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13분, 상담실의 조명이 깜박였다.
지훈은 세 번째 내담자와 마주앉아 있었다. 남자, 서른 중반, 눈이 죽어 있었다. 명함 따위는 없었다. 이곳의 내담자들은 모두 이름만 남긴다. 이름도 가짜일 수 있다.
"처음이세요?"
지훈이 물었다. 또는 물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 거울에서 나온 말인지 구분이 안 됐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는데, 그것이 남자의 목소리인지 지훈 자신의 목소리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네. 처음입니다. 잠을 못 자고 있어요."
지훈의 손가락에서 검은 실이 흘러나왔다. 가는 실이 공중을 헤매다가 남자의 입 모서리에 감겼다. 그 순간, 남자의 입에서도 검은 실이 역방향으로 흘러나왔다. 지훈의 손가락으로 돌아오는 실. 두 줄기가 공중에서 얽혔다.
"언제부터?"
목소리의 톤이 이상했다. 마치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높고 낮은 음이 겹쳐서 울렸다.
"3년 전부터요. 그 이후로 눈을 감으면 꿈을 꿔요. 악몽이에요. 같은 악몽이 계속 반복돼요."
상담실의 조명이 다시 깜박였다. 그 찰나에 지훈은 거울을 봤다.
거울 속 얼굴이 떨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얼굴이 투명하게 겹쳐 있었다. 마치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지훈의 얼굴 아래에 민준의 얼굴이, 그 아래에 수진의 얼굴이, 그 아래에 태호의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의 얼굴. 그리고 또 그 아래에 누군가의 얼굴. 얼굴이 무한히 겹쳐 있었다.
지훈의 손이 떨렸다. 검은 실이 손가락을 벗어났다. 팔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목을 감싸고 있었다.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당신도 똑같아요."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가 다시 겹쳤다. 이번엔 여성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수진의 목소리였다.
"우리 모두 같은 꿈을 꿔요. 같은 악몽을."
지훈이 입을 열었다.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나왔다.
"당신은 누구세요?"
"당신은 누구예요?"
"당신은?"
상담실의 벽이 흔들렸다. 조명이 깜박였다. 깜박였다. 깜박였다.
지훈의 몸 전체가 검은 실로 묶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지훈을 꿰매고 있는 것처럼.
남자가 사라졌다. 상담실에 남은 것은 지훈뿐이었다. 거울 속의 지훈도 여전히 여러 얼굴로 떨고 있었다.
지훈이 일어섰다. 다리가 불안정했다. 거울로 걸어갔다. 손을 거울에 대었다.
거울 속 손이 맞춰졌다. 손가락이 겹쳤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손이 거울 속에서 지훈의 손에 맞춰졌다.
상담실 문이 열렸다.
은서가 들어섰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창백한 얼굴, 검은 호수처럼 깊은 눈. 그녀의 눈에는 여러 개의 지훈이 비쳤다. 모두 다른 표정으로.
"안녕하세요."
은서가 말했다. 목소리가 여러 사람의 것처럼 겹쳐 있었다. 정확히 지훈의 목소리들처럼.
"당신을 찾으러 왔어요."
지훈의 한 인격이 은서에게 집착했다. 다른 인격은 은서를 두려워했다. 또 다른 인격은 은서를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인격은 은서가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동시에 뒤로 물러나려 했다. 양쪽 방향으로 당겨지는 듯한 고통이 척추를 관통했다.
지훈의 입에서 여러 목소리가 나왔다.
"당신은 누구야?"
"당신은 누구야?"
"당신은?"
은서가 웃음을 지었다. 여러 톤의 웃음이 겹쳐 있었다. 그 웃음 속에서 지훈은 자신의 웃음을 들었다. 수진의 웃음을 들었다. 민준의 웃음을 들었다. 태호의 웃음을 들었다.
"내일 밤 11시에 상담실에서 만나요."
은서가 말했다.
"그때 알려드릴게요."
은서가 돌아섰다. 상담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이 희미해졌다. 조명이 깜박이며 그녀를 삼켰다.
지훈이 거울로 돌아섰다.
거울 속 얼굴이 변했다. 지훈의 얼굴이 아니었다. 민준도 아니었다. 수진도 아니었다. 태호도 아니었다. 이 남자도 아니었다.
은서의 얼굴이었다. 창백한 피부, 검은 호수 같은 눈. 지훈과 완전히 같은 얼굴로.
지훈이 손을 거울에 대었다.
거울 속 은서가 손을 맞췄다.
그 손이 차갑고 생기 없었다. 마치 죽은 손처럼.
그 순간, 지훈은 깨달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내일 밤 11시에 만날 그 여인이 누구인지.
하지만 그 깨달음은 즉시 사라졌다. 거울 속 얼굴이 다시 변했다. 다시 여러 얼굴이 겹쳤다. 다시 여러 목소리가 울렸다. 다시 검은 실이 몸을 감쌌다.
상담실의 시계가 2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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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은 상담실 소파에 쓰러져 있었다.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훈의 눈에는 얼굴들이 보였다. 여러 얼굴이 물에 떠 있는 해골처럼.
시간이 흘렀다. 새벽 8시 21분, 휴게실 문이 열렸다.
관리자가 들어섰다. 회색 양복을 입은 그의 얼굴은 항상 같았다. 또는 항상 달랐다. 지훈은 구분할 수 없었다.
"당신은 지금 급속도로 붕괴되고 있습니다."
관리자가 말했다. 목소리는 기계음처럼 중립적이었다.
"정체성 손실률 94.7%. 다중 인격 형성 단계 3. 내담자와의 경계 소실 단계 2."
지훈이 일어나려 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은 더 이상 상담사가 아닙니다."
관리자가 계속했다.
"당신은 내담자입니다. 항상 그랬습니다. 당신은 5년 전, 2019년 3월 15일에 이 상담소에 내담자로 처음 들어왔습니다."
지훈의 입에서 여러 목소리가 나왔다.
"거짓이야."
"거짓이에요."
"거짓이다."
관리자가 노트를 펼쳤다. 그 안에는 사진들이 있었다. 지훈의 사진들. 같은 얼굴의 사진이 다양한 날짜로 붙어 있었다. 2019년 3월 15일. 2020년 7월 22일. 2021년 11월 3일. 2022년 4월 19일. 2023년 9월 8일. 2024년 8월 11일. 2024년 11월 8일. 모두 같은 나이의 같은 얼굴이었다.
"이 모든 기록이 당신입니다."
관리자가 말했다.
"당신은 계속 같은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계속 같은 결함을 흡수하고 있습니다. 계속 같은 정체성을 잃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번 우리는 당신을 새로운 상담사로 배치합니다."
지훈이 손을 들었다. 손에서 검은 실이 흘러나왔다. 그 실은 관리자로 연결되어 있었다. 관리자의 손가락에서 나온 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당신은 우리의 도구입니다. 결함을 수집하는 도구. 그리고 내일 밤 11시, 은서와의 최종 상담에서 당신은 완전히 소멸할 것입니다."
지훈이 손으로 사진을 집어던졌다. 사진들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2019년의 자신의 얼굴이 떨어졌다. 2020년의 얼굴이 떨어졌다. 지훈은 손가락으로 2019년 사진을 가리켰다.
"그건 나가 아니야. 나는 지훈이야. 지훈이다."
목소리가 떨렸다. 한 인격이 기억을 되짚으려 했다. 자신의 이름을 반복했다. 지훈. 지훈. 지훈. 하지만 그 이름도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처음 들어보는 이름처럼.
다른 인격들이 저항했다. 한 인격은 거짓이라 외쳤다. 다른 인격은 관리자의 말이 맞다고 느꼈다. 또 다른 인격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아니야."
지훈의 목소리가 여러 톤으로 울렸다.
"아니에요. 아니다. 내가 살아 있어. 우리가 살아 있어."
관리자가 노트를 닫았다. 상담실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잠금음이 났다.
지훈은 다시 누웠다. 천장을 봤다. 여전히 얼굴들이 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얼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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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47분, 지훈은 상담소를 나갔다.
기억이 명확하지 않았다. 언제 나갔는지, 어떻게 나갔는지. 강남역 지하의 미로 같은 통로를 헤매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건지도 모르면서 발은 정확한 방향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미 이 길을 걸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지훈을 피했다. 그의 눈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한쪽은 민준의 눈이었고, 다른 쪽은 수진의 눈이었다. 또는 그렇게 보였다.
편의점에 들어섰다. 계산대 위의 작은 거울이 있었다. 지훈이 그 거울을 봤다.
거울 속 얼굴이 움직였다. 독립적으로. 지훈의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거울 속 입술이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거울 속 얼굴이 말했다. 목소리는 은서의 목소리였다.
"당신을 찾았어요."
지훈이 거울에서 손을 뗐다. 손가락에 검은 실이 감겨 있었다. 그 실은 거울로, 또는 거울 속 은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편의점을 나갔다. 거리로 나왔다. 이미 오후 5시 30분이었다.
지훈의 발은 자동으로 움직였다. 손가락의 검은 실이 당기고 있었다. 폐쇄된 지하철역으로. 그곳이 진짜 상담소라는 것을 알면서도, 또는 알고 싶지 않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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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15분, 지훈은 폐쇄된 지하철역 입구 앞에 서 있었다.
계단이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손가락에서 검은 실이 흘러나왔다. 실은 계단 아래로 뻗어 있었다. 마치 손가락 끝이 누군가의 입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지훈은 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가지 마."
"가야 해."
"가자."
"우리는 이미 가 있어."
한 인격이 계단을 내려가려 했고, 다른 인격이 몸을 붙잡으려 했다. 척추가 비틀렸다. 팔이 경련했다. 하지만 발은 계속 내려갔다. 실이 당기는 대로.
오후 7시 42분, 지훈은 폐쇄된 역사에 도착했다.
역사는 어두웠다. 조명이 깜박이고 있었다. 선로는 빈 배처럼 검었다. 플랫폼에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얼굴이 흐릿한 사람들. 또는 모두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 지훈의 얼굴을.
"당신들은 누구야?"
지훈이 물었다. 여러 목소리로.
그들이 대답했다. 지훈의 목소리로.
"우리는 당신이에요."
"우리는 당신입니다."
"우리는 당신이다."
선로에서 검은 기차가 나타났다. 창문도 검았다. 마치 기차 자체가 검은 실로 만들어진 것처럼.
기차의 문이 열렸다.
은서가 기차 안에 앉아 있었다. 상담사 의자에. 지훈을 마주보며.
"들어와요."
은서가 말했다. 목소리는 더 깊고 더 오래된 것이었다.
"우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계속."
지훈의 한 인격이 질문을 던졌다. 다른 인격이 은서를 향해 몸을 날렸다. 셋째 인격이 은서의 목을 조르려 했다. 넷째 인격이 은서에게 매달렸다. 모든 인격이 동시에 움직였다. 몸이 경련했다. 팔이 은서를 향했다가 자신을 향했다. 은서를 밀어냈다가 당겼다.
"당신은 누구예요? 왜 날 찾았어요?"
목소리가 비명처럼 울렸다.
은서가 웃음을 지었다. 웃음도 무한히 겹쳤다. 그 웃음 속에서 지훈은 자신의 웃음을 들었다. 수진의 웃음을 들었다. 민준의 웃음을 들었다. 태호의 웃음을 들었다.
"들어와요. 그러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지훈은 기차에 탔다. 은서 맞은편에 앉았다. 기차의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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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47분, 기차는 터널 속을 달리고 있었다.
은서의 얼굴이 변하고 있었다. 여러 얼굴로. 모든 상담사들의 얼굴로. 모든 내담자들의 얼굴로. 그리고 지훈 자신의 얼굴로.
"당신은 누구예요?"
지훈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은서가 웃음을 지었다.
"내일을 기다려요. 밤 11시에 상담실에서."
은서가 말했다.
"그때 당신은 알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이 누구인지."
지훈이 은서에게 다시 물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누구예요?"
은서의 웃음이 끊겼다. 그녀의 얼굴이 한순간 명확해졌다. 그 얼굴은 지훈의 얼굴과 완전히 같았다.
"나도 모르는데요."
은서가 말했다. 이번엔 한 가지 목소리로.
"나도 계속 찾고 있어요."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깊은 어둠으로.
지훈은 기차 창문을 봤다. 거울처럼 비친 창문.
거울 속에는 자신의 얼굴이 없었다. 대신 모든 얼굴이 있었다. 무한히 겹친. 무한히 울리는. 무한히 흘러나오는 검은 실과 함께.
그리고 그 중심에 은서의 눈이 있었다. 깊은 호수처럼. 지훈을 보고 있는.
또는 자신을 보고 있는.
또는 아무도 없는 곳을 보고 있는.
기차는 계속 달렸다. 끝이 없는 터널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