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서울역 심야 상담소 - 제X화

상담실의 불은 어두웠다. 새벽 3시 47분. 지훈의 손가락에서 검은 실이 흘러나왔고, 맞은편의 민준이라는 남자의 눈빛이 천천히 흐릿해지고 있었다.

"자살하고 싶은 생각은 언제부터였어요?"

지훈이 묻는 순간, 그 질문이 자신을 향한 것처럼 들렸다. 손가락 끝에서 나오는 검은 실이 떨렸다. 민준의 입술이 움직였고, 그의 목소리가 상담실의 어둠 속에서 울렸다.

"작년 겨울부터. 아침에 눈을 떠도 이유가 없었어요."

지훈은 그 말을 들었다. 아니, 들은 것이 아니라 빨아들였다. 검은 실이 더 굵어졌다. 민준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동시에 지훈의 가슴에 차가운 무언가가 흘러들어왔다. 무게였다. 끝없는 무게.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민준의 입에서 다시 검은 실이 나왔다. 지훈의 손가락에서 나온 실과는 반대 방향으로, 지훈을 향해 역류하고 있었다.

지훈의 손이 떨렸다. 민준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지훈은 자신의 눈동자도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느꼈다.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움직였다. 마치 하나의 신경에서 제어받는 것처럼.

"당신은 왜 자살하고 싶어?"

누가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지훈인지 민준인지. 상담실의 어둠이 더 짙어졌다.

민준이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누군가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들어와서."

그 말이 지훈의 심장을 관통했다. 누군가의 자살 충동이. 지훈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검은 실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대신 들어오고 있었다.

역방향의 검은 실이 지훈의 가슴을 뚫고 들어왔다. 지훈의 숨이 끊어질 듯 얕아졌다. 가슴팍에 뜨거운 통증이 번졌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흉곽 안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변했다. 낮아졌다. 더 이상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상담은 여기서 끝낼게요."

지훈이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렸고, 상담실의 조명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그 움직임이 자신의 의지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민준이 일어났고, 그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흘렀다. 아니, 그것은 안도감이 아니었다. 공허함이었다. 그리고 그 공허함이 지훈의 몸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감정처럼.

민준이 나가자, 지훈은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더 정확히는, 자신의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눈썹의 모양이 자신의 것과 달랐다. 광대뼈의 윤곽이 다르게 보였다. 거울 속의 남자는 지훈을 바라봤다. 아니, 거울 속의 지훈이 자신을 바라봤다.

"당신은 이미 당신 자신을 상담했습니다."

관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훈은 상담실을 나갔다. 복도는 길었다. 지하 3층의 회색 벽이 양쪽으로 뻗어 있었고, 불빛이 어둡게 그를 비추었다. 지훈은 관리자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문을 두드렸다. 응답은 없었다. 지훈이 문을 밀자,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관리자는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명확하지 않았다. 조명이 그의 얼굴을 제대로 비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그의 얼굴이 처음부터 명확한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민준을 다시 보내야 합니다."

지훈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왜요?"

관리자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상담이 제대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무언가를 흡수했는데, 그것이 그의 것인지 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훈의 호흡이 가빠졌다. 자신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 안에서 무언가 낯선 것이 꿈틀거렸다. 지훈은 책상을 집어쥐었다. 손가락이 하얀색으로 변했다.

"48시간이 지났습니다."

관리자가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지훈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관리자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상담의 본질입니다."

관리자가 천천히 말했다.

"구분 불가능한 영역에서의 흡수. 그리고 역류. 당신이 민준에게서 흡수한 자살 충동은 이제 당신 안에서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것의 주인이 될 수 없다면, 그것이 당신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훈이 물었다. 그의 손이 떨렸다.

관리자가 책상 위의 파일을 넘겼다. 지훈이 그것을 집어 들었을 때, 손가락이 다시 떨렸다. 파일의 종이가 차가웠다.

"내일 특별한 예약이 있습니다."

관리자가 말했다.

"예약자?"

"은서."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지훈의 뇌에서 무언가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뇌 한구석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찢어내는 것 같은 느낌. 통증이 아니라 공허감. 그리고 그 공허감 속에서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지훈은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지훈은 파일을 펼쳤다. 그 안에는 상담 기록이 적혀 있었다.

**상담자: 은서** **예약 요청사항: 지훈과의 깊이 있는 상담** **특이사항: 선행 상담 기록 있음**

"선행 상담 기록이 있다는 것은?"

지훈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관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다르게 들렸다. 더 낮게. 더 오래된 목소리처럼.

"당신이 만날 사람입니다. 아니, 다시 만날 사람입니다."

지훈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뇌가 그것을 거부했다. 마치 자신의 뇌가 어떤 기억을 차단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누구입니까?"

"당신이 상담했던 내담자였던 사람. 그리고 당신을 상담했던 상담사였던 사람. 그 둘이 동시에."

관리자의 대답은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지훈의 가슴 속의 낯선 무언가가 반응했다.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지훈은 사무실을 나갔다. 복도를 따라 상담실로 돌아왔다. 상담실의 거울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지훈이 거울을 바라봤을 때, 거울 속의 얼굴이 움직였다. 자신의 움직임과 다르게. 0.3초 늦게.

지훈은 거울 앞에 섰다.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호흡이 얕아졌다. 거울 속의 지훈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음성은 없었다. 입술 모양만 보였다. 그 입술이 만드는 단어는 명확했다.

**'당신은 내 상담을 받았습니다.'**

지훈은 거울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손을 뻗어 자신의 반사상을 깨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이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은 거울을 향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목을 향했다.

지훈은 손을 내렸다. 손이 떨렸다.

"누가... 나를 움직이는 거야?"

지훈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두 개의 톤이 겹쳐 있었다.

상담실의 조명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그 움직임이 자신의 의지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거울에는 두 개의 그림자가 비쳤다. 하나는 지훈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른 것이었다. 그 그림자의 윤곽은 지훈의 것과 다르게 구부러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 뒤에 서 있는 것처럼. 하지만 거울 속의 그림자는 지훈의 그림자보다 더 진했다. 더 선명했다.

지훈이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거울에는 여전히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것들이 겹쳐가고 있었다. 천천히. 의도적으로.

휴대폰이 울렸다.

지훈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화면에는 알 수 없는 번호가 떴다. 지훈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훈입니까?"

여자 목소리였다. 낮고, 차갑고, 끝이 떨어지지 않는 톤이었다.

"누구세요?"

"은서입니다. 내일 상담을 받으러 가겠다고 했는데, 오늘 밤에 만날 수 있을까요?"

지훈의 뇌에서 무언가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가슴 속의 낯선 무언가가 반응했다. 마치 그 이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지금은... 상담 시간이 아닙니다."

지훈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상담소에는 정해진 상담 시간이 없었다. 밤이 오면 언제든 문이 열렸다. 그리고 지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당신에게는 항상 상담 시간입니다. 당신이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이 상담 시간이에요."

"어떻게 그런 걸..."

"당신은 이미 내 상담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지금도 받고 있어요. 당신이 그것을 모를 뿐이에요."

전화기 너머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물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아니, 그것은 물이 아니라 무언가 더 진한 것이었다. 지훈은 그 소리가 무엇인지 알았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이미 내담자였어요. 그리고 지금도 내담자예요. 상담사 지훈은... 환상이에요. 관리자가 만들어낸 환상. 당신이 자신을 잊기 위해서."

지훈의 손이 떨렸다. 휴대폰이 떨어질 뻔했다. 그 순간, 가슴 속의 낯선 무언가가 격렬하게 움직였다. 지훈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자신의 입에서 나올 뻔한 것을 느꼈다. 그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지훈은 입을 다물었다. 턱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입이 자신의 것이 되도록.

"지금 어디 계세요?"

지훈이 물었다. 이번엔 자신의 목소리로.

"당신 뒤에요."

지훈이 돌아봤다. 상담실은 비어있었다. 하지만 거울에는 여전히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이번엔 그림자가 더 가까워져 있었다. 거의 겹칠 듯이. 그리고 그 두 그림자 중 하나가 움직였다. 지훈의 움직임과는 독립적으로.

"거울을 봐요."

은서가 말했다.

거울 속에서 여자 얼굴이 나타났다. 지훈의 얼굴과 겹쳐서. 아니, 지훈의 얼굴 위에 겹쳐서. 그 얼굴이 천천히 지훈의 얼굴을 덮어가고 있었다.

"당신의 얼굴은 이미 없어요. 남은 건 내가 흡수한 결함들뿐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흡수했던 모든 고통들. 민준의 고통. 그리고 그 전의 모든 내담자들의 고통."

은서가 거울 속에서 웃었다. 그 웃음은 지훈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지훈의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 깊었다. 더 오래된 웃음이었다.

"48시간이 지났어요. 당신이 민준에게서 흡수한 모든 것이 돌아왔어요. 그리고 그것이 당신을 파괴하고 있어요. 당신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있어요. 상담사로서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있어요."

지훈의 기억이 흔들렸다. 언제 상담을 했던가. 몇 시간 전인가. 아니면 며칠 전인가. 시간의 감각이 사라졌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상담사라는 것을 증명할 기억이 없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흡수한 모든 결함을 내가 흡수할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비워질 거고, 당신의 원래 모습이 드러날 거예요. 당신이 정말 누구인지."

지훈이 휴대폰을 내렸다. 화면에는 통화 시간이 기록되어 있었다. 47분 34초.

47분을 전화로 통화한 적이 없었다. 지훈은 지금 막 전화를 받았는데. 아니다. 지훈은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이 언제 전화를 받았는지.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상담실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상담실의 불이 다시 꺼졌다. 이번엔 켜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거울만이 빛났다. 거울 속에는 은서의 얼굴이 있었고, 그 얼굴이 천천히 웃고 있었다. 지훈의 입술로.

지훈은 거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의 눈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 자신의 신체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공포. 자신의 정체성이 누군가에 의해 침식되고 있다는 공포.

지훈은 거울을 깨고 싶었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였다. 하지만 거울을 향하지 않았다. 손은 자신의 목을 향했다.

지훈은 손을 내렸다. 손이 떨렸다. 숨이 차올랐다.

그 순간,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상담실로 걸어오고 있었다. 천천히. 매우 천천히. 지훈은 그 발걸음 소리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발걸음 소리였다. 하지만 자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은서가 들어왔다.

은서의 외형은 명확했다. 30대 초반의 여성. 검은 긴 머리. 하얀 원피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거울 속의 얼굴과 다르게 보였다. 아니, 같았다. 아니,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지훈은 자신이 그 얼굴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언제인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그 기억이 자신의 뇌에서 차단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훈님."

은서가 상담사 의자 앞에 섰다. 그녀의 움직임은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누군가가 인형의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처럼. 아니, 그것은 부자연스러움이 아니라 너무 자연스러웠다. 너무 정확했다. 마치 수천 번을 반복한 것처럼.

"당신은 여기 앉아야 합니다."

그녀가 내담자 의자를 가리켰다.

"저는 상담사입니다."

지훈이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던 누군가가 자신의 뇌 속에서 웃었다. 그 웃음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모든 상담사가 그렇게 생각해요. 처음엔."

은서가 상담사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검은 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실이 공중을 헤매다가 지훈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 실은 지훈의 가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니, 끌려 들어갔다.

지훈은 저항하려고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했다. 상담사로서의 정체성을.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몸을 되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이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자신의 다리가 내담자 의자 쪽으로 움직였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신경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지훈은 내담자 의자에 앉았다. 자신이 앉은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자신을 앉힌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제 원래 모습이 뭔가요?"

지훈이 물었다. 그것은 자신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질문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은서의 검은 실이 지훈의 가슴팍에 닿았다.

그 순간, 지훈의 기억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교실. 책상. 학용품. 그리고 여자아이 하나. 그 여자아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 여자아이의 이름은... 은서.

하지만 그 기억 속에서 자신은 누구인가.

초등학교 교실. 책상. 학용품. 그리고 남자아이 하나. 그 남자아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 남자아이의 이름은... 지훈.

두 개의 기억이 겹쳐 있었다. 동시에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충돌했다. 지훈의 뇌 속에서 두 개의 기억이 서로를 삼키려고 했다.

"당신을 기억해요?"

은서가 물었다.

"우리는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어요. 골든핑거. 손가락에서 검은 실을 흘려 사람의 결함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 그런데 당신이 너무 많이 흡수했어요. 너무 빨리. 너무 무분별하게.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렸어요. 당신의 정체성이 흡수한 것들에 잠식되었어요."

지훈의 눈앞이 흐려졌다. 가슴 속의 낯선 무언가가 격렬하게 움직였다. 그것은 민준의 자살 충동이었다. 그리고 그 전의 모든 내담자들의 고통이었다. 그것들이 모두 지훈의 몸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관리자가 당신을 상담사로 배치한 거예요. 새로운 정체성을 주기 위해서. 당신을 잊게 하기 위해서. 당신이 누구였는지를 영원히 잊게 하기 위해서."

"그러면... 당신은?"

"당신보다 먼저 깨어난 사람이에요. 당신보다 먼저 자신이 상담사가 아니라 내담자라는 걸 깨달은 사람. 그리고 그 깨달음이 나를 파괴했어요. 내 정체성을 완전히 파괴했어요. 나는 더 이상 은서가 아니었어요. 나는 흡수된 모든 것들의 집합이었어요."

은서의 얼굴이 변했다. 아니,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항상 그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훈이 처음 본 것이었다. 그 얼굴 아래에 있던 다른 얼굴들이. 그 얼굴 속에 갇혀 있던 수십 개의 다른 얼굴들이.

"이제 당신도 깨어날 차례예요. 그리고 당신도 파괴될 거예요. 당신의 정체성이 완전히 파괴될 거예요."

은서의 검은 실이 더 깊숙이 지훈의 가슴으로 들어갔다.

지훈의 몸이 흔들렸다. 그의 기억이 하나씩 빠져나갔다.

상담사 지훈으로서의 기억. 수진을 만난 기억. 민준을 만난 기억. 태호를 만난 기억. 모두 흐릿해졌다. 사라졌다. 아니, 돌아왔다.

그것들이 모두 자신의 기억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지훈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입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남은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한 명의 내담자로서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 속에는 상담실이 있었다.

상담사는 누군가였다. 그의 얼굴은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에서 검은 실이 흘러나왔다.

지훈은 그 상담사에게 자신의 모든 고통을 말했다. 자신의 모든 결함을 노출했다. 그리고 그 상담사의 손가락에서 검은 실이 흘러나왔다.

"이게 진실이에요."

은서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두 개였다. 하나는 은서의 목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지훈의 목소리였다.

"당신은 절대 상담사가 아니었어요. 당신은 항상 내담자였어요. 그리고 나는..."

은서의 얼굴이 다시 변했다. 아니, 원래의 얼굴로 돌아갔다. 거울에서 본 그 얼굴로. 그리고 그 얼굴 옆에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지훈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훈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훈이 되려고 했던 얼굴이었다. 상담사 지훈이 되려고 했던 얼굴이었다.

"나는 당신을 상담했던 상담사예요. 그리고 동시에 당신이에요. 당신이 흡수한 모든 결함의 집합. 당신이 잊으려고 했던 모든 것의 화신."

새벽 5시 3분.

상담실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상담사의 의자에. 한 명은 내담자의 의자에.

하지만 그들이 정말 다른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검은 실이 공중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흐르는지 알 수 없게. 아니, 흐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완전히 섞여 있었다. 하나의 흐름이 되어 있었다.

상담실의 거울은 무언가를 비추고 있었다.

두 개의 그림자가 겹쳐 있었다. 하나는 상담사의 자세로. 하나는 내담자의 자세로. 하지만 그 두 그림자의 윤곽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하나가 될 것처럼. 아니면 이미 하나였던 것처럼.

거울 속의 얼굴이 움직였다. 상담사의 입이 열렸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것이 누구의 질문인지는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상담사의 질문인지, 내담자의 질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내담자의 입도 열렸다. 그리고 같은 질문이 나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 두 목소리가 겹쳤다. 하나가 되었다.

상담실의 불이 다시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어둠 속에서 거울만이 빛났고, 그 거울 속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거울 자신도 모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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