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10화 「시간의 선물」

강현의 손가락이 홀로그램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서울 중앙 지점의 지하 전산실. 검은 화면들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정확히 689일 16시간 43분이다."

서태환이 옆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시스템 접근 권한을 얻는 데만 3시간이 걸렸다. 크로노스 그룹의 중앙 데이터베이스는 세계에서 가장 견고한 방어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작할까?"

강현이 손을 내밀었다. 서태환이 손목을 맞잡았다.

689일. 그것이 강현이 남긴 모든 시간이었다. 타임칩의 붉은 숫자가 깜빡였다.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생명이 스러져가는 세계. 이제 그것을 바꿀 차례였다.

강현이 첫 번째 명령어를 입력했다.

``` GLOBAL_TIMEBANK_RESET.EXE ```

화면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코드가 흐르기 시작했다. 전국 5,247개 지점의 타임칩이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저음의 신호음. 마치 지진의 전조처럼.

"3분 안에 경고가 올 거다. 응답팀이 올 거고—"

"상관없다."

강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다. 689일. 그것으로 충분한가? 이 거대한 기계를 멈출 수 있을까? 죽음 앞에서 두려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민지를 생각했다. 박수진의 아들을 생각했다. 이준호를 생각했다. 그들의 시간이 더 이상 빼앗기지 않기를.

두 번째 명령어를 입력했다.

``` DELETE_ALL_DEBT_RECORDS ```

그 순간이었다. 화면 너머로 수천 개의 신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별이 떨어지는 것처럼. 각각은 한 사람의 타임칩이었다. 50년, 30년, 100년. 그들이 짊어진 빚의 숫자들이 0으로 수렴했다.

강현은 그 신호들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각 신호마다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이준호(50년 채무) — 타임칩 신호 소멸.

박수진(65년 채무) — 채무 기록 삭제.

김준석(120년 채무) — 회수 대상 해제.

그리고 수백만 개의 이름들. 얼굴 모르는 사람들. 강현이 추적하지 않은 사람들. 하지만 같은 악순환 속에서 죽어가던 사람들.

"강현."

서태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강현은 듣지 못했다. 이미 세 번째 명령어를 입력했다.

``` INITIALIZE_BASIC_TIME_ALLOCATION ALL_CITIZENS: 80_YEARS ```

모든 국민에게 80년.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구나 가지는 시간. 팔 수도 없고, 빌릴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시간.

알람이 울렸다. 붉은 불이 깜빡였다.

"침입 감지. 임도영 직속팀이 15초 안에 도착한다."

강현의 손가락이 마지막 명령어를 누르고 있었다.

``` BROADCAST_SYSTEM_CHANGE ```

전국 모든 타임칩에 동시 메시지 전송.

*"빚은 끝났다. 당신들은 자유다. 더 이상 시간을 팔지 마라. 더 이상 도망치지 마라. 거리로 나와라."*

문이 터졌다. 무장한 인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뒤로 임도영이 나타났다.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 크로노스 그룹의 실질적 지배자.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강현."

임도영이 말했다. 목소리는 차갑지만 떨리고 있었다.

"넌 뭘 한 거야?"

"시스템을 바꿨어."

강현이 대답했다.

"이제 끝이다."

타임칩의 붉은 숫자가 떨어지고 있었다.

689일 → 688일 → 687일

세 번의 명령어마다 하루씩. 강현의 시간이 깎여나가고 있었다. 시스템 방어막을 뚫기 위해 골든핑거 능력을 역으로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시간 소모. 강현의 몸이 뜨거워졌다. 서태환이 강현의 팔을 잡았다.

"나가자!"

하지만 강현은 서 있었다. 타임칩을 보고 있었다. 숫자가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강현!"

"미쳤나—"

"이건 내 몫이다."

강현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서태환을 밀어냈다. 서태환이 창문으로 뛰어나갔다. 강현은 다시 키보드로 돌아갔다. 손가락이 떨렸다.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강현을 지탱했다.

마지막 명령어.

``` TRANSFER_REMAINING_TIME_TO_COLLECTIVE_POOL ```

자신의 모든 남은 시간을 공유 자산으로 분산한다. 689일의 시간 데이터가 전국 타임칩 네트워크로 쪼개져 흘러들어간다. 수백만 개의 칩이 동시에 그 시간을 받아들인다. 한 사람의 생명이 수백만 명에게 나뉘어 저장되는 순간.

총이 울렸다. 강현의 어깨가 터졌다. 하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임도영이 총을 내렸다. 그의 얼굴은 절망으로 가득했다.

"넌... 미쳤어."

"아니다."

강현이 뒤를 돌아봤다. 임도영의 눈을 마주쳤다.

"난 처음으로 제정신이 들었어."

타임칩의 숫자가 0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50일.

10일.

1일.

0시간 0분 0초.

강현의 손이 떨어졌다. 타임칩이 검은색으로 변했다.

강현의 눈이 감겼다.

---

검은 어둠.

아무것도 없는 공간.

강현은 떠 있었다. 아니, 침몰하고 있었다. 끌려가고 있었다. 아래로, 계속 아래로.

*죽음이다.*

생각이 떠올랐다. 민지는? 자신이 남긴 것이 충분할까?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때였다.

따뜻함.

누군가의 손이 강현을 잡았다. 살아있는 누군가.

"아빠."

민지의 목소리였다.

"내가 아빠를 놓치지 않을 거야."

그 목소리가 강현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고마워. 아빠. 내 시간을 나눠줘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박수진이었다.

"당신이 없었다면 내 아들은 죽었을 거다. 당신의 선물이었다는 걸 이제 알았어."

또 다른 목소리들이 모여들었다. 이준호. 김준석. 그리고 수백만의 목소리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강현의 몸이 따뜻해졌다. 어둠이 걷혔다.

눈을 떴다.

---

병원 천장.

하얀 형광등.

강현의 눈이 떠졌다. 호흡기가 콧구멍에 꽂혀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어깨가 아팠다. 하지만 그것도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옆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강현."

서태환이었다.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넌... 어떻게..."

강현이 입을 열었다.

"타임칩이 689일을 받았어. 전국의 모든 채무자가 당신의 시간을 나눠받았어. 수백만 명이."

서태환이 강현의 손을 잡았다.

"그들이 당신을 구하기 위해 나눠준 시간이 다시 당신에게로 돌아왔어. 당신이 공유 풀에 시간을 넣으면서 시스템이 그들과 연결되었거든. 그들이 당신을 놓고 싶지 않았어."

강현이 자신의 팔을 봤다. 타임칩이 있었다. 하지만 숫자가 아닌 다른 것을 표시하고 있었다.

*"연결: 민지(+15년) | 박수진(+8년) | 이준호(+30년) | 김준석(+12년) | 서태환(+20년) | 그 외 4,872,394명"*

강현의 눈이 감겼다. 눈물이 흘렀다.

"3시간 동안 심장이 멈춰 있었어. 의료팀은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타임칩이 반응했고, 시스템이 당신을 되돌렸어. 수백만 명이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서태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크로노스 그룹이 무너졌어. 임도영은 체포됐고, 시스템 공개와 함께 정부가 움직였어.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고 있어. 모든 국민에게 80년을 보장하는 법. 당신이 시작한 것들이 계속되고 있어."

"임도영은?"

"법정에 서게 될 거야. 그의 제국은 끝났어."

---

1주 후.

강현은 병원을 나왔다. 어깨의 총상이 완전히 아물지 않았지만, 걸을 수 있었다.

민지가 병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14살의 여자아이. 아버지를 잃었지만 이제 다시 가족을 찾은 아이.

"아빠!"

민지가 뛰어왔다. 강현이 그녀를 안았다.

"아빠가... 죽었다고 했는데..."

"난 죽지 않았어. 너 때문에."

강현이 민지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이제 우린 뭐 하는 거야?"

"함께 살아가는 거야. 그게 다야."

---

2주 후.

서울 광화문 광장.

강현은 거기 서 있었다. 아직 총상이 완전히 아물지 않았지만, 서 있을 수 있었다.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수십만 명. 아니, 수백만 명. 거리로 나온 모든 채무자들. 그리고 그들을 환영하는 사람들.

더 이상 타임칩의 숫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80년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 상관없이. 부자와 빈자 상관없이.

"강현."

민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 이제 뭐 하는 거야?"

강현이 민지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시간을 함께 쓰는 법을 배우는 거야. 누군가가 자기 시간을 어떻게 쓸지 함께 생각하는 거지."

민지가 웃었다.

"그게 뭐야? 다시 회수하는 거야?"

"아니다. 이번엔 다르다."

강현이 광장을 내려다봤다. 박수진이 보였다. 자신의 아들을 안고 있었다. 아이가 웃고 있었다. 5년의 시간이 남았으니까 아이는 살 수 있었다.

김준석도 보였다. 하지만 더 이상 강현을 경멸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강현이 자신의 시간을 돌려줬으니까.

3주 전, 이준호의 무덤 앞에 민지가 꽃을 놔뒀다.

*"이준호 할아버지, 이제 난 혼자가 아니야. 강현 아저씨가 있어. 고마워."*

그날 이후로 강현의 타임칩은 계속 변했다.

*"연결: 민지(+15년 2개월) | 박수진(+8년 7개월) | 이준호(+30년) | 김준석(+12년 1개월) | 서태환(+20년) | 그 외 4,872,403명"*

더 많은 사람들이 강현을 찾았다. 자신의 시간을 나누고 싶었다. 강현이 자신들을 구했으니까.

강현은 깨달았다.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변화였다.

회수는 끝이 아니었다. 선물이었다.

빚은 끝이 아니었다. 연결이었다.

---

3주 후.

강현과 민지가 새로 지은 건물 앞에 섰다. 간판이 붙어 있었다.

*"시간 안내소"*

"여기서 뭐 하는 거라고?"

민지가 물었다. 15살의 민지. 학교에도 다니고 있었다. 미래가 있었다.

"사람들이 자기 시간을 어떻게 쓸지 함께 생각하는 곳이야."

"그래서 강현 아저씨는?"

"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야."

강현이 타임칩을 봤다. 이제 시간 숫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들이 기록되고 있었다.

*"3월 15일: 민지와 함께 공원에서 시간을 보냄 (행복) | 4월 2일: 박수진의 아들 수술 성공 (감사) | 5월 8일: 김준석이 처음 웃었다 (용서) | 7월 22일: 이준호 추도식 (평온) | 8월 30일: 서태환과 함께 새로운 법을 만들다 (희망)"*

강현이 중얼거렸다.

"이제 난 충분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어. 왜냐하면 난 혼자가 아니니까."

민지가 강현의 손을 잡았다. 둘이 건물로 들어갔다. 안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자신의 시간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 자신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고 싶은 사람들.

강현은 첫 번째 사람에게 앉아서 물었다.

"당신은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쓰고 싶으신가요?"

그 사람이 대답했다.

"제 아이를 키우고 싶어요. 전에는 시간이 없어서 못했는데...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강현이 그 사람의 손을 잡았다.

"그럼 함께 해보죠. 어떻게 하면 될지 함께 생각해봅시다."

강현의 타임칩이 다시 빛났다.

*"사랑"*

외부에서는 누군가 강현을 찾고 있었다. 크로노스 그룹의 잔당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강현을 해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강현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민지도 있고, 박수진도 있고, 서태환도 있고, 그리고 수백만 명의 연결이 있었다.

그 연결 속에서 강현은 마침내 살아있었다.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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