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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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석 과장의 냉소적인 웃음이 응급실을 가로질렀다. 의대생이 진단을 내렸다는 사실이 회의실에 퍼지는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의대생이."

그 두 단어로 충분했다. 절차를 무시한 자에 대한 경멸. 하지만 환자는 살았다. 담낭암. 종양 괴사. 응급 절제술이 필요했고, 이준호의 진단이 정확했다.

오후 2시 47분, 응급실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이준호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뇌 깊숙한 곳에서 둔한 통증이 맥박처럼 울렸다. 천장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신경과 의사의 거짓 진단이 귓가에 맴돌았다. '뇌 부종. 신경세포 손상 진행 중. 이대로면 비가역적 손상이 올 수 있습니다.'

"깼네."

박재민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오후 2시 47분이 표시되어 있었다. 28분 차이. 이준호가 의식을 잃은 시간이 그 정도라는 뜻이었다.

"셋째 주 안에 셋 번을 썼어. 준호, 넌 진짜..."

박재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화난 것이 아니었다. 걱정하고 있었다.

"환자들을 살렸는데."

이준호의 입술이 마르고 있었다. 간호사가 종이컵에 물을 따라 밀어 줬지만, 그는 손을 뻗지 않았다.

"환자들을 살렸잖아."

"그 환자들 때문에 넌 죽을 수도 있어."

박재민은 침대 끝에 앉았다. 등을 굽혔다. 이준호와 같은 의대 3학년이지만, 지금 박재민의 표정은 훨씬 나이가 많아 보였다. 침대 위의 손가락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월간 3회. 그게 한계라고 했잖아."

박재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넌 이미 한계를 넘었어. 다섯 시간 반을 날렸어, 준호. 다섯 시간 반."

이준호는 천장을 봤다. 뇌 속에서 신경이 쏟아지고 있었다. 조선 시대의 기억이 아니었다. 현대의 의료진들이 자신을 응급실로 옮기던 순간의 표정들이었다. 충격. 우려. 그리고 뭔가 불만스러운 것 같은 감정. 마치 자신이 규칙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세 번째는 뭐였어? 기억해?"

박재민이 물었다.

이준호는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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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전 화요일 오전 11시경. 내과 회의실이었다.

"65세 여성, 주소는 우상복부 통증. 초음파에서 담낭염으로 진단 나왔는데, 72시간 항생제 투여 후에도 호전 없음. 복부 CT도 재촬영했지만 특이소견 없음."

박용석 과장이 환자 영상을 띄웠다. 한두 명의 전공의와 인턴, 그리고 이준호가 화면을 봤다. 이준호는 의대 3학년이었다. 공식적으로는 '관찰'만 허용된 신분이었다. 하지만 화면을 보는 순간, 뇌 깊숙한 곳에서 낯선 감각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담낭이 아니었다.

위치가 맞지 않았다. 통증의 패턴이 맞지 않았다. 그리고 CT 영상에서—사실은 CT에 찍혀 있지 않은 것에서—기억이 폭발했다.

"담낭이 아닙니다. 담낭암입니다."

이준호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로질렀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기 단계. 초음파와 CT의 해상도로는 경계가 불명확할 수 있습니다. MRI를 다시 촬영하고 MRCP를 추가 시행하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술을 서둘러야 합니다."

박용석 과장의 눈이 이준호를 향했다. 그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냉소적인 웃음이었다.

"절차를 따르지 않는군요."

박용석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것이 더 위협적이었다.

"내가 주치의인 한, 이 환자는 담낭염으로 경과 관찰합니다. 항생제를 3일 더 투여합니다. 의견이 있으시면 상급의를 통해 제시하십시오, 학생."

'학생'이라는 단어가 공기를 자르고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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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경, 응급실에서 그 환자가 들어왔다. 패혈증 쇼크. 담낭 천공이 아니었다. 담낭암의 종양 괴사였다. 종양이 자체 괴사하면서 세균이 복강으로 퍼진 것이었다.

이준호는 응급실 의사를 찾아갔다. 상급의가 아니라 응급실 의사였다. 절차를 무시하고 자신의 진단을 직접 전했다.

"담낭암 진행 단계. 응급 수술이 필요합니다."

응급실 의사는 이준호의 얼굴을 봤다. 신분증을 확인했다. 의대생이었다. 하지만 환자는 죽어 가고 있었다. 패혈증 쇼크는 시간 싸움이었다.

응급실 의사는 외과에 연락했다.

수술은 오후 3시 17분에 시작됐다. 이준호가 예측한 대로였다. 담낭암의 진행 단계. 종양 괴사. 응급 절제술이 필요했다. 환자는 살았다.

그리고 이준호는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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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

박재민이 다시 물었다. 침대의 끝을 꼭 쥐고 있었다.

"기억나, 그 응급실 의사의 표정? 넌 의대생인데, 상급의 거치고 직접 지시했어."

박재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의사가 뭐라고 생각했을까? 나중에 박용석 과장이 뭐라고 생각했을까?"

침묵이 방을 채웠다. 박재민의 어깨가 움직였다. 한숨이었다.

"그리고 넌 다섯 시간 반을 날렸어. 응급실에서 깨어날 때까지. 그 사이에 뭐 됐는지 알아? 넌 없었어. 담낭암 환자 수술 후 경과를 볼 의료진이 없었어. 넌 의식을 잃었고, 담당 의사들은 넌 왜 이렇게 됐는지 설명해야 했어. 의대생이 왜 환자 진단을 내리고 의식을 잃었는지."

박재민이 일어섰다.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이준호."

박재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넌 이미 한계를 넘었어. 뇌 손상은 비가역적이야. 계속 이러면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온다고."

"그 환자들이 죽었으면 어쩔 거야?"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 담낭암 환자, 그 심근경색 환자, 그 신경변성질환 환자. 다 죽었으면 어쩔 거야, 박재민?"

"넌 그들을 살렸어. 그건 맞아."

박재민이 침대에 다시 앉았다. 이준호와 눈높이를 맞췄다.

"하지만 너도 죽을 수 있어, 준호. 너도."

박재민의 눈이 흔들렸다.

"최준혁 선배 알지? 50년 임상의. 명예교수."

"알지."

"그 사람이 내 말로는 30년 전에 넌 같은 짓을 했대. 천재 진단. 정확한 진단. 환자를 살렸어. 그런데 한 번은 실수했어. 아주 작은 실수. 그런데 그 환자는 죽었어."

박재민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그 이후로 최선배는 팀의학만 믿는대. 혼자 판단한 적이 없대. 절차를 100% 따른대."

박재민이 일어섰다.

"생각해 봐.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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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30분, 희귀질환 연구실. 이화영은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양쪽 화면에는 이준호의 뇌 영상이 떠 있었고, 그 옆에는 데이터 시트가 펼쳐져 있었다. 녹색과 빨간색 선이 그려져 있었다.

"봐. 이건 정상 뇌 활성화 패턴이고, 이건 넌 진단할 때의 패턴이야."

이화영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상 상태에서 시각 정보 처리는 후두엽에서만 일어나. 기억 처리는 해마와 전두엽. 분석은 측두엽. 다 따로야."

그녀가 두 번째 영상을 가리켰다.

"근데 넌 진단할 때 이 네 영역이 동시에 활성화돼. 그것도 엄청난 강도로."

이준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게다가 전전두엽도 함께 켜져. 의사결정 영역이야."

이화영이 모니터를 꺼지 않은 채 의자를 돌렸다. 그녀의 눈이 이준호를 찾았다.

"이건 정상적인 신경 활동이 아니야. 뇌가 동시에 너무 많은 작업을 하고 있어."

그녀가 다시 모니터를 켰다. 또 다른 이미지가 떠올랐다. 뇌척수액의 흐름을 보여주는 영상이었다.

"뇌척수액 유동에 비정상이 있어. 신경세포가 손상되면서 괴사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다는 뜻이야."

이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모니터의 빨간색 선들이 자신의 뇌 손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반복되면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넌 진단을 멈추게 하는 게 아니야. 이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거야. 왜 넌 뇌가 이렇게 반응하는지, 왜 정확한 진단이 나오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는지. 그 근거를 만들어야 해."

"어떻게?"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해. 근데 넌 더 이상 진단하면 안 돼. 적어도 한 달은. 뇌가 회복될 시간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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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경, 대학병원 5층 김정수 정교수의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최준혁 명예교수가 이미 앉아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손에는 오래된 문헌 복사본을 들고 있었다. 한문으로 쓰인 의학 기록이었다. 이준호는 그것을 본 순간, 뇌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조선 시대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 가까운 것이었다. 현대의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이었다.

"앉아."

김정수가 말했다.

이준호는 앉았다.

"박용석이가 움직이고 있어. 신미래 과장도. 넌 절차를 무시했어. 응급실 의사에게 직접 진단을 내렸어. 상급의를 거치지 않고."

"환자가..."

"환자가 죽을 뻔했어, 맞아. 근데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거야, 준호. 너도, 환자도, 그리고 이 팀도."

김정수가 문헌을 테이블에 놨다.

"너는 지금 두 개의 문제를 가지고 있어. 첫 번째는 뇌 손상이야. 이화영이 말했을 거야. 두 번째는..."

최준혁이 입을 열었다. 50년 임상의의 목소리였다.

"너는 혼자가 되고 싶어해."

"아니, 저는..."

"혼자가 되고 싶어. 왜냐하면 혼자 판단할 때 가장 빠르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옳으니까. 근데 의학은 절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준호. 의학은 팀이야."

최준혁이 문헌을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이 안에 있는 이준이라는 의관을 알아? 조선 명의야. 정확한 진단으로 유명했어. 근데 결국 혼자였어. 혼자 판단했어. 혼자 그 진단을 고수했어. 그리고..."

최준혁이 눈을 감았다.

"역모 누명으로 죽었어. 능지처참으로."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그 사람이 넌 전생이야?"

최준혁의 질문이 공기를 꿰뚫었다.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테이블 위의 문헌을 봤다. 그 안에는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이 쓰여 있었다. 조선 시대의 진단. 조선 시대의 기억. 그리고 조선 시대의 고독이.

"그렇다면, 넌 다시 죽으면 안 돼. 다른 방식으로."

김정수가 말했다.

"병원 정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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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아직 길었다. 이준호는 침묵 속에서 깨닫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구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문헌 속에 쓰인 이준이라는 의관이, 자신과 똑같이 혼자였다는 것을.

이준호는 최준혁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결연함이 담겨 있었다.

"팀의학으로 전환하겠습니다."

이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박용석 과장에게 공식 사과 편지를 쓰겠습니다. 절차를 무시한 것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상급의를 통해서만 진단을 제시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달간 진단 능력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최준혁이 말했다.

"응급실 의사와 다시 만나야 해. 그 의사도 절차 위반에 연루됐어. 넌 그 의사를 보호해야 해."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상처 입혔는지.

"박용석 과장이 받아줄까?"

김정수의 말이 공중에 떠 있었다.

최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테이블 위의 문헌을 한 장 넘겼다. 그 페이지에는 이준이라는 의관이 당한 탄핵의 기록이 적혀 있었다. 날짜는 정확했다. 정확한 진단을 내린 지 정확히 2주 후였다.

"다음 주 화요일 정기 회의에서 박용석이가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거야."

최준혁이 말했다.

"그 회의에서 넌 모든 것을 인정하고, 모든 책임을 져야 해. 그게 유일한 길이야."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회의가 자신의 병원 인생을 결정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박용석 과장이 그 자리에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질책할 것이라는 것을.

"역사는 반복된다."

최준혁이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끝내야 한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침묵이 사무실을 채웠다. 이준호는 최준혁의 눈을 마주했다. 그 눈에는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승인인지, 경고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인지.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희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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