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 11시 30분, 김정수 정교사의 사무실
테이블 위에는 조선 시대 의학 문헌이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이준호의 뇌 MRI 영상과 초진단 기록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최준혁 명예교수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이준호를 바라봤다.
"이번엔 다르게 끝내자."
그 말이 이준호의 가슴을 때렸다. 전생에서 혼자 판단하다 역모 누명으로 죽은 자신이, 이번엔 무엇을 어떻게 달리해야 한다는 건가. 최준혁은 한 장 한 장 문헌을 넘기며 계속했다.
"300년 전 이준 의관의 진단 기록을 봐. 모두 정확했어. 그런데 왜 죽었을까?"
"혼자였으니까요."
이준호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박재민의 경고, 이화영의 분석, 최준혁의 고백. 모두가 같은 말을 했다. 혼자 판단하면 죽는다.
"그래. 그럼 이번에는 팀을 만들자."
김정수 정교사가 손을 모았다. 그의 눈빛은 이미 무언가를 설계하고 있었다.
---
# 밤 1시 20분, 대학병원 컨퍼런스 룸 B
이준호는 테이블 한쪽 끝에 앉아 있었고, 그의 맞은편에는 김정수 정교사, 이화영 인턴, 최준혁 명예교수, 박재민이 마주 앉았다. 화이트보드에는 새로운 프로토콜의 구조가 그려져 있었다.
"초진단 → 실시간 기록 → 팀 검증 → 상급의 승인 → 치료 집행."
김정수가 손가락으로 각 단계를 가리켰다.
"이준호, 넌 이제부터 혼자 진단을 결정하지 않는다. 초진단을 하는 순간, 우리가 그 과정을 모두 기록한다. 이화영이 신경학적 메커니즘을 검증하고, 최준혁이 임상적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내가 최종 승인한다. 이해?"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불안감이 밀려왔다. 초진단이 발동되는 순간을 누가 '멈출' 수 있단 말인가. 능력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터져 나온다.
"능력을 억제할 순 없습니다."
"알아. 그래서 우리가 있는 거야."
최준혁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있었고, 그 주름 사이마다 50년의 임상이 새겨져 있었다.
"넌 초진단을 하고 나서 두통이 온다고 했지. 그 두통이 나타나는 순간, 우리가 너를 돌본다. 혼자가 아니야."
박재민이 테이블 아래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아무 말도 없이.
"프로토콜 첫 번째 케이스는?"
김정수가 물었다. 이화영이 차트를 들어 올렸다.
"56세 남성, 박정수. 3주 전부터 간헐적 상지 마비와 보행 장애. 신경과 진료에서 파킨슨 의심, 신경외과는 척추관협착증 의심. 뇌 MRI, 척추 MRI 모두 정상. 원인 불명."
"진단 불가 케이스네."
최준혁이 중얼거렸다. 이것이 팀이 필요한 환자들이었다. 교과서에 없는 환자들.
"환자가 지금 응급실에 있어. 새로 들어온 지 20분."
이준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김정수가 손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우선 모두가 동시에 내려가. 이준호는 절대 혼자 환자를 보지 않는다. 이화영과 함께 가고, 나는 뒤에서 따라간다. 최준혁은 대기실에서 준비해. 알겠어?"
"알겠습니다."
---
# 밤 1시 45분, 응급실 4번 침대
56세 박정수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양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주치의 전공의가 차트를 읽고 있었다. 이준호와 이화영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환자분."
이화영이 인사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이준호는 환자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눈빛의 초점이 흔들렸다. 손 떨림의 리듬이 균등하지 않았다. 상지 마비라고 했지만, 손가락의 색깔이 미묘하게 다르다.
그 순간이었다.
뇌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깨어났다. 조선 시대의 맥진이 현대의 신경학과 겹쳐졌다. 손의 색깔이 말해주는 것은 말초 신경 괴사. 미세한 떨림의 패턴은 소뇌 기능 이상. 눈빛의 흔들림은 동안신경 마비의 초기 신호.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동시에 나타나는 질환은—
"CIDP 합병 Wernicke-Korsakoff 증후군."
이준호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초진단이 발동된 것이다. 그 과정은 마치 폐쇄된 방 안에서 갑자기 모든 창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환자의 신체 신호들이 한순간에 수렴되어 하나의 진단으로 결정화되는 경험. 조선 시대 의학과 현대 신경학이 그의 뇌 속에서 충돌하고 융합되며, 마침내 진실로 도달하는 그 순간. 손가락 끝의 색변부터 시작된 신호가 소뇌의 미세한 기능 이상까지 연결되고, 마지막으로 동안신경의 초기 마비 신호가 모든 퍼즐을 완성시키는 느낌이었다.
"뭔가요?"
전공의가 놀라며 물었다.
"만성 염증성 탈수초 다발신경병증에 비타민 B1 결핍성 뇌병증이 합병된 상태입니다. 혈청 피루베이트 수치와 뇌척수액 검사가 필요합니다."
이준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이미 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화영이 즉시 태블릿을 꺼내 기록했다.
"초진단 시간: 1시 47분. 진단: CIDP 합병 Wernicke-Korsakoff. 근거: 말초 신경 색변, 소뇌 기능 이상 신호, 동안신경 마비 초기 징후의 동시 출현."
전공의는 차트를 다시 들었다. "이건 교과서에 없는데요?"
"있어."
최준혁이 응급실 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의학 저널 프린트물이 들려 있었다. "2019년 신경학 분과 보고서. CIDP와 Wernicke-Korsakoff의 동시 발현 사례. 드물지만 보고된 케이스야."
전공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준호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있었다. 이마에 맺힌 땀이 점점 많아졌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준호?"
이화영이 물었다.
"두통이..."
이준호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그의 머리가 갑자기 아래로 떨어졌고, 시야가 희부옇게 변했다. 최준혁이 즉시 이준호를 잡았다.
"침대 옆에 누워."
최준혁의 목소리는 명령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이준호는 응급실 침대 옆 바닥에 누워졌다. 박정수는 위에서, 이준호는 아래에서, 같은 공간을 공유했다.
"뇌척수액 누출 신호네요."
이화영이 태블릿의 뇌 모니터링 앱을 켰다. 이준호의 스마트 헬스밴드와 연동된 신경 신호가 실시간으로 떠올랐다. 뇌척수액 누출의 패턴이 명확했다.
최준혁은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손을 잡고 있었다.
"괜찮아. 우리가 있어."
최준혁이 반복했다.
"괜찮아. 우리가 있어."
이준호는 의식을 잃었다. 하지만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박재민이 응급실 문을 통해 들어왔다. 손에는 수액 세트가 들려 있었다. 그는 이준호의 팔에 정맥주사를 꽂았다. 손을 놓지 않으면서.
"수액 40cc/hr, 혈액 검사 세트, 뇌척수액 모니터링."
김정수가 전공의에게 지시했다. "박정수 환자는 신경과와 내분비과 상담. 즉시 혈청 피루베이트 검사와 뇌척수액 B1 수치 측정. CIDP 진단 위해 신경 전도 검사 준비. 긴급으로."
전공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는 이준호의 초진단을 믿고 있었다.
20분이 지났다. 이준호는 여전히 의식을 잃고 있었다. 최준혁은 여전히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화영은 모니터를 봤다. 뇌척수액 누출이 안정화되고 있었다.
"신경세포 손상 진행이 멈췄어요."
이화영이 말했다.
"팀이 있으니까."
최준혁이 중얼거렸다. "혼자였으면 벌써 뇌사였을 텐데."
밤 2시 30분, 이준호의 눈이 떨어졌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최준혁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의 손. 여전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깼어?"
최준혁이 물었다.
"네... 환자는?"
"안정화됐어. 당신의 진단이 맞았다. 혈청 피루베이트 수치가 정상치의 3배. B1 결핍도 확인됐어. 신경 전도 검사에서 CIDP 패턴이 명확해."
이준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처음이었다. 진단이 맞다는 것을 확인받는 것이. 그것도 팀과 함께.
"당신은 천재가 아니야."
김정수가 이준호 위에서 말했다. 그의 얼굴도 피로로 가득 했지만, 눈빛은 맑았다.
"당신은 의사야. 차이를 알아?"
이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눈물만 흘러내렸다.
"천재는 혼자 싸운다. 의사는 팀과 함께 싸운다. 당신은 이제 팀의 일부야."
---
# 밤 3시 15분, 응급실
새로운 환자 신호가 울렸다. 68세 여성, 의식 불명. 원인 불명.
응급실 3번 침대에 누운 여성의 얼굴은 창백했다. 양쪽 눈동자는 정중앙을 향해 있었다. 뇌간 기능 이상의 신호였다.
이준호는 침대 옆에서 멈췄다. 박재민이 손을 잡으려 했다.
"가야겠어."
이준호가 말했다.
"혼자면?"
박재민이 물었다.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그 질문이 그의 모든 것을 흔들었다. 혼자라면? 처음 환자 때처럼 두통이 올 것이다. 혼자라면 다시 의식을 잃을 것이다. 혼자라면 환자는 죽을 것이다.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역모 누명을 쓰고 죽으며 구하지 못한 환자들의 얼굴. 그들을 외면했던 죄책감. 그리고 이번 생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절망감.
능력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저주였다. 혼자 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지 않을 수 없는 저주.
"가봐야겠어."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자신에 찬 것이 아니라 체념에 가까웠다.
여성의 손을 잡는 순간, 그것이 터져 나왔다.
조선 시대의 맥진이 깨어났다. 현대 신경학이 겹쳤다. 동공 산대, 반사 소실, 뇌척수액 누출의 징후. 모두가 동시에 나타났다. 첫 번째 환자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이번엔 더 급격했다. 더 명확했다. 뇌간의 혈류 차단. 신경핵의 기능 정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원인—
"급성 뇌간 경색."
이준호의 입에서 단어가 나왔다.
그리고 두통이 시작됐다. 이번엔 더 강했다. 손이 떨렸다. 호흡이 얕아졌다. 여성의 손을 놓으려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몸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이화영이 들어왔다. 태블릿을 켰다. 초진단을 기록했다. 김정수도 들어왔다. 최준혁도.
"뇌 CT 앙기오그래피 준비. 신경과 긴급 상담."
김정수가 전공의에게 지시했다.
그 순간, 응급실 문이 열렸다.
박용석 과장이 들어섰다.
야간 회진 중 응급실 신호를 받은 것이었다. 신경과 상담 요청이 들어왔고, 그의 경험상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났다. 의대생이 진단을 내리고 있다는 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박용석은 곧장 응급실로 내려왔다.
"뭐 하는 거야?"
박용석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날카로운 의도가 숨어 있었다.
"환자 진단입니다."
이준호가 대답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넌 의대생이야. 진단 권한이 없어."
박용석이 말했다. 그는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 시선은 마치 덫에 걸린 짐승을 보는 것 같았다.
"기록하고 싶으면 좋아. 기록해. 하지만 그 순간부터 이건 '공식 진단'이 되는 거야. 의료법상 의대생의 진단은 무인가 진단이고, 그건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뜻이야."
박용석이 천천히 걸어왔다.
"당신이 기록하면, 당신은 물론이고 이 팀 전원이 의료법 위반으로 문제가 돼. 특히 최준혁 교수는 명예교수 자격을 잃을 수도 있고, 김정수 정교사는 교직을 잃을 수도 있어. 이화영은 인턴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지."
박용석의 입가에 미소가 떴다.
"선택은 당신들의 몫이야. 기록하고 법적 책임을 질 거냐, 아니면 지금 이 자리를 떠날 거냐."
응급실이 순간 정지했다. 여성의 맥박은 계속 약해지고 있었고, 이준호의 두통은 극에 달했다. 시야가 흔들렸다.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최준혁이 한 발 나섰다. 하지만 멈췄다. 그의 얼굴이 경직됐다. 50년을 쌓은 명예, 학회에서의 위상, 모든 것이 이 선택에 달려 있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의 입술도 움직였다. 말을 하려 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의료인으로서의 양심과 현실적 두려움 사이에서 흔들렸다. 50년 동안 지켜온 것들을 한순간에 내려놓을 수 있을까. 학회에서의 초대 강연, 후학들의 존경, 정년 이후의 명예로운 삶.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눈 앞에는 죽어가는 환자가 있었다.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진단이 있었다. 그것을 외면하고 명예를 지킬 수 있을까. 그 갈등 속에서 그의 손가락은 계속 떨렸다. 10초, 15초, 20초. 시간이 길어질수록 환자의 상태는 악화되었다. 최준혁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떨리는 손. 하지만 그 손에는 50년의 경험이 담겨 있었다. 그 경험이 말해주는 것은 명확했다. 환자가 먼저다.
김정수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학병원 정교사로서의 신뢰도, 교직 평가, 논문 발표의 기회.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 그의 목이 움직였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화영은 태블릿을 들었다가 내려놨다. 들었다가 내려놨다. 인턴 자격 박탈. 의료인이 되기 전에 경력이 오염되는 것. 그녀의 손이 떨렸다.
박재민은 이준호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이 팀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질 것인가, 아니면 눈을 감을 것인가.
30초가 지났다. 여성의 생체 신호가 한 칸씩 떨어지고 있었다.
1분이 지났다. 이준호의 두통이 극에 달했다. 의식이 끊어지려 했다.
그 순간, 최준혁이 움직였다.
"법은 나중이야."
최준혁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50년의 경력을 내려놓는 목소리였다. 그것은 결정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명예교수로서의 지위를 버리고, 학회에서의 위상을 포기하고, 정년 이후의 모든 것을 걸어두는 선언. 그의 손이 여전히 떨렸지만, 그 떨림은 이제 두려움이 아니라 결단의 신호였다. 50년 동안 의료인으로서 지켜온 가치, 그것이 이 순간 모든 것을 압도했다.
"환자가 먼저야."
최준혁이 태블릿을 집었다. 손을 내밀었다.
"이 기록은 내 이름으로 올린다. 나는 아직 의료인이야. 내 책임이야."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떨렸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급성 뇌간 경색. 진단자: 최준혁 명예교수. 초진단 검증: 이준호 의대생. 임상 판단: 즉시 신경과 상담, 뇌 CT 앙기오그래피, 혈전용해제 투여 검토."
최준혁의 손이 떨렸다. 이 기록은 그의 명예를 건 선택이었다. 50년 의료인으로서의 경력, 학회에서의 위상, 모든 것이 이 한 줄에 걸려 있었다.
김정수가 움직였다. 태블릿에 자신의 서명을 더했다. 그의 손도 떨렸다.
"최종 승인: 김정수 정교사."
그는 대학병원의 신경과 정교사였다. 이 기록이 공식화되면, 그의 교직 평가는 도마 위에 올라갈 것이다. 의료법 위반 혐의. 비인가 진단 승인. 모든 것이 그를 향할 것이다.
이화영도 태블릿을 잡았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떨렸다. 인턴이라는 신분, 아직 의료인이 되지 못한 신분. 하지만 그녀는 기록했다.
"검증 기록: 이화영 인턴. 이 기록에 대한 모든 책임은 우리가 진다."
전공의는 차트를 들고 움직였다. 신경과로 전화를 걸었다.
"긴급 상담 요청합니다. 급성 뇌간 경색 의심. 68세 여성. 혈전용해제 투여 검토 필요합니다."
박용석은 그들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에는 놀라움이 없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이미 예상했던 것처럼.
"당신들 다 미쳤어."
박용석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기억해. 이건 당신들이 선택한 길이야."
박용석은 응급실을 나가며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의료법 위반 신고' 문서가 떠올랐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아직 전송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법을 어긴 팀. 그들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그의 고발이 옳은 것인지. 의료인으로서의 양심과 제도를 지키는 책임 사이에서 박용석도 흔들렸다. 마치 이들의 다음 움직임을 기다리는 것처럼.
이준호는 여성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두통이 극에 달했다. 의식이 흐려졌다. 하지만 손은 놓지 않았다.
"우리가 있어. 혼자가 아니야."
박재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재민이 이준호의 어깨를 잡았다.
이준호는 검은 세계로 빠져들었다.
---
# 밤 5시 50분, 응급실
이준호는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 응급실 침대 옆. 최준혁은 여전히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68세 여성은 뇌 CT 앙기오그래피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경과 전문의가 환자 옆에 서 있었다. 혈전용해제 투여 준비가 진행 중이었다.
"CT 결과 확인됐습니다. 우측 뇌간 동맥 혈전입니다. 즉시 혈전용해제 투여를 시작하겠습니다."
신경과 전문의가 말했다.
"초진단이 정확했어."
김정수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초진단이 맞았다. 환자는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가는 명확했다.
최준혁은 50년을 쌓은 명예교수의 자격을 걸었다. 의료법 위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을 수도 있다. 학회에서의 발표 기회는 사라질 것이다. 후학 지도는 제한될 수도 있다.
김정수는 대학병원 정교사로서의 신뢰도를 잃었다. 의료 사고 위원회의 심사 대상이 될 것이다. 논문 발표 시 이 사건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승진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화영은 인턴 자격 박탈의 위험에 직면했다. 의료인이 되기 전에, 비인가 진단에 참여한 혐의인. 경력 초반부터 오염된 기록을 가지고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무언가를 잃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박재민이 이준호의 옆에 앉았다. 이화영은 모니터를 봤다. 최준혁은 여전히 이준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우리가 진다."
김정수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무거운 결단이 담겨 있었다.
"법적 책임을 우리가 진다. 모두가."
최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했어. 이준호. 이게 팀이야."
응급실의 모니터들이 계속해서 신호를 보냈다. 박정수의 생체 신호는 안정화되고 있었다. 68세 여성의 혈전용해제 투여가 시작되었다.
그 순간,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박용석이 대학병원 원무과장과 함께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환자 기록 압수 영장이 들려 있었다.
"의료법 위반 혐의로 즉시 조사를 진행합니다. 모든 진료 기록과 태블릿 기록을 압수하겠습니다."
박용석의 목소리는 공식적이고 냉정했다.
"그리고 이 팀 전원에게 병원 행정부 고발 통보를 발송하겠습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혼자가 아닌 팀으로서. 하지만 이제 그들 앞에는 법정이라는 새로운 전장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