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목소리의 톤

밤 열한 시, 온음 카페의 불이 꺼진 지 한 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은은 카페 문 앞에서 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기다리는 척하고 있었다. 손가락을 꼬았다 풀었다를 반복했고, 한 번쯤은 돌아가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섯째 날 밤, 준호가 은에게 건넨 메모는 짧았다.

'오늘 밤 카페에서 만날래? 오래 있어도 되는 밤.'

오래 있어도 되는 밤. 그 표현이 자꾸 떠올랐다. 마치 그 밤이 특별하다는 신호 같았고, 동시에 불안했다. 어제의 해변에서 그들은 손을 잡았고, 은은 준호의 온기가 자신의 손가락 끝까지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감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손가락 끝에 남겨진 온도의 기억.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카페 문이 열렸다.

"들어와. 추울 거야."

준호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은은 즉시 그것을 감지했다. 음성의 톤이 평소보다 낮았고, 숨을 쉬는 리듬이 느렸다. 마치 물 위를 천천히 걷는 것처럼, 한 발 한 발이 신중한 목소리였다.

"오늘은 좀 다르네. 이렇게 늦게."

은이 말했다. 준호가 카페의 문을 잠그고 돌아섰다.

"응. 오늘은 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어."

그 순간, 은은 준호의 어깨가 미묘하게 내려앉는 것을 봤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동작. 은은 카페 깊숙한 곳의 테이블에 앉았고, 준호는 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사이의 거리는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지만, 오늘따라 그것이 멀게 느껴졌다.

"너는 지난 열흘이 어땠어?"

준호가 물었다. 그 질문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했지만, 목소리 속에는 여러 층의 의도가 섞여 있었다. 진짜로 궁금한 것도 있고, 자신이 은에게 뭔가를 해줬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고, 동시에 자신의 뭔가를 고백하기 전에 은의 상태를 재는 것 같았다.

은은 한 호흡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햇빛이 따뜻했어. 음식이 맛있었어. 바람이 불었고, 꽃이 향기로웠어."

"그래. 그건 알고 있어."

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은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것을 묻고 있었다.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감정은?"

은은 그 질문 앞에서 멈췄다. 감정. 그것이 지난 열흘의 진짜 질문이었다. 은은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의 눈빛은 진지했다. 아니, 진지함을 넘어 불안해 보였다. 마치 자신이 던진 이 질문의 답에 자신의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처럼.

"...감정이 돌아오는 중이야."

은이 천천히 말했다. 그 순간,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주 미묘하게. 한 호흡만큼. 은은 그것을 들었다. 목소리 끝의 미세한 떨림.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준호가 말했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은은 그 침묵 속에서 준호가 무언가를 결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절벽 끝에 선 사람이 뛸지 말지를 결정하는 순간처럼.

"은, 난 너한테 미안해."

준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의 톤이 완전히 바뀌었다. 더 이상 일상의 톤이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를 벗겨내고 드러내는 순간의 목소리.

"넌 날 도와주려고 내려왔다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준호가 숨을 들이마셨다. 길고 깊은 호흡.

"난 널 도와주려고 한 게 아니었어. 난 날 도와달라고 했어. 너한테."

은의 눈이 커졌다.

"서울에서 카페 사업을 했어. 아, 하려고 했어. 임차료도 내고, 간판도 달고, 손님도 들었어. 근데..."

준호의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이 길어졌다.

"망했어. 일 년 반 만에."

준호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가늘게 떨렸다.

"마지막 날이 가장 힘들었어. 손님들한테 '내일부터 문을 안 열어요'라고 말해야 했거든. 그리고 할머니한테도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며칠을 꼼짝도 못 하고 있는데, 너가 연락을 해 온 거야. 감정 표현 불능증 진단을 받았다고. 고향에 가고 싶다고."

은은 숨을 쉬지 못했다.

"그 순간 난 생각했어. 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겠네. 내가 무너져 있는 너를 붙잡으면, 내가 무너질 일은 없을 거야. 너를 도와주다 보면, 내가 도움받는 거라고 생각했어."

준호가 은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근데 넌 진짜 날 도와줬어. 넌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냥 옆에만 있었는데, 나는 살아났어. 너를 보면서 내가 다시 살아났다는 걸 느꼈어."

은의 가슴이 철렁했다. 준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고, 그 떨림이 직접 은의 심장을 건드렸다.

"그래서 미안해. 난 널 구원할 수 없었어. 난 너한테 구원받았어. 그런데 계속 도와주는 척했어. 미안해."

준호가 말했다. 은은 그 말을 들으면서 뭔가가 자신 안에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햇빛도, 음식의 맛도, 바람도, 향기도 아닌 무언가. 그것은 순수한 감정이었다. 준호의 목소리에 담긴 진실이 은의 가슴에 직접 닿은 것이었다.

은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준호를 바라봤다.

"난 넌 날 구원하려고 했다고 생각했어. 넌 내가 다시 감정을 느끼게 해주려고 했다고."

은이 천천히 말했다. 그 순간, 준호의 얼굴이 움직였다.

"근데 넌 나한테 구원받고 있었어?"

은이 물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깨달음이었다.

준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넌 스스로 구원되는 거야. 난 그냥 옆에 있을 뿐이야."

준호가 말했다. 그 말은 단순했지만, 목소리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슬픔도, 자책도, 그리고 희망도.

"난 너를 구원할 수 없어, 은. 그건 너 스스로 해야 돼. 난 그냥..."

준호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이 길어졌다. 그 침묵 속에서 준호는 자신의 손을 테이블 위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은의 손 쪽으로. 하지만 닿지는 않았다. 마치 은에게 선택을 남겨두려는 것처럼.

"그냥 여기 있고 싶어. 넌 다시 살아나고 있고, 난 너를 보면서 살아나고 있고. 그게 전부야."

은은 준호의 손을 바라봤다. 테이블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손가락들. 그리고 그 손 너머의 준호의 얼굴.

은은 자신의 손을 테이블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준호의 손과 만날 때까지. 그 순간, 준호의 눈이 은의 손을 바라봤고, 그 다음 은의 눈을 바라봤다. 손이 만났을 때, 온기가 흐르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이 흐르고 있었다. 감정이었다. 순수한 감정이.

준호의 손가락이 은의 손을 감싸 안았다. 그 압력 속에는 말이 아닌 다른 언어가 있었다. 미안함도, 감사함도, 그리고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도.

"고마워. 넌 진짜..."

은이 말했고, 그 순간 카페의 문이 노크 소리와 함께 흔들렸다.

둘 다 손을 떼었다. 준호가 일어나 카페 문으로 향했다. 밤 열한 시 반, 누가 카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준호가 문을 열었다.

"아버지?"

은의 목소리였다. 서영준. 은의 아버지가 카페의 문 앞에 서 있었다. 밤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코트를 입고,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들어와도 될까?"

아버지가 물었다. 준호가 몸을 옆으로 물리며 아버지를 들여보냈다. 서영준은 카페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고, 은을 바라봤다. 딸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준호 군이 전화를 했어. 넌 이곳에 있다고. 그래서 왔다."

아버지가 말했다. 은은 그 말을 들으며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아버지는 종이봉투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오래전에 준비해 뒀던 거야."

아버지가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은이 어렸을 때의 사진. 엄마와 함께 있는 사진. 아버지도 함께 있는 사진들. 모두 웃음이 가득했던 시절의 기록이었다.

"나도 그래. 너랑 엄마가 함께 있을 때가 그리워. 그때가 언제였는지 잊어버렸지만, 그 시간이 얼마나 따뜻했는지는 기억해."

아버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은은 그 목소리 속에서 무언가 무거운 것을 감지했다.

"넌 엄마를 잃었을 때, 난 넌 상처를 주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말을 안 했어. 그런데 그게 또 다른 상처가 됐나 봐."

아버지가 사진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네가 감정을 못 느낀다고 했을 때, 난 내 탓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너한테 감정을 주지 못했다고."

아버지가 은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런데 너를 보니까... 너는 충분히 느끼고 있었어. 그냥 다른 방식으로."

은은 아버지의 눈을 마주쳤다. 깊은 죄책감과 뒤늦은 깨달음이 담긴 그 눈. 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날 버린 게 아니었구나."

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의문이 풀리는 순간의 깨달음이었다.

"난 아버지가 엄마를 잃은 후로 날 버렸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난 감정을 못 느끼는 척했어. 아버지 곁에 있어도 안 될 것 같아서. 하지만..."

은은 테이블 위의 사진들을 바라봤다. 그 안에서 자신과 엄마, 그리고 아버지의 웃음을 찾았다.

"아버지도 힘들었구나."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는 준호를 바라봤다.

"고마워. 내 딸을 봐줘서."

아버지가 말했다. 그 말과 함께 아버지는 은을 한 번 더 바라봤고, 사진들을 테이블 위에 남긴 채 카페를 나갔다. 문이 닫히고, 밤바람의 소리만 남았다.

은은 테이블 위의 사진들을 바라봤다. 오래된 사진 속에서 자신과 엄마,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자신이 했던 웃음이고, 언젠가 다시 찾을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도 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편안한 침묵이 아니었다. 무거우면서도 뭔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침묵이었다.

"우리가 열흘 후에도 함께할 수 있을까?"

준호가 물었다. 그 질문은 낮고 조심스러웠다.

은은 그 질문 앞에서 멈췄다.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했다. 준호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모르겠어."

은이 마침내 말했다.

"서울 직장에서 날 다시 부를 거 같아. 그리고 아버지도...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은데."

은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불안함과 죄책감이 섞여 있었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은 확실해."

준호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단호했다.

"지금 넌 다시 살아있어. 그리고 열흘 후에 뭐가 될지는... 그때 가서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은은 준호를 바라봤다. 카페의 간접 조명 아래서 준호의 얼굴은 여전히 무너져 보였지만, 동시에 뭔가 단단해지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카페의 시계는 밤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열흘의 중간지점. 다섯 날이 지났고, 다섯 날이 남아 있었다.

은은 준호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준호의 손은 따뜻했고,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그 떨림 속에 준호의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불안함도, 희망도, 그리고 함께하고 싶다는 간절함도.

은의 내면에서는 여전히 무언가 불안했다. 열흘이 끝난 후, 서울의 직장이 자신을 다시 부를 때.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그 불안함이 은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게 했다. 준호는 그 압력을 느꼈고, 은의 손을 놓지 않았다. 말 없이, 그저 함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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