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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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30분, 기숙사 방.

이준호는 침대에 앉아 두꺼운 종이 바인더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김정수 정교사가 건넨 조선 의학 문헌의 전체 사본이었다. 표지에는 '의관 이준 임상기록 1589~1609'라고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첫 장을 펼쳤다. 1589년 6월, 동궁(세자) 치료 기록. 증상은 '고열과 복부 경직, 목 뒤 강직'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현대 의학 용어로는 뇌수막염이었다. 기록의 다음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맥진 시 심박동이 불규칙하며 우측 상복부에 경결. 의관 이준의 진단: 뇌수막염 합병 화농성 담낭염. 표준 치료로는 불가. 특수 침술과 약제 조합 사용.'

이준호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것은 자신이 응급실에서 한 진단 방식과 정확히 일치했다. 미세한 신체 신호들을 조합하여 교과서에 없는 복합 질환을 포착하는 방식. 손가락으로 맥을 짚어 심장 리듬의 불규칙성을 감지하고, 복부의 경결을 만져 염증 위치를 파악하는 것. 그것은 CT나 초음파가 없던 시대의 초진단이었다.

페이지를 넘겼다. 1593년 7월. 왕의 적자(嫡子) 치료. 1601년 3월. 궁녀의 난산(難産). 1604년 12월. 양반 집의 급성 중풍. 각 기록 옆에는 '의관 이준이 성공적으로 진단하고 치료함'이라는 메모가 붉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을 때, 이준호의 손이 멈췄다.

'1609년 9월 15일. 동인(東人) 파벌의 모함으로 역모 혐의 수사 개시. 의관 이준, 능지처참 집행. 사인: 극형. 임상 기록 소실 위험. 제자들에 의해 일부만 비밀리에 보존.'

그 아래에는 익숙한 글씨가 있었다. 자신의 글씨. 정확히는 자신이 과거 생에 썼던 글씨의 필적 분석 자료였다. 의관 이준이 진단서에 남긴 서명과 이준호가 병원 기록에 쓴 서명이 같은 필압(筆壓)으로 나타나 있었다.

이준호는 문헌을 내려놓고 얼굴을 묻었다.

300년 전, 자신은 의학으로 사람을 살렸다. 그리고 그 능력 때문에 죽었다. 아니, 정확히는 정치 때문에 죽었지만, 죽음의 이유는 의학이었다. 왕과 양반들이 자신의 진단을 신뢰했고, 그 신뢰가 권력 싸움에서 자신을 목표물로 만들었다. 자신의 치료법은 역사에서 지워졌고, 제자들도 그것을 전승하지 못했다.

300년이 지나고, 같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준호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기숙사 창밖으로 서울대 캠퍼스의 야경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몇몇 건물만 불이 켜져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대학병원이었다.

'내가 환생한 이유가 뭘까.'

중얼거림이 방 안에 울렸다.

처음엔 자신의 능력이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전생의 경험이 깨어나 현대 의학 지식과 겹쳐 초인적 진단을 가능하게 한다고. 그 능력으로 환자들을 살리고, 자신의 이름을 의학사에 남기고, 박용석 같은 자들을 눌러 깔 수 있다고. 그것이 정의라고, 복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3주간 일어난 모든 일이 그 생각을 부수고 있었다.

윤리위원회의 소환. 신미래 과장의 감시. 박용석의 함정. 세 번의 쓰러짐. 뇌척수액 누출. 신경세포 손상. 박재민의 경고: 한두 번 더 능력을 쓰면 회복 불가능하다.

그리고 어제 밤, 응급실에서.

여성 환자의 급성 뇌간 경색을 진단하고 또 다시 의식을 잃었다. 이번에는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최준혁이 손을 잡고 있었고, 박재민과 이화영이 옆에 있었고, 김정수가 법적 책임을 감수하고 치료를 강행했다. 그들이 없었으면 자신은 죽었을 것이다.

이준호는 문헌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번엔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1589년 6월, 동궁 치료 성공 후 의관 이준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진단은 나 혼자 할 수 있으나, 치료는 불가능하다. 침술을 담당할 의수(醫手)가 필요하고, 약제를 조합할 약사(藥師)가 필요하며, 환자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관찰할 시종(侍從)이 필요하다. 의학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문장이 이준호의 가슴을 부쳤다.

300년 전의 자신도 알고 있었다. 진단이 아무리 정확해도, 혼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런데 왜 죽음의 기록 직전 페이지들에는 그 깨달음이 사라져 있었을까?

이준호는 1605년부터 1609년의 기록을 읽어나갔다. 점점 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더 이상 제자들과 의료진의 조언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진단을 절대 진리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기록은 이랬다.

'1609년 8월 20일. 양반 집의 급성 중풍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했으나, 제자들의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특수 약제를 강행했다. 환자는 3일 후 사망했다. 의관 이준은 그 책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진단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고 깨달았다.'

그 다음 페이지가 역모 혐의 기록이었다.

이준호는 책을 덮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자신의 전생은 한 번의 실수로 깨달았다. 진단이 정확해도, 팀이 없으면 환자는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역모 혐의로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의 한 달 동안만 그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이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밖을 바라봤다. 밤 1시였다.

'난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중얼거림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다르게.

'내가 환생한 이유는 자신의 복권이 아니라 의학의 발전이다.'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 그의 표정이 완전히 변했다. 분노와 자존심이 섞여 있던 눈빛이 사라졌다. 대신 차분한 결의가 자리 잡았다. 복수심이 아닌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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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후 2시, 명예교수 최준혁의 연구실.

이준호는 문을 노크했다. 최준혁이 책상에서 얼굴을 들었다.

"들어와."

이준호는 앉았다. 최준혁은 그의 표정을 살펴봤다. 뭔가 달랐다.

"교수님, 질문이 있어요."

"뭐?"

"넌 왜 나한테 그렇게 집착하세요?"

최준혁이 한숨을 쉬었다. 의자를 뒤로 밀었다. 창밖으로 서울대 캠퍼스가 보였다.

"너 이름이 뭐지?"

"이준호."

"내 이름은 최준혁. 25년 전 나도 너처럼 초진단을 했다. 교과서에 없는 질환을 한 번에 꿰뚫는 능력이 있었어. 그 때 나는 신이라고 생각했어. 그 능력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최준혁이 돌아서서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런데 10년 전, 내가 혼자 판단하다가 환자를 죽였다."

최준혁이 말을 멈췄다. 이준호의 호흡이 가빠졌다.

"진단은 맞았어. 치료 방법도 옳았어. 그런데 팀이 없었어. 나 혼자 결정했고, 다른 의료진은 그걸 막지 못했어. 환자는 급성 심근경색이었는데, 내 판단으로 관상동맥 우회술 시기를 놓쳤어."

최준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이후로 난 혼자가 되는 게 가장 무서워. 나는 팀의학만 믿어. 왜냐면 혼자는 죽이니까."

이준호의 손가락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호흡이 얕아졌다. 시야가 수축했다.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세상이 한 점으로 축소되는 듯했다.

10년 전의 환자 사망 사건. 그것이 자신의 전생 기록에 있던 '1609년 8월 20일 환자 사망 사건'과 정확히 겹쳐졌다. 같은 실수. 같은 죄책감. 같은 깨달음. 하지만 시간은 다르고, 장소는 다르고, 이름도 다르다. 오직 의학의 교훈만 같다.

이준호는 책상의 모서리를 잡았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관절이 하얀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너는 정말 특별해.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다는 뜻이 아니라, 넌 정말 위험해. 그 능력으로 위대한 의사가 될 수도 있고, 살인자가 될 수도 있어. 둘 다 가능해."

최준혁이 이준호의 눈을 똑바로 봤다.

"그래서 나는 널 봐야 해. 넌 혼자면 안 돼."

이준호는 처음으로 그것을 이해했다. 최준혁이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자신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위험해서였다. 그리고 그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준혁은 자신을 놓지 않고 있었다.

"고마워요. 교수님."

이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틀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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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8시, 병원 지하 카페.

박재민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준호가 나타났을 때 그는 표정을 굳혔다.

"야, 언제 퇴원했어?"

"어제. 아직 두통이 남아있지만 괜찮아."

박재민이 의자를 밀었다. 이준호가 앉았다.

"미안해, 박재민."

"뭐가?"

"내가 너한테 고마워해야 하는데, 자존심이 상해서 무시했어. 넌 처음부터 팀의학이 맞다고 말했는데, 나는 듣지 않았어."

이준호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넌 왜 나랑 있어? 나 때문에 너도 문제될 수 있는데."

박재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

"임마, 우리 친구 아니야? 의사가 되기 전에 먼저 친구잖아. 그리고 넌 혼자가 아니야. 절대 혼자면 안 돼."

이준호는 박재민의 어깨를 잡았다. 손이 떨렸다. 말을 잇지 못했다. 시간이 흘렀다. 카페의 소음이 멀어졌다. 그저 박재민의 어깨 위에 얹힌 자신의 손만 남았다. 눈물이 맺혔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이 친구의 신뢰가 자신을 살렸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실히 느꼈다.

"고마워. 정말."

이준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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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30분, 신경과 연구실.

이화영은 뇌 스캔 이미지를 보고 있었다. 이준호의 뇌 스캔과 정상인의 뇌 스캔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준호가 들어왔을 때 이화영은 스크린을 가리키지 않고 바라봤다.

"당신의 뇌에서 특이한 신경 활성 패턴을 발견했어요. 초진단이 발동될 때, 당신의 뇌는 시간적으로는 0.5초이지만, 신경 활성으로는 평균인의 2시간 분량의 정보 처리를 합니다. 그래서 신경세포가 손상되는 거예요."

이화영이 이미지를 확대했다. 손상된 신경세포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이것도 관찰 가능한 현상이에요. 신경생물학적 메커니즘이 있다는 뜻이어요. 그리고 그것을 재현 가능한 형태로 만들 수 있다면, 당신 개인의 천재성이 아니라 '의학 방법론'이 될 수 있어요."

이화영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순수한 학문적 열정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려면, 당신이 '피실험자'가 되어야 해요. 뇌 스캔, 신경 검사, 초진단 발동 시의 모든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해요. 당신의 능력은 더 이상 개인의 비밀이 아니라 의학 공동체의 자산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물론 그렇게 되면 당신의 신분이 노출될 수도 있고, 향후 능력 사용에 제약이 생길 수도 있어요."

이준호는 한 점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깊은 갈등이 흘렀다. 자존심과 소명 사이의 무게. 개인의 비밀을 포기하는 것의 대가. 신비성을 내려놓는 것의 고통. 의학사에 남기고 싶었던 자신의 이름을 포기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얼굴에 드러났다가, 천천히 결의로 변했다.

"좋아요. 다만 하나 조건이 있어요."

"뭐죠?"

"이 연구가 다른 학생들도 도움이 될 수 있게, 결과를 학술지에 발표해 주세요. 내 개인적 명예가 아니라 의학 공동체가 검증할 수 있는 형태로."

이화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은 정말 특이한 학생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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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대학병원 로비.

이준호는 병원을 나가고 있었다. 손에는 노트북이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자신의 초진단 능력에 대한 첫 학술 발표 자료가 들어 있었다.

제목은 '신경생물학적 관점에서의 초고속 진단 현상: 증례 분석과 재현 가능성 연구'였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신비'로 신비화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으로 검증하려는 시도였다.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의학 공동체의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준호가 로비를 나가는 순간,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김정수 정교사였다.

"준호, 응급실에 새로운 환자가 들어왔어. 진단 불가 케이스야. 의식 변화와 심한 복부 통증, 신체 어느 부위도 정상 반응을 보이지 않아. 올 수 있어?"

이준호는 침묵했다. 몇 초가 흘렀다.

능력 사용 횟수를 세었다. 월 3회 제한까지 남은 횟수는 1회. 이번이 마지막 사용이 될 것이다.

신경세포 손상은 누적된다. 박재민의 경고가 떠올랐다. '한두 번 더 능력을 쓰면 회복 불가능하다.' 뇌척수액 누출의 임계값은 이미 위험 수준에 가까워 있었다. 이화영의 데이터에 따르면 뇌척수액 누출이 정상치의 150% 이상이 되면 신경 손상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현재 수치는 145%.

이번 능력 사용 후로는 다시는 초진단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환자는?

이준호는 눈을 감았다. 로비의 형광등이 눈꺼풀을 밝게 물들였다.

자신의 전생에서 배운 것. 300년 전 의관 이준이 마지막으로 깨달은 것. 혼자는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 깨달음이 너무 늦었다는 것.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응급실에는 최준혁이 있을 것이다. 박재민이 있을 것이다. 이화영이 있을 것이다. 김정수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이 소진되는 순간을 알고 있고, 그 이후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면, 이 환자도 혼자가 아니다.

"예, 지금 가겠습니다."

이준호는 병원으로 돌아섰다. 로비의 형광등 아래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뻗어 있었다.

그것은 조선 시대의 영혼이 아니라, 현대의 의사였다.

응급실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호흡이 깊어졌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것이 마지막 초진단이 될 것이라는 각오. 그리고 그 각오 속에 있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결의였다.

전생의 죽음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극형의 고통. 무너지는 의관의 영광. 하지만 그것은 과거였다. 현재의 이준호는 그 죽음을 이미 경험한 자였고, 그것을 넘어선 자였다.

응급실의 자동문이 열렸다.

최준혁, 박재민, 이화영, 김정수. 그들의 얼굴이 순서대로 떠올랐다. 그들의 손이 떠올랐다. 그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넌 혼자면 안 돼.'

그 말이 이준호를 응급실로 밀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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