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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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수 정교사의 사무실은 여전히 어둑했다. 오전 8시 30분, 햇빛이 블라인드 사이로 얇은 줄무늬를 그었다. 이준호는 책장 앞에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닿은 페이지의 글씨가 떨렸다. 조선 중기 한글과 한자가 뒤섞인 의학 문헌. 그 안의 한 이름—'李準 명의의 진단 기록'—이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준호는 글씨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붓질의 획과 점이 자신의 손가락 움직임과 정확히 겹쳤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것을 쓴 사람의 손과 자신의 손이 같은 힘의 궤적을 따르고 있었다.

호흡이 얕아졌다.

"이게... 뭐지?"

"너를 찾아온 책이다."

김정수 정교사가 뒤에서 말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무언가를 관찰하는 톤이었다.

"1823년. 조선 순조 23년. 역모 누명으로 죽은 의관이 있었다. 이름이 이준이었다. 그의 제자들이 몰래 그의 진단 기록을 필사해 전했다. 300년 가까이 의학사 주석 속에만 살아있었지. 나는 5년 전에 이 기록을 서울 대학 도서관 특수 자료실에서 찾았다."

이준호는 돌아서지 않았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멈췄다.

"이 의사의 진단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너를 만나니... 그게 명확해지고 있어."

김 교수가 한 발 가까워졌다.

"넌 이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본다."

그 말이 이준호의 뇌를 관통했다. 단순한 추측이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이준호의 이마를 들어올려 그의 기억을 들여다본 후 내린 판정이었다.

이준호의 손이 책을 놓았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그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해부 실습 중 그 시신을 봤을 때도 같은 떨림이 있었다. 역모 누명. 능지처참. 그리고 지금, 자신의 전생 이름이 적힌 책.

"네가 이 팀에 필요한 이유는 그거야. 너는 현대 의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환자들을 본다. 그리고 그들을 산다. 우리는 그 과정을 함께 기록해야 해."

이준호는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손이 여전히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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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희귀질환 연구실은 생각보다 좁았다. 회의 테이블 주변에 노트북 4개가 놓여있었고, 벽에는 진단 불가 환자들의 사례집이 붙어있었다. 증상, 검사 결과, 담당 과의 의견, 그리고 '미해결'이라는 빨간 스탬프.

10년 동안 쌓인 미해결의 기록들이었다.

"이것들이 우리가 마주친 환자들이야." 김정수 정교사가 벽을 가리켰다. "모두 표준 진료 경로를 거쳤어. 근데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대증 치료만 반복되고 있어."

이준호는 사례집을 하나씩 읽었다. 79세 여성, 만성 복통, 내시경 음성, CT 음성, 혈액검사 음성. 3년 전부터 증상. 최근 악화. 현재 입원 중.

"이 환자를 봐줄 수 있겠니?"

이준호가 사례집을 들었다. 손끝에서 이미 무언가가 울리고 있었다. 복부 움직임의 패턴. 증상 발현의 시간대. 그 조합이 매우 특이했다.

"환자를 만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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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동 6층 202호실. 79세 박미영 환자는 창문 쪽 침대에 누워있었다. 얼굴이 회색이었다. 만성 통증이 초래하는 피로와 절망이 그 위에 겹쳐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준호라고 합니다. 의대 학생이고요, 당신의 증상을 다시 한 번 봐도 괜찮을까요?"

박미영 환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수십 번의 검사와 진료를 거친 환자였다. 또 다른 의료진이 올 때마다 같은 말을 들었을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검사가 없습니다. 대증 치료를 계속하시죠.'

이준호는 침대 옆에 앉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복부를 만져볼게요."

손가락이 복부에 닿는 순간, 세상이 달라졌다.

조선 시대의 맥진이 아니었다. 하지만 손끝의 감각은 같았다. 조직의 탄성. 혈관의 진동. 신경의 반응. 그것들이 한 번에 들어왔다.

복부 우측 하단 3센티미터 지점. 장간막 신경이 압박받고 있었다. 신경 압박의 진동이 손가락 끝 세 개 마디를 통해 전달됐다. 소장을 싸고 있는 막 조직 속에서 신경이 눌려있었다. 하지만 표준 CT 영상에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정도의 유착이었다. 신경병증의 초기 단계였다. 통증은 실재했지만, 영상에는 귀신처럼 사라지는 유형의 병변이었다.

"여기, 장간막 신경이 압박받고 있습니다. 복강 내 유착이 만든 압력이 신경을 누르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검사가 음성이었어요. 염증도 감염도 종양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신경은 분명히 상했습니다."

박미영 환자의 눈이 떨렸다.

"그게... 확실해요?"

"네."

침묵이 흘렀다. 이준호는 손을 떼지 않았다. 손끝은 여전히 그 압박된 신경에 닿아있었다.

박미영 환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크고 거친 눈물이었다. 10년을 고생했는데,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의 병을 본 것이었다. 검사 수치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직접 본 것이었다.

"10년... 10년을 이러고 있었는데..."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손을 거기에 둔 채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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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로 돌아왔을 때, 이화영 인턴과 최준혁 선배가 있었다.

이화영은 노트북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뇌 스캔 영상이었다. 이준호의 뇌 영상이었다. 최근에 촬영한 것이었다.

"좌측 전전두엽과 우측 두정엽의 비정상적 활성화. 그리고 뇌섬엽의 과활성. 이게 뭐야?"

이화영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걸 어떻게 봤어?"

이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조선 시대 명의의 감각이 깨어났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의학이 아니라 환상처럼 들릴 것이었다.

"그 과정을 설명해줄 수 있다면, 우리는 재현 가능한 진단법을 만들 수 있어."

이화영이 말했다. 목소리는 냉정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학문적 욕구가 있었다.

"지금은 너 개인의 천재성이야.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 메커니즘을 밝혀낼 수 있다면, 그건 의학이 돼. 모든 의사가 배울 수 있는 기술이 되는 거야."

이준호는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자신의 뇌가 스캔되어 있었다. 좌측 전전두엽의 활성화는 논리적 판단을 담당하는 영역. 우측 두정엽의 활성화는 공간 지각. 뇌섬엽의 과활성은 신체 감각의 통합. 그것들이 모두 동시에 작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능력을 신경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 이준의 감각이 그의 뇌에 남겨놓은 신경 회로. 그것이 현대 의학 기계로 포착된 것이었다.

"이건..." 이준호가 말을 시작했다가 멈췄다.

"뭐?"

"이건 제 능력이 실제라는 뜻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그래. 그리고 그게 너를 더 위험하게 만들어." 최준혁이 말했다. 그는 창문 너머를 보고 있었다. "너는 이제 자신을 의심할 수 없어. 뇌 스캔이 증거니까. 하지만 천재가 자신을 의심하지 않으면 독단이 돼."

최준혁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오래된 병원 복도를 많이 걸어본 눈이었다.

"너 같은 천재를 본 적이 있어. 10년 전에."

최준혁이 일어섰다.

"그 천재는 자기 진단을 너무 믿었어. 그리고 한 번 실수했어. 환자가 죽었어. 그 이후로 그 의사는 절대로 혼자 판단하지 않았어. 팀의학만 믿게 됐어."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넌 아직 환자를 죽이지 않았어. 근데 지금 가는 길은 그 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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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끝났을 때는 오후 3시였다. 이준호는 병원 복도를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자신도 몰랐다. 단지 발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박용석 과장과 마주쳤다.

박 과장은 멈추지 않았다. 그저 이준호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의대생이 환자를 진찰하고 진단을 내리는 것은 윤리 위반이야. 그리고 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이다."

이준호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 응급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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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복도는 밤 10시경이었는데도 분주했다. 내원 환자 수가 많았다. 의료진들이 서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이준호는 대기실 끝에 서 있었다. 관찰자로서. 학생으로서.

그때였다. 응급차 사이렌이 들렸다. 119 구급대가 환자를 실어 왔다. 50대 남성. 의식이 없었다. 심전도가 불규칙했다.

응급실 의사가 나왔다. 박용석 과장의 부하 전문의였다.

"심근경색으로 보입니다. 심장 초음파 준비하겠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하지만 이준호의 눈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환자의 얼굴. 입술의 색. 피부의 온도. 그리고 흉부의 움직임.

아니다.

뇌가 울렸다. 그것은 심근경색이 아니었다. 폐동맥의 혈류 차단. 심장이 아닌 폐의 문제. 신체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온 혈전이 폐동맥을 막고 있었다.

이준호는 입을 열려다 멈췄다. 최준혁의 말이 떠올랐다. 천재가 자신을 의심하지 않으면 독단이 된다고. 환자가 죽었다고.

하지만 환자는 지금 죽어가고 있었다.

이준호는 한 발 나아갔다.

"실례합니다. 그 환자, 폐색전증 같습니다."

응급실 의사는 이준호를 보지도 않았다.

"의대생은 관찰만 해. 진단은 우리 몫이야."

하지만 이준호는 멈추지 않았다. 손가락이 떨렸지만, 발은 움직였다.

"폐색전증이 맞습니다. 심장 초음파로는 안 보이는 폐동맥 혈전입니다. 다리에서 올라온 혈전이 폐동맥을 막고 있어요. 심전도 변화는 폐의 급성 허혈 때문입니다."

의사가 돌아봤다.

"뭐하는 거야?"

박용석 과장이 응급실로 들어왔다. 밤 10시인데 병원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환자를 한 번 보지 않고 이준호를 먼저 바라봤다.

그 순간, 박용석 과장의 표정이 변했다. 눈썹이 내려앉았고, 턱 근육이 조여졌다. 코로 내쉬는 숨이 길어졌다.

박용석 과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후에 환자 정보를 받으며 우측 다리 정맥의 비정상적 혈류 신호를 초음파로 포착했고, 환자의 병력—최근 장시간 비행—이 혈전 위험을 높였다. 하지만 심전도의 ST 변화가 심근경색을 시뮬레이트했기에, 확신 없이 표준 경로를 따르려 했던 것이다. 이준호의 진단이 자신의 의심을 확인시켜줬다.

"CT 폐혈관조영 준비하고. 다리 정맥 초음파도."

"과장님, 심근경색 아닙니까?"

박용석 과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응급실 의사의 눈을 정확히 바라봤다. 그의 턱이 한 번 움직였다.

"일단 해."

의사들이 움직였다. 하지만 박용석 과장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마치 자신이 이준호의 진단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도 같은 의심을 품고 있었던 것처럼.

박용석 과장이 이준호에게 돌아섰다. 그의 눈썹이 다시 올라갔다. 경고의 신호였다.

"넌 지금부터 여기서 나가. 이건 절차 위반이야. 의료위원회 보고가 올라갈 수 있어. 임상실습도 중단될 수 있고."

이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환자의 심전도가 다시 울렸다. 심실빈맥. 의료진들이 제세동기를 준비했다.

이준호의 두통이 시작됐다.

목 뒤에서 뭔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뇌척수액을 천천히 뽑아내는 것 같았다. 그 감각은 점점 심해졌다. 관자놀이에서 시작된 통증이 두개골 전체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준호는 이를 깨물었지만 소용없었다. 뇌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신호. 그것은 진단의 대가였다.

응급실 의사가 CT 결과를 받았다.

"우측 폐동맥 주요 가지... 완전 폐색입니다."

박용석 과장의 얼굴이 움직였다. 눈썹이 한 번 더 내려앉았고, 입술이 일직선이 되었다. 그것은 확인의 신호였다.

"심장외과에 응급 혈전제거술 의뢰합니다."

의료진들이 움직였다. 환자는 수술실로 옮겨졌다.

박용석 과장은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뭔가가 있었다. 인정도, 경고도 아닌 다른 감정. 마치 자신이 이준호에게 무언가를 전해야 하는데, 말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다음엔 절차를 지켜."

박용석 과장이 응급실을 떠났다.

그 말은 단순한 훈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약속이었다. 이준호의 진단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방식이 계속되면 안 된다는 경고였다.

이준호는 응급실 복도에 남겨졌다.

두통이 심해졌다. 이준호는 응급실 계단으로 내려갔다.

지하 1층 창고 같은 공간. 의료 폐기물 보관소 옆.

거기서 그는 무릎을 꿇었다.

손가락 끝이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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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밤 11시 45분이었다.

이준호는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옆에는 박재민이 앉아있었다.

"깨났어? 미쳤어. 응급실에서 쓰러졌다고?"

박재민이 말했다.

"너 뭐 한 거야? 박용석 과장이 왜 너한테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거야?"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환자... 폐색전증 맞았어. 너 진단이 정확했어. 의료진들이 다 알고 있어. 근데 넌 의대생이잖아. 그런 진단을 하면 안 돼."

박재민이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넌 맞췄어. 진단은 정확했어.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 알지? 환자를 살리려면 팀이 필요해. 너 혼자는 불가능해."

이준호의 손이 박재민의 손 위에서 떨렸다. 거부인지 수용인지 불명확한 떨림이었다.

이준호는 박재민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천장을 보고 있었다.

뇌에서는 여전히 뭔가 울리고 있었다.

박미영 환자의 진단은 성공했다. 폐색전증 환자도 정확히 봤다. 하지만 그 능력의 대가는 명확했다. 두통. 그리고 더 이상의 것들.

자신의 뇌 스캔에 나타난 비정상적 활성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조선 시대 의관 이준의 기억이 현대 의대생 이준호의 신경계에 남긴 흔적인가.

그리고 박용석 과장. 그 과장은 왜 자신의 진단을 막으면서도 따랐을까. 절차 위반이라고 경고했으면서도 CT를 지시한 이유는 무엇인가.

박용석 과장의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눈썹의 움직임. 턱 근육의 조임. 호흡의 길이. 그것들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박용석은 왜 자신의 의심을 숨겼는가.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의료위원회 사무실에서였다. 이준호의 절차 위반 신고가 올라왔다는 내용이었다. 의료위원회는 내일 오전 10시에 이준호를 소환할 것이라고 했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천장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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