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새벽 다섯 시, 은이 눈을 떴다.

할머니 집의 침대에서 창밖을 보니 해가 아직 뜨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시계의 초침 소리만 들렸다. 은은 누운 채로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어제 준호의 손목을 잡았을 때의 맥박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었다. 자신의 맥박과 준호의 맥박이 다르게 뛰었다. 두 개의 심장이 다른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이상했다.

그리고 공포가 밀려왔다. 열흘이 끝나면 이 모든 게 사라질 거라는 생각이. 준호의 손의 온기, 그의 목소리, 그의 향기. 그 모든 것이 다시 무감각 속으로 빨려 들어갈 거라는 생각이. 은의 호흡이 얕아졌다. 열흘 후, 자신은 다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돌아갈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준호였다. 은은 눈을 감았다가 뜨지 않은 채 귀를 기울였다. 준호가 자신의 방 앞을 지나갔다. 그의 발소리는 계단 쪽으로 향했다. 카페 준비를 하러 가는 것이었다. 은은 천장을 바라봤다. 어제 준호가 말했다. '넷째 날 내가 없을 수도 있다'고. 오늘은 다섯째 날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어제 눈물을 흘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광대뼈 아래가 약간 부어 있었다. 은이 손가락으로 그 부은 자리를 눌렀다. 통증은 없었다. 다만 무언가가 자신의 얼굴에 남아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눈물의 자국. 감정의 증거.

거실로 나갔을 때 할머니가 밥을 푸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

"네."

"오늘 뭐 할 거야?"

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준호가 오늘의 계획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제 준호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던 이유를 은은 알고 싶지 않으면서도 알고 싶었다.

할머니가 밥그릇을 앞에 내려놓았다. 밥 위에 계란이 얹혀 있었다. 은이 수저를 들었다. 밥을 한 숟갈 떠먹었다. 어제의 밥과 같은 맛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밥은 어제의 밥과 달랐다. 밥알의 질감이 더 뚜렷했다. 혀 위에서 밥이 부서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은이 또 다른 숟갈을 떠먹었다.

할머니가 국을 담았다. 미역국이었다.

"어제는 눈물이 나왔네."

은이 숟가락을 멈췄다.

"울어야 할 땐 우는 거야. 그게 정상이지. 울지 않는 게 비정상이야."

은이 국을 마셨다. 국물이 입 안에 퍼졌다. 염분. 미역의 향. 그 아래 숨어 있던 다시마의 깊은 맛. 은은 이제 그것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오늘 준호가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할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기다려. 준호는 깜짝 선물 같은 걸 좋아해."

은이 밥을 계속 먹었다. 깜짝 선물이라는 말이 가슴을 떨리게 만들었다. 준호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계획했다는 뜻이었다.

아침 여덟 시, 준호가 할머니 집의 문을 두드렸다.

"준호야."

할머니가 문을 열었다. 준호는 손에 꽃 한 다발을 들고 있었다. 백합이었다. 은이 거실에서 그것을 봤다. 준호가 백합을 할머니에게 건넸다.

"할머니, 고마워요."

"뭐해. 이 자식. 우리 은이 때문에 이런 것까지 챙기네."

준호가 거실로 들어왔다. 은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뭐 하는 거야?"

"오늘 특별한 데 가고 싶어."

"어디?"

"가보면 알아."

준호의 얼굴에는 어제의 불안감이 없었다. 대신 무언가를 기대하는 표정이 있었다. 은은 준호를 자세히 봤다. 준호의 피부는 창백했다. 밤을 새웠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맑았다. 준호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옷 갈아입고 나와. 한 시간만."

은이 침실로 돌아갔다. 옷장을 열었다. 서울에서 가져온 검은색 옷들이 주르륵 매달려 있었다. 은은 그 중 가장 밝은 회색 셔츠를 골랐다. 바지는 청바지로 고르고 신발은 흰색 스니커즈를 신었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봤을 때 얼굴이 조금 달라 보였다. 덜 딱딱해 보였다.

준호의 차는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은이 창밖을 봤다. 아침 햇빛이 바다 위에 반짝였다. 파도가 해변에 밀려왔다. 은은 준호에게 묻지 않았다.

삼십 분 후, 차는 작은 시장 골목에 멈췄다. 간판에는 '해안꽃시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꽃시장?"

"응. 여기 좋아. 한 번 와 봐."

은이 차에서 내렸다. 시장 입구부터 향기가 밀려왔다. 그것은 은이 지금까지 경험한 어떤 향기와도 달랐다. 한 가지 향이 아니었다. 여러 향이 뒤섞여 있었다. 은은 코를 움직였다.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뇌가 그 향을 분석하려고 애썼다.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양쪽에 꽃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장미, 백합, 국화, 튤립, 카네이션. 은이 걸으면서 각각의 향을 맡기 시작했다. 장미의 향은 달콤했다. 촉촉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향수 같기도 했다. 은이 장미 가까이 다가갔다. 붉은 장미, 분홍 장미, 흰 장미. 각각의 색깔이 달랐다.

붉은 장미를 들었다. 코를 가까이 가져갔다. 달콤함이 진했다. 분홍 장미를 들었다. 향이 더 밝았다. 흰 장미를 들었다. 향이 거의 없었다. 은이 눈을 감았다. 붉은 장미는 밤의 어둠처럼, 분홍 장미는 오후 햇빛처럼, 흰 장미는 새벽의 침묵처럼 느껴졌다. 각각의 향이 시간을 불러내고 있었다.

준호가 은의 옆에 섰다.

"좋아?"

"응."

은이 계속 걸었다. 이번엔 백합이었다. 백합의 향은 진했다. 거의 자극적일 정도였다. 은이 백합 앞에서 멈췄다. 흰 백합의 향이 가장 진했다. 은이 그것을 들었을 때 코가 거의 마비될 정도로 강했다.

"백합은 층이 있어. 처음엔 진하게 느껴지지만, 자꾸 맡으면 그 아래 다른 향들이 보여."

준호가 말했다. 은이 다시 백합을 들었다. 코를 대고 천천히 숨을 들었다. 진함. 그 아래 은은함. 그리고 그 아래... 은이 눈을 감았다. 백합의 향이 뇌에 그려졌다. 여러 색깔이 겹쳐 있는 것처럼. 보라색과 흰색과 노란색이 한 점에서 만나는 것처럼.

은이 눈을 떴다. 준호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감정도 그래. 처음엔 하나처럼 느껴지지만, 자세히 보면 여러 개가 섞여 있어."

은은 백합의 향을 다시 맡았다. 진함 아래의 은은함. 그 은은함 속에서 무언가 다른 것들이 떠올랐다. 슬픔. 그런데 그 슬픔 아래에는 희망이 있었다. 희망 아래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두려움 아래에는 사랑이 있었다. 은은 백합을 내려놓았다. 자신의 감정이 이렇게 겹겹이 쌓여 있었단 말인가. 하나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여러 감정의 층이었단 말인가.

은이 다른 꽃들을 보기 시작했다. 국화. 국화의 향은 은은했다. 거의 풀 냄새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아래 무언가가 있었다. 흙의 냄새. 가을의 냄새. 은이 국화를 손에 들고 가만히 섰다. 국화의 향에서 슬픔을 느꼈다. 하지만 그 슬픔 아래에는 무언가 단단한 것이 있었다. 견딤. 견디어내는 것. 은은 국화를 내려놓고 다시 백합을 집어 들었다. 백합에서 느껴지는 감정과 국화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달랐다. 백합은 격렬했고, 국화는 조용했다. 그런데 둘 다 자신 안에 있었다.

"너는 어떤 향기가 제일 좋아?"

은이 준호에게 물었다.

준호가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시장을 걸어 나갔다. 은은 준호를 따라갔다. 시장의 끝에 다다랐을 때 준호가 멈췄다. 그곳에는 작은 꽃가게가 있었다. 가게 안에는 여러 꽃들이 섞여 있었다. 한 가지 향이 아니라 여러 향이 뒤섞여 있는 곳이었다.

"이 향기 좋아.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개가 섞여 있어서."

준호가 말했다. 은은 그 향기를 맡았다. 여러 향이 뒤섞여 있었다. 장미, 국화, 백합, 튤립. 하나의 향이 아니라 여러 향이 함께 있었다.

"이게 바로 우리 같은 거야."

준호가 말했다. 은이 준호를 봤다. 준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준호의 얼굴이 창백했다. 밤을 새운 피로가 눈 아래에 짙게 드리워 있었다.

"여러 감정이 섞여 있어. 친구 같기도 하고, 그 이상 같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 모든 게 섞여 있을 때가 가장 좋아."

은이 준호의 손을 잡았다. 준호의 손이 차갑고 떨리고 있었다.

"뭐 해?"

준호가 물었다. 은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준호의 목 근처에서 향을 맡았다. 세제의 냄새가 났다. 준호가 아침에 샤워했을 때 사용한 샤워젤의 향. 그 아래에는 준호의 피부 냄새가 있었다. 소금기가 약간 있는 냄새. 그리고 그 아래... 은이 눈을 감았다. 준호의 향기 아래에 있는 것. 그것은 준호 자신이었다. 준호의 두려움, 준호의 불안감, 준호의 사랑. 모든 것이 섞여 있었다.

"너한테 뭐 냄새가 나."

은이 눈을 뜨고 말했다.

"뭐?"

"너만의 냄새. 이게 뭐야?"

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어색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았고, 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건 나라고 생각하면 돼."

은이 다시 준호의 옷깃 근처에서 향을 맡았다. 세제, 피부, 그리고 그 아래 무언가. 은은 눈을 감았다. 그 향기가 계속 코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은은 무서웠다. 이 향기가 언제까지 자신 곁에 있을까 하는 것이. 열흘 후에도 이 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은의 숨이 얕아졌다. 준호를 놓칠까 봐. 준호의 손의 온기를 잃을까 봐.

"은아."

준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은이 눈을 떴다.

"시장 나갈래?"

둘은 시장을 나갔다. 골목 입구에 카페가 하나 있었다. 준호가 은을 그곳으로 안내했다. 창가에 앉았을 때 준호가 커피를 주문했다. 은이 창밖을 봤다. 해변이 보였다. 파도가 자꾸만 밀려왔다.

은은 시장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생각했다. 여러 향이 섞여 있었듯이, 준호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여러 개가 섞여 있었다. 친구라는 감정, 그 이상이라는 감정, 두려움, 그리움. 모든 것이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살아 있게 만들었다.

"너는 나한테 뭐야?"

은이 갑자기 물었다. 준호가 손을 멈췄다.

"뭐라고 했어?"

"넌 나한테 뭐야? 친구? 아니면..."

"친구지."

준호의 대답이 빨랐다. 하지만 목소리에 확신이 없었다. 은이 준호의 얼굴을 봤다. 준호의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다. 준호의 턱 근처의 근육이 움직였다.

"친구 이상인 것 같은데."

"그럼 뭐가 되고 싶은데?"

준호가 역으로 물었다. 은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준호는 자신의 친구였다. 하지만 친구는 아닌 것 같았다. 준호의 손을 잡고 싶었다. 준호의 향기를 맡고 싶었다. 준호가 옆에 있으면 감정이 살아났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은이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함께 느끼는 거. 그런 게 있는 것 같아."

은이 천천히 말했다.

"함께 느끼는 거?"

"응. 너와 있으면 내가 느껴져. 너의 손, 너의 목소리, 너의 향기. 그런 것들이 모여서...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아. 그게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몰라도."

은이 준호를 봤다. 준호의 눈이 떨렸다.

"그래서 계속 함께하고 싶어?"

"응."

"알아도 돼. 시간이 있으니까."

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있다는 그 말이 거짓처럼 들렸다. 열흘이라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다섯째 날이었다. 남은 시간은 다섯 날이었다.

카페에서 나왔을 때 은이 준호의 팔을 잡았다. 준호가 은을 봤다.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은은 준호의 팔을 놓지 않았다. 준호의 팔의 온도가 자신의 손에 전해지고 있었다. 그 온기가 자신의 손목까지 전달되고 있었다. 은은 그 온기를 계속 느끼고 싶었다. 이 온기가 영원히 자신 곁에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변으로 내려갔다. 은이 준호의 손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었다.

"의사가 뭐라고 했어?"

준호가 물었다. 은이 준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열흘 후에 다시 무감각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그래?"

"응. 환경이 바뀌면 증상이 다시 나타날 수 있대. 너무 의존하지 말라고."

은이 준호를 봤다. 준호의 얼굴이 창백했다. 준호도 은을 봤다. 준호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럼... 우린..."

"상관없어."

은이 말했다. 준호가 은을 봤다.

"뭐라고?"

"의존해도 괜찮아. 난 계속 너와 함께하고 싶어. 그게 무감각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해도."

은이 준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준호도 은을 놓지 않았다.

해변의 바위 위에 앉았을 때 해는 이미 중천을 향하고 있었다. 파도가 바위 아래로 밀려왔다. 물이 튀어올랐다.

"열흘이 끝나면 뭐가 남을까?"

은이 물었다. 준호가 은을 봤다. 준호의 눈이 떨렸다.

"모르겠어."

준호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계속 함께하면 되지 않을까?"

은이 물었다.

"그럼 좋겠지."

"하지만 그게 될까?"

은은 준호의 팔을 잡았다. 준호도 은을 놓지 않았다. 둘이 서로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잡음 자체가 불안해 보였다. 마치 서로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파도가 계속 밀려왔다. 은은 두려웠다. 이 온기가 사라질까 봐. 이 손의 온도가 자신을 떠날까 봐.

은은 해변에서 느꼈던 불안감을 떨쳐내려고 애썼다. 준호가 자신을 떠날 것 같은 그 예감. 그것이 단순한 불안감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준호의 얼굴을 다시 봤다. 준호의 피부는 여전히 창백했다. 밤을 새운 흔적이 선명했다. 준호의 눈빛도 어딘가 다르게 보였다. 뭔가를 결정한 사람의 눈빛처럼.

"내일 서울 일이 생겼어."

준호가 말했다. 은의 몸이 굳었다. 은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해변에 내려오면서부터 이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준호의 불안감, 밤을 새운 피로, 그 모든 것이 이 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

"이번 주 목요일에 카페 건축 일정이 잡혔어. 서울 본사에 가야 돼."

"그럼... 언제?"

"내일 오후 3시 차를 타야 해."

은이 준호를 봤다. 준호의 얼굴이 창백했다. 준호도 은을 봤다. 준호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럼 우린..."

"모르겠어. 정말."

준호가 은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은도 준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둘 다 불안해하고 있었다. 준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은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파도 소리만 계속 들렸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