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흘의 온도
서은은 회의실의 불빛 아래에서 발표했다. 음성은 평탄했고, 손은 움직이지 않았고, 눈은 자료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3분기 매출 목표는 전분기 대비 15% 증가입니다. 마케팅 부서의 효율성 개선과 비용 절감을 통해 달성 가능합니다."
김태식 상사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이 떠 있었다.
"좋아. 서은, 너는 정말 프로페셔널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야."
그 말 이후 회의실의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몇몇 팀원들의 시선이 서은에게로 향했다. 부러움 섞인 눈빛들. 서은은 자신의 목을 가다듬고 자리로 돌아갔다.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강함이라고,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퇴근은 오후 8시였다.
서울의 밤하늘은 검은색이 아니었다. 건물의 불빛과 간판의 네온으로 물든 회색이었다. 서은은 지하철 역사를 걸으며 아무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플랫폼의 사람들은 모두 휴대폰을 들고 있었고, 열차 안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누군가를 보지 않았다. 그것이 이 도시의 규칙이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였다.
서은은 현관의 신발장 옆에 섰다. 집 안의 공기는 고였다. 어제도 이 공기를 마셨고, 그저께도, 그 이전도. 그녀는 부엌으로 걸어갔다. 냉장고의 남은 밥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3분. 비프음이 울렸을 때 그릇을 꺼냈다.
한 숟가락. 밥은 따뜻했다. 그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온도 감각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맛은 없었다. 혀가 거기 있었지만 그것이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간장, 김, 계란말이—모두 같은 질감이었다. 회색으로 입 안에 들어갔다가 회색으로 넘어갔다.
서은은 밥을 포기했다.
거실의 소파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텔레비전을 켰다. 드라마가 나왔다. 여배우가 울고 있었다. 남배우가 그녀를 안고 있었다. 서은은 채널을 돌렸다. 음악 프로그램이 나왔다. 가수가 노래했다. 음악은 있었다. 멜로디가 존재했다. 음악이 공기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가슴에 닿지 않았다.
밤 11시. 거울 앞에 섰다.
서은은 자신의 얼굴을 봤다. 눈, 코, 입이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낯설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거울 반대편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서은은 손을 들었다. 거울 속 손도 들었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뺨을 만져봤다.
피부가 있었다. 손가락이 차갑게 느껴졌다. 뺨은 따뜻했다. 그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온도 정보는 전달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감각은 그곳에서 끝났다. 뺨이 손을 거부하지도, 환영하지도 않았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마치 돌을 만지고 있는 것처럼.
거울 속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아니다. 자신의 눈동자가 움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낯설었다. 그 눈이 자신의 눈이 맞나? 서은은 손을 거울에 대고 있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아니다. 떨리지 않았다. 떨려야 하는 건가? 뭔가 떨려야 하는 상황인가? 그녀는 손을 내렸다. 거울 속의 여자도 손을 내렸다.
그 여자는 누구인가.
밤 중에 임혜영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은, 진심이야. 병원 가야 해. 너 진짜 이상한데?"
서은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임혜영은 직장에 나타나지 않고 서은의 사무실로 왔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진짜 가자. 지금."
서은은 거부했다. "괜찮아. 그냥 피곤할 뿐이야."
"피곤? 은, 너 어제 회의에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 '마케팅 효율성'? 그걸 말하면서도 눈물이 안 나왔어? 다른 팀원들은 다 눈치 챘어. 넌 뭔가 이상해."
임혜영의 목소리는 높았다. 사무실의 다른 직원들이 고개를 들었다. 서은은 임혜영을 복도로 이끌어냈다.
"자, 가자면 가지만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뭐가 이상하지 않은데? 밥을 먹어? 잠을 자? 내 말에 답을 해?"
서은은 입을 다물었다.
병원의 진료실은 흰색이었다. 의사 이름이 적힌 명패를 서은은 읽으려다 멈췄다. 임혜영이 의자에 앉으면서 웃음을 지었다.
"이 친구가 내 후배야. 신뢰할 수 있어."
의사는 서은을 봤다. 나이는 서은과 비슷해 보였다.
"무엇이 불편하신가요?"
서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임혜영이 대신했다. "감정이 없대. 밥 맛이 없고, 음악이 안 들리고, 사람을 만나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대."
의사는 서은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그 시선은 차갑지도, 연민으로 가득하지도 않았다. 그저 관찰하는 눈빛이었다.
"감정 표현 불능증입니다. 심리적 번아웃에서 비롯된 것 같네요. 직업 스트레스가 심하셨나요?"
"네."
의사는 펜을 내려놨다.
"감정은 감각으로 시작됩니다. 당신은 지금 감각이 차단된 상태인 것 같아요. 햇빛이 따뜻하다고 느끼거나, 음식이 맛있다고 느끼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좋다고 느끼거나 하는 감각들이요. 그것이 없으면 감정도 없습니다."
서은의 손이 떨렸다. 그것을 느꼈다. 손가락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 변화입니다. 이 도시를 떠나세요. 최소한 2주."
의사의 말이 떨어지고 침묵이 흘렀다. 서은은 의사의 눈을 마주쳤다. 그 눈에는 동정이 없었다. 그저 사실만 있었다.
임혜영이 서은의 팔을 잡았다.
"알겠지? 가야 해. 제발."
서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퇴근 후, 서은은 집으로 가지 않았다. 지하철을 탔다. 어디로 가는지는 정하지 않았다. 단지 남쪽으로 가고 싶었다.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였다. 서은은 표를 샀다. 온음정행. 고향이었다.
열차는 밤을 달렸다. 창밖은 검은색이었다. 가끔 도시의 불빛이 지나갔다. 서은은 창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엔진음도, 휠소리도, 다른 승객의 숨소리도. 그저 침묵이었다.
새벽 5시. 온음정역에 도착했다.
역사는 작았다. 사람도 거의 없었다. 서은은 역 밖으로 나갔다. 공기가 달랐다. 짠내가 있었다. 그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바다의 냄새였다.
해변은 가까웠다. 서은은 모래 위를 걸었다. 해가 뜨고 있었다. 동쪽 하늘이 붉어지고 있었다. 황금색의 빛이 파도를 타고 밀려왔다.
햇빛이 뺨을 스쳤다.
온도. 그것은 온도였다. 서은이 확실히 느꼈다. 햇빛이 피부에 닿았을 때의 온기. 그것이 처음으로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너는 아직 살아 있다. 너의 피부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너는 느낄 수 있다.
서은은 그 자리에 섰다. 눈을 감았다. 햇빛이 눈꺼풀을 통해 들어왔다. 붉은색이 보였다. 처음으로, 뭔가가 색깔을 가지고 들어왔다.
"은?"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서은은 눈을 떴다.
해변의 카페 테라스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커피 잔이 들려 있었다. 얼굴을 들었을 때, 서은은 그것이 누구인지 알았다. 박준호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친구였다. 10년 이상 만나지 않은.
"은이 맞지? 정말 오래간만이야."
준호의 얼굴은 여전히 따뜻했다. 하지만 그 따뜻함 뒤에는 뭔가 다른 것이 숨어 있었다. 서은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상처.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은 알았다.
"오래간만이야."
서은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탄했다.
준호는 그것을 들었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한 것처럼.
"고향에 왔어? 일이 있어서?"
"그런 편이지."
준호가 한 발 가까워졌다.
"너, 괜찮아? 뭔가 다른데?"
서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준호는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은 행복한 웃음이 아니었다. 뭔가를 인정하는 웃음이었다. 마치 자신이 예상하던 일이 일어났다는 듯한 표정.
준호의 손이 서은의 팔을 잡았다. 손가락이 팔을 감쌌다. 그 온기가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처럼. 처음으로. 오랜만에. 뭔가가 흐르고 있었다. 따뜻함이.
"열흘만 함께 있어. 나랑."
"뭐?"
"열흘.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 시간이 그정도야. 열흘 동안 나랑 함께 있어 봐. 그럼 뭔가 달라질 거야."
서은은 준호를 봤다. 그의 눈은 진지했다. 이것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움이 될까?"
"모르지. 하지만 시도할 가치는 있어."
준호의 손이 서은의 팔을 더 단단히 잡았다. 그것이 답변이었다.
서은은 한 발 물러섰다. 준호의 손이 팔에서 떨어졌다. 그 순간, 온기가 사라졌다.
"열흘이라니. 그게 뭐 하는 건데?"
"뭐냐고? 너를 깨우는 거지."
"깨운다고 해서 나아질까? 의사도 환경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지, 이게 치료법은 아니잖아."
준호는 서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치료법은 아니야. 하지만 넌 이미 여기 왔어. 고향에. 그리고 넌 내 손을 잡고 있었어. 아까. 그건 뭔가가 변하고 있다는 신호야."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모르지. 하지만 열흘 동안 함께 있으면서 알아보자.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넌 뭘 느낄 수 있는지."
서은은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간절함이 있었다. 마치 자신의 제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는 듯이.
"조건이 있어."
"뭐?"
"매일 밤 혼자 있게 해줘. 그리고 언제든 나가고 싶으면 나갈 수 있어야 해."
준호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그의 머리를 흔들었다.
"알겠어. 그 조건 들어줄게."
"정말?"
"응. 대신 하루하루를 제대로 함께 있어 줄 거지?"
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 날은?"
준호가 웃음을 지었다.
"첫째 날은 햇빛이야. 해변을 걸어보자."
그들은 해변으로 걸어갔다. 햇빛은 더욱 밝아지고 있었다. 파도는 리듬을 가지고 밀려왔다. 서은은 준호의 손을 느끼면서 걸었다. 온기. 그것이 유일한 신호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준호의 손이 서은의 팔을 잡은 채로 해변을 향해 내려갔다. 모래가 신발 속으로 밀려들었다. 서은은 그것을 느꼈다. 모래의 거친 질감. 발바닥에 닿는 입자들. 이전에는 이런 것들이 그저 물리적 자극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준호의 손이 자신의 팔을 감싸고 있는 이 순간, 그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저기 봐. 해가 완전히 떴어."
준호가 동쪽 하늘을 가리켰다. 해는 수평선 위로 완전히 올라와 있었다. 주황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해가는 하늘. 파도 위로 쏟아지는 빛의 길. 그것들이 모두 색을 가지고 서은의 눈에 들어왔다.
서은은 멈춰 섰다.
"뭐야?"
준호가 돌아봤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서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십년 간 본 모든 해는 회색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외치는 그 장면들도 자신에게는 그저 이미지일 뿐이었다는 것을.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준호의 손이 자신의 팔을 잡은 이 순간, 해가 색을 되찾았다.
"계속 걸어."
준호가 손을 놓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서은도 따라갔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모래 위로 길게 늘어났다. 준호의 그림자는 크고 둥근 모양이었다. 자신의 그림자는 가늘고 뾰족했다. 그림자끼리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했다.
"저 언덕 위에 내 카페가 있어. 온음이라고. 할머니 이름 따서 지었거든."
준호가 가리킨 방향에는 솔숲으로 둘러싸인 언덕이 있었다. 그 위로 작은 건물이 보였다. 흰색의 깔끔한 외관. 테라스에는 목재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다. 거기서였다. 서은이 준호를 만난 곳.
"난 여기 와서 5년째야. 서울에서 일하다가 내려왔어. 할머니 일을 봐야 했고, 그냥 여기서 살게 됐어."
준호의 목소리에는 담담한 것이 있었다. 후회도, 아쉬움도 아닌 것. 그저 사실을 인정하는 톤.
"잘 되고 있어?"
"그런 편이야. 여름에는 관광객들이 오고, 겨울에는 조용해. 그런 리듬으로 사는 거지."
서은은 준호의 옆얼굴을 봤다. 10년이 지났는데 그의 얼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만 눈가에 작은 주름이 생겼고, 입가에는 뭔가 무거운 것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서은도 모를 수 없었지만,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서은, 너는?"
"뭐가?"
"서울에서. 뭐하고 있어?"
서은은 한발 앞으로 나갔다. 파도가 모래에 닿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마케팅 회사. 대리 정도."
"일 잘하지?"
"그런 편이야."
"그런데 왜 왔어? 휴가?"
서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준호는 그것을 이해한 듯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이 서은의 팔을 더 단단히 잡았다. 그것이 답변이었다. 내가 안다. 너 힘들어. 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해변의 끝까지 걸어갔다. 바위가 나타났다.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들이 해안을 따라 쌓여 있었다. 파도가 그 위로 치솟았다. 물이 튀었다. 서은의 얼굴에 소금기 있는 물이 닿았다.
미각. 혀가 반응했다. 짠맛. 그것은 명확했다. 소금. 바다. 생명.
서은은 눈을 깜빡였다.
"감각이 돌아오고 있어."
준호가 중얼거렸다.
준호가 바위 위에 올라갔다. 손을 내밀었다. 서은도 그 손을 잡고 올라갔다. 바위 위에서 본 바다는 달랐다. 넓고, 깊고, 끝이 없었다. 파도의 리듬이 더 선명하게 들렸다.
"첫째 날은 햇빛과 감각이야. 햇빛이 너에게 말해주는 거야. 넌 아직 살아 있다고. 넌 여전히 뭔가를 느낄 수 있다고."
준호가 서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온기가 어깨를 통해 등으로, 가슴으로 전해졌다.
"열흘 동안 넌 천천히 깨어날 거야. 하루씩. 하나씩. 감각을. 그리고 나중에 감정을."
"그럼 열흘 후에는? 다시 무감각해질까?"
준호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그의 머리를 흔들었다. 하늘은 점점 더 파란색이 되고 있었다.
"모르지. 하지만 넌 알게 될 거야. 감각이 깨어나면, 감정도 따라올 거야. 그리고 그건 다시 사라지지 않아."
"확실해?"
"아니. 하지만 시도할 가치는 있어."
준호가 손을 내렸다. 서은은 그 손을 잡고 있었다. 온기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손에서 팔로, 팔에서 가슴으로. 처음으로, 오랜만에, 뭔가가 흐르고 있었다.
"둘째 날은?"
"둘째 날은 맛이야. 밥을 먹자. 내가 만들어줄게."
준호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이전의 무거운 것과는 달랐다. 희망처럼 보였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천천히 보자. 하루씩."
그들은 해변에서 내려왔다. 해는 더욱 높아지고 있었다. 햇빛은 더욱 밝아지고 있었다. 서은은 준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유일한 신호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카페로 올라가는 길. 솔숲을 지나갔다. 바람이 소나무를 흔들었다. 솔향이 공기에 퍼져 나왔다. 서은의 콧구멍이 반응했다. 향기. 그것도 색을 가지고 있었다. 초록색. 따뜻한 갈색. 그 향기는 뭔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넌 여기 있다. 이것은 너의 고향이다. 넌 돌아왔다.
카페의 테라스에 도착했을 때, 오래된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준호의 할머니였다. 정의숙. 서은도 어린 시절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어? 은이가 왔네?"
할머니의 목소리는 마치 서은이 어제 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할머니, 은이가 고향에 내려왔어. 한동안 묵을 거야."
"그래? 잘 왔네. 밥 먹어야지. 밥을 못 먹으면 안 돼. 준호, 밥 해. 내가 국을 끓일게."
할머니가 안으로 들어갔다. 준호가 서은을 카페 안으로 이끌었다. 나무 테이블.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 그 위에 햇빛이 반짝였다.
"앉아. 좀 있으면 밥이 나올 거야."
준호가 주방으로 사라졌다. 서은은 혼자 남겨졌다. 창밖의 바다를 봤다. 햇빛이 파도를 타고 밀려왔다. 그것은 여전히 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여전히 온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얼마 후, 준호가 밥그릇을 들고 나왔다. 흰 쌀밥. 그 위에 반짝이는 참기름. 할머니가 국을 들고 나왔다. 미역국. 그 향기가 서은의 콧구멍을 파고들었다.
"어? 미역국이네. 생일날 먹는 국이잖아. 은이 생일이 가까워?"
준호가 웃음을 지었다.
"그런 게 아니고, 할머니가 그냥 해주신 거예요."
"그래. 잘 먹어. 너 몸이 약해 보여."
서은은 밥을 집었다. 숟가락에 담긴 밥. 그것을 입에 넣었다.
미각이 폭발했다.
쌀의 단맛. 참기름의 고소함. 소금의 짠맛. 모든 것이 혀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눈물이 맺혔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숨이 잠깐 멎었다. 그것은 단순한 맛이 아니었다. 그것은 메시지였다. 할머니의 손으로 지어진 밥. 준호가 옆에 앉아 있다는 것.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 넌 여기 있다. 넌 살아 있다. 넌 느낄 수 있다.
서은은 눈을 감았다. 뜨거운 것이 뺨을 타고 내려왔다.
"괜찮아?"
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서은은 대답했다. 처음으로,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그날 하루, 서은은 준호와 함께 있었다. 카페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햇빛이 테라스에 쏟아졌다. 파도의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울려 퍼졌다. 준호가 손님들에게 커피를 건네줄 때의 모습. 그의 얼굴에는 무거운 것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서은이 그것을 함께 짊어지고 있다는 듯이.
저녁이 되었다.
할머니는 저녁을 준비했다. 생선구이. 된장찌개. 계란말이. 밥. 국. 모든 것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많이 먹어. 너 정말 말라 있어."
할머니가 계속해서 서은의 그릇에 반찬을 담았다. 서은은 거부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그녀는 처음으로 포만감이라는 것을 느꼈다. 배가 부르다. 그것은 온기였다. 내부에서 오는 온기.
밤이 되었다.
준호가 서은을 카페의 2층 방으로 이끌었다. 간단한 침대. 작은 책장. 창밖으로는 밤의 바다가 보였다.
"여기서 묵어. 편히 쉬어."
"고마워."
서은이 말했다.
"열흘이니까. 그 동안 뭐든 필요한 거 말해."
준호가 문을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서은이 말했다.
"준호."
준호가 돌아봤다.
"열흘 후에는? 정말 괜찮을까?"
준호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불안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마치 자신도 그것을 모른다는 듯이. 그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알게 될 거야. 감각이 깨어나면, 감정도 따라올 거야. 그리고 그건..."
준호가 말을 멈췄다.
"그건 뭐야?"
"그건 넌 스스로 느껴야 하는 거야. 더 이상 내가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건 너 자신이 만들어야 하는 거야."
준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했다. 마치 자신도 그 말이 얼마나 위험한 약속인지 알고 있다는 듯이.
준호가 문을 나갔다. 발소리가 복도로 사라졌다.
서은은 혼자 남겨졌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파도의 소리. 그것은 리듬이었다. 끝없는 리듬.
그 리듬 속에서, 서은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심장의 고동. 아니다. 심장보다 더 깊은 곳에서.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뭔가.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몰랐지만,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뜨거운 물줄기가 뺨을 타고 내려왔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슬픔인지, 기쁨인지, 아니면 그 둘을 동시에 느끼는 것인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사라질까봐 두렵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다시 멈춰버릴까봐.
그 순간,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준호가 돌아오는 것이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서은은 눈을 떴다. 문이 살짝 열렸다. 준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침대 위의 서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 흘리는 서은을. 그 순간, 서은은 손을 들었다. 준호를 향해.
준호의 발이 멈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들어오지 않았다. 문을 천천히 닫고 돌아갔다. 그의 발소리가 복도 아래로 내려가는 소리.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
서은은 손을 내렸다. 그 손이 공중에서 맴돌다가 침대 위로 떨어졌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이번엔 진짜 떨림이었다. 감사. 의존. 두려움. 모든 것이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