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신앙의 승리

5월 26일 새벽 4시. 오스만의 포격이 다시 시작됐다.

콘스탄틴은 성벽 위에서 눈을 떴다. 침실에서 쓰러진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하늘은 여전히 검었지만, 동쪽 지평선 너머로 불이 타올랐다. 오스만의 대포 화염이다. 포탄이 성벽에 맞을 때마다 돌가루가 하늘로 솟았다.

손을 들어보니 떨렸다. 손가락 끝이 마비되고 있었다. 끝에서 시작된 마비가 이제 손목까지 번져 있었다. 손가락을 깨물어도 통증이 희미했다. 또 다른 기억이 사라졌다는 신호였다. 콘스탄틴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누군가의 손처럼 낯설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 생각이 떠올랐을 때, 이준호의 기억도, 콘스탄틴 11세의 기억도 모두 희미했다. 둘 다 아닌, 어딘가 사이에 떠 있는 감각. 그것이 지금 자신의 정체였다.

"황제 폐하."

유스티니아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노바 용병대장은 왼쪽 팔을 붕대로 감고 있었다. 어제 포격으로 입은 상처에서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성벽 위에 서 있었다.

"기술을 더 사용하지 마십시오."

콘스탄틴이 고개를 돌렸다.

"지난 밤 당신을 봤습니다. 침실에서 혼자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나도 압니다. 당신의 눈빛이 변했습니다. 우리 같은 군인들은 그런 변화를 본다. 죽음의 눈빛입니다."

유스티니아니는 성벽 아래 오스만 진영을 가리켰다. 포병대가 다시 화약을 장전하고 있었다.

"더 이상 기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졌습니다. 하지만 져도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콘스탄틴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기술이 없다면, 현대의 지식이 없다면, 자신은 누구였는가?

"당신은 황제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유스티니아니가 검을 뽑아 들었다. 날이 햇빛에 반사되어 콘스탄틴의 눈을 찔렀다. 그 순간 먼지 속에서 오스만군이 나타났다. 수백 개의 사다리가 성벽을 향해 들어올려졌다.

"지금입니다, 황제 폐하."

콘스탄틴은 검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현대의 엔지니어로서는 검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황제의 몸은 알고 있었다. 검의 무게가 손에 익숙했다. 또 다른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준호의 기억이 아닌, 콘스탄틴 11세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첫 번째 오스만 병사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콘스탄틴은 검을 내려찍었다. 병사의 어깨가 갈라지며 피가 솟구쳤다.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사다리에서 떨어졌다.

다음 병사, 또 다음 병사. 올라오는 것마다 검이 내려찍었다. 감정이 없었다. 효율성도 계산도 없었다. 단순한 반복이었다. 살인의 반복이었다.

성벽 위에 100명, 200명의 비잔틴 병사들이 검을 들고 섰다. 모두가 같은 움직임을 반복했다. 올라오는 병사를 내려치고, 떨어진 시체 위로 다음 병사가 올라오고, 다시 내려친다. 포기 없이, 계획 없이, 끝까지.

1시간이 지났다. 성벽 남쪽 구간이 무너졌다. 돌이 산사태처럼 무너져 내렸고, 그 틈으로 오스만군이 성벽 위로 들어왔다. 비잔틴 방어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50명, 30명, 20명. 병사 수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유스티니아니는 그 틈새로 뛰어들었다. 콘스탄틴도 따라 뛰어들었다. 전투가 대형 광장으로 옮겨졌다.

루카스 노타라가 나타났다. 귀족의 옷을 벗고 갑옷을 입은 그는 검을 휘둘렀다. 나이 많은 몸이지만 움직임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가 갑옷을 입기까지는 오랜 내적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기술을 거부하던 보수 귀족이 어떻게 검을 들게 되었는가. 성벽 위에서 비잔틴 병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콘스탄틴이 기술 대신 저항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서, 그의 믿음이 서서히 흔들렸을 것이다. 기술만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도 역사를 만든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래서 그는 옷을 벗고 갑옷을 입었다.

"황제 폐하, 우리는 졌습니다."

루카스가 외쳤다. 옆에 오스만 병사가 나타났고, 루카스는 그를 베어냈다. 검이 병사의 팔을 자르고 지나갔다.

"우리는 졌지만, 우리의 영혼은 졌지 않습니다."

콘스탄틴이 답했다. 자신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준호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콘스탄틴 11세가 말했다. 또 다른 기억이 사라졌다는 신호였다.

루카스가 웃었다. 피를 흘리면서 웃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루카스는 더 깊이 성 안으로 들어갔다. 콘스탄틴은 그의 뒷모습을 봤다. 그 뒷모습이 점점 작아져서 사라졌다.

그 순간, 콘스탄틴은 하기아소피아 대성당을 봤다.

도시의 중심에서 그 건물이 솟아 있었다. 돔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그 돔 아래에서 합창이 들렸다. 그레고리우스 총대주교의 목소리였다. 깊고 울림 있는 그 목소리가 성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주민들이 함께 부르고 있었다. 라틴어 성가가 아니라 그리스어 정교회 성가였다. 천년 동안 이 도시에서 울려 퍼진 그 노래였다. 촛불이 제단을 밝히고 있었고, 향의 연기가 성당 안을 감싸고 있었다.

총대주교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주변에 주민들이 서 있었다. 아이들, 노인들, 여자들, 남자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오스만군이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데도 그들은 계속 불렀다. 포격음을 뚫고 성가가 울려 퍼졌다. 마치 그들의 목소리로 도시를 지키려는 듯이.

콘스탄틴은 멈춰 섰다. 검을 들었던 손이 내려갔다.

"기술이 영혼을 구하지는 못한다."

총대주교의 말이 귓가에 되살아났다. 1화에서 들었던 그 말. 그때 콘스탄틴은 무시했다. 현대의 엔지니어는 그런 말을 들을 귀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성벽 위에서, 죽음 앞에서, 기억이 사라지는 절망 속에서, 그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됐다.

기술은 성벽을 강화할 수 있지만, 영혼을 구할 수는 없다. 화약은 적을 죽일 수 있지만, 신앙을 죽일 수는 없다. 그리스 화염은 배를 태울 수 있지만, 희망을 태울 수는 없다.

그것이 역사의 진실이었다. 기술이 아니라 신앙이, 승리가 아니라 저항이, 효율성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이 역사를 만들었다. 천년 제국이 천년을 버틴 것은 기술 때문이 아니라 신앙 때문이었다.

콘스탄틴은 검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렸다. 기술을 포기하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그리스 화염을 만들지 않겠다는 결정이었다. 더 이상 현대의 지식으로 저항하지 않겠다는 결정이었다. 인간으로서, 황제로서, 신앙으로서 남겠다는 결정이었다.

"황제 폐하!"

다비드 팔라이올로고스가 나타났다. 젊은 병사의 옷을 입은 그는 피에 젖어 있었다. 검에도, 얼굴에도, 옷에도 다른 누군가의 피가 묻어 있었다.

"기술은 우리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다비드가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서 절망과 해방이 섞여 있었다. 그는 기술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놨다. 이제 단지 전사로서 싸울 수 있었다.

"맞습니다."

콘스탄틴이 답했다. 그의 목소리도 차분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 있습니다."

다비드가 그 말을 듣고 어깨가 떨렸다. 울음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서 있습니다."

다비드가 반복했다. 그리고 다시 검을 들고 오스만군을 향해 뛰어갔다.

성 안의 싸움은 더 이상 조직적이지 않았다. 일대일의 결투로 변했다. 비잔틴 병사 하나가 오스만 병사 세 명과 싸우고 있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 병사는 계속 검을 휘둘렀다. 떨어질 때까지, 죽을 때까지.

콘스탄틴은 그 장면들을 봤다. 모두가 패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패배하는 방식을 자신들이 선택했다. 무릎을 꿇지 않고 서서 죽는 방식을.

성 남쪽 입구에서 제노바의 마리아가 나타났다. 그녀는 아이들과 노인들을 이끌고 있었다. 낮은 성벽을 타고 내려가려고 했다. 한 아이가 두려워 멈춰 섰다. 마리아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내려갔다. 또 다른 아이가 떨렸다. 마리아는 그 아이를 안아 내려놨다. 노인이 다리를 절었다. 마리아는 그의 팔을 잡고 함께 내려갔다. 하나씩, 차근차근, 멈추지 않고.

"우리는 살아남아야 합니다! 기억하기 위해!"

마리아가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전투의 소음을 뚫고 들렸다.

"누군가는 살아남아야 이 일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저항입니다!"

아이들이 그녀를 따라 성벽을 내려갔다. 노인들이 따라갔다. 마리아는 마지막에 돌아섰다. 콘스탄틴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있었다. 그 미소는 결정의 미소였다. 살아남겠다는 결정의 미소였다.

"당신의 기술이 우리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황제 폐하. 하지만 당신의 저항이 우리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마리아가 말했다. 콘스탄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선택을 이해한다는 뜻이었다. 축복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마리아는 마지막 아이의 손을 잡고 성벽 아래로 사라졌다.

콘스탄틴은 성벽 위에 남겨졌다. 유스티니아니, 루카스, 다비드, 그리고 남은 병사들과 함께.

오스만군이 계속 밀려왔다. 비잔틴군이 계속 물러났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검을 들고 있었다.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여전히 서 있었다.

정오가 되자 전투는 거의 끝났다. 대궁전이 불에 타올랐다. 하기아소피아 대성당의 돔은 여전히 햇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총대주교는 여전히 제단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여전히 부르고 있었다. 그 성가가 성당을 가득 채웠다.

콘스탄틴은 성벽 위에서 그 광경을 봤다. 도시가 무너지고 있었다. 천년 제국이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멸 속에서 신앙이 타오르고 있었다.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저녁 6시경, 오스만군의 포격이 멈췄다. 술탄 메흐메드 2세의 명령이었다. 내일 새벽 최종 공격을 하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밤은 비잔틴군에게 마지막 숨을 쉴 기회를 주었다.

콘스탄틴은 성벽 위에서 내려왔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았다. 팔 전체가 마비되고 있었다. 기억을 또 잃었다는 신호였다. 이제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유년기 기억들이 사라졌고, 직업 기억들도 희미해졌다. 남은 것은 현재의 상황뿐이었다. 그것도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침실로 돌아갔다. 벽에는 여전히 5월 29일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아직 이틀이 남아 있었다. 아직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콘스탄틴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는 황제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독수리가 날개를 펼친 모양이었다. 천년 동안 이 천장은 황제들의 머리 위에 있었다. 이제 그것도 사라질 것이다.

밤이 깊어갔다. 밤 11시경, 콘스탄틴은 다시 성벽 위로 올라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도시는 거의 침묵했다. 아직 전투가 있는 몇몇 지역에서 불빛이 보였지만, 대부분의 거리는 어두웠다. 하기아소피아 대성당은 여전히 촛불이 켜져 있었다. 총대주교가 밤새 기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콘스탄틴은 혼자 성벽 위에 섰다. 바람이 불었다. 바다 냄새가 났다. 금각만 너머로 오스만의 진영이 보였다. 불빛이 반짝였다. 21만의 대군이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콘스탄틴의 머리가 아팠다.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콘스탄틴이 중얼거렸다.

'이준호? 콘스탄틴? 아니면 다른 누군가?'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팔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마치 돌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언어도 흐릿해지고 있었다. 생각이 점점 느려졌다.

'기억이 모두 사라졌다.'

콘스탄틴은 그 생각을 다시 했다.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포도, 절망도, 슬픔도 없었다. 단지 무였다. 텅 빈 무였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성벽을 올라오고 있었다.

유스티니아니였다.

"황제 폐하, 당신은 콘스탄틴입니다. 우리의 황제입니다."

유스티니아니가 옆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콘스탄틴은 그 목소리를 들었다. 확신이 다시 돌아왔다. 아니면 그것이 환상이었나? 자신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내일 새벽이었다. 마지막 새벽이었다.

5월 27일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스만의 포격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더 가까웠다. 더 크게 울렸다. 새벽 5시 전에 최종 공격이 시작될 것 같았다.

그 순간, 성당 쪽에서 성가가 들렸다. 포격음을 뚫고 그레고리우스 총대주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더 크게, 더 절박하게. 주민들의 목소리가 함께했다. 죽음 앞에서 부르는 노래였다.

콘스탄틴은 그 성가를 들었다. 그리고 검을 들었다. 아무 기억도 남지 않은 채로, 아무 이름도 갖지 않은 채로, 단지 인간으로서. 성벽 위에 서 있었다.

그 순간, 유스티니아니가 말했다.

"황제 폐하, 메흐메드의 최종 공격은 새벽 5시입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서 있어야 합니다."

콘스탄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할 수 없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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