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비 효과의 시작
장수연의 손이 준호의 어깨를 잡았을 때, 그의 몸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
응급실 침상 5번. 오후 5시 17분.
김태호의 아내가 침상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붓고 허연 얼굴에 박혀 있었다. 남편의 손을 잡은 그 손가락들이 부들거렸다. 준호는 그 장면을 응급실 통로에서 봤다. 그리고 알았다. 자신이 구한 이 남자가 무엇을 했는지.
2주 전 뉴스. 강남 도로에서의 음주운전 사고. 차량 3대 충돌. 사망자 3명.
그 중 한 명은 19세 여대생이었다.
준호의 손이 떨렸다.
"앉아."
장수연이 말했다. 25년 응급실 경력의 간호사. 수천 명의 죽음을 본 사람. 준호는 침상 옆 의자에 무릎을 꺾고 앉았다. 다리가 버티지 못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게 있어."
장수연이 준호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25년을 일했어. 죽음을 본 횟수? 셀 수 없어. 처음엔 그 모든 죽음이 내 실패라고 생각했어. 의료진의 실패, 의학의 한계. 그런데 어느 날 깨달았어. 죽음도 선택이고, 생명도 선택이야. 넌 그걸 모르고 있었어."
준호의 목이 움직였다. 침을 삼킬 수 없었다.
"이 남자." 장수연이 김태호를 바라봤다. "당신이 살렸어. 35분간의 심폐소생술이 실패했을 때, 당신은 그를 다시 돌렸어. 그리고 그는 살아났어. 그리고 2주 후..."
그녀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 끝낼 필요가 없었다.
준호는 일어섰다. 침상에서 떨어지고 싶었다. 응급실에서 떨어지고 싶었다. 자신의 손에서 떨어지고 싶었다.
응급실 기록실. 오후 5시 42분.
준호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의료기록 시스템에 접속했다. 인턴 권한으로는 제한이 많았지만, 자신이 직접 다룬 환자들의 기록은 조회 가능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첫 번째 환자. 김태호. 심근경색. 응급실 도착 시간: 오후 10시 31분. 심폐소생술 기록: 35분. 사망 선고: 오후 11시 06분.
다음 줄: 기적적 회복. 퇴원 날짜: 11일 후.
현재 상태를 찾았다. 2주 전 재입원. 진단: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 다중 골절, 뇌진탕. 함께 입원한 환자들: 3명. 진단: 다발성 외상. 예후: 1명 사망, 2명 중증.
준호의 화면이 흔들렸다.
두 번째 환자를 검색했다. 박민수. 자살 시도. 약물 중독. 응급실 도착 시간: 오후 2시 18분. 심정지. 사망 선고: 오후 2시 52분.
기록: 기적적 회복. 퇴원 날짜: 14일 후.
현재 상태. 정신과 재입원 기록 3회. 가족 관계 기록: 이혼 신청(아내). 자녀 기록: 두 명 모두 소아정신과 진료 중(적응 장애, 불안 장애 진단).
준호는 한 줄 한 줄을 읽으며 호흡이 얕아졌다.
세 번째 환자. 이영희. 폐암 말기. 응급실 도착 시간: 오전 11시 06분. 호흡 부전. 심정지. 사망 선고: 오전 11시 34분.
기록: 기적적 회복.
현재 상태. 종양내과 입원 중. 생명 연장 치료 진행 중. 의료비 기록: 5개월간 5억 2천만 원. 가족 관계: 딸 이름으로 대출 신청 기록 2건.
준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화면 맨 아래 한 줄:
'이영희 딸, 2주 전 자살. 사망 원인: 추정 자살(극심한 우울증).'
키보드에 손을 얹고 있던 준호의 팔이 떨렸다. 모니터의 불빛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비췄다.
"뭘 하고 있어?"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았다.
김수진이 기록실 문을 통해 들어섰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눈가가 빨갛다.
"선생님, 왜 여기서..."
"이 환자들을 보고 있었어."
준호가 화면을 가리켰다.
수진이 화면을 봤다.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눈이 한 줄 한 줄을 따라갔다. 김태호. 박민수. 이영희. 그리고 그 아래로 계속되는 이름들.
"당신이 구한 사람들이에요." 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을 죽였어요."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이 책임져야 하나요?" 수진이 물었다.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당신이 그들을 살렸으니까? 그래서 그들이 저지른 일까지?"
준호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럼 지금 응급실에 있는 환자는요?" 수진이 계속했다. "당신이 능력을 쓰지 않으면, 그 환자가 죽는데요. 그 환자의 가족은? 그들이 겪을 비극은?"
"모르겠어."
준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낮고 쉬었다.
"모르겠어. 수진."
신경외과 병동. 오후 6시 11분.
오명준 교수의 연구실이었다. 준호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명준이 노트북을 켰다.
"당신의 구출 환자 18명을 추적했습니다."
화면에 표가 떴다. 이름. 진단. 구출 날짜. 퇴원 후 상태.
"직접 초래한 사망을 보겠습니다."
오명준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첫 번째, 김태호 사건. 음주운전으로 강남 도로에서 차량 3대를 충돌시켰습니다."
화면에 사진이 떴다. 세 명의 얼굴. 준호는 눈을 돌렸다.
"19세 여대생. 23세 회사원. 58세 택시기사. 모두 당신이 살린 환자 때문에 죽었습니다."
오명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각 단어가 준호의 가슴을 내려찍었다.
"두 번째, 박민수 회복 후 극단적 선택 시도 당시 발생한 사건입니다."
화면에 새로운 사진이 떴다. 30대 남성.
"박민수의 친구입니다. 목격자로 응급 신고 지연으로 사망했습니다. 신고가 10분 늦었으면 살았을 겁니다."
준호의 호흡이 깊어졌다.
"간접 영향으로 인한 자살도 있습니다."
오명준이 계속했다.
"이영희 사건. 의료비로 인한 가족 파괴. 딸이 극심한 우울증으로 자살했습니다. 당신이 어머니를 살리지 않았다면, 그 딸은 지금 살아 있었을 겁니다."
오명준이 화면을 껐다.
"당신의 능력이 초래한 총 사망 가능성: 10명에서 11명 사이입니다."
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건... 내 책임이 아니야."
준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공허했다.
"책임이 없다면, 무엇입니까?" 오명준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당신이 그들을 살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응급실 침상에서 죽었을 겁니다. 그 죽음으로 인한 가족의 비극도, 그들이 일으킨 또 다른 비극도 없었을 겁니다."
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당신은 개인의 죽음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죽음은 초래했습니다. 그것이 의학의 한계입니다. 그것이 당신의 능력의 한계입니다."
오명준의 말이 준호의 뇌를 관통했다.
준호가 일어섰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응급실 통로. 오후 6시 47분.
준호는 응급실을 나가고 있었다. 거리로 나가고 싶었다.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통로 중간에서 누군가 그를 멈췄다.
여자. 40대. 얼굴이 창백했다. 눈이 빨갛다.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무엇인가가 있었다.
"당신이... 우리 남편을 살린 의사죠?"
김태호의 아내였다.
준호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고마워요." 그녀의 목소리가 나왔다. "진짜 고마워요. 남편을 살려줘서."
그 말의 뒤에는 분노가 있었다. 절망이 있었다.
"근데요..." 그녀가 계속했다. "그 남편이 살아나서 뭐 했는지 아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술을 더 많이 마셨어요. 운전을 했어요. 그리고 세 사람을 죽였어요."
눈물이 흘렀다.
"그 중에 제 조카도 있었어요. 19살. 대학교 1학년."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제발... 왜 살렸어요?"
그 한마디가 준호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응급실. 오후 7시 03분.
모니터에서 소리가 났다.
'응급 환자 도착. ETA 2분. 뇌출혈, GCS 6, 생존 가능성 10%.'
박영준이 응급실 입구에 나타났다. 그의 눈이 준호를 찾았다.
"준호."
박영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기적을 만들 수 있지?"
침상이 준비되었다. 의료진들이 자리를 잡았다. 모니터가 울렸다.
'심정지. 심정지.'
환자의 동공이 산대되었다. 준호의 눈에 금빛이 물들기 시작했다. 그 익숙한 감각. 시간을 거스르는 능력.
준호의 손이 떨렸다.
박영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수진이 옆에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 눈은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급실이 침묵했다.
환자의 심정지음이 계속 울렸다.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금빛이 시야 전체를 잠식하려는 순간, 그는 눈을 감았다.
심호흡.
1초.
2초.
그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뜨거운 통증. 마치 무언가가 자신의 내부에서 뜯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
준호는 눈을 떴다.
금빛이 사라졌다.
완전히.
그것이 자발적 포기인지, 초자연적 상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그 능력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내부에서 뜯어져 나간 것이었다. 마치 영혼의 일부를 빼앗긴 것처럼.
"심폐소생술 계속하세요."
준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무표정했지만, 내부는 무너지고 있었다.
"생존 가능성 10%입니다. 의학적 한계를 존중하겠습니다. 35분 더 시도하고, 그 후엔 사망 선고합니다."
박영준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입이 열렸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준호, 잠깐—"
박영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차올랐다.
"넌 뭘 하는 거야? 이 환자를 살릴 수 있잖아. 기적을 만들 수 있잖아. 병원의 평판도 올라가고, 너도 영웅이 되고—"
"할 수 없습니다."
준호가 끊었다.
"더 이상 그런 선택은 하지 않겠습니다."
박영준의 얼굴이 붉어졌다.
"넌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의료진들이 최선을 다해도 못 살릴 환자들이 있어. 그런데 넌 그걸 살릴 수 있는데 왜 안 하는 거야? 이건 배신이야. 환자에 대한 배신이고, 의료진에 대한 배신이고, 병원에 대한 배신이야."
박영준이 한 발 다가섰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 지금 뭐하는 건지 알아? 넌 인턴이야. 나는 과장이야. 넌 나한테 거역할 수 없어. 넌 이 병원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준호는 박영준을 봤다. 그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렇게 되겠습니다."
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이 환자는 의학으로 살리겠습니다."
침상 주변의 의료진들이 움직였다. 누군가 가슴 압박을 재개했다. 약물 투여. 기도 확보. 모든 것이 기계적이었다. 준호도 기계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환자의 얼굴을 본다. 60대 남자. 뇌출혈로 인한 의식 소실. 동공산대. 뇌간 반사 소실. 신경학적으로 비가역적 상태.
35분 후에도 이 환자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엔 그것이 맞다.
"박 과장."
준호가 말했다.
"이 환자의 사전의료지시서 확인했습니까?"
박영준이 답하지 않았다.
"확인하세요. 의료진에게 공지하세요. 우리는 의학적 한계를 존중합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의학적 한계를 존중한다.
자신이 방금 무엇을 말했는가.
이것은 거짓이다.
존중이 아니다.
포기다.
도망이다.
그런데도 준호는 계속 서 있었다. 환자의 옆에. 심박동이 돌아올 가능성은 없다. 뇌사 상태에서 회생은 불가능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의학적으로도 알고 있었고, 이제는 도덕적으로도 알고 있었다.
김수진이 준호의 옆으로 왔다. 그녀의 손이 준호의 팔을 잡았다. 꾹 눌렀다. 그것은 응원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넌 옳은 선택을 했다는 확인.
하지만 그 손도 떨리고 있었다.
15분이 지났다. 20분. 25분.
환자는 여전히 죽어 있었다. 신체는 움직이고 있었지만, 환자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박영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박영준은 준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응급실 구석에 서서 팔을 껴안고 있었다.
30분.
"심전도 무수축 지속."
누군가의 목소리.
"혈압 측정 불가."
또 다른 목소리.
"동공 산대 지속, 대광반사 소실."
준호가 시계를 봤다. 오후 7시 38분.
"35분 경과했습니다."
준호가 말했다.
"사망 선고합니다. 시간 19시 38분."
침상 주변의 움직임이 멈췄다. 의료진들이 손을 거뒀다. 모니터는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음향을 껐다.
침묵.
응급실의 침묵은 깊었다.
박영준이 준호를 봤다. 그의 눈에는 분노와 실망이 있었다. 준호는 그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처음으로 박영준의 눈에서 눈을 돌렸다.
"유족 상담은?"
준호가 물었다.
"담당 간호사가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답했다.
준호는 침상을 떠났다. 응급실 통로로 나갔다. 거리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멈췄다. 벽에 기대고 서 있었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응급실 의무실. 오후 7시 42분.
준호는 혼자 앉아 있었다. 손을 들어 봤다. 떨리고 있었다. 아직도 금빛의 자국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준호는 알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장수연이 들어왔다.
"너 괜찮아?"
장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거짓이었다.
"그 환자 죽었어. 어차피 죽을 환자였어. 넌 옳은 선택을 했어."
"알고 있습니다."
"근데 왜 그렇게 보여? 마치 네가 죽인 것처럼."
준호는 답하지 않았다.
장수연이 앉았다. 준호의 옆에. 그들은 침묵했다. 5분. 10분.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예전에 한 말 기억해?"
장수연이 말했다.
"죽음도 선택이라고. 그리고 생명도 선택이라고."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넌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어. 넌 모든 죽음을 돌리려고 했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뭘 했는지 알아?"
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10명을 죽였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넌 한 명을 살리기 위해 10명을 죽인 거야."
"그건 내 책임이 아닙니다."
준호가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책임이 없다고? 그럼 뭐야? 의료진이 최선을 다했으니까? 환자가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장수연이 일어섰다.
"응급실에서 우리가 배우는 첫 번째 것이 뭔지 알아? 우리는 신이 아니라는 거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있고, 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거야. 그 한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넌 그 다음 환자까지 죽여. 넌 이미 그렇게 했어."
그리고 장수연은 나갔다.
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응급실. 오후 8시 15분.
모니터에 새로운 신호가 들어왔다.
'응급 환자 도착. ETA 5분. 교통사고, 두부 외상, 생존 가능성 60%.'
준호는 의무실에서 나갔다. 응급실로 돌아갔다. 침상이 준비되었다. 의료진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환자가 들어왔다. 20대 남자. 교통사고로 인한 두부 외상. 의식은 있었다. 생존 가능성은 60%.
박영준이 준호를 봤다. 그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거기에는 경멸이 섞여 있었다.
"준호. 이 환자는?"
준호는 환자를 관찰했다. 20대 남자. 의식 있음. 호흡 안정적. 맥박 촉지 가능. 신경학적 검진 수행 가능한 상태.
"생존 가능성 60%입니다."
준호가 말했다.
"신경외과 협진이 필요합니다. CT 촬영으로 두개강 내 출혈 여부를 확인하고, 필요시 응급 수술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호는 환자의 눈을 들어 올렸다. 동공 크기 확인. 빛 반응 확인. 양쪽 모두 정상.
"신경학적 검진을 30분마다 반복해서 상태 악화를 조기에 감지하겠습니다. 의학적 지식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준호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결정은 명확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과 달랐다.
이전에는 이 환자를 보면서도 금빛이 떠올랐을 것이다. 60% 생존 가능성. 40%의 죽음. 그 40%를 돌릴 수 있다는 유혹.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유혹.
하지만 지금 준호의 눈에는 금빛이 없었다.
오직 의료 데이터만 있었다. 60% 생존 가능성. 의학적 한계. 그리고 그것을 존중하는 의사의 결정.
박영준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돌아섰다.
준호는 환자의 침상 옆으로 갔다. 신경학적 검진을 시작했다. 손가락 따라오기. 대칭적 근력 검사. 반사 검사.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당신은 운이 좋아요."
준호가 환자에게 말했다.
"생존 가능성이 60%입니다. 충분히 높은 확률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의료를 제공하겠습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환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이 명확했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희망도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준호는 환자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 살아 있는 손. 그리고 준호의 눈에서 금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영구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준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능력이 사라진 건지, 아니면 자신이 능력을 거부한 건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제 그는 기적을 만들 수 없다.
오직 의사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응급실 밖. 오후 8시 47분.
김수진이 준호를 찾았다. 복도에서. 준호는 벽에 기대고 있었다.
"당신 괜찮아요?"
수진이 물었다.
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수진의 입이 벌어졌다.
주름이 깊어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희끗했다. 눈 주변에는 검은 자국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른 것은 눈빛이었다.
금빛이 사라졌다.
"당신... 능력이..."
수진이 말했다.
"거부했습니다."
준호가 말했다.
"아니, 능력이 없어진 거 같아요."
수진이 말했다.
"방금 그 환자 심정지였어요. 당신 눈이 금빛이 안 됐어요. 처음이에요."
준호는 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해방감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수진이 물었다.
"계속 의사로 일할 겁니다."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구한 환자들을 찾아갈 겁니다. 나비 효과를 되돌릴 순 없지만, 최소한 책임은 질 수 있을 테니까요."
수진이 준호를 봤다. 그녀의 눈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실망이 아니었다. 희망이었다.
"당신이 진짜 의사가 되는 거네요."
수진이 말했다.
응급실 모니터. 오후 9시 12분.
새로운 신호가 들어왔다.
'응급 환자 도착. ETA 3분. 심근경색, 생존 가능성 40%.'
준호는 응급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기적 없이 최선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