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후의 침전
황후의 침전 앞 복도는 봄 햇빛으로 가득했다. 하린은 그 빛 속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손 안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편지? 아니, 그보다 무거운 것이었다. 결정. 그것도 자신이 내려야 할 결정이었다.
"들어오거라."
나혜경의 목소리는 얇은 비단을 찢는 소리 같았다. 침전의 어둠 속에서 황후는 베개에 기대앉아 있었다. 얼굴은 미소로 가득했지만, 눈은 빙하처럼 차가웠다.
"너는 선택해야 한다."
황후가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시녀가 들고 온 것은 문서였다. 하린은 그것을 받았다. 손이 떨렸다.
"백작가의 복권을 원하거든, 황제를 떠나라. 그 남자는 이미 정신을 잃었다. 황궁에 해가 될 뿐이다. 너를 내 것으로 만들어주겠다. 그러면 너의 가문도 살아난다."
하린은 문서를 펼쳤다. 글자들이 흐릿했다. 복권, 작위 회복, 재산 반환. 모든 단어가 종이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는 않겠다. 오늘 자정까지. 그 전에 황제를 떠나든지, 아니면 영원히 궁중에서 사라지든지."
하린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가거라."
복도로 나온 하린은 벽에 등을 붙였다. 문서는 여전히 손 안에 있었다. 백작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단어를 떠올릴 때 나타나는 것은 얼굴 없는 그림자들뿐이었다.
형.
그 단어가 뭔가를 깨웠다.
후원의 정원에서 이준호는 검은 상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팍이 찢어진 흰 천이 그의 슬픔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린은 그를 본 순간 무언가를 잊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서.
"누나!"
형의 목소리는 부러진 현처럼 울렸다. 그는 하린을 안으려 했지만, 하린은 한 발 물러섰다.
"우리 집으로 돌아오자. 제발. 이 모든 게 끝났어. 아버지의 누명도 어느 정도 벗겨졌고,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너만 있으면 된다. 형이 있으니까."
하린은 형의 얼굴을 봤다. 눈은 자신과 같은 색이었다. 같은 색의 눈.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누나, 말해 줘. 너는 누구를 선택하는 거야?"
형은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목소리가 떨렸다.
"가문을 선택하는 거야, 아니면 그 남자를 선택하는 거야?"
하린의 입술이 움직였다.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목에서 나오는 것은 음절뿐이었다.
"형... 뭐..."
"우리 집으로 돌아와. 제발."
형이 손을 내밀었다. 하린은 그 손을 봤다. 따뜻한 손이었다. 하지만 그 손을 잡으면 뭔가가 끝난다는 생각만 들었다. 뭔가 중요한 것이.
하린이 돌아섰다. 형의 손을 마주하지 않은 채 뒤를 향해 걸었다.
"미안해."
그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준호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누나가 자신을 버리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죽음보다 무거운 것을 느꼈다.
침전으로 돌아가는 길은 길었다. 하린은 자신의 발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걸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곳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
라윤은 창가에 서 있었다. 저녁 햇빛이 그의 옆얼굴을 핥고 있었다.
"넌 뭔가를 결정했다."
선언이었다. 질문이 아니었다. 라윤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내가 뭘 결정했나요?"
하린의 목소리는 낯선 사람의 것처럼 들렸다.
"그 남자의 손을 잡지 않기로."
라윤이 이제야 돌아섰다. 그의 눈은 검은 호수 같았다.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그래?"
"그래."
라윤이 다가왔다. 하린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봤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칠 이유가 없었다.
라윤이 하린의 손을 들었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세우듯이.
"이 손이 누군가 다른 사람을 만지는 것을 나는 볼 수 없다."
"그렇군요."
하린이 말했다.
백의관은 주방 뒤 복도에서 하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석상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이 양반, 당신의 기억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린은 그를 봤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사람인 것 같았다.
"기억이 뭐죠?"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당신의 이름, 당신의 가족, 당신의 선택. 그 모든 것."
백의관이 말했다. 그의 눈에서 물이 흘렀다.
"이제 당신에게 남은 것은..."
그가 말을 멈췄다. 하린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분뿐입니다."
주방에서 송미래는 칼을 들고 있었다. 손이 계속 떨렸다. 하린의 자리는 아침부터 비어 있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몰랐다. 하린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 깨달음이 너무 늦었다는 것을.
"미안해. 너무 미안해."
송미래가 중얼거렸다. 칼이 도마 위에서 멈췄다.
침전의 거울 앞에서 하린은 자신을 봤다. 검은 머리, 창백한 얼굴, 낯선 눈. 그것이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왜 자신의 얼굴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문이 열렸다. 라윤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지만, 눈빛은 예리했다. 하린을 보는 순간 그것이 변했다. 눈동자가 확장되었고, 호흡이 짧아졌다.
"넌 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린이 거울에서 돌아섰다. 라윤과의 거리는 세 발짝. 그 거리가 무한대처럼 느껴졌다.
"누구를 선택하는 건가요?"
"나를."
라윤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한 발짝 다가올 때마다 호흡이 얕아졌다. 마치 얼음이 금이 가는 소리처럼, 무언가 부서질 듯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다른 선택지가 있나요?"
하린이 물었다. 그녀의 눈은 흐렸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
라윤은 그 눈을 봤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손이 떨렸다.
"있다."
그가 한 발 더 다가섰다.
"가문의 복권. 명예. 모든 것을 되찾는 것. 네 가족의 이름을 되살리는 것. 아버지의 누명을 풀고, 형과 함께 다시 살아가는 것."
라윤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말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넌 그것을 원했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하린은 그의 말을 들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뭔가 중요한 것 같았다. 뭔가 자신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기억은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런 게 있었나요?"
"있었다."
라윤이 더 가까이 다가섰다. 이제 거리는 한 발짝. 그의 손이 하린의 볼을 감싸 안았다.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넌 나를 이용하려고 했다. 요리로, 감정으로, 모든 것으로. 그리고 나는 넌 잊을 수 없게 만들려고 했다."
라윤이 말했다. 그의 이마가 하린의 이마에 닿았다.
"넌 내 것이 되어야 했다. 완전히."
침전의 문이 또 다시 열렸다. 이번엔 황후 나혜경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냉정했고, 눈빛은 검았다.
"황제 폐하."
나혜경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조정 회의에서 당신의 정신 상태를 문제 삼을 예정입니다. 식관 이하린의 영향력이 황제 폐하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고."
라윤은 천천히 돌아섰다. 하린의 손을 잡은 채로. 그의 눈빛은 다시 얼어붙었다.
"그렇군."
"따라서 제안합니다. 이 여자를 버리시고, 정상적인 정치 활동으로 복귀하십시오. 그렇다면 황태자 폐하가 중보를 서겠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의 가문 복권을 약속하겠습니다. 그녀가 가고 싶다면."
나혜경이 말했다. 그녀의 입꼬리에는 미소가 떠 있었다.
하린은 황후를 봤다. 그 여자의 얼굴을 인식했다. 중요한 사람. 뭔가 협박한 사람. 하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가."
라윤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궁중의 모든 신하들이 듣는 듯한 음성이었다.
"다시 들어올 생각 말아라."
"황제 폐하—"
"나가!"
라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침전의 기둥이 울렸다. 나혜경은 순간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얼굴에 분노가 스쳤지만, 곧 자신을 추스르고 몸을 돌렸다.
"후회하실 겁니다. 모두가."
나혜경이 말했다. 그리고 나갔다.
침전은 다시 침묵으로 가득 찼다.
라윤은 하린을 다시 봤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이.
"넌 선택할 수 있다."
라윤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눈빛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흐르고 있었다.
"가거나, 남거나."
"가면... 뭐가 되나요?"
하린이 물었다.
"다시 살아간다. 가문의 복권을 받고, 형과 함께 그 이름으로 다시 시작한다."
라윤이 창문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남으면요?"
하린이 물었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흐렸지만,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라윤은 창문에서 아래쪽 정원을 내려다봤다. 이준호가 상복을 입은 채 서 있었다. 형은 여전히 누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죠?"
하린이 물었다.
"네 형이다."
"그 사람이 날 부르고 있어?"
"그렇다."
라윤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더욱 차가워졌다.
"나가면, 저 사람과 함께 갈 수 있다. 그리고 다시는 나를 보지 않을 것이다."
하린은 라윤의 말을 들었다. 그 말이 중요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중요한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기억은 계속 사라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흐릿해지고, 아버지의 손이 희미해지고, 형의 얼굴이 멀어져 갔다. 마치 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남으면요?"
하린이 다시 물었다.
라윤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눈은 검었다.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눈. 그리고 동시에 그 안에는 무언가 절망적인 것이 흐르고 있었다.
"남으면, 넌 영원히 나의 것이 된다. 나 외에는 아무도 필요 없게 된다. 나 외에는 아무도 기억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 나 자신도."
라윤이 말했다. 그 말에는 선택이 아닌 선언이 담겨 있었다.
침전 바깥의 백의관은 여전히 복도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붉었다. 그는 침전 안의 목소리들을 들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선택의 시간. 그리고 자신이 지킬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칼을 들어야 할 시간.
손가락이 칼의 자루에 닿았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 내일 조정 회의에서 황후는 황제의 정신 상태를 문제 삼을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백의관은 이미 알고 있었다. 황제를 보호하거나, 하린을 구출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주방에서 송미래는 여전히 칼을 들고 있었다. 손은 떨리고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돌아와. 제발."
송미래가 중얼거렸다.
"어떤 선택을 하든, 돌아와."
침전 안에서 하린은 두 가지를 봤다. 창문 밖의 형. 그리고 자신 앞의 황제.
형의 얼굴은 흐렸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왜 자신을 부르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뭔가 슬픈 감정이 흘러나왔다.
라윤의 얼굴은 명확했다. 모든 선이 뚜렷했다. 그의 눈, 그의 코, 그의 입. 모든 것이 선명했다.
하린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라윤을 향해.
"나... 남을 거 같아요."
하린이 속삭였다.
"왜?"
라윤이 물었다.
하린은 한참을 생각했다. 왜일까? 가문의 복권이 좋지 않은가? 형이 싫은가? 그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형과의 추억, 가문의 이름, 자신의 정체성. 모두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것을 선택했다. 왜?
"기억 안 나요."
하린이 말했다.
"뭘 기억 안 나는데?"
"왜 가야 하는지."
하린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왜 저 사람이랑 가야 하는지. 왜 그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지. 왜 뭐든 기억해야 하는지."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라윤의 가슴으로. 그 안의 심장이 느껴졌다. 뛰고 있는 심장.
"이것만 알아요."
하린이 말했다. 그녀의 눈은 이제 맑았다.
"이것만 기억나요. 이것만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 같아요."
라윤은 그 손을 감쌌다. 자신의 양손으로.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가슴에 더 깊게 눌렀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라윤이 물었다.
"네."
하린이 답했다.
창문 아래에서 이준호는 더 이상 누나를 부르지 않았다. 상복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누나가 이미 떠나갔다는 것을. 그 누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하린의 손가락이 라윤의 손목을 감싸 안았다.
"절대 놓지 마요."
하린이 말했다.
"절대."
라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를 더 강하게 안았을 뿐이다. 침전의 어둠 속에서.
조정 회의장의 황후는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아버지의 행동을 기록하고 있었다. 궁중의 모든 파벌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침전 안의 두 사람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린의 기억은 계속 사라지고 있었다. 형의 목소리, 어머니의 얼굴, 가문의 이름. 모두 흐릿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라윤.
그 이름만큼은.
그 이름만은.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
밤이 깊어갔다. 자정을 지나 새벽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침전의 침대에서 라윤은 하린을 안고 있었다. 그녀의 숨이 고르게 흐르고 있었다. 이미 잠이 든 것 같았다.
라윤은 그녀의 얼굴을 봤다. 창백한 얼굴. 낯선 눈.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 얼굴.
라윤의 입가에 처음으로 무언가가 떠올랐다. 웃음이 아니었다. 눈빛이 더 어두워졌고, 호흡이 깊어졌다. 감정 억압 속에서 피어나는 것, 절망과 소유욕이 뒤섞인 그것.
"나는 너를 잃지 않을 거야."
라윤이 속삭였다.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하린의 귀에 닿을 듯이.
"너는 내 것이고, 영원히 내 것이 될 거야."
침전 바깥의 백의관은 여전히 복도에 서 있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손은 칼의 자루에 놓여 있었다.
내일 조정 회의에서 황후는 황제의 정신 상태를 문제 삼을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백의관은 이미 알고 있었다.
황제를 보호하거나, 하린을 구출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칼의 자루는 차갑고 단단했다.
중요한 것은 침전 안의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 모두 이미 선택을 마친 것이었다.
하린은 자신의 이름을 잃어도, 자신의 기억을 잃어도,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도.
라윤의 곁에 남기로.
그리고 라윤은 하린이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절대 놓지 않기로.
그 선택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