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 검사 결과지를 집어 든 손이 떨렸다.
협회 의료실의 형광등 아래서 이준호는 종이 한 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6년 전 게이트 붕괴 이후 매년 받아온 강화 판정. 올해는 달랐다.
**신체 강화 불가 판정. 등급: E(영구 고착)**
의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나 흡수율이 0에 수렴합니다. 더 이상의 강화는 기대 어렵습니다."
0에 수렴한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준호는 잘 알았다. 6년 전, 게이트 붕괴로 신체가 고착된 직후부터 그는 매년 이 검사를 받았다. 처음엔 의사들도 "시간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그 희망은 수치로 죽어갔다. 마나 흡수율 8% → 3% → 0.5% → 그리고 이제 0.
"다른 길을 찾는 것을 추천합니다. 헌터 외에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으니까요."
의사는 이미 수백 번 한 말을 반복했다. 이준호는 답할 힘이 없었다.
협회 로비로 나오며 그는 휴대폰을 켰다. 엄마로부터의 부재중 전화가 12통. 문자 메시지는 읽지 않았다. 내용이 뻔했으니까.
이준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협회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타기 전에 그는 한 번 뒤를 돌아봤다. 협회 건물의 거대한 로고—황금색 방패에 새겨진 헌터의 상징. 그 아래서 수백 명의 헌터들이 매일 드나들었다. E등급부터 S등급까지. 그중에서도 S등급은 국가의 자산처럼 취급받았다. A등급도 충분히 대우받았다. B등급은 중산층이었다. C등급은 노동자였다.
E등급은?
E등급은 이준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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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서울 외곽의 제한 구역.
이준호는 협회 감시 카메라의 사각지대를 통해 펜스를 넘었다. 손가락 관절이 부스러질 듯 아팠다. 여전히 신체는 E등급이었다. 6년간 강화되지 않은 그 몸이.
게이트는 산 중턱에 있었다. 협회에 신고되지 않은 미등록 게이트. 이준호가 우연히 발견한 이곳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협회 감시망에 걸리지 않는 낡은 동굴 입구. 그 안에서만 자신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나 결정이라도 하나 채취해오면, 최소한 자신이 완전히 무능한 건 아니라는 증거라도 될 것 같았다.
이준호는 낡은 헬멧을 쓰고 손전등을 켰다. 게이트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변했다. 습도, 온도, 심지어 중력까지도. 게이트는 다른 세계였다.
발을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진흙이 신발에 묻었다. 손전등 광선이 비추는 곳마다 이상한 생물의 흔적이 보였다. 뼈다귀, 낙엽처럼 말린 피부, 그리고—
움직임.
이준호는 손전등을 재빨리 돌렸다. 동굴 깊숙한 곳에서 뭔가 웅크리고 있었다. 게이트의 생물인가? 아니면—
그것은 정령이었다.
반투명한 몸, 마치 연기처럼 흩어질 듯한 형태. 그것은 거의 죽어있었다. 몸의 반 이상이 이미 사라져가고 있었다.
**"...헌터?"**
정령의 음성은 바람 같았다. 귀가 아니라 뇌에 직접 울렸다.
이준호는 움직이지 못했다. 고등급 게이트 내부에서나 만날 수 있다는 정령을 본 적이 없었다. 협회 교과서에서도 정령은 이론상의 존재였다. 신화처럼 취급받았다.
"...도망쳐."
정령이 말했다.
"이 구역은... 너 같은 약한 것이... 살 수 없다."
이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다. 자신은 약했다. E등급. 영구 고착. 더 이상 강해질 수 없는 몸. 그 사실을 오늘 아침 의료실에서 또 한 번 확인했다.
"넌... 뭐야?"
이준호가 물었다.
정령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반투명한 몸이 떨렸다.
"라이라. 나는... 이곳의... 주인이었다."
**과거형이었다.**
"주인이었어?"
"이 게이트가... 닫혀가고 있다. 차원이... 붕괴되고 있다. 나도... 사라진다."
라이라의 몸이 더 희미해졌다. 이준호는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섰다. 죽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 항상 불편했다.
"너는... 왜 여기 왔나?"
"...증명하고 싶어서. 내가 완전히 무능한 건 아니라는 것을."
그 말이 나가는 순간, 이준호 자신도 놀랐다. 자신이 진짜 원했던 말이 그것이었단 걸 깨달았다.
라이라가 웃음처럼 보이는 진동을 냈다.
"약함을 인정하는 자는... 드물다."
"뭐?"
"나와... 계약하지 않겠나?"
이준호는 정령을 바라봤다. 그 반투명한 형태, 사라져가는 몸. 죽어가는 존재.
"계약?"
"내 힘을... 너에게 준다. 대신..."
라이라가 가까워졌다. 그 움직임은 부드러웠지만, 이준호의 전신이 경계했다.
"내가 필요한 것을... 받는다."
"뭘?"
"감정. 기억. 그리고..."
라이라는 말을 멈췄다. 반투명한 눈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너의 약함."
이준호는 순간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약함을 어떻게 주는가? 그건 이미 자신이 가진 것 아닌가?
"계약 조건은... 하나다. 넌 절대 자신을 거짓으로 포장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약함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 순간만... 내 힘을 빌릴 수 있다."
"그게 무슨..."
"약함을 부정하는 자는... 내 힘을 쓸 수 없다. 강함만을 추구하는 자도... 마찬가지다. 오직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나와 함께할 수 있다."
이준호의 손이 다시 떨렸다. 이건 함정처럼 들렸다.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라니. 그럼 자신은 계속 약할 텐데. 그런데도 이 정령은 그걸 조건으로 내걸었다.
"대가는?"
"감정 하나. 기억 하나. 매 계약마다... 넌 뭔가를 잃는다. 하지만 그 대신... 불가능한 힘을 얻는다."
불가능한 힘.
그 말이 이준호의 가슴을 후벼파고 들어왔다.
"다시 강해질 수 있어?"
이준호는 숨을 멈췄다. 의료실의 그 종이가 떠올랐다. 마나 흡수율 0. 영구 고착. 끝.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헌터로서의 미래, 가족의 기대, 자신의 존재 이유까지 모두 그 한 줄에 묻혔다.
그런데 이 정령은 뭔가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신체는... 여전히 약하다. 하지만 약함 위에서... 초월적 힘을 쓸 수 있다."
약함 위에서 초월적 힘을.
그것은 모순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정령은 자신을 인정하고 있었다. 약한 그대로를.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펼쳤다. E등급의 손. 6년 동안 강화되지 않은 그 손. 의료실에서 영구 고착 판정을 받은 그 손.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하겠어."
라이라가 움직였다. 반투명한 손이 이준호의 가슴을 스쳤다.
그 순간, 세상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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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가 분출했다.
이준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손가락 끝에서, 발끝에서, 머리끝에서 마나가 흘러나왔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열감. E등급의 신체가 초월적 힘을 담아내려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E등급의 신체에서 이토록 거대한 에너지가 나올 수 있다니.
이준호는 무릎을 꿇고 싶었다. 기쁨인지 공포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감정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근육이 진화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힘이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동굴의 돌이 울렁거렸다. 마나의 파동이 공기를 떨게 했다.
그러나 동시에.
뭔가 빠져나갔다.
이준호는 손을 놨다.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엄마와 함께했던 날. 엄마가 주방에서 국을 끓이던 모습. 그 국의 맛. 엄마의 목소리. 그 날씨. 그 시간. 모두 사라졌다. 마치 사진에서 한 장면이 지워진 것처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도 기억할 수 없었다. 단지 '없다'는 감각만 남았다. 뭔가 중요한 것이 사라졌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왼쪽 가슴에서 뭔가 사라지는 느낌. 감정의 일부가 빨려나가듯이. 그것이 기쁨이었는지 슬픔이었는지, 자신의 감정이었는지 남의 감정이었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이준호는 게이트의 진흙 위에 무릎을 꿇었다. 손과 발이 떨렸다.
"무서운가?"
라이라의 음성이 들렸다. 그 정령은 이제 조금 더 선명해 보였다. 이준호의 것을 빨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무... 뭐였어?"
이준호가 묻자, 라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만이 남았다. 그리고 이준호는 깨달았다. 방금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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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에서 나온 건 새벽 2시 30분이었다.
이준호의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초월적 힘의 여운이 남아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이기만 해도 주변 공기가 부스럭거렸다. E등급의 신체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관목 사이를 빠져나가려던 찰나.
"움직이지 마!"
외침이 들렸다.
이준호는 순간 얼어붙었다. 손전등 여러 개가 어둠을 뚫었다. 협회 추적팀. 회색 조끼를 입은 5명의 요원들이 이준호를 포위했다.
"이준호! 당신은 미등록 게이트에 불법으로 진입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준호의 머리가 돌았다. 항복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방금 받은 힘이 아직도 몸에 남아있었다. 이 상태라면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 협회의 적이 되는 것이었다.
"손을 들어!"
요원이 다시 외쳤다. 그 순간, 이준호의 눈 색깔이 바뀌었다. 계약의 표시였다. 마나가 몸 표면에 일렁였다.
요원들이 움직였다. 그들도 전투 준비를 갖춘 헌터들이었다.
이준호는 손을 펼쳤다. 마나가 손바닥에서 소용돌이쳤다. 주변의 공기가 압축되고, 흙이 떠올랐다. 게이트의 차원 에너지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그 에너지는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와 주변 공간 자체를 뒤틀었다.
"뭐야, 이게—"
요원 중 한 명이 외쳤다.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마치 얇은 종이가 찢어지는 것처럼. 그 틈새로 초월적 힘이 흘러나왔다.
이준호는 그 틈새를 통해 몸을 날렸다. 공간 자체를 미끄러지듯이 빠져나가는 느낌. 요원들의 외침이 들렸지만, 그것은 이미 다른 차원의 소리였다.
이준호는 절벽 너머로 몸을 던졌다. 게이트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로. 아래는 어두운 숲이었다.
"추격!"
요원들의 외침이 들렸지만, 이준호는 그 소리를 뒤로했다. 초월적 힘이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마나가 공중에서 그를 붙잡았다. 중력을 거스르는 힘으로.
공중에서 몸이 떨렸다. E등급의 신체는 절벽을 내려올 수 없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내려오고 있었다. 공포와 쾌감이 뒤섞여 척추를 타고 흘렀다. 이것이 죽음인가, 아니면 거듭남인가?
5미터. 10미터. 20미터.
그 아래는 어두운 숲이었다.
이준호는 나무 위에 착지했다. 나뭇가지가 비틀리고 부러졌다. 하지만 그는 넘어지지 않았다. 초월적 힘이 그를 지탱했다. 마나가 그의 발목을 감싸 균형을 잡아줬다.
위에서 손전등 빛이 흔들렸다. 요원들이 절벽 가장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내려올 수 없었다. 정상적인 신체의 한계였다. 하지만 이준호는 E등급의 신체로 그것을 해냈다. 약함 위에서.
이준호는 숲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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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압구정동의 원룸.
이준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초월적 힘이 이제 빠져나갔지만, 그 여운이 남아있었다.
휴대폰에는 협회로부터의 긴급 공지가 들어와 있었다.
**[긴급 공지] 이준호(E등급 헌터)는 미등록 게이트 불법 진입 혐의로 수사 대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협회 소환에 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래에는 다른 공지도 있었다.
**[게이트 내부 이상 신호] 제한 구역 게이트에서 미등록 생명체의 흔적이 적발되었습니다. 협회는 해당 게이트를 폐쇄하고 추가 조사를 진행합니다.**
미등록 생명체. 라이라를 말하는 거였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여전히 E등급의 신체. 약하고, 강화 불가능한 그 손. 하지만 방금 그 손으로 공간을 뒤틀었다. 절벽을 내려왔다.
그리고 뭔가가 빠져있었다.
이준호는 집중했다. 자신의 과거를 더듬어보려고. 어린 시절의 기억들. 엄마와 함께했던 시간들. 형과 누나들과의 추억들.
대부분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 중 일부는 마치 물 위에 떠있는 글씨처럼 흐릿했다. 어떤 장면이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없다'는 것만 느껴졌다. 마치 사진에서 한 사람이 지워진 것처럼. 그리고 그 사라진 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그리고 가슴 왼쪽에서는 여전히 뭔가 부족한 느낌이 남아있었다. 감정의 일부가 사라진 것처럼. 기쁨인지 슬픔인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채로.
이준호는 눈을 감았다.
불가능한 힘. 그것을 위해 자신은 무엇을 잃었는가?
그리고 앞으로 또 무엇을 잃게 될 것인가?
협회는 자신을 수사 대상으로 지정했다. 그들은 라이라를 찾을 것이다. 그들은 미등록 게이트를 조사할 것이다. 그들은 진실을 캐낼 것이다.
하지만 이준호는 이미 깨달았다. 라이라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게이트가 붕괴되고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라이라가 자신에게 더 요구할 때는 어떻게 될까? 계약을 또 맺어야 할까? 더 많은 것을 잃으면서?
이준호는 손을 펼쳤다. 손가락 끝에서 미약한 마나가 흘러나왔다. 계약의 증거.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증거였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이준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문자가 들어왔다.
**[라이라입니다. 우리의 계약이 생각보다 빨리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당신의 감정이 더 필요합니다.]**
이준호의 손이 얼어붙었다.
감정이 더 필요하다니.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약이 생각보다 큰 대가를 요구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라이라 자신이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는 뜻인가?
이준호는 문자를 다시 읽었다. 마지막 문장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당신의 감정이 더 필요합니다.**
더 필요하다.
그렇다면 처음 계약에서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기게 된다는 뜻이었다. 더 많은 기억이 사라질 것이고, 더 많은 감정이 빨려나갈 것이다.
이준호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협회의 추적은 계속될 것이다. 라이라의 요구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계속해서 뭔가를 잃을 것이다.
강함을 얻기 위해 약함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준호는 깨달았다.
약함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이런 뜻일 리 없다고.
협회 항복. 라이라와의 재계약. 아니면 도주.
세 가지 선택지가 남았다. 그 중 어느 것을 선택하든 돌아갈 수 없었다.
원룸의 어둠 속에서 계약의 빛이 다시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