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밖 거리의 야경이 준호의 눈에 들어왔다. 오후 9시 40분. 박영준의 제지로 환자는 이미 사망 선고된 후였다. 준호는 병원 정문을 나갔다. 차도에 나서자마자 휴대폰을 켜 지도를 띄웠다. 손가락이 떨렸다. 강남구 대치동. 김태호의 주소를 입력했다.
택시 안에서 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 끝이 창백했다. 손톱 반달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거울을 꺼내 얼굴을 봤다. 거기는 이미 타인의 얼굴이었다. 50대 초반의 낡은 피부. 눈가의 깊은 주름. 입가의 처진 살. 32세의 몸이 아니었다.
"대치동 어디요?"
기사의 목소리에 준호는 주소를 반복했다. 차는 강남대로를 빠져나가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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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의 집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3층 빌라. 현관 불이 꺼져 있었다. 준호는 인터폰을 눌렀다. 5초. 10초.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다시 눌렀다. 여전히 침묵만 돌아왔다.
옆 집 할머니가 현관을 열고 나왔다. 60대 후반의 얼굴. 의심스러운 눈.
"누구세요?"
"이... 이 집에 사는 사람을 찾는데요."
"아, 김태호? 그 사람 요즘 안 보여. 아내분이 계긴 한데..." 할머니가 말을 끊었다. 그 얼굴이 굳어졌다. "당신 뉴스 본 거 아니야? 그 사람 음주운전으로 사람 죽인 사람 아닌가. 여기 요즘 협박전이 자꾸 와. 아내분이 많이 고생하시던데."
준호의 호흡이 끊겼다.
"협박전?"
"응. 피해자 유족들이라고 하더라고. 그 사람 남편이 사람을 죽였으니까 당연히 분노하겠지. 근데 아내분은 뭔 죄냐고... 며칠 전에도 울고 계셨어."
준호는 할머니의 말을 더 듣지 않았다. 돌아섰다. 택시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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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수의 집은 강동구 성내동 아파트였다. 5층 502호. 현관 앞에는 '신발장 수리 중'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도어락이 고장 난 지 오래 보였다. 인터폰을 눌렀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 옆 집에서 중년 여성이 나왔다.
"누구 찾으세요?"
"502호 박민수..."
"아, 그 사람? 여기 안 살아요. 한 달 전에 나갔어. 정신병원으로 옮겼대."
준호의 입술이 떨렸다.
"정신병원?"
"네. 자살 시도했대더라고. 회복 후 계속 자해하려고 해서... 가족들이 입원을 결정했어. 지금도 있을 거 같은데, 정확히는 몰라."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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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집은 용산구 이촌동 주택가였다. 좁은 골목길의 반지하 주택. 현관 위의 화분들이 시들어 있었다. 인터폰을 눌렀다. 한참 후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누구세요?"
"저... 저는 서울 중앙종합병원 의사 이준호라고..."
문이 열렸다. 50대 초반의 여성이 서 있었다. 눈이 붓고 하얀색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준호는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선생님이군요."
그 목소리에는 고마움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들어오세요."
실내는 어두웠다. 거실의 벽장에 작은 상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 유골함이 있었다. 흰색 화장 상자. 준호는 그것을 봤을 때 무릎이 꺾였다.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엎드렸다. 이영희의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준호가 울도록 내버려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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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가 응급실로 돌아온 것은 오후 11시 47분이었다.
응급실 입구에서 간호사들이 그를 봤다. 그들의 표정이 변했다. 그 남자는 더 이상 '기적의 의사'가 아니었다. 그저 죽어가는 한 명의 인간이었다. 피부는 회색이었다. 눈은 죽어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준호 오빠!"
김수진이 달려왔다. 그 얼굴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그녀는 준호를 안았다.
"왜... 왜 그 환자를 살리지 않았어? 5%인데도... 당신이면 할 수 있었잖아."
준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수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목구멍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은 환자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눈물이었다.
"수진아..."
"뭐... 뭐라고..."
"내가... 잘못 생각했어. 정말 많이."
김수진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다. 그녀는 준호를 더 세게 안았다. 그 순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준호는 알지 못했다.
응급실 한구석에서 장수연 간호사가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슬픔과 함께 약한 안도감이 보였다. 눈이 감겼다. 그녀는 입술을 움직였다. 말이 없는 중얼거림. 아마 기도였을 것이다.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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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준 교수는 준호를 신경외과 회의실로 불렀다. 오후 11시 57분. 책상 위에는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제목: '시간 인지 이상과 가속적 신체 노화의 상관성—윤리적 성찰.'
"이것이 최종 분석 결과다."
오명준은 문서의 페이지를 넘겼다. 그래프와 수치들. 혈액 수치. 뇌 영상.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표가 있었다.
"당신이 구한 18명의 환자. 그 중 11명이 초래한 사망. 당신의 능력 1회 사용당 간접 사망 0.61명. 다시 말해서, 당신이 한 명을 살릴 때마다 또 다른 0.61명이 죽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준호의 손이 떨렸다.
"당신의 능력은 기적이 아니었어. 그건 다른 형태의 죽음일 뿐이야. 더 큰 죽음. 더 복잡한 죽음. 그리고 당신 스스로도 죽어가고 있다."
오명준은 준호의 얼굴을 봤다.
"신장 기능 27%. 심장 박동 부정맥 빈도 주당 3회. 뇌 백질 변성. 현재 속도로 진행되면 18개월 내 심부전 진행. 당신은 이미 죽음의 과정 중에 있어. 그리고 당신이 구한 사람들도 함께 죽어가고 있어."
준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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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준 과장의 사무실은 조용했다. 밤 0시 12분. 준호가 들어갔을 때 박영준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의료 윤리 위원회에서 연락이 왔다."
박영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당신의 성공률에 대한 의학적 설명이 필요하다고. 내가 지금까지 묵인해온 것이 당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건 알지? 당신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준호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이제 이상의료사건 신고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기자들도 냄새를 맡았고, 의료 윤리 위원회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당신이 여기 있으면 병원 전체가 말려들어갈 것 같으니, 일단 병가를 권고할 생각이다."
준호는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능력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박영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라고?"
"저는 의사이지, 신이 아닙니다."
준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것은 다짐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그리고 신도 아니었어야 했어요."
그 말은 박영준의 귀에만 들린 것이 아니었다. 응급실 전체에 퍼졌다. 침묵이 흘렀다. 장수연이 고개를 들었다. 민준영이 펜을 멈췄다. 간호사들이 준호를 바라봤다.
박영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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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이었다.
응급차 사이렌.
"중증 외상! 뇌출혈, GCS 3, 자살 시도!"
응급실이 술렁였다. 준호는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몸이 굳었다.
들것이 들어왔다. 50대 남성. 피로 범벅인 얼굴. 의식이 없었다.
준호는 그 얼굴을 봤다.
이영희의 남편이었다.
"생존 가능성 5%입니다!"
의료진의 외침이 울렸다. 준호의 눈에 금빛이 어렸다. 아주 희미한 금빛. 마치 촛불처럼.
응급실 전체가 준호를 바라봤다.
박영준.
민준영.
김수진.
장수연.
모두가 준호를 봤다.
준호의 손이 떨렸다. 혈압계를 잡으려던 손. 그 손가락이 떨렸다. 심박수 모니터의 불규칙한 신호. 수축기 압력 급락. 환자의 생명이 이 순간 떠나가고 있었다.
5분.
그 5분이 준호 눈앞에 펼쳐졌다.
0.61명.
오명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간접 사망 0.61명.
준호는 손을 내렸다.
"고식적 치료로 전환하세요."
"선생님?"
"더 이상 리바운드는 없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준호의 눈에서 금빛이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졌다.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형태로.
응급실이 침묵했다.
"응급차에서 연락 왔습니다!"
간호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기자 이은지가 병원 정문에 도착했습니다. 응급의학과 관련 대형 보도를 준비 중이라고..."
박영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준호는 모니터를 봤다. 심박수가 점점 느려졌다. 50. 40. 30.
이영희의 남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 아직 따뜻한 손.
"미안해요."
그 말을 반복했다.
"정말... 미안해요."
모니터에서 마지막 신호가 울렸다. 일직선.
오후 0시 18분.
환자 사망 선고.
장수연이 준호 옆에 서서 중얼거렸다.
"이제 끝이다. 이제... 정말 끝이야."
그 말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응급실 밖에서 기자 이은지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한 번, 두 번, 세 번.
"기적의 의사는 끝났다."
그것이 내일 신문의 헤드라인이 될 것이었다.
# 나비 효과의 전모
응급실을 떠나는 순간, 준호의 발걸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퇴근 신호도 없었다. 그저 침상 모니터를 마지막으로 바라보고, 하얀 가운을 벗어던지듯 걸어 나갔다. 복도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매번 이 불빛 아래서 자신이 누군가를 살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 생각은 독처럼 느껴졌다.
병원 정문을 나서자 오후의 햇빛이 얼굴을 내리찍었다. 준호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손가락 끝에 떨림이 있었다. 약한 떨림이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진동. 신경계가 스스로를 거부하기 시작한 증거였다.
택시를 탔다. 목적지는 강남구 역삼동. 김태호의 주소. 2주 전 심폐소생술 35분 끝에 준호가 시간을 되돌려 살린 그 남자의 집.
차 창으로 서울의 거리가 흘렀다. 평일 오후 3시, 거리는 한산했다. 준호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죽음의 직전 상태처럼 보였다. 버스를 타는 여성, 횡단보도를 건너는 노인, 편의점에 들어가는 청년—모두가 언제든 심정지로 쓰러질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중 누구도 준호의 능력으로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었다.
주택가 골목에 택시가 멈췄다. 3층 주택 건물. 페인트가 벗겨진 회색 벽. 1층 현관 위에 '김태호'라는 이름이 적힌 명패가 있었다.
준호는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눌렀다. 30초. 1분. 응답이 없었다. 준호는 현관 옆 좁은 틈에서 안쪽을 들여다봤다. 어둠. 침묵. 그리고 이상한 냄새. 신문지와 음식물이 섞인 듯한 악취.
"누구 찾으세요?"
옆 집 문이 열렸다. 60대 여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김태호 씨가 계신가요?"
"아, 그 사람? 요즘 집에 없어. 병원에 입원했데. 아내도 요즘 밤에 집에 못 들어와. 유족들이 와서 협박한다고 하더라고. 빚이 많다고도 하고. 참 가엾은 집이야."
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유족들. 협박. 그것은 자신이 구한 사람이 초래한 결과였다. 심근경색으로 죽을 뻔한 김태호를 살린 대가가 이것이었다.
"병원은 어디인가요?"
"정신과 병원. 서초구 쪽이었나..."
준호는 인사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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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주소는 박민수의 집이었다. 강동구 성내동, 낡은 아파트 단지. 6층. 준호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한 계단 한 계단마다 숨이 차올랐다. 신체가 더 이상 30대의 신체가 아니었다. 폐활량이 감소했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6층. 604호.
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없었다. 준호는 현관 옆에 있는 우편함을 열어봤다. 청구서, 광고지, 그리고 주소 불명으로 반송된 편지들. 누군가 이 집을 오래전부터 비운 것 같았다. 현관 밖에는 짚신 한 켤레만 놓여 있었다.
"누가 찾는 건가?"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50대 남성이 쓰레기통을 들고 있었다.
"박민수 씨를 찾고 있는데..."
"아, 저 친구? 한 달 전에 실려 나갔어. 정신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했대. 아내가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하더니, 결국 아이들 데리고 친정으로 내려갔어. 빚도 많고."
준호는 말을 하지 못했다. 박민수. 심정지 환자. 준호가 4분 리바운드로 살린 남자. 회복 후 그는 '차라리 죽었으면'이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이 우연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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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주소는 이영희의 집이었다. 종로구 평창동, 좁은 골목. 준호는 주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의료 차트에 기록된 주소. 보호자 연락처. 딸의 이름: 이다은. 나이: 22.
골목 끝의 작은 한옥. 문이 열려 있었다. 마당에는 화분이 넘어져 있었다. 흙이 흩어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영희 씨?"
응답이 없었다. 거실로 들어갔다. 어둡고 습한 공기. 창문에는 검은 천이 쳐져 있었다. 상을 치르는 집의 냄새였다.
준호는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제단이 있었다. 하얀 국화. 양초. 그리고 유골함. 작은 유골함.
준호는 무릎을 꿇었다.
유골함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았다. 손이 떨렸다. 더 이상 의사의 손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의 손으로. 죄인의 손으로.
"미안합니다."
그 말을 반복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유골함 옆에는 사진이 있었다. 22세의 젊은 여성. 웃고 있었다. 이다은. 준호가 구한 환자 이영희의 딸. 그 딸이 자살했다. 아버지의 암 치료비로 인한 가정 파괴. 어머니의 우울증. 그 모든 것의 끝에 딸의 죽음.
준호는 그 사진을 쳐다봤다. 웃는 얼굴. 살아 있는 얼굴. 이제는 유골함 속에만 존재하는 얼굴.
"내 때문이야."
중얼거렸다.
"내가 당신의 아버지를 살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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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로 돌아온 준호는 다른 사람이었다. 얼굴이 변했다. 눈동자가 회색으로 변했다. 더 이상 '기적의 의사'의 눈이 아니었다. 그저 죽어가는 한 명의 인간의 눈이었다.
복도에서 김수진을 마주쳤다. 그녀는 준호의 얼굴을 본 순간 멈췄다.
"선배... 어디 다녀오셨어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앞으로 걸어갔다. 김수진이 따라왔다. 응급실 로커룸으로 들어갔을 때, 김수진이 문을 닫고 준호를 바라봤다.
"무슨 일 있으세요?"
준호는 입을 열려다 닫았다. 그리고 다시 열었다.
"내가...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됐어."
그 말을 하는 순간, 준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피로의 눈물이 아니라, 깊은 절망의 눈물이었다.
김수진이 준호를 안았다.
준호는 그 어깨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깊고 긴 울음. 마치 처음 울어보는 것처럼. 오랫동안 억눌렀던 모든 감정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자책, 분노, 절망, 그리고 끝없는 죄책감.
응급실 밖에서 장수연 간호사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이 있었다. 동시에 안도감도 있었다. 드디어 준호가 깨어났다. 드디어 그가 거울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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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준 교수는 준호를 자신의 연구실로 불렀다. 오후 5시. 응급실의 저녁 피크 시간대. 준호는 그곳에 가야 했지만, 발걸음이 연구실로 향했다.
"당신이 찾던 결과다."
오명준이 보고서를 건넸다. A4 용지 30장 분량. 제목은 명확했다.
'시간 인지 이상과 가속적 신체 노화의 상관성—윤리적 성찰'
준호가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래프, 데이터, 그리고 결론.
"당신의 능력은 기적이 아니었어. 그건 다른 형태의 죽음일 뿐이야."
오명준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개인의 죽음 1명을 돌리기 위해, 사회적 죽음 0.61명을 초래했다. 통계적으로 당신이 사용한 35회의 능력은 약 21명의 간접 사망을 야기했다. 그 중 자살이 6명, 타살이 3명, 사고사가 12명이다."
준호는 보고서를 떨어뜨렸다.
"당신의 능력이 없었다면, 당신이 구한 35명의 환자 중 상당수가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살았을 때 초래하는 피해도 있었다. 의료 시스템은 그것을 모두 감당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포기한다. 그것이 의학의 현실이다."
준호는 말을 하지 못했다.
"당신은 신이 되려고 했어. 하지만 신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의사는 책임을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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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준의 사무실로 들어갔을 때, 그는 이미 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병가를 마치고 복귀하겠다고 했다고 들었다."
박영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의료 윤리 위원회에서 연락이 왔다. 당신의 성공률에 대한 의학적 설명이 필요하다고. 내가 지금까지 묵인해온 것이 당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건 알지? 당신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준호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병원의 평판. 자신의 명예.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환자는 그 다음이었다.
"이제 이상의료사건 신고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기자들도 냄새를 맡았고, 의료 윤리 위원회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당신이 여기 있으면 병원 전체가 말려들어갈 것 같으니, 일단 병가를 권고할 생각이다."
박영준은 자신의 책상 위에 있는 펜을 들었다. 그 손가락도 떨리고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봤다. 두려움. 그것은 두려움의 떨림이었다.
"더 이상 능력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준호의 목소리가 울렸다.
박영준이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저는 의사이지, 신이 아닙니다."
준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것은 다짐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명령이 아니라 진실의 고백이었다.
"그리고 신도 아니었어야 했어요."
그 말은 박영준의 귀에만 들린 것이 아니었다. 응급실 전체에 퍼졌다. 침묵이 흘렀다. 복도에서 간호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의료진들이 준호를 바라봤다. 장수연이 고개를 들었다. 민준영이 펜을 멈췄다.
박영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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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이었다.
응급차 사이렌.
"중증 외상! 뇌출혈, GCS 3, 자살 시도!"
응급실이 술렁였다. 준호는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몸이 굳었다.
들것이 들어왔다. 50대 남성. 피로 범벅인 얼굴.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의식이 없었다.
준호는 그 얼굴을 봤다.
이영희의 남편이었다.
딸의 죽음 이후로 계속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 남자. 준호의 의료 차트에 기록된 보호자. 이영희의 배우자.
"생존 가능성 5%입니다!"
의료진의 외침이 울렸다. 뇌출혈. 뇌간 손상. 완전 마비. 생존해도 식물인간 상태가 확실했다.
준호의 눈에 금빛이 어렸다. 아주 희미한 금빛. 마치 촛불처럼. 가장 마지막 촛불처럼.
응급실 전체가 준호를 바라봤다.
박영준은 준호의 손을 바라봤다.
민준영도 준호를 바라봤다.
김수진도 준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장수연도 준호를 봤다.
모두가 준호를 봤다. 이 순간에 그가 무엇을 할 것인지. 마지막 결정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준호의 손이 떨렸다. 혈압계를 잡으려던 손. 그 손가락이 떨렸다. 심박수 모니터의 불규칙한 신호. 수축기 압력 급락. 환자의 생명이 이 순간 떠나가고 있었다.
5분.
그 5분이 준호 눈앞에 펼쳐졌다. 5분 뒤 이 남자는 죽을 것이다. 뇌사 판정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준호의 능력이 작동할 것이다.
그 5분을 되돌릴 수 있다.
이영희의 남편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준호는 오명준의 보고서를 떠올렸다. 0.61명. 그 수치가 떠올랐다.
이 남자를 살리면 어떻게 될까.
또 다른 누군가를 죽일까.
준호는 손을 내렸다.
"고식적 치료로 전환하세요."
"선생님?"
응급실이 순간 멈췄다. 누군가의 숨이 멎었다.
"더 이상 리바운드는 없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준호의 눈에서 금빛이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졌다.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형태로. 마치 초에서 불이 꺼지듯이.
응급실이 침묵했다.
의료진들이 움직였다. 천천히. 절망적으로. 도포민 주입을 중단했다. 모니터의 신호를 줄였다. 흰 천을 준비했다.
"응급차에서 연락 왔습니다!"
간호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기자 이은지가 병원 정문에 도착했습니다. 응급의학과 관련 대형 보도를 준비 중이라고... 그리고..."
박영준이 간호사를 바라봤다.
"그리고?"
"경찰도 함께 왔습니다. 의료 사건 관련 조사라고."
박영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민준영은 한 발 물러섰다. 이제 더 이상 준호를 바라보지 않았다.
준호는 모니터를 봤다. 심박수가 점점 느려졌다. 100. 80. 60. 50. 40. 30.
이영희의 남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 아직 따뜻한 손.
"미안해요."
그 말을 반복했다.
"정말... 미안해요."
모니터에서 마지막 신호가 울렸다. 일직선. 길고 긴 일직선.
오후 5시 47분.
환자 사망 선고.
장수연이 준호 옆에 서서 중얼거렸다.
"이제 끝이다."
그 목소리에는 슬픔이 있었다.
"이제... 정말 끝이야."
그 말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일 것이었다.
응급실 밖에서 기자 이은지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밝은 빛이 창문을 통해 응급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기적의 의사는 끝났다."
그것이 내일 신문의 헤드라인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헤드라인 옆에는 또 다른 헤드라인이 나올 것이었다.
"응급의학과 의료 윤리 사건 적발. 환자 35명 기적적 회복 뒤에 숨겨진 진실."
"의료 윤리 위원회 조사 개시. 비정상적 회복률의 의학적 근거 규명 시급."
"기적의 대가—응급의학의 한계와 의료진의 책임."
준호는 그 헤드라인들을 떠올렸다. 아직 나오지 않은 뉴스들. 하지만 이미 정해진 미래들.
그는 이영희의 남편의 손을 놓았다. 의료진들이 시신을 덮었다. 하얀 천이 얼굴을 가렸다.
준호는 응급실을 나갔다. 혼자가 아니라, 박영준의 눈길, 민준영의 시선, 그리고 경찰의 호출을 동반한 채로.
응급실의 문이 닫혔다.
그 문 너머에서 새로운 사이렌이 울렸다.
또 다른 환자가 도착했다.
또 다른 죽음이 응급실로 들어왔다.
응급실은 멈추지 않는다. 죽음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응급의학의 진실이었다.
준호는 그것을 이제 알았다.
너무 늦게, 하지만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