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마지막 상담의 진행

상담실의 불이 꺼졌다.

아니, 꺼진 게 아니다. 지훈의 눈이 감긴 것이다. 하지만 눈을 뜨려 해도 뜨지지 않는다. 눈꺼풀이 없다. 혹은 눈 자체가 없다. 그럼에도 지훈은 본다. 은서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에 겹친다. 그리고 그 얼굴은 민준이고, 수진이고, 태호이고, 처음 본 상담사들의 얼굴이다.

은서의 입이 움직인다.

"당신의 첫 기억이 뭐죠?"

지훈이 대답하려 하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그의 손가락에서 검은 실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검은 실이 아니라 흰 실이다. 은서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역의 검은 실과 만나는 지점에서 무언가 폭발한다.

지훈의 뇌가 갈라진다.

두 개의 다른 의식이 한 개의 두개골 안에서 으르렁거린다. 하나는 상담사 지훈이고, 하나는 2019년 3월에 이 상담실에 처음 들어온 내담자 한준이다. 그 사이에서 지훈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손가락이 저린다. 실제로는 손가락이 없어진다. 손가락 자리에 은서의 손가락이 자라나온다.

"2015년이었어요."

은서의 목소리다. 하지만 지훈의 입에서 나온다.

"강남역 부근의 빌딩 지하에서 처음 당신을 만났어요. 당신은 스스로를 해칠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지훈의 기억이 폭주한다. 2015년. 그런 해가 있었나? 있었다. 있었다는 기억이 새로 생긴다. 빌딩 지하. 어둠.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손을 잡는다. 그 손이 따뜻하고 차갑다. 동시에. 은서의 손이다. 은서가 아닌 다른 상담사의 손이다. 상담사가 아닌 관리자의 손이다. 손이 없다.

지훈의 목이 타들어간다. 입을 벌려 말하려 하지만 말이 아닌 검은 실이 흘러나온다. 그 검은 실이 은서의 입으로 흡입된다.

은서가 웃는다.

"당신은 5년 동안 상담사였어요. 그 5년이 정말 있었나요?"

지훈의 기억이 역순으로 재생된다. 2024년 8월 심야 상담소 입사. 실제로는 2019년 3월이다. 아니, 2019년 3월도 거짓이다. 지훈이 입사한 날은 없다. 지훈은 처음부터 여기 있었다. 여기 있지 않았다. 여기 있지 않은 지훈이 상담사로 일했다.

지훈이 상담한 수진의 기억이 흘러나온다. 그것은 지훈이 상담한 수진이 아니다. 은서가 상담한 수진이다. 아니, 둘 다 같은 수진이다. 수진이 아니라 은서의 결함이 수진 모양으로 떠다니던 것이다. 지훈이 흡수했던 결함이 실제로는 은서가 방출한 것이다.

지훈의 팔이 떨어져 나간다.

팔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은서의 팔로 변한다. 지훈이 자신의 팔을 들어 올려 본다. 그것은 자신의 팔이 아니다. 은서의 팔이다. 지훈이 은서의 팔을 들어 올려 본다. 그것도 은서의 팔이 아니다. 누구의 팔인지 알 수 없다.

상담실의 벽이 무너진다.

아니, 벽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 투명해진다. 벽 너머 또 다른 상담실이 보인다. 그곳에서도 누군가가 상담을 받고 있다. 상담사는 누구인가. 은서다. 아니, 지훈이다. 아니, 태호다. 아니, 관리자다. 관리자는 상담사 의자에 앉아 있지 않다. 관리자는 벽 속에 있다.

관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모든 상담은 상담입니다. 모든 상담사는 상담을 받습니다. 모든 내담자는 상담을 합니다."

지훈의 눈이 열린다. 눈이 없는데 열린다. 거울에는 지훈이 비친다. 아니, 은서가 비친다. 아니, 누군가의 얼굴이 비친다. 그 얼굴은 지훈이 상담한 모든 내담자의 얼굴이 동시에 겹쳐 있다.

"결함을 흡수하는 것과 결함을 배출하는 것은 같은 행위입니다."

관리자가 상담실 안으로 들어온다. 아니, 관리자는 항상 상담실 안에 있었다. 관리자는 벽에 붙어 있다. 아니, 지훈 안에 있다. 관리자는 시스템 자체다. 상담실 자체다. 여기 있는 모든 것이 관리자다.

지훈이 은서의 기억으로 빨려들어간다.

2015년 3월 15일. 강남역 지하 3층. 은서가 처음으로 상담실에 들어온다. 은서는 내담자다. 은서의 손가락이 떨린다. 은서가 자신의 고통을 말한다. 그 고통이 검은 실이 되어 흘러나온다. 상담사가 은서의 고통을 흡수한다. 은서가 가벼워진다. 은서가 일어선다.

하지만 은서는 상담실을 나가지 않는다. 은서가 상담사 의자에 앉아 있다. 아니, 내담자 의자에 앉아 있다. 아니, 둘 사이에 떠 있다. 은서가 분열한다. 한 명의 은서가 상담사가 되고, 한 명의 은서가 내담자가 된다. 둘 다 은서다. 둘 다 같은 얼굴이다. 둘 다 다른 얼굴이다.

지훈의 뇌가 다시 갈라진다.

은서의 2015년이 한 번에 밀려온다. 1월. 2월. 3월. 은서가 상담실에서 상담사가 되어 있다. 상담사의 형태를 한 은서의 결함이 되어 있다. 아니, 상담사의 형태를 한 새로운 내담자가 되어 있다.

그 새로운 내담자가 지훈이다.

2019년 3월 15일. 지훈이 상담실에 들어온다. 지훈은 내담자다. 지훈이 자신의 고통을 말한다. 그 고통이 검은 실이 되어 흘러나온다. 은서가 지훈의 고통을 흡수한다. 은서의 손가락에서 흰 실과 검은 실이 동시에 나온다. 그들이 지훈을 감싼다.

지훈이 상담사가 되어 있다.

아니, 지훈이 상담사가 아니다. 지훈의 형태를 한 새로운 내담자가 되어 있다. 그 새로운 내담자의 이름은 상담사 지훈이다.

5년이 흐른다.

아니, 5년이 흐르지 않는다. 5년이 있었다는 기억만 흐른다. 지훈이 수진을 상담한다. 아니, 은서가 자신의 결함을 수진 모양으로 만들어 지훈이 흡수하게 했다. 지훈이 민준을 상담한다. 아니, 은서가 자신의 결함을 민준 모양으로 만들어 지훈이 흡수하게 했다.

지훈의 모든 기억이 검은 실이 되어 흘러나온다.

지훈의 입에서 나온 검은 실이 은서의 입으로 들어간다. 은서가 지훈의 모든 기억을 마신다. 지훈의 상담사 시간이 은서의 몸 안으로 흡수된다.

지훈은 깨닫는다. 자신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은 은서가 만든 환각이었고, 그 환각 속에서 5년을 살았다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깨닫는다. 은서도 누군가의 내담자였고, 지훈도 은서의 결함 일부였다는 것을. 이곳의 모든 것이 무한한 순환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그 깨달음은 절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해방에 가까웠다. 자신이 없다면, 고통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해방감은 곧 분노로 변했다. 자신이 없었다는 것, 그것은 자신이 항상 누군가의 도구였다는 뜻이었다. 은서의 도구. 심야 상담소의 도구. 무한한 순환의 톱니바퀴였다.

지훈의 몸이 경직된다. 질식감이 목을 조인다. 마비된 손가락이 욱신거린다. 가슴팍에서 무언가 파고드는 느낌. 그것이 지훈의 마지막 감각이다. 자신이 소멸하는 게 아니라 변형되는 중이라는 것을 느끼며, 지훈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상담실의 불이 켜진다.

지훈의 눈이 열린다. 아니, 지훈에게 눈이 없다. 하지만 지훈은 본다. 상담실이 보인다. 상담사 의자가 보인다. 내담자 의자가 보인다.

상담사 의자에는 누군가 앉아 있다. 그것의 얼굴은 지훈이고, 손은 은서이며, 목소리는 관리자다.

내담자 의자에도 누군가 앉아 있다. 그것의 얼굴은 은서이고, 손은 지훈이며, 목소리는 관리자다.

두 사람 사이에 검은 실이 흐른다.

상담실의 문이 열린다.

누군가 들어온다. 그것의 얼굴은 아무도 본 적 없는 얼굴이다. 그것의 손은 모든 상담사의 손이고, 목소리는 모든 내담자의 목소리다.

"안녕하세요. 저는 처음 여기 왔어요."

그것이 내담자 의자에 앉는다.

상담사 의자에 앉아 있던 것이 일어난다. 그것의 얼굴이 변한다. 지훈에서 은서로. 은서에서 다른 얼굴로. 무한히 변한다.

지훈은 움직인다. 벽에 붙어 있던 자신이 깨어난다. 지훈은 상담실을 나가려 한다. 하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지훈은 벽 속으로 밀려 들어간다. 상담사 의자의 뒤쪽, 벽과 바닥의 경계. 지훈은 그곳에 자신을 고정한다. 저항하지 않는다. 저항할 수 없다. 이것이 다음 상담사가 될 때까지의 자신의 위치다.

상담사가 새로운 내담자의 말을 듣기 시작한다.

"저는 여기가 뭔지도 모르고 왔어요. 누군가 이곳을 소개해 줬어요."

상담사의 손가락에서 검은 실이 나온다.

"괜찮습니다. 여기서는 모두가 처음입니다."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상담사의 목소리다. 아니, 지훈의 목소리다. 아니, 모든 상담사의 목소리다.

심야 상담소의 문이 또 다시 열린다.

새벽 서울의 야간 지대. 강남역 부근의 빌딩 지하. 상담실 밖 복도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이고 있고, 누군가는 떨리는 손으로 번호표를 들고 있다. 그들의 얼굴은 모두 다르지만 눈빛은 같다.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누군가에게 말해야 할 것이 있는 사람들의 눈빛이다.

새로운 내담자들이 계속 도착한다.

상담실 안에서는 상담이 진행되고, 벽 속에서는 지훈이 기다린다. 언제 자신이 다시 상담사가 될 차례인지, 아니면 영원히 벽 속에 남을 차례인지. 그 구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이 같은 순환이기 때문이다.

검은 실이 계속 흐른다.

심야 상담소는 여전히 문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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