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본문

성벽의 돌 위에서 내려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깨 부상으로 팔을 움직일 수 없는 유스티니아니가 침상에서 나와 복도를 통해 왔고, 그의 뒷모습은 전날보다 더 굽어 있었다. 5월 21일 새벽, 오스만의 포격은 한 시간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울렸다. 이제 그 음향도 주민들의 귀에 익숙해져 있었다. 익숙함은 공포보다 더 위험했다. 공포는 사람을 행동하게 했지만, 익숙함은 사람을 절망하게 했다.

궁전의 회의실에 들어서자 이미 루카스 노타라와 그의 측근들이 앉아 있었다. 정교회의 관료들도 있었다. 콘스탄틴 11세의 얼굴로 나타난 이준호는 의자에 앉기 전에 그들의 눈빛을 읽었다. 계산적이었다. 두려웠다. 의심했다.

"황제 폐하, 어제의 포격으로 식량 창고 일부가 손상되었습니다." 루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날카로웠다. "재정 담당관의 계산으로는 현재 수비대의 식량이 15일 분량 이상 소진되었습니다. 주민을 포함하면 5일입니다."

"강화 공사에 투입된 인력을 줄이면?" 이준호는 물었다.

"강화 공사 자체를 중단해야 합니다, 폐하." 루카스의 눈이 찬 빛을 띠었다. "어제 성벽 남쪽 구간 보강 작업에서 3명이 사망했습니다. 부상자 5명. 주민들은 이제 당신의 명령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이준호의 손이 탁자 위에서 떨렸다. 어제의 기억이 희미했다. 누가 죽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손등을 그었을 때 피가 흐르는 감각만 남아 있었다.

"주민들의 사기가 중요합니다, 황제 폐하." 정교회의 대사제 음성이 낮게 울렸다. "신앙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기술이 우리를 구할 수 없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기술은 구할 수 있습니다." 이준호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하지만 그것은 확신이 아니라 반복이었다. 자신에게 계속 말해주어야 하는 주문처럼. "그리스 화염의 재현이 진행 중입니다. 화약 무기의 개선도. 이것들이 성벽의 내구도를 높이고, 오스만군의 접근을 저지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루카스가 천천히 말했다. "다만 기술은 사람을 먹이지 않습니다. 기술은 죽은 자를 살리지 못합니다. 황제 폐하, 당신이 말씀하신 그리스 화염과 화약 무기가 언제 완성되겠습니까? 우리의 식량은 지금 필요합니다. 5일 후가 아닌, 오늘 밤이 아닌, 지금."

루카스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노타라 가문은 신앙 안에서의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원합니다. 기술이 아닌 현실을 원합니다."

이준호는 일어섰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생존하게 하겠습니다."

그는 회의실을 나갔다. 복도를 걸으며 자신의 손을 봤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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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광장은 정오의 햇빛 아래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준호는 계단 위에 섰다. 아래에는 노인, 여인,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두려움으로 흔들렸다.

"시민들이여!" 그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렸다. 오스만의 포격도 멈춘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기술로 이길 것입니다! 그리스 화염이 성벽을 지킬 것입니다! 화약이 적군을 무찌를 것입니다!"

그의 팔이 하늘을 향했다. 계획한 제스처였다. 영감을 주려는 황제의 몸짓이었다.

하지만 광장의 반응은 침묵이었다.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했다. 사람들은 주인공을 보지 않았다. 그들은 아래를 봤다. 어떤 아이가 어머니 치마를 잡고 있었다. 한 노인이 다른 노인의 팔을 짚고 있었다. 그들은 기술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확실함을 원했다. 내일의 보장을 원했다.

"우리는..." 이준호가 다시 말하려 했을 때, 한 여인이 앞으로 나아왔다. 제노바의 마리아였다. 그녀의 얼굴은 차분했지만 눈은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황제 폐하," 그녀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당신의 기술을 믿습니다. 정말 믿습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노인들은 기술을 먹지 못합니다. 당신의 그리스 화염이 완성되려면 몇 주가 더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우리의 식량은 며칠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들을 돌보겠습니다. 당신의 기술과 함께가 아니라, 그들의 손을 잡고."

그녀는 돌아섰다. 광장의 절반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노인들, 아이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 이준호는 그들의 뒷모습을 봤다. 그것은 배반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마리아가 광장을 떠날 때, 이준호의 호흡이 얕아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손가락이 주먹으로 굳어졌다.

단상 위에서 이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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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식량 배급소.

이준호는 루카스와 마주쳤다. 배급 담당관들이 곡식 자루를 나누고 있었다. 그 양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었다.

"이것이 전부인가?" 이준호가 물었다.

"네, 폐하." 루카스가 답했다. "어제 포격으로 손상된 창고를 제외하면 이것이 남은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배급량을 줄이고 강화 공사를 계속하자. 성벽이 더 견고해지면 포격 피해도 줄어들 것이다."

루카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폐하, 주민들은 이미 한 끼를 거르고 있습니다. 배급량을 더 줄이면—"

"기술이 우리를 구할 것이다." 이준호가 끊었다. "강화 공사를 계속하라."

"기술이 언제 우리를 구하겠습니까?" 루카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스 화염은 아직 실패하고 있습니다. 화약 무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본 것은 폭발만 있고 제어는 없었습니다. 폐하, 우리는 결과를 봐야 합니다. 약속이 아닌 현실을."

이준호는 루카스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절망도 있었다.

"강화 공사를 계속하라." 이준호가 다시 말했다. "그것이 명령이다."

루카스는 한 발 물러섰다. "그렇다면 노타라 가문은 더 이상 당신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는 돌아섰다. 배급소를 떠났다. 그가 나간 후, 이준호의 호흡이 가빠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손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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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30분, 침실.

유스티니아니가 침상에 누워 있었다. 어깨 부상이 악화되고 있었다. 의료진은 감염을 우려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 유스티니아니의 목소리가 약했다. "당신의 기술이 우리를 나누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을 나누지 않았다." 이준호가 말했다.

"아니면 당신이 우리를 구할 수 없다는 현실이 우리를 나누는 것입니다." 용병 지휘관의 눈이 천장을 봤다. "기술은 정해진 역사를 바꾸지 못합니다, 황제. 저는 이미 깨달았습니다. 당신도 깨달아야 합니다."

이준호는 침상 옆에 섰다. 유스티니아니의 어깨를 봤다. 부상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 왼쪽이었나? 오른쪽이었나? 어제 본 것이 맞는가?

기억이 흐릿했다.

"당신은 여전히 군사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가?" 이준호가 물었다.

유스티니아니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어깨의 통증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누웠다.

"아니오, 폐하."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침상 옆에 서서 유스티니아니의 창백한 얼굴을 봤다. 그 얼굴을 어디서 봤는가? 어제? 그제? 아니면 이 침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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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성벽.

이준호는 그리스 화염 제조소를 점검했다. 엔지니어들이 작업 중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피로로 가득 차 있었다.

"진행 상황은?" 이준호가 물었다.

"폐하, 아직 점화 메커니즘에 문제가 있습니다." 담당 엔지니어가 답했다. "혼합 비율을 조정했지만, 불이 제어되지 않습니다. 화염이 발사체에서 폭발하거나 목표를 벗어납니다."

"언제 완성되겠는가?"

"최소 2주, 폐하. 그것도 추가 실험이 성공할 경우입니다."

이준호는 제조소를 돌아봤다. 실패한 장치들이 쌓여 있었다. 그 옆에는 화약 무기들도 있었다. 그것들도 마찬가지였다. 폭발은 하지만 정확도는 없었다.

기술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

그 깨달음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준호는 그것을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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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8시, 궁전의 회의실.

정교회의 대주교 그레고리우스가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굳어져 있었다.

"황제 폐하," 그가 말했다. "우리는 당신의 기술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레고리우스가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리스 화염, 화약 무기, 그 모든 것들. 그것들은 우리의 영혼을 훼손시킵니다. 신앙을 약하게 합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정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싸우겠는가?" 이준호가 물었다.

"신앙으로," 그레고리우스가 답했다. "우리는 신앙으로 죽을 것입니다. 기술이 아닌."

그는 돌아섰다. 회의실을 떠났다. 그가 나간 후, 이준호의 맥박이 급격히 올라갔다. 목이 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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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침실.

이준호는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은 콘스탄틴 11세의 것이었다. 수염, 눈, 콧대. 모두 그것이었다. 하지만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 다른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현대의 무언가. 엔지니어의 무언가. 이준호의 무언가.

그것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거울에 비친 손도 떨렸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손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회의실이 떠올랐다. 밝은 조명. 프로젝트 화면이 벽면에 떠 있었다. 누군가 그의 설계를 보고 있었다.

"이준호, 이 설계는 실현 가능한가?"

그가 답하고 있었다.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네, 완전히 실현 가능합니다. 예산 15억, 일정 18개월."

누군가가 다시 물었다. "효율성은?"

"최고 수준입니다. 기술적으로 완벽합니다."

하지만 그 장면이 언제였는가? 어디였는가? 콘스탄티노플 이전이었나? 아니면 지금이었나?

이준호의 눈이 떠졌다. 침실로 돌아왔다. 거울 속의 얼굴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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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성벽의 남쪽 구간.

포격으로 인한 균열이 벽면에 생겼다. 작은 균열이었지만, 그것은 성벽의 취약점을 드러냈다. 이준호는 그것을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강화 공사가 부족했다.

시간이 부족했다.

기술이 부족했다.

그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 회의실. 밝은 조명. 프로젝트 화면이 벽면에 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화면이 달랐다. 붉은 글씨로 표시된 수치들.

"예산 초과 30%. 일정 지연 8개월. 효율성 미달 45%."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갑고 명확한 목소리로. "이준호, 이것은 무엇인가?"

그가 답하고 있었다. 방어적으로. "기술적으로는 여전히 완벽합니다. 단지 시간이 더 필요할 뿐입니다—"

"기술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말이 반복되고 있었다.

"결과가 중요합니다."

성벽 위에서 이준호의 눈이 떠졌다. 아래에는 오스만군의 횃불이 보였고, 위에는 별이 떠 있었다. 하지만 그 회의실 장면은 여전히 눈 안에 어른거렸다. 두 개의 세계가 겹쳐 있었다. 하나는 현실이고, 하나는 환상이어야 했지만,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손가락으로 팔뚝을 그었다. 피가 흘렀다. 따뜻한 피. 현실의 증거였다. 하지만 현실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불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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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30분.

다비드가 성벽에서 이준호를 찾아왔다. 젊은 팔라이올로고스의 얼굴은 창백했다.

"황제 폐하," 다비드가 천천히 물었다. "당신은 정말 우리 황제인가요?"

"그렇다," 이준호가 답했다.

"아니면 우리를 파괴하려는 누군가인가요?" 다비드의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다. "기술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우리를 나누고 있는 누군가?"

이준호는 입을 열려 했지만 다비드가 말을 계속했다.

"루카스는 떠났습니다. 그레고리우스도 떠났습니다. 유스티니아니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성벽의 남쪽 구간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다비드의 눈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래야 저는 당신을 따를지, 아니면 당신을 의심할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준호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현대의 엔지니어였나? 콘스탄틴 11세였나? 아니면 둘 다 아닌 것이 되어 가고 있었나?

"나도 모르겠다."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겠어."

다비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황제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고백. 그것은 절망이었다. 젊은 팔라이올로고스는 말없이 돌아섰고, 성벽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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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45분.

침실의 어둠 속에서 이준호는 깨어나 있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같았다. 그 둘의 경계가 무너져 있었다.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손가락이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반응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손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회의실이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누군가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누구였는가? 상사였나? 클라이언트였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만 들렸다.

"이준호, 당신은 우리를 구할 수 있는가?"

그가 답하고 있었다. 확신 있는 목소리로. "네, 할 수 있습니다."

"정말인가?"

"네."

하지만 그 대답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었다.

침실의 벽이 더 가까워졌다. 아니, 자신이 더 작아지고 있었다. 손가락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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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자정을 넘겼다.

침실의 문이 열렸다. 루카스 노타라가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굳어져 있었다.

"황제 폐하," 그가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따를 수 없습니다."

이준호는 입을 열려 했지만 루카스가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강화 공사를 계속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결과 주민들은 더 굶주렸고, 노타라 가문의 사람들은 성벽에서 죽었습니다. 신앙 안에서의 죽음이 아닌, 당신의 명령 안에서의 죽음입니다. 그것은 다른 죽음입니다. 영혼 없는 죽음입니다."

루카스는 돌아섰다. 침실을 떠났다.

그가 나간 후, 정교회의 대주교 그레고리우스가 들어섰다. 그의 눈은 분노가 아닌 체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황제께서 말씀하신 기술이 무엇인지 우리는 압니다," 그레고리우스가 말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정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떠났다. 침실의 문이 닫혔을 때 이준호의 맥박이 급격히 올라갔다. 목이 조였다. 손가락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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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자정 15분.

침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유스티니아니 롱고가 들어섰다. 어깨의 상처가 악화되고 있었다. 감염의 흔적이 보였다. 그는 이준호를 봤다.

"황제 폐하," 그가 말했다. "성벽의 남쪽 구간 균열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이대로라면 3시간 내에 함락될 것입니다." 유스티니아니의 목소리는 낮았다. "나는 더 이상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어깨의 감염이 악화되었고, 팔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군사 작전을 지휘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지휘하겠는가?"

"아무도 없습니다, 폐하." 유스티니아니가 답했다. "루카스는 떠났고, 그레고리우스는 신앙만을 말합니다. 마리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다비드는 당신을 의심합니다."

유스티니아니가 한 발 물러섰다. "기술이 우리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나는 이미 깨달았습니다. 당신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 안에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는 침실을 떠났다.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도 이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기술이 아니라는 것. 신앙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그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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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자정 30분.

침실의 어둠 속에서 이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모두가 떠났다. 마리아는 슬픔으로. 루카스는 분노로. 그레고리우스는 체념으로. 유스티니아니는 침묵으로. 다비드는 의심으로.

그리고 이제 침실의 벽만 남아 있었다.

그 벽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니, 자신이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손가락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회의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결과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결과는 이것이었다.

고립. 절망. 정체성의 붕괴. 그리고 성벽의 함락.

기술의 대가는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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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자정을 지났다.

침실의 어둠 속에서 이준호는 깨어나 있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같았다. 그 둘의 경계가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이 아니라 정체성 자체가.

두 개의 세계 사이에서. 두 개의 이름 사이에서. 두 개의 죽음 사이에서.

그 순간,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성벽에서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포격음이 울렸다. 더 크고, 더 가깝게.

침실의 벽이 흔들렸다.

이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손가락이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였는가?

그는 누가 되어 가고 있었는가?

그 순간,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돌이 굴러떨어지는 음. 주민들의 비명. 그리고 오스만군의 함성.

침실의 벽이 더 가까워졌다.

자신이 더 작아지고 있었다.

손가락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성벽이 함락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준호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어둠 속에서 깨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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