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담실의 불이 꺼졌다
새벽 10시 47분. 지훈의 손가락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거울 앞 의자에 고정된 채, 그는 자신의 손끝에서 검은 실이 흘러나오는 것을 봤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저려 왔다. 마치 누군가 그의 신경을 하나씩 끊어내는 것처럼. 실들은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거울 안의 얼굴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민준의 얼굴. 수진의 얼굴. 태호의 얼굴. 그리고 자신의 얼굴.
남은 것은 어둠뿐이었다.
"안녕, 지훈."
여인이 들어섰다.
지훈은 숨을 쉬려 했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은서라고 했던 그 여인. 지훈은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다. 본 것 같기도 했다. 거울에서 몇 번이나. 그런데 지금 그녀의 모습은 계속 달라졌다. 윤곽이 명확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형태가 계속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지훈이 눈을 깜빡할 때마다 그녀의 코, 입, 눈의 위치가 조금씩 움직였다.
"나를 아나?"
은서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 가지가 아니었다. 여러 목소리가 겹쳐 있었다. 어떤 목소리는 낮았고, 어떤 목소리는 높았다. 어떤 목소리는 지훈 자신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지훈은 대답할 수 없었다. 호흡이 얕아지고 있었다. 거울 의자에 고정된 손가락에서 검은 실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실들이 상담실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온도가 떨어졌다. 상담실 안의 공기가 차갑고 질척해졌다.
은서가 한 발 다가섰다.
"당신을 데려가러 왔어."
그 말과 함께 지훈의 목이 조여 왔다. 산소 부족. 공황. 두 번째 발걸음. 은서의 형태가 조금씩 명확해졌다. 지훈은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녀를 보는 각도가 계속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은서는 움직이지 않은 채로 있는데, 지훈의 시선이 그녀를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은서가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
지훈은 거부할 수 없었다. 의자에 고정된 팔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손가락이 은서의 손에 닿는 순간, 세상이 반전했다.
검은 실이 아니라 흰 빛이 나타났다.
흰 빛 속에서 지훈은 자신을 봤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상담사 의자가 아닌 내담자의 의자. 그 남자는 손가락이 없었다. 손목에서 검은 실로 끝나 있었다. 그 실들이 공중을 헤매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흐릿했다.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하지만 지훈은 알았다. 그것이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2019년 3월 15일."
은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재 시점의 은서가 아니라, 그 기억 속의 은서. 그때의 상담사 은서. 흰 빛 속에서 그 여인이 다시 나타났다. 지금의 은서와 같은 모습이었다. 윤곽이 명확하지 않은. 얼굴이 계속 변하는.
"당신이 처음 들어왔을 때."
은서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가락에서 검은 실이 흘러나왔다. 실들이 의자에 앉은 남자—지훈—의 손목으로 빨려 들어갔다.
"당신의 이름은 한준이었어."
은서의 목소리가 계속됐다. 기억의 층위가 벗겨지듯이.
"서울 강남구 삼성동. 건설회사 과장. 월급 600만 원. 전세금 3억 5천."
한 호흡. 그 사이에 지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내는 없었어. 아이도 없었어."
기억 속의 지훈—한준—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날 도와주셨어요."
"맞아. 나는 당신의 결함을 흡수했어. 당신의 죽음에 대한 욕망을. 당신의 고독을. 당신의 모든 것."
검은 실들이 한준의 몸 전체를 감쌌다. 그의 형태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상담사로 만들었어."
한준이 사라졌다. 흰 빛만 남았다.
---
현재로 돌아왔다.
지훈의 손이 은서의 손에서 떨어졌다. 그는 의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검은 실이 여전히 그의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알았다. 그 실들이 자신을 묶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그건... 거짓이야."
지훈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내 이름은 지훈이야. 2024년 8월에 입사했어. 나는... 상담사야."
은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도 여러 목소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게 거짓이야."
그녀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지훈은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한 명, 또 한 명, 또 한 명. 모두 다른 얼굴. 모두 같은 눈.
"당신은 5년 동안 내담자였어. 내가 당신의 결함을 흡수하는 동안, 당신은 조금씩 사라졌어. 이름도, 과거도, 모든 기억도."
은서가 상담사 의자 맞은편의 내담자 의자를 가리켰다. 지훈은 그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거울에는 자신이 거기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당신이 일어났어. 상담사 의자로 옮겨 앉았어. 당신 자신도 모르게. 당신의 결함들이 새로운 사람들을 흡수하기 시작했어."
"멈춰."
지훈이 외쳤다. 손가락에 힘을 주려 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않으려고 버티는 손가락. 그 저항이 전신으로 퍼졌다. 근육이 경직되고, 호흡이 얕아졌다. 목이 조여 들었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말도 안 돼. 내 기억이 있어. 내 삶이 있어. 내가 누군지 알아."
지훈의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려던 시도. 실패. 다시 시도. 실패. 반복되는 무력감이 팔 전체로 퍼져나갔다.
은서가 웃음을 멈췄다. 그녀의 얼굴이 한 순간 명확해졌다. 그 얼굴은 지훈의 얼굴이었다.
"당신의 기억? 그건 내가 남겨준 것이야. 내가 당신을 상담사로 만들기 위해서."
거울이 흔들렸다. 상담실의 벽이 울려 퍼졌다. 그 울음은 사람의 울음이 아니었다. 금속음이었다. 기계음이었다.
은서가 상담사 의자로 향했다. 지훈은 자동으로 일어섰다. 의자에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자신을 묶은 것은 검은 실이 아니라 자신의 두 발이었다.
거울 조각들이 공중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서의 손이 허공을 헤쳤다. 유리 파편들이 그 궤적을 따라 회전했다. 지훈은 그 움직임을 따라갔다. 거울 조각 하나가 그의 얼굴에 가까워졌다. 그 안에 비친 것은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한준이었다. 그 다음 조각은 민준을 비춰 주었다. 수진. 태호. 그리고 또 다른 얼굴들. 은서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거울 조각들이 지훈의 주변을 선회했다. 마치 그를 가두는 우리처럼.
"이제 마지막 상담을 시작하자."
은서가 상담사 의자에 앉았다. 지훈은 내담자 의자에 앉아야 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 손가락에서 검은 실이 흘러나왔다.
"당신을 상담해야 돼. 완전히. 철저하게. 모든 것을."
상담을 시작하려는 순간, 지훈 안의 모든 인격이 동시에 깨어났다.
"상담을 받고 싶어."
지훈의 목에서 한준의 목소리가 나왔다.
"상담을 거절하고 싶어."
다른 목소리가 겹쳤다. 민준의 절망감이 섞여 있었다.
"누구인지 알고 싶어."
수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누구도 되고 싶지 않아."
태호의 목소리가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목소리가 모두 동시에 울려 퍼졌다. 상담실이 진동했다. 거울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검은 실들이 상담실 전체를 뒤덮었다.
은서는 웃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야."
거울이 완전히 깨졌다.
---
거울의 파편들이 공중에서 멈췄다.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지훈의 네 목소리는 거울 조각 사이에서 맴돌며 서로를 찾으려 했다. 한준은 상담을 갈구했고, 민준은 거절했으며, 수진은 울부짖었고, 태호는 침묵했다. 네 개의 절망이 한 구멍에서 흘러나왔다.
은서가 움직였다.
상담사 의자에서 일어선 그녀는 천천히 거울 조각들 사이를 걸어갔다. 발밑의 유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오히려 은서가 밟을 때마다 다시 하나로 붙었다. 그녀의 손이 공중을 헤친다. 거울 조각들이 그 손가락을 따라 회전했다. 네 목소리가 한 점으로 모였다.
"당신들이 뭐라고 말하든."
은서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은서 혼자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상담사들의 목소리가 겹쳐 있었다. 1990년대부터 2024년까지, 모든 상담사의 목소리. 여러 입에서 동시에 나오는 듯한 울음.
"결국 하나야."
지훈의 몸이 움직였다. 의지와 관계없이. 손가락에서 검은 실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은서의 손에서 나온 검은 실이, 지훈의 손가락을 통해 그의 몸 속으로 침투했다. 냉기가 팔을 타고 올라왔다. 얼어붙는 듯한 통증. 손목에서 팔꿈치로. 팔꿈치에서 어깨로. 그 냉기가 흉부에 도달했을 때 지훈의 숨이 끊어졌다.
지훈의 눈이 떠졌다. 다른 눈이었다. 한준의 눈이었다.
"멈춰. 제발."
지훈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지훈의 목소리가 아니라 한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훈의 입에서 나왔다.
은서가 한 발 더 다가섰다. 상담사 의자와 내담자 의자 사이의 거리는 1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지훈은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의자는 상담실의 일부였고, 상담실은 지훈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구세요?"
지훈이 물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도 거짓이었다. 모든 목소리가 거짓이었다.
은서가 앉았다. 상담사 의자가 아니라 지훈의 바로 옆, 공중에. 중력이 작동하지 않는 곳에 그녀는 떠 있었다.
"나는 당신이 상담했던 사람이야."
은서가 말했다.
"1990년부터. 2024년까지. 모든 상담사가 상담했던 사람."
그녀의 손이 지훈의 얼굴을 만졌다. 손가락이 지훈의 눈썹을 그렸다. 그 선을 따라 지훈의 얼굴이 변했다. 한준이 되었다가, 지훈이 되었다가, 또 다른 누군가가 되었다. 은서의 손은 따뜻했다. 하지만 그 온기가 지훈의 피부를 녹이는 것 같았다.
"당신들은 모두 내 결함을 담는 그릇이었어. 그릇이 가득 차면, 다음 그릇이 나타났어. 그리고 그 그릇도 가득 차면, 또 다음이."
상담실의 벽에 붙은 사진들이 떨어졌다. 1990년부터 2024년까지의 모든 상담사 사진. 그것들이 공중에서 회전했다. 사진마다 얼굴이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모두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지훈이 일어서려 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왜... 이러는 거야?"
목소리가 떨렸다. 이번에는 누구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순수하게 지훈의 목소리였다. 혹은 그렇게 생각했다.
은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도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장 아래층에는 지훈의 웃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신이 나를 상담했어. 5년 동안. 매일 밤. 당신의 손가락에서 검은 실이 나와서 내 결함을 빨아들였어. 내 고통이, 내 죄책감이, 내 절망이 모두."
은서가 손을 펼쳤다. 그 손에는 검은 실이 감겨 있었다. 아주 많은 검은 실. 그것들에서 썩은 냄새가 났다. 수십 년 묵은 상처의 냄새.
"그런데 당신이 몰랐던 게 있어."
은서가 말했다.
"결함은 없어져 안 돼. 그냥 옮겨갈 뿐이야. 내 결함이 당신에게로 옮겨갔고, 당신의 결함은 당신이 상담한 사람들에게로 옮겨갔어. 그리고 그 사람들의 결함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지훈이 거울을 봤다. 거울은 이미 깨져 있었지만, 그 파편들에 수많은 얼굴이 비쳐 있었다. 모두 지훈의 얼굴이었다. 모두 다른 표정으로.
"민준이... 수진이... 태호가..."
지훈이 중얼거렸다.
"그들은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야. 그들은 당신이 흡수한 내 결함이 다시 사람의 형태로 나타난 거야. 당신이 그들을 상담하면서, 당신은 사실 나를 다시 상담하고 있었던 거지."
상담실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마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이.
"그래서 당신은 점점 사라졌어. 당신이 상담한 사람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당신의 기억이 흐릿해졌어. 당신의 과거가 불확실해졌어.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어."
은서가 지훈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지훈이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당신이 일어났어."
은서의 눈이 지훈의 눈을 마주쳤다.
"상담사 의자로."
지훈의 뇌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기억이 아니라, 기억의 부재가. 그것이 터지면서 새로운 기억이 흘러내렸다.
지훈은 자신이 상담사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봤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내담자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봤다. 두 장면이 동시에 존재했다.
"당신은 나를 상담했어. 그리고 나는 당신을 상담했어. 5년 동안. 끊임없이. 서로의 결함을 빨아들이면서."
은서가 말했다.
상담실의 조명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 깜빡임에 따라 지훈의 얼굴이 변했다. 한준이 되었다가, 지훈이 되었다가, 또 다른 누군가가 되었다.
"그러다가 관리자가 나타났어."
상담실의 벽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인간의 형태를 한 그림자. 하지만 그것은 벽에 비친 그림자가 아니었다. 벽 자체가 그 모양으로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 움푹한 부분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은서도 지훈도 아닌, 제3의 목소리.
"상담을 멈추라고. 그리고 당신을 상담사로 만들라고. 그래야 더 많은 결함을 수집할 수 있다고."
그 목소리가 사라졌다. 벽의 그림자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었다.
상담실의 벽이 울려 퍼졌다. 금속음이었다. 기계음이었다. 아니, 그것은 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벽 자체가 내는 울음이었다.
"이제 당신이 내담자가 되는 차례야."
은서가 일어섰다. 상담사 의자로 향했다. 지훈은 자동으로 내담자 의자에 앉게 되었다. 손가락에서 검은 실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당신의 모든 결함을 말해줄래? 모든 기억을 말해줄래?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래?"
은서가 상담사 의자에 앉았다. 그 순간, 상담실의 벽에 새로운 사진이 붙기 시작했다. 2024년 11월 9일자. 하지만 그 사진에는 얼굴이 없었다. 검은 실로 뒤덮인 형태만 있었다.
지훈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검은 실이 흘러나왔다. 입에서, 코에서, 눈에서, 귀에서. 모든 구멍에서.
"말해줄래?"
은서가 다시 물었다.
지훈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도 검은 실로 변했다. 공중에서 은서의 손을 향해 흘러갔다. 은서가 그것을 받아 정리했다. 마치 실을 감듯이.
"당신의 이름은?"
은서가 물었다.
지훈이 입을 열었다. 그 안에는 몇 개의 이름이 있었다. 지훈. 한준. 민준. 수진. 태호. 그리고 또 다른 이름들. 1990년부터 2024년까지의 모든 상담사의 이름.
그것들이 동시에 나왔다.
"지훈입니다." "한준입니다." "민준입니다." "수진입니다."
목소리가 겹쳤다. 여러 입에서 동시에 나오는 듯 울렸다. 가장 아래층에는 은서의 목소리도 있었다.
"당신의 직업은?"
은서가 물었다.
"상담사입니다." "내담자입니다." "결함입니다." "그릇입니다."
다시 모든 대답이 동시에 나왔다.
상담실이 흔들렸다. 아니,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분해되고 있었다. 벽이 투명해졌다. 그 안에는 수많은 상담실이 있었다. 1990년부터 2024년까지의 모든 상담실. 그것들이 서로를 비추고 있었다. 거울처럼.
지훈이 거울을 봤다. 그 안에는 자신이 없었다. 대신 모든 상담사가 있었다. 모두 같은 자세로 내담자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모두 같은 표정으로 은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은서도 거울 속에 있었다. 모든 거울에 동시에. 하지만 그 모습은 계속 변했다. 때로는 한준처럼 보였고, 때로는 민준처럼 보였고, 때로는 지훈처럼 보였다.
"당신은 누구세요?"
지훈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은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에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지훈은 자신이 상담사 의자에 있는지 내담자 의자에 있는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거울 속의 자신도, 거울 밖의 자신도 모두 같은 자리에 있었다. 모든 거울이 깨졌다.
---
상담실의 불이 들어왔다.
새벽 10시 48분.
지훈은 상담사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미세한 진동. 통제 불가능한 진전. 손가락에서 검은 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담자 의자는 비어 있었다. 아니,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상담실의 문이 열렸다.
새로운 내담자가 들어섰다. 그 얼굴은 지훈의 얼굴이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혹은 지훈이 그렇게 보기로 결정했다. 혹은 그렇게 보는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내담자가 내담자 의자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지훈이 물었다. 상담사처럼. 혹은 내담자처럼. 그 구분이 더 이상 의미 없었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두 개의 음역대가 한 문장에서 울렸다.
"오늘은 무엇을 상담받고 싶으세요?"
"죽고 싶어요."
새로운 내담자가 말했다.
"누군가 내 목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요."
지훈의 손가락에서 검은 실이 더 빠르게 흘러나왔다. 손가락이 더 빠르게 떨렸다. 거부의 움직임. 하지만 멈출 수 없는 움직임.
상담실의 벽에 새로운 사진이 붙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