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빛의 온기
해변 도로의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준호의 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서은은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따라가지 않았다. 눈은 열려 있었지만 초점이 맞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서울의 상사 김태식이었다.
—은, 회신 부탁. 복귀 일정 논의 필요. 다음 주부터 프로젝트 론칭이 있으니 조율 가능 여부 확인 필요.
서은은 화면을 내려놨다. 어제 밤을 지나 도착한 고향의 아침은 여전히 낯설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만든 거리감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저기가 예전 횟집 있던 자리네."
준호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서은의 시선이 그곳으로 움직였다. 낡은 건물이 사라지고 새로운 카페가 들어서 있었다. 세상은 변했다. 자신도 변했다. 하지만 변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왜 나를 도와주려고 해?"
서은이 돌연 물었다. 목소리는 평탄했다.
준호는 차선을 바꾸며 대답했다. "그냥 함께 있고 싶어."
그 말이 이상했다. 논리적이지 않았다. 서은은 직장에서 '왜'라는 질문에 항상 명확한 이유를 요구받았다. 투자 대비 수익, 효율성, 성과—모든 것이 계산되고 정당화되어야 했다. 하지만 준호의 대답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냥. 함께. 있고. 싶어.
"그게 이유가 돼?"
"왜 아니야?"
준호는 웃지 않았다. 심각했다. 서은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창밖을 봤다. 가슴이 철렁했다. 오랫동안 이름 붙지 않은 감정들이 쌓여 있었다.
차는 해변으로 향했다. 도로가 점점 내려갔다. 건물들이 낮아졌다. 사람들이 많아졌다. 초가을 오전의 해변은 한적했다. 몇몇 산책객들과 낚시꾼들이 흩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준호가 차를 세웠다. 백사장이 보였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빠져나갔다. 그 반복. 10년 전 서은도 이 파도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무엇을 느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내려가보자."
준호가 문을 열었다. 서은도 따라 내렸다. 발이 모래에 닿았다. 모래는 따뜻했다. 햇빛이 닿은 곳은 뜨거웠고, 그림자에 있는 곳은 시원했다. 그 차이를 처음으로 의식했다.
준호는 먼저 백사장으로 걸어 내려갔다. 서은이 뒤따랐다. 파도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코에 들어오는 소금기 있는 공기. 그것도 처음이었다. 아니, 처음이 아니라 처음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신경이 깨어나는 감각. 오랫동안 마취 상태에 있다가 깨어나는 것 같았다.
"여기서 잠깐 멈춰 봐."
준호가 멈췄다. 서은도 멈췄다. 두 사람 사이에 1미터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준호는 서은의 얼굴을 보지 않고 바다를 봤다.
"눈 감아 봐."
"뭐?"
"눈을 감으라고."
서은은 주저했다. 하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어둠이 찾아왔다. 그 순간, 햇빛이 얼굴에 닿았다. 눈꺼풀을 통해 붉은 빛이 스며들었다. 뺨에, 이마에, 목에. 햇빛이 닿는 곳마다 따뜻함이 퍼졌다.
10년. 10년 동안 서은의 피부는 사무실의 형광등 아래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불어오는 책상 앞에서. 화면을 들여다보는 시간들. 감정을 억누르는 것처럼 몸도 억눌렀다. 어깨가 올라가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따뜻함이 어깨의 경직을 풀었다. 햇빛이 닿는 곳마다 근육이 이완되었다. 가슴의 답답함이 천천히 뚫려나갔다. 얼어붙은 것이 녹아내리는 느낌. 서은의 호흡이 깊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던 걸까. 아니, 숨을 쉬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했던 걸까.
눈을 뜨고 싶은 욕망과 계속 감으려는 욕망이 충돌했다. 서은은 눈을 감은 채로 있었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피부에 소금기 있는 공기가 닿았다. 모든 감각이 동시에 깨어났다.
"여기가 좋아?"
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그리고 가깝게. 서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눈을 떴다. 햇빛이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서은은 눈을 깜빡였다. 초점이 맞아갔다. 파란 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해변의 백사장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준호의 얼굴이 역광으로 어둡게 보였다.
"괜찮아?"
준호가 물었다. 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할 수 없었다. 목이 조여왔다.
두 사람은 백사장을 걸었다. 준호는 말을 거는 대신 침묵으로 함께했다. 서은은 그 침묵이 좋았다. 누군가가 말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도 처음이었다. 직장에서는 항상 설명해야 했다. 자신의 상태를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무것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모래가 발목에 들어왔다. 서은은 신발을 벗었다. 맨발로 모래 위를 걸었다. 따뜻한 모래와 시원한 물이 번갈아가며 발을 감쌌다. 그 차이가 명확했다. 신체는 반응했다. 감각은 깨어났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언제까지일까. 열흘이 끝나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준호의 손길도, 이 따뜻함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느끼는 이 감각들도 환상일 뿐 아닐까. 서은은 그 생각을 밀어냈다.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함께 있었다.
"내일은?"
서은이 물었다. 준호가 고개를 돌렸다.
"내일은 뭘 느껴?"
"내일은... 음식의 맛을 느껴 봐."
준호는 웃었다. 첫번째 웃음이었다. 그 웃음이 서은의 눈에 들어왔다. 10년 전의 웃음과 같은 웃음이었을까. 서은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웃음이 낯설지는 않았다.
해변에서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1시간. 아니면 2시간.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도시에서는 항상 시간에 쫓겼다. 회의 시간, 마감 시간, 퇴근 시간. 하지만 여기서는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 혹은 흐르지 않았다. 단지 있었다.
준호의 카페 '온음'으로 돌아갔다. 카페는 조용했다. 오후 2시. 손님이 없는 시간이었다. 준호가 서은을 주방으로 데려갔다. 서은은 처음 주방 문을 열었다.
냄새가 스쳤다. 밥을 짓는 냄새. 국물의 냄새. 무언가 익어가는 냄새. 그 냄새들이 섞여 있었다.
"오늘은 밥을 지을 거야. 할머니 레시피 쌀밥이야. 내일 아침에 먹는 밥이 가장 맛있다고 할머니가 말씀하셨어."
준호가 앞치마를 매며 말했다.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쌀을 씻었다. 물을 붓고 냄비를 불 위에 올렸다. 모든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요리를 하는 손. 서은은 그 손을 봤다. 10년 전 그 손은 어땠을까. 그 손이 지금도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왜 봐?"
준호가 물었다. 서은은 눈을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거짓말하는 얼굴이 아니네. 진짜 아무것도 아닌 거구나."
준호는 웃으며 밥을 지었다. 서은은 주방 한구석에 앉았다. 냄비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밥이 익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낭비가 아닌 것 같았다.
"내일 아침에 먹을 때 진짜 느껴 봐. 할머니가 지으신 국물도 있고, 반찬도 있고... 밥 한 숟가락이 어떤 마음으로 만들어졌는지 느껴 봐."
준호가 말했다. 냄비의 뚜껑을 살짝 열었다. 내부의 온기가 흘러나왔다. 서은의 얼굴에 닿았다. 따뜻했다.
"내일 아침?"
"응. 내일 아침이 좋아. 밤을 새우고 먹는 밥도 있지만, 우리는 내일 아침에 밥을 먹자. 열흘 동안 매일 아침을."
준호의 목소리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단순한 제안이 아니었다. 마치 약속 같았다. 또는 초대. 서은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거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밤이 찾아왔다. 준호는 서은을 할머니 집으로 데려갔다. 할머니는 따뜻한 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국물의 냄새가 집 전체에 퍼져 있었다. 서은은 그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내일 아침. 내일 아침에 밥을 먹는다. 그것이 기대가 되었다.
밤 9시쯤, 준호가 서은을 방으로 데려다주었다. 방에는 준호의 어린 시절 물건들이 남아 있었다. 책장, 낡은 기타, 사진들. 서은은 사진을 들었다. 10년 전의 자신과 준호가 웃고 있었다. 아, 그때는 웃을 수 있었구나. 그때는 뭔가를 느낄 수 있었구나.
"내일이 되면 뭔가 달라질까?"
서은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방 밖에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들어왔다. 달빛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니면 이미 서은의 감각이 그렇게 변해 있었을 수도 있었다.
밤 11시. 준호의 카페 주방. 냉장고 안에 밥이 식어가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데워먹을 밥. 준호는 냉장고 문을 닫고 서은을 향해 기대감 어린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은은 아직 구분하지 못했다.
카페의 불이 꺼졌다. 거리는 조용했다. 해변 마을은 밤 11시면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서은은 혼자 준호의 빈 의자를 봤다. 의자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빈 자리가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 준호는 다시 나타날 것이다. 밥을 데우고, 국을 데우고, 반찬을 꺼내고. 그리고 서은은 그 밥의 맛을 느낄 것이다. 그 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느껴봐야 한다고 준호가 말했다.
밤바람이 카페 창을 흔들었다. 서은은 눈을 감았다. 오늘 해변에서처럼. 햇빛은 없었지만, 여전히 따뜻함이 남아 있었다. 그 따뜻함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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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반. 할머니 집 손님방의 창문을 통해 파도 소리가 들렸다. 서은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천장에는 준호가 고등학교 때 그렸다는 별자리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10년이 지났는데도 반짝반짝했다. 누군가 닦아주었을 것이다. 준호일까, 할머니일까.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서울의 상사 김태식이었다.
—은, 회신 부탁. 복귀 일정 논의 필요. 다음 주부터 프로젝트 론칭이 있으니 조율 가능 여부 확인 필요.
서은은 메시지를 읽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맴돌았다. 회신해야 했다. 상사에게 회신하지 않는 것은 직장 문화에서 가장 무례한 행위였다. 하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화면은 어두워졌다. 파도 소리만 남았다.
밤 중에 한 번 깼다. 오후 3시쯤 일어난 이후로, 시간 감각이 뒤틀려 있었다. 서은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누군가 주방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 냄비를 다루는 소리. 칼질하는 소리.
할머니일 것이다. 또는 준호.
서은은 누워만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 소리들을 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밥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지난 10년간 그런 일은 없었다. 회사 밥은 혼자 먹었다. 편의점 도시락. 또는 사무실 책상 위의 샐러드. 누군가 자신을 위해 요리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다시 잠들었다.
새벽 6시쯤 눈을 떴다. 시계를 확인했다. 시침과 분침이 정확했다. 서울의 습관이 남아 있었다. 정각에 일어나는 것. 하지만 고향에는 그런 필요가 없었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파도 소리는 여전했다. 밤새 같은 음악이 반복되고 있었다.
서은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제 준호가 건넨 옷이었다. "할머니 옷인데 너한테 줄 게 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을 때, 서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미 준비해두고 있었다.
복도를 나섰다. 주방에서 불이 켜져 있었다. 할머니가 국을 끓이고 있었다. 된장국. 냄비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된장의 향이 복도까지 퍼져 있었다. 서은은 그 향을 마셨다. 코를 통해 깊숙이.
"아, 깼네."
할머니가 뒤돌아봤다. 얼굴에 미소가 있었다. 말이 적은 할머니였지만, 그 미소는 많은 것을 말했다.
"밥이 곧 된다. 앉아 있어."
할머니는 주걱으로 냄비 밑바닥을 긁었다. 밥이 들어붙지 않도록. 그 손길이 능숙했다. 몇십 년을 그렇게 해온 손길.
서은은 밥상 앞에 앉았다. 할머니는 반찬을 꺼내기 시작했다. 계란말이, 된장에 절인 오이, 미역, 생선 구이. 작은 밥상이었다. 하지만 밥상 위의 색깔들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색, 초록색, 검은색, 주황색. 서울의 편의점 도시락에는 없던 색깔들이었다.
"준호 녀석은 어디 갔어?"
할머니가 물었다.
"카페 문을 열러."
"이 시간에?"
"새벽부터 문을 열어. 아침 손님들이 와."
할머니는 밥을 담았다. 커다란 숟가락으로 한 번, 또 한 번. 밥그릇에는 보슬보슬한 흰쌀이 소복이 담겼다. 그 위에 국을 부었다. 국물이 밥 위에 흘렀다. 된장의 풍미가 밥을 스며들었다.
"먹어."
할머니가 밥그릇을 내밀었다.
서은은 숟가락을 들었다. 밥 한 숟가락을 떠올렸다. 입에 넣었다.
따뜻했다. 밥의 온기가 혀 위에서 퍼졌다. 국물의 맛이 뒤따랐다. 짠맛. 구수한 맛. 그리고 무언가 더. 서은은 천천히 씹었다. 밥알이 입 안에서 부서졌다. 미각이 깨어났다.
그 맛이 뭐였을까. 단순한 된장국의 맛이 아니었다. 밥을 짓는 손길이 있었다. 국을 끓이는 손길이 있었다. 반찬을 준비하는 손길들이 모두 섞여 있었다. 서은은 한 숟가락을 더 떠올렸다. 이번엔 할머니의 손길을 찾으려고 했다. 아니, 준호의 손길을 찾으려고 했다. 누구의 손이 이 밥을 만들었는가. 그것을 구분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숟가락을 더 먹으며 서은은 깨달았다. 이 밥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걸. 할머니의 손길도, 준호의 손길도 모두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이 밥은 누군가의 사랑일까. 아니면 단순한 의무일까.
"맛있어?"
할머니가 물었다.
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없었다. 대신 눈빛이 할머니를 봤다.
"준호가 어젯밤에 밥을 지었어. 내가 국을 끓였고. 함께 만든 밥이야."
할머니는 자신의 밥을 떠서 먹었다. 음식을 먹는 할머니의 모습이 평온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당연한 것처럼. 누군가를 위해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밥상을 차리는 것이.
서은은 밥을 다시 떠올렸다. 한 숟가락. 또 한 숟가락. 이번엔 거부감을 찾으려고 했다. 이 모든 게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준호는 왜 자신을 도우려고 할까. 의료 진단에서 신체적 문제는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건 뭔가. 누군가를 위해 밥을 지어주는 것이 정상인가.
"내일도 할 거야?"
할머니가 물었다.
"네?"
"준호가 말했어. 열흘 동안 함께 있으면서 매일 아침을 먹기로."
서은은 할머니를 봤다. 할머니의 눈에는 뭔가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더 깊은 것. 마치 할머니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
"할머니는 왜..."
"왜 뭐야?"
"준호가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지 알아?"
할머니는 국을 한 숟가락 떠서 마셨다. 그리고 대답했다.
"모르지. 근데 우리가 알 필요는 없어. 그냥 고마우면 되는 거야."
"그게... 다인가?"
"충분하지 않아?"
할머니는 밥그릇을 들고 일어섰다. 서은이 밥을 다 먹지 못했는데도. 하지만 강요하지 않았다. 단지 밥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은은 남겨진 밥상을 봤다. 밥그릇에는 여전히 밥이 남아 있었다. 국그릇도. 반찬 그릇들도. 누군가를 위해 준비된 밥상. 그 밥상이 지금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이게 정말 자신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준호의 일방적인 감정일 뿐인가. 서은은 밥 한 숟가락을 더 떠올렸다가 내려놨다.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준호였다.
—할머니한테 아침 먹었어?
"응. 지금 먹고 있어."
—맛있어?
서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뭐야? 안 맛있어?
"음... 맛있긴 한데."
—근데?
"왜 자꾸 이래?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휴대폰 너머에서 카페의 소리가 들렸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웽웽거리는 소리. 손님들의 목소리. 침묵이 길어졌다.
—10분만 있으면 갈게. 우리 해변으로 나가자.
"이 시간에? 그리고 내 질문에 대답해."
—아침에 해변에서 해 뜨는 거 봐야지. 첫날 해는 못 봤잖아. 어제는 저녁이었고. 그리고... 그건 해변에서 얘기하자.
서은은 창밖을 봤다.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지평선이 살짝 밝아지고 있었다. 새벽이 밀려오고 있었다.
"알겠어."
—10분만.
전화가 끊겼다.
서은은 남은 밥을 보고만 있었다. 더 먹을 수도 없었고, 버릴 수도 없었다. 할머니가 들어와서 밥그릇을 거두지 않을 때까지. 그리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 입던 옷을 벗고, 할머니가 건넨 옷을 입었다. 면 소재의 얇은 옷. 고향 냄새가 났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봤다. 10년 전의 자신과 비교했다. 얼굴의 선이 더 날카로웠다. 눈에 생기가 덜했다. 하지만 지금 그 눈이 뭔가를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거부하고 있었다.
준호의 차가 집 앞에 멈췄다. 서은은 현관을 나섰다. 밖은 아직 차가웠다. 밤의 차가움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차가움도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피부에 닿는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차 안에 탔다. 준호는 웃고 있었다.
"늦지 않았지?"
"응."
서은은 창밖을 봤다. 거리가 천천히 밝아지고 있었다. 가로등의 불이 희미해졌다. 새벽이 도시의 불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오늘은 뭘 느낄까?"
준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뭘 느낀다고? 그리고 너는 왜 자꾸 이 말을 해?"
"감각이야. 넌 요즘 뭘 못 느껴?"
"그게 뭔데? 내가 뭘 못 느낀다고?"
서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준호는 차를 몰며 대답했다.
"너 자신을. 너의 몸을. 너의 마음을."
"그건 의료 문제가 아니야. 의사도 그랬고."
"의료 문제가 아니니까 의사가 못 본 거야."
서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의 밝아지는 하늘을 봤다.
"햇빛. 오늘은 햇빛의 온기를 좀 더 느껴 봐. 그 다음에 향기. 그 다음에 소리. 그 다음에..."
"그 다음에 뭔데?"
"그건 나중에."
준호는 웃으며 차를 몰았다. 해변을 향해.
해변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지평선은 분명히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준호는 서은을 이끌고 백사장으로 내려갔다. 모래가 발 아래에서 부스스거렸다. 파도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여기서 기다려."
준호가 말했다. 서은은 해변에 섰다. 혼자가 아니었다. 준호가 옆에 있었다. 하지만 준호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함께 있었다.
지평선이 점점 밝아졌다. 빨강이 주황으로 변했다. 주황이 노랑으로 변했다. 그리고 순간, 해가 떠올랐다.
햇빛이 서은의 얼굴에 닿았다. 따뜻했다. 어제보다 더 강했다. 어제는 오후의 햇빛이었다면, 지금은 새벽의 햇빛이었다. 다른 온도. 다른 색깔. 다른 의미.
서은은 눈을 감았다. 햇빛이 눈꺼풀을 통과했다. 빨간 세상이 보였다. 그 빨간 세상 속에서 온기가 흘렀다. 피부를 타고. 뼈를 타고. 마음속 깊은 곳까지.
"따뜻하지?"
준호가 물었다. 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뜨지 않았다.
"이게 햇빛이야. 이게 감각이야. 이게 살아 있다는 증거야."
준호의 목소리가 파도 소리와 섞였다.
"계속 느껴 봐. 이 온기가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그리고 뭔데?"
"그리고 이 온기가 사라질 때까지. 그 시간을 놓치지 말아."
서은은 눈을 떴다. 준호를 봤다. 준호의 얼굴도 햇빛에 비쳤다. 그의 눈이 밝았다. 마치 햇빛을 담고 있는 것처럼.
"왜 자꾸 이렇게 말해?"
"왜냐면 시간은 자꾸 사라지니까. 우리가 느끼는 모든 순간이 자꾸 지나가니까."
준호는 서은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서은은 손을 빼냈다. 준호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왜?"
"모르겠어. 이게 뭔지 모르겠어."
"뭐가?"
"이 모든 게. 너가 나한테 하는 이 모든 게. 왜 하는 건지 모르겠어."
서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햇빛 속에서 눈물이 맺혔다. 아니, 눈물일 수도 있었고, 단순한 햇빛의 반사일 수도 있었다.
"너는 왜 자꾸 나한테 감각을 강요해? 내가 원하지 않는 감각을. 내가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을."
"넌 느껴야 해."
"왜? 왜 내가 느껴야 해?"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은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어제의 밝은 눈빛이 아니었다. 더 어두운 것. 더 절실한 것.
"왜냐면 넌 죽어 있었으니까."
준호가 말했다.
"10년 동안 넌 죽어 있었어. 숨을 쉬고 있었지만 살아 있지 않았어. 밥을 먹고 있었지만 맛을 느끼지 못했어. 그리고 나는..."
준호는 말을 멈췄다.
"나는 너를 다시 살리고 싶었어."
서은은 준호를 봤다. 그의 얼굴이 햇빛에 젖어 있었다. 눈물인지 햇빛의 반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게... 사랑이야?"
서은이 물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서은이 받았다. 손가락이 손가락을 감쌌다. 온기가 전달되었다. 햇빛의 온기와는 다른 온기. 그것이 사람의 온기였다.
해변에서 한 시간을 더 있었다. 햇빛이 점점 높아졌다. 모래의 온도가 올라갔다. 발 아래가 따뜻해졌다. 서은은 신발을 벗었다.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것도 감각이었다.
"좋아?"
"응."
"진짜?"
"응."
준호는 웃었다. 그 웃음도 햇빛처럼 따뜻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뭔가 불안정한 것이 있었다. 서은은 그것을 느꼈다.
카페로 돌아오니 오전 10시였다.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침 손님들. 할머니도 카페에 와 있었다. 주방을 도와주고 있었다.
"손님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며칠간 너무 없었거든."
할머니가 준호에게 말했다.
준호는 앞치마를 매고 커피 머신으로 향했다. 서은은 카페의 한구석에 앉았다. 창밖으로 거리가 보였다. 고향 거리. 낡은 건물들. 해변으로 향하는 골목. 이 모든 것이 여전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다시 김태식이었다. 이번에는 전화였다.
서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준호를 봤다. 준호는 손님들에게 커피를 건네고 있었다. 어떤 손님에게는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날씨 좋네요." "네, 정말 좋네요." 그런 식의 대화들. 서울에서는 하지 않던 대화들.
준호가 서은을 봤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5분"이라고 표시했다.
5분 안에 뭔가를 할 계획인 것 같았다. 서은은 기다렸다. 휴대폰은 울음을 멈췄다. 김태식은 포기한 것 같았다. 또는 잠시 기다리기로 한 것 같았다.
어쨌든 고향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달랐다. 여기서는 5분이 무한처럼 느껴졌다.
준호가 앞치마를 벗고 다가왔다. 손에는 두 개의 컵이 있었다.
"뭐야?"
"아메리카노. 너 마실 거지?"
서은은 컵을 받았다. 온기가 손에 전달되었다. 또 다른 온기. 또 다른 감각.
"처음 마셔 보는 거 같은데?"
"응. 그게 맞아. 넌 커피를 마시긴 했지만 느낀 적이 없었어."
준호는 옆에 앉았다. 자신의 커피를 마셨다. 입술이 컵 가장자리에 닿았다. 그 모습도 서은의 눈에 들어왔다.
"이제부터는 느껴 봐. 커피의 쓴맛. 온기. 향. 모든 것을."
"왜 자꾸 이래?"
"왜냐면 넌 모든 걸 놓치고 살았으니까. 이제부터는 놓치지 말아."
서은은 커피를 마셨다. 쓴맛이 혀를 적셨다. 온기가 몸을 데웠다. 향이 코로 올라왔다.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났다.
"이게 커피야?"
"응. 그리고 이게 살아 있다는 거야."
준호는 웃으며 자신의 커피를 마셨다.
오후 3시. 서은은 할머니 집에서 혼자 있었다. 준호는 카페에 있었고, 할머니는 장을 보러 나갔다. 서은은 침대에 누워 천장의 별자리 스티커를 봤다.
휴대폰 화면에는 김태식의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3개.
—은, 회신 부탁. —복귀 일정 중요함. —월요일까지 답변 필요. 월요일이 데드라인.
서은은 메시지를 읽었다. 월요일은 사흘 뒤였다. 열흘 중 사흘. 거의 절반.
손가락이 움직였다. 회신을 입력하려고 했다. 하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다. "회복 중"이라고? "아직 결정 못 했다"고? 아니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국 서은은 메시지를 닫았다.
대신 창밖을 봤다. 고향의 하늘. 서울의 하늘과는 다른 하늘. 더 높은 것 같았다. 더 넓은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일은 무엇을 느낄까. 음식의 맛은 이미 느껴봤다. 햇빛의 온기도. 그렇다면 내일은?
준호가 "그 다음"이라고 말했던 것. 그게 뭐였을까.
저녁 6시. 준호가 다시 나타났다. 서은을 이끌고 카페의 뒷길로 갔다. 소나무 숲으로 향하는 길. 산책로.
"오늘은 여기야."
"뭐 하는 건데?"
"향기를 느껴 봐. 소나무의 향기. 그리고..."
준호가 서은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서은은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온기."
서은은 준호의 손을 봤다. 그리고 준호의 얼굴을 봤다.
"열흘이 끝나면 이 온기가 없어질까?"
서은이 물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은의 손을 더 꼭 잡았다. 마치 그 손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괜찮을까?"
서은이 다시 물었다.
"뭐가?"
"우리가. 열흘이 끝나면."
준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은을 봤다. 그 눈빛에는 뭔가가 있었다. 단순한 친구의 눈빛이 아니었다. 더 깊은 것. 더 복잡한 것.
"모르겠어. 근데 지금은 함께 있잖아."
준호가 말했다.
"지금이 전부야."
서은은 준호의 손을 다시 봤다. 소나무 숲의 녹색 빛 속에서 그 손이 얼마나 따뜻한지 느껴졌다. 그리고 그 온기가 정말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이 순간이 영원할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열흘이 지나면 자신은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 손길도, 이 따뜻함도 사라질 것이다.
소나무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코로 깊게 들이마셨다.
"향기가 있어?"
준호가 물었다.
"응. 있어."
"그게 뭐야?"
"살아 있다는 증거."
서은이 대답했다. 준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정확해."
그들은 소나무 숲을 걸었다. 손을 놓지 않고. 향기를 마시며. 파도 소리를 들으며. 서은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것을 밀어내고 싶었다.
밤 8시. 카페로 돌아왔다. 할머니가 준비한 저녁 밥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란말이, 된장에 절인 오이, 미역국, 생선 구이. 어제와 비슷했지만 다른 밥상. 같은 손으로 준비했지만 다른 마음으로.
서은은 밥을 떠올렸다. 한 숟가락. 또 한 숟가락.
"맛있어?"
할머니가 물었다.
"응."
"내일도 할 거야?"
서은은 할머니를 봤다. 할머니의 눈에는 여전히 그 깊은 것이 있었다.
"응. 내일도."
"그 다음날도?"
"응. 내일도, 그 다음날도."
서은은 대답했다. 자신도 모르게.
밤 11시. 준호의 카페 주방. 냉장고 안에 내일을 위한 밥이 식어가고 있었다. 준호는 냉장고 문을 닫고 창밖을 봤다. 거리는 조용했다. 해변 마을의 밤은 깊었다.
그리고 준호는 서은을 향해 물었다.
"내일은 뭘 느낄까?"
"뭘 느낀다고?"
"감각이야. 더 깊은 감각."
준호의 눈빛이 어두운 카페 안에서 흔들렸다. 마치 햇빛을 담고 있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서은은 그 눈빛을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지만 아직 말할 수 없었다.
대신 서은은 카페의 불을 껐다. 거리는 조용했다. 해변 마을의 밤은 깊었다.
내일 아침. 다시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열흘이 끝날 때까지.
하지만 서은의 휴대폰은 계속 울렸다. 김태식의 메시지. 월요일까지의 데드라인. 서울의 시간이 고향의 시간을 침범하고 있었다.
준호는 서은의 휴대폰을 봤다. 그리고 손을 뻗어 서은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정확히 그 순간, 서은의 휴대폰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