가락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한준호는 강하게 치지 않았다. 선택했다. 각 순간을 선택했다.
이석우의 움직임이 예측되지 않았다. 미래 기억도, 통계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훈련이 아니라 현재였기 때문이었다.
한준호는 왕리펑의 백핸드 드라이브를 알고 있었다. 미래에서 본 그 기술을. 하지만 이 순간, 이석우의 이번 동작은 예측하지 않기로 했다. 의도적으로 기억을 무시했다. 현재의 감각만으로 플레이하기로 선택했다.
공이 네트에 걸렸다. 한준호의 공이었다.
"1-0."
이석우가 말했다.
다시 서브. 다시 랠리. 이번에는 한준호가 이겼다. 손가락의 통증 속에서. 불완전한 감각 속에서. 1-1.
그들은 계속했다. 밤 10시 30분부터 밤 11시까지. 공이 튀는 소리만 울렸다. 한준호의 숨소리. 이석우의 숨소리. 그리고 손가락이 경련하는 소리.
점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준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미래를 안다는 것과 미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불완전한 신체 속에서도 현재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마지막 랠리에서 한준호가 강하게 쳤다. 45% 손가락으로. 손가락이 통증으로 울부짖었다. 하지만 라켓은 흔들리지 않았다. 공이 탁구대를 넘어갔다. 이석우가 반응하지 못했다.
"게임."
한준호가 말했다. 손가락을 펼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떨림은 이제 약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재를 선택한 자의 떨림이었다.
이석우가 웃음을 지었다.
"그래. 넌 이길 수 있어. 왕리펑도. 하지만 그건 미래가 정해져 있어서가 아니야. 넌 그 순간을 선택했으니까. 계속 선택하면 돼."
이석우가 라켓을 내려놨다.
"그리고 기억해. 넌 자유야. 지금도, 앞으로도. 그 자유 속에서 넌 누가 될지 선택할 수 있어."
이석우가 훈련장을 나갔다. 한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탁구대 위의 공. 그것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감정이었다. 현재를 선택한 자의 감정. 불완전함을 받아들인 자의 감정.
한준호는 라켓을 내려놨다.
밤 11시 30분. 훈련센터는 조용했다.
한준호는 기숙사로 향했다. 내일도 훈련이 있을 것이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하지만 이제 그것은 정해진 미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택이었다.
손가락의 통증은 여전했다. 신경이 깨어나면서 생기는 고통.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한준호는 느꼈다. 신체가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불완전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신체가.
화면에 자막이 떠올랐다.
'감각 회복 45% 달성, 훈련 시작 5주차'
그리고 다시.
'남은 시간: 25주'
한준호의 심장이 뛰었다. 25주.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누가 될 것인가? 미래의 기억에 갇힌 자인가, 아니면 현재를 선택한 자인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이제 그것은 매 순간의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