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범자의 자각
경찰청을 나간 지 사흘. 이준호는 법무법인 정의의 문을 밀었다.
이명재 검사의 사무실은 예상보다 낡았다. 강남 사무실 거리에서 골목 안쪽, 낡은 빌딩 3층.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올랐다. 계단 모서리의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누군가는 이런 곳에서 진실을 찾는다고 생각하자, 이준호의 입가가 비틀렸다. 경찰청 특수범죄수사과의 회의실과는 천양지차였다.
"들어오세요."
이명재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은 꺼져 있었고, 손에는 커피잔이 들려 있었다. 옅은 갈색 액체가 반쯤 남아 있었다. 냄새로 봐서 두세 시간은 된 것 같았다. 그는 이준호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아니요. 다만 당신이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명재는 의자를 권했다. 이준호는 앉지 않았다. 서 있는 쪽이 심리적으로 유리했다.
"박준영 사건입니다. 증거 조작의 정황이 명백합니다. 재심을 진행해야 합니다."
"어떤 증거가?"
"CCTV 타임스탐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명재가 노트북을 켰다. 화면에 CCTV 영상이 떴다. 타임스탐프 좌측 상단의 숫자들이 명확했다.
"사건 당일 오후 11시 47분, 피해자 김태식이 현장에서 나가는 영상입니다. 하지만 타임스탐프는 오후 10시 22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85분의 시간 차이. 영상 파일의 메타데이터를 보면 수정 흔적이 있습니다. 타임스탐프 변조 방식은 전문가 수준입니다."
이준호는 화면을 응시했다. 숫자들이 정확히 맞지 않는 것이 보였다.
"혈액형 데이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명재가 계속했다. 다른 파일을 열었다.
"법의학 보고서 원본에는 현장 혈액이 AB형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박준영의 혈액형은 O형입니다. 그런데 검찰 제출 증거에서는 그 혈액이 O형으로 변조되어 있습니다. 데이터베이스 수정 로그를 추적하면 접근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경찰청 법의학과 시스템에서 오후 2시 18분. 담당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증인 기록도 같은 패턴입니다. 초기 진술에서는 '갈색 옷을 입은 남자'라고 했지만, 법정 증언에서는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로 바뀌었습니다. 그 사이 이준호 분석가의 프로파일이 개입되었습니다. 당신이 '검은색 옷이 범인의 심리 특성과 일치한다'고 발표한 직후였습니다. 증인의 기억이 당신의 프로파일에 맞춰졌습니다."
이명재가 노트북을 닫았다.
"모두입니다. 재심을 진행해야 합니다."
이준호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마치 수사 보고서를 읽는 듯한 톤이었다. 하지만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렸다. 이명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법원이 받아주지 않습니다."
이명재가 천천히 말했다. 커피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왜일까요?"
침묵이 흘렀다. 이준호는 그 질문이 함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대답하는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당신의 프로파일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이명재가 계속했다.
"당신의 분석은 과학이 아니라 신앙이 되었습니다. 15년 동안 그 신앙은 박준영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찰도, 경찰청도. 모두가 당신을 믿었거든요. 당신이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이준호의 몸이 뒤로 물렸다. 마치 주먹을 맞은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깊은 곳에 타격을 입었다. 심장이 아니라 자존심의 중심부에.
"그건... 제 책임이 아닙니다. 증거가 그렇게 지목했습니다."
"증거가 그렇게 지목했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그렇게 해석했습니까?"
이명재는 일어났다. 창문으로 걸어가며 강남의 회색 빌딩들을 바라봤다.
"당신은 프로파일러입니다. 범인의 심리를 읽는 능력자. 그런데 당신도 모르게 당신이 읽고 싶은 심리만 읽었다면? 당신이 보고 싶은 증거만 봤다면?"
"그렇다면 오재훈은?"
이준호가 묻자, 이명재가 돌아섰다.
"오재훈은 조직폭력배 출신입니다. 15년 전, 그는 경찰청에 들어오기 전 하남파라 불리는 조직의 고위 간부였습니다. 공식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검찰 비공식 기록에는 있습니다."
이명재가 책상 옆의 파일을 집었다. 손가락으로 한 페이지를 짚었다. 이준호는 그 페이지를 봤다. 오재훈의 젊은 시절 사진이 있었다. 하남파 조직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오재훈은 은행장 김태식과 거래 관계가 있었습니다. 지하 금융 네트워크. 정치자금 횡령, 마약 자금 세탁 등. 그 거래가 실패했습니다. 김태식은 돈을 챙기고 튀려고 했습니다. 오재훈은 그를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죽였다는 건가요?"
"그래서 죽였거나, 죽이도록 시켰거나, 아니면 죽은 시체를 발견했거나. 어쨌든 김태식은 죽었습니다. 강도살인이라는 명목으로. 그리고 오재훈은 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박준영을 희생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명재가 다시 앉았다. 이번엔 이준호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당신의 프로파일링이 그 은폐를 완벽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신도 모르게."
이준호의 입이 벌어졌다. 닫혔다. 다시 벌어졌다. 마치 물고기처럼.
"제가... 제가 알 리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도구였으니까요. 매우 효율적인 도구였습니다. 당신의 능력은 그들에게 법적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당신의 이름 아래 모든 증거 조작이 정당화되었습니다."
이명재가 일어나 이준호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에는 감정이 없었다. 순수하게 사실만 있었다.
"당신은 공범자가 아닙니다."
이준호의 숨이 들어왔다. 마지막 희망처럼.
"당신은 피해자입니다."
숨이 나갔다.
"하지만 그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부터의 선택에 따라."
이명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치 날씨를 이야기하는 듯.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모든 논리가 무너졌다. 모든 확신이 흔들렸다. 15년간 쌓아올린 경력, 무패 기록, 경찰청에서의 지위—모두가 한순간에 모래성이 되었다.
그가 깨닫은 것은 자신의 오판이 아니었다. 오판도 견딜 수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법의학 검사도, 수사관도, 판사도.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악용되었다는 것. 자신의 정확함이 거짓을 완벽하게 만들었다는 것.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공범자가 되었다는 것.
그것은 다른 차원의 고통이었다.
"박준영은?"
"감옥에 있습니다. 15년 동안."
"그의 가족은?"
이명재가 조용히 말했다. 마치 사건 기록을 읽는 것처럼.
"어머니는 3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을 위해 청원서를 쓰다가 뇌졸중으로. 형은 사업에 실패했습니다. 변호사 비용으로 모든 자산을 썼거든요."
이준호의 손이 주먹이 되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가 맺혔다. 하지만 그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것만 느껴졌다.
죄책감이 아니었다. 분노였다.
자신을 이용한 자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분노는 곧 자신을 향해 돌아왔다. 자신이 그것을 막지 못했다는 분노. 15년 동안 자신의 능력이 악용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분노. 자신의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는 분노.
"지금 당신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명재가 말했다.
"침묵하면, 박준영은 계속 감옥에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명예도 지켜질 것입니다. 경찰청도 당신을 보호할 것입니다. 조직은 항상 자신을 보호하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진실을 말하면, 당신의 모든 것이 무너질 것입니다. 경력도, 명성도, 신뢰도. 법정에서 당신은 공범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은 공범자일지라도."
이명재가 다시 창문을 바라봤다.
"당신이 박준영을 구한다면, 당신은 자신을 파괴해야 합니다."
침묵.
이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석상처럼. 하지만 내부는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15년의 확신이 무너지는 소리. 그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 속에서 무언가 깨어나고 있었다. 죄책감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해보세요."
이명재가 이준호에게 신문지를 건넸다. 그 위에는 준호의 얼굴이 실려 있었다. 헤드라인은 이랬다: '범죄심리분석가 이준호, 증거 조작 혐의 수사'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준호는 신문지를 보지 않았다. 손도 내밀지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많지 않습니다."
이명재가 말했다.
"오재훈은 이미 구속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더 큰 세력이 있습니다. 경찰청 내 특정 라인입니다. 그들은 당신을 공범자로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아니면 침묵하도록 협박할 것입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이준호는 이명재의 사무실을 나갔다. 말 없이.
계단을 내려갈 때,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마치 물속을 걷는 것처럼. 1층 입구에서 햇빛이 들어왔다. 오후 3시쯤이었다. 하늘은 맑았다. 서울의 하늘은 항상 그렇게 맑았다. 하지만 공기 속에 무언가 부식되어 있었다.
그는 차에 탔다. 검은색 BMW. 경찰청 지하주차장에서 받은 차가 아니었다. 이명재의 지인을 통해 빌린 차였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시동을 걸려고 하는 순간, 백미러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차가 있었다.
5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검은 승용차. 타입은 다르지만, 색상은 같았다. 차창이 어두워 탈것이 보이지 않았다.
이준호의 손이 멈췄다.
그 차는 경찰청을 나갈 때부터 따라왔다. 강남역 지하주차장에서도 있었다. 분당으로 가는 길에도.
이제 법무법인 정의의 앞에도 있었다.
이준호는 시동을 걸지 않았다. 그냥 핸들을 잡고 앞을 바라봤다. 백미러 속 검은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이준호가 어떻게 행동할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입술이 얇아졌다.
침묵 속에서, 이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은 이미 함정 안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함정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라는 것을.
자신을 파괴하는 것.
하지만 그것도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시동을 켰다.
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법무법인 정의 앞 도로를 빠져나갔다. 강남대로를 타고 강남역 방향으로. 백미러에서 검은 차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왔다. 마치 정해진 안무처럼.
이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그는 받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휴대폰은 계속 울었다.
결국 받았다.
"이준호."
목소리는 남자였다. 3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차분하고, 낮고, 위협적이었다. 이준호는 그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 톤에서 경찰청 고위 간부의 권위가 느껴졌다.
"누구세요?"
"당신이 궁금해할 사람입니다."
"뭘 원하십니까?"
"당신이 원하는 것. 박준영을 구하고 싶으시죠? 오재훈을 무너뜨리고 싶으시죠? 당신의 명예를 지키고 싶으시죠?"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 가지를 모두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럼 뭘 제안하시는 겁니까?"
"한강대교로 오세요."
전화가 끊겼다.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핸들을 더 단단히 잡아야 했다. 백미러에서 검은 차는 여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한강대교로 가는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길로.
강남대로를 따라 계속 직진했다. 동작대교 방향이 아닌 한강대교 방향이었다. 신호는 모두 초록색이었다. 마치 이준호를 위해 맞춰져 있는 것처럼. 세상이 자신의 움직임을 허용하고 있다는 환상. 하지만 그것도 착각이었다. 이것도 계획된 이동이었다.
한강대교 진입로. 차들이 많았다. 오후 3시 반의 서울 도심. 퇴근 전 적당한 교통량. 이준호의 차는 중앙 차선을 타고 다리 위로 올라갔다. 한강이 보였다. 물빛이 어두웠다. 마치 거울처럼.
백미러에서 검은 차가 더 가까워졌다.
이제 5미터 정도.
이준호는 액셀을 밟지 않았다. 같은 속도를 유지했다. 60km/h. 다리 위에서의 제한 속도. 규칙을 지키는 것이 유일한 저항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같은 번호였다.
"다리 위입니다. 이제 당신은 선택할 수 없습니다."
목소리가 들렸다.
"오른쪽 갓길로 빠지세요."
"만약에..."
"만약이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15년 전부터."
이준호는 오른쪽 갓길로 빠졌다. 차는 천천히 멈춰섰다. 다리 위의 갓길. 한강이 아래에 있었다. 140미터 아래.
검은 차가 나란히 정차했다.
운전석 창이 내려갔다.
40대 초반의 남자가 보였다. 정장을 입고 있었다. 경찰청 특수범죄수사과 간부급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준호는 그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기록에도 없었다. 그런데 뭔가 익숙했다. 목소리의 톤, 얼굴의 각도, 손목에 찬 시계. 모두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았다.
"이준호 분석가."
남자가 말했다.
"당신의 프로파일링 능력은 정말 뛰어났습니다. 99.8% 정확도라고 하더군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당신이 앞으로 뭘 할지입니다."
남자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준호는 받지 않았다.
"그 안에는 당신을 위한 제안이 있습니다. 박준영 사건. 당신의 프로파일링이 완벽했다는 것을 법원에 증명할 수 있는 자료들입니다."
"조작된 증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증거는 해석의 문제입니다. 당신이 그동안 해온 것처럼. 프로파일링도 그렇고요. 과학이라고 하지만, 결국 해석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해석의 대가입니다."
이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박준영을 계속 감옥에 두시면, 당신의 가족은 안전합니다. 당신의 경력도 보존됩니다. 오재훈은 우리의 실수였습니다. 그를 책임지게 하면 됩니다. 모든 게 끝납니다."
"그리고 진실은?"
"진실은 당신이 정의하는 것입니다. 항상 그래왔잖습니까?"
남자가 다시 서류를 내밀었다. 이번엔 이준호가 받았다. 손이 떨렸다.
서류에는 수사 자료들이 있었다. 법의학 보고서, CCTV 영상, 혈액형 데이터. 모두 박준영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준호는 알았다. 이것들은 모두 조작된 것들이었다. 자신이 이미 본 것들이었다.
"당신은 뛰어난 분석가입니다. 이 자료들이 조작되었는지 아닌지를 구분할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법정에서는 당신의 의견이 중요합니다. 당신의 프로파일이 법이 됩니다. 당신이 '완벽하다'고 말하면, 법원도 받아들입니다. 당신의 신뢰도가 그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이준호는 서류를 내팽개쳤다. 바람에 흩어졌다. 일부는 한강으로 날아갔다.
"당신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우리는 당신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시스템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경찰청, 검찰, 법원.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재훈도 그 일부일 뿐입니다."
남자가 창문 밖 한강을 가리켰다.
"더 큰 구조 속의 작은 톱니바퀴일 뿐입니다. 경찰청 내 특정 라인. 그 라인이 15년 동안 유지되어온 것입니다."
이준호의 눈이 떴다.
"김태식은?"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잠시였지만, 그 순간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이준호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의 반응을 의식했다. 그것은 약점이었다.
"그건 당신이 알 필요 없는 것입니다."
"박준영이 현장에 있던 이유는?"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가 다시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경고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균열이 생겼다. 이준호는 그것을 봤다.
"당신은 이제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습니다. 한쪽은 당신의 파멸이고, 다른 한쪽은 당신의 보존입니다. 선택은 당신의 것입니다."
남자가 창문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준호가 차에서 내렸다. 한강대교 위. 바람이 심했다. 140미터 아래 물이 보였다.
"당신은 뛰어난 분석가지만,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창문이 거의 닫혀가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자신의 능력이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의는 권력입니다. 그리고 권력은 당신을 보호하거나 파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선택에 따라."
검은 차의 창문이 완전히 닫혔다. 엔진음이 났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준호는 핸드폰을 꺼냈다. 녹음을 시작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화면을 확인했다. 녹음 표시가 떴다.
"당신의 이름을 말씀해주실래요?"
검은 차의 운전석 창이 다시 내려갔다.
"당신은 이제 녹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 녹음은 어디로 갈까요? 검찰? 법원? 아니면 언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모든 것 안에 있으니까요."
검은 차가 움직였다. 한강대교를 빠져나가는 방향으로.
이준호는 뒤따라갔다. 핸드폰을 들고. 녹음을 멈추지 않으면서. 하지만 화면에 노이즈가 생겼다. 통화 신호가 약해지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녹음이 끊겼다.
이준호의 손이 주먹이 되었다. 핸드폰을 집어던졌다. 화면이 깨졌다. 녹음은 이미 죽어 있었다.
검은 차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다리를 내려가며. 이준호의 차도 따라갔다.
차 안에서, 이준호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경찰청으로 돌아가면 구속 영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박준영에게 연락하면 그 통화도 감시받을 것이다. 도망치면 가족이 인질이 될 것이다.
모든 길이 막혀 있었다.
하지만 남은 것이 하나 있었다.
분노. 그리고 그 분노 속에서만 벗어날 길이 있다는 것을.
이준호는 핸들을 돌렸다. 한강대교에서 내려오는 길. 경찰청 방향이 아닌 다른 곳으로.
그의 차가 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