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오후 2시 47분, 응급의학과 회의실의 형광등이 하얀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준호는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짐을 느꼈다. 테이블 양편에 앉은 얼굴들이 모두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박영준 과장, 민준영 과장, 오명준 교수, 그리고 의료 윤리 위원회 위원들. 준호는 자신을 위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손이 떨렸다. 주머니에 넣었다.

민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준호 레지던트의 환자 생존율이 90.2%입니다. 동일 기간 응급의학과 평균 생존율은 68.4%입니다. 표준편차로 계산하면 이는 통계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수치입니다."

그는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띄웠다. 준호의 환자 리스트. 각각의 진단명, 처치 기록, 생존 여부. 모두 정확했다.

"의료 기록상 특별한 처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심정지 환자 11명 중 10명이 생존했습니다. 농약 중독 환자는 표준 치료 시간보다 3분 빠르게 회복했습니다."

민준영이 차트를 넘겼다. 통계 수치들이 화면을 채웠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이는 의료 기록에 기재되지 않은 처치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혹은..."

"그것은 능력의 문제입니다."

박영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능력?"

윤리 위원회 위원장이 반복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경고였다.

박영준이 준호를 봤다. 눈빛만으로 침묵을 명령했다. 그리고 다시 위원장을 봤다.

"이준호는 응급의학 분야에서 탁월한 직관력을 가진 의사입니다. 정확한 진단, 신속한 판단. 그것이 높은 생존율의 원인입니다."

"그렇다면 의료 기록에 그 과정이 상세히 기재되어야 합니다."

민준영이 다시 공격했다. 그의 손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현재 차트에는 표준 프로토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응급 상황에서의 판단 과정은 통상 기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준호 레지던트의 의료 기록을 전수 조사하고, 본인에 대한 신체 검사를 실시해야 합니다. 혹시 모를 의료 부정행위를 배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위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의 손이 더 심하게 떨렸다.

"신체 검사?"

"혈액 검사, 신경인지 검사, 뇌 영상. 기본적인 의료진 건강 검진입니다."

오명준이 차분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과학자의 냉철함이 담겨 있었다. 동정도 판단도 없었다. 오직 호기심과 의무감만.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이준호는 48시간 내에 신체 검사를 받아야 했다. 의료 기록 전수 조사도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 동안 준호는 응급실 근무를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

준호는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의 형광등 아래에서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

오후 3시 22분, 신경외과 검사실.

오명준은 준호의 팔에 지혈대를 감았다. 손가락 끝이 보라색으로 변했다.

"몇 개?"

"스무 개입니다."

간호사가 바이알을 준비했다. 스무 개의 작은 유리병이 준호의 피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준호는 천장을 봤다. 천장도 떨렸다. 아니, 자신의 눈이 떨렸다.

첫 번째 바이알이 채워졌다. 어두운 빨강. 두 번째. 세 번째. 오명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채울 뿐이었다. 아홉 번째 바이알까지 오면서 준호는 속으로 세었다. 열 개. 열한 개. 열다섯 개.

마지막 바이알이 채워질 때, 오명준이 입을 열었다.

"당신의 생물학적 신체 나이를 추정해보니 50세에서 52세 사이입니다."

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혈액 검사에서 신우신염의 흔적이 보입니다. 신장 기능이 정상인 사람치고는 이상합니다. 백혈구 수치도 높습니다. 만성 스트레스의 신호입니다."

오명준은 바이알들을 분석기에 집어넣었다.

"혈청 크레아티닌 수치가 1.8입니다. 정상은 0.6에서 1.2입니다. 당신의 신장은 이미 손상되고 있습니다."

침묵이 계속되었다.

"당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요. 그리고 정말로... 그게 뭔지 궁금해요. 하지만 먼저 당신은 의사를 그만둬야 합니다."

준호가 처음 눈을 맞췄다. 오명준의 시선은 의학적 호기심과 의료인의 책임감이 뒤섞여 있었다.

"당신은 죽어가고 있어요."

오명준의 목소리는 감정이 없었다. 마치 검사 결과를 읽어주는 것처럼 객관적이었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준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할 말이 없었다. 거짓말을 해야 할까? 하지만 오명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수치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신경인지 검사도 받아야 합니다. 뇌 MRI도."

오명준이 다시 말했다.

"혹시 당신이 겪는 신체 변화가 심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 그런 착각은 버리세요. 이건 생물학적 현실입니다."

---

오후 4시 11분, 검사실 밖의 복도.

김수진이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눈이 빨개 있었다. 준호가 나오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수진."

준호가 다가갔다.

"봤어?"

"응."

수진의 목소리는 작았다.

"얼마나... 심해?"

"모르겠어. 신경 써."

수진이 준호를 봤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선배. 이게 뭐야? 진짜 뭐야?"

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수진의 손이 떨렸다. 아니, 준호의 손이 떨렸고, 그것을 보는 수진의 손이 떨렸다.

"환자들을 구했어. 맞지?"

"응."

"그런데 자신은?"

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수진이 돌아섰다.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리고 멈춰 섰다. 뒤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이게 정말 필요한 거야?"

그 말에는 질책도, 동정도 없었다. 오직 절망만 있었다.

---

오후 5시 33분, 응급실 밖 로비.

이은지 기자가 응급실 입구에 서 있었다. 카메라 대신 노트북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병원 관계자들에게 접근했다.

"이준호 선생님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으신가요?"

간호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계속 물었다. 모두가 거절했다. 하지만 거절이 많다는 것 자체가 무언가 있다는 신호였다.

이은지는 응급실 CCTV 영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준호가 환자를 보는 모습. 손을 얹는 장면. 그리고 환자가 깨어나는 순간. 그것을 반복해서 담았다. 12번의 회복. 12번의 기적. 그 속에서 패턴을 찾았다.

준호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 초반의 영상과 최근의 영상을 비교하면 차이가 명확했다. 피부의 탄력이 사라지고, 주름이 깊어지고, 움직임이 둔해지고 있었다.

---

오후 6시 15분, 기자회견장.

박영준이 긴급 기자회견을 소집했다.

"우리 병원은 이준호 선생님의 탁월한 의료 역량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박영준의 말은 부드러웠다. 미소도 자연스러웠다.

"모든 의료 기록은 투명하게 공개될 것입니다. 의료 윤리 위원회의 조사에 전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이은지는 노트를 들고 질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준호의 신체 변화를 담은 영상 프레임들을 펼쳐 놓고 있었다. 박영준은 그녀를 외면했다. 그녀가 손을 들 때도, 질문을 시작할 때도.

"우리는 이준호 선생님이 응급의학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박영준의 말 뒤에는 다른 언어가 숨어 있었다. 우리는 이 상황을 통제할 것이다. 우리는 피해를 최소화할 것이다. 그리고 필요하면 누군가를 희생시킬 것이다.

기자회견장 뒤편에서 민준영은 자신의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박영준의 모든 말, 그의 표정, 회피의 패턴. 그가 준비한 의료 기록 조사 자료는 이제 기자회견의 내용과 함께 더욱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노트에 무언가를 메모했다. '의료 기록 위조 가능성 높음. 추가 감시 필요.'

---

오후 7시 42분, 응급실 밖 복도.

박영준이 준호를 불렀다.

"이준호."

준호가 돌아섰다.

"민준영 놈이 계속 문제 삼을 거야."

박영준의 목소리는 낮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넌 며칠 쉬어. 병가를 내."

"왜요?"

"그동안 우리가 정리할 게 있어."

준호가 박영준의 얼굴을 봤다. 그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으려고 했다. 하지만 읽을 수 없었다. 박영준은 완벽한 관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료 기록을 정리해야 하고, 윤리 위원회와 조율해야 해. 넌 그 과정에 없는 게 낫다."

"그런데..."

응급실에서 알람이 울렸다. 높고 날카로운 소리. 중증 환자 도착. 준호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발이 응급실 방향으로 향했다.

박영준이 손을 올렸다.

"가지 마. 넌 병가 중이야."

준호가 멈췄다. 응급실 안에서 의료진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침상에서 심전도 모니터가 울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정지! 심폐소생술 시작!"

준호의 손이 떨렸다. 그것은 단순한 떨림이 아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하지 못하게 막히는 무력감이었다.

"넌 여기 서 있어."

박영준이 응급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준호는 복도에 남겨졌다. 응급실 안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심전도의 비프음. 의료진의 지시 목소리. 그리고 그 속에서 누군가의 숨이 멈춰 있었다.

준호의 눈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아니,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금빛은 죽음 앞에서만 나타난다. 그리고 준호는 지금 응급실 밖에 있다.

하지만 금빛은 계속 나타났다.

침상 5번. 심정지 환자. 뇌사 판정 직전.

5분을 되돌릴 수 있다.

준호의 손이 복도의 벽을 짚었다. 박영준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넌 여기 서 있어."

응급실 안에서 의료진이 흐르는 시간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준호는 복도에 서서 그 시간을 본다. 그리고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다.

금빛이 더 강해졌다.

준호의 입술이 떨렸다.

응급실 안의 비프음이 더 빨라졌다. 심전도 리듬이 불규칙해지다 평탄선으로 변했다. 누군가 외쳤다.

"Asystole! 에피네프린 1mg IV!"

준호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금빛이 시야 전체를 잠식했다. 그것은 죽음의 신호였다. 그리고 동시에 구원의 신호였다. 5분을 되돌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박영준이 막아섰다.

"넌 여기 서 있어."

이 말은 지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위협이었다. 준호가 응급실에 들어가면 병가는 끝나고, 윤리 위원회의 조사는 가속화될 것이다. 민준영의 추적은 더 거세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숨기려던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응급실 안에는 죽어가는 환자가 있다.

5분을 되돌릴 수 있다.

준호의 발이 움직였다. 한 발 앞으로. 응급실 문이 가까워졌다. 창을 통해 침상 5번이 보였다. 의료진들이 가슴 압박을 반복하고 있었다. 환자의 얼굴이 창백했다.

준호의 손이 문 손잡이에 닿았다.

그 순간, 응급실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김수진이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붉었다.

"준호 선배..."

수진이 준호를 봤다. 그리고 준호의 눈을 봤다. 금빛으로 물든 눈을.

수진의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이 준호의 팔을 잡았다.

"안 돼요."

목소리가 떨렸다.

"제발... 안 돼요."

준호가 수진을 봤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있었다. 그리고 그 눈물 속에는 공포가 있었다. 공포와 함께 무언가 다른 감정도 있었다. 절망.

"선배, 당신..."

수진의 목소리가 끊겼다.

"당신 얼굴 봤어요. 거울에. 혼자 있을 때."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주름이... 손이... 머리가..."

수진이 준호의 손을 봤다. 떨리는 손. 노인의 손처럼 보이는 손. 피부가 늘어져 있고, 나이 반점이 떠올라 있었다.

"넌 알고 있었어? 너 뭐하는 거야?"

응급실 안에서 의료진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심정지 지속! 계속!"

금빛이 더 강해졌다. 준호의 시야가 거의 금색으로 물들었다. 5분을 되돌릴 수 있다. 지금 바로.

준호의 발이 한 발 더 앞으로 나갔다.

수진이 양손으로 준호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몸이 응급실 문을 막았다.

"제발!"

목이 터질 듯한 목소리였다.

"제발 안 해요! 선배, 제발!"

준호가 멈췄다. 수진의 얼굴을 봤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그 눈물 속에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잃어가는 절망이 있었다.

응급실 안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30분 경과. 뇌사 판정 기준 충족. 심폐소생술 중단."

준호의 손이 떨렸다. 호흡이 얕아졌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 늦었어?"

수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에요. 아직 5분 안에..."

"아니야."

응급실 안에서 박영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폐소생술 중단. 사망 선고."

금빛이 사라졌다.

준호의 눈이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검은색은 이전의 검은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허함이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깨달음이었다.

수진이 준호의 팔에서 손을 놨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당신... 그동안... 몇 번이나..."

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응급실 문을 통해 들어갔다. 창백한 얼굴의 환자가 침상 5번에 놓여 있었다. 의료진들이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박영준이 준호를 봤다.

"넌 왜 들어왔어? 나가."

"환자는?"

준호의 목소리가 낮았다.

"사망 선고했어. 뭐 더 필요해?"

박영준이 차트를 적었다.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펜은 의료 기록을 수정하고 있었다. 표준 프로토콜만 기재하고, 특이 사항은 생략하는 방식으로. 시스템의 논리에 맞게.

"저 환자, 제 능력으로 살릴 수 있었어요."

응급실이 조용해졌다. 의료진들이 준호를 봤다.

박영준이 손을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5분 안에 심폐소생술을 계속했으면, 회생 가능했어요."

박영준이 일어섰다. 준호에게 다가갔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냉정했다.

"넌 지금 뭐라는 거야? 자백해?"

"네."

준호가 대답했다.

"내가... 그동안..."

박영준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준호의 입을 막지는 않았지만, 그 제스처는 명확했다. 입을 다물라.

"여기가 적절한 장소가 아니야."

박영준이 방을 나갔다. 그 뒤를 준호가 따랐다.

---

오후 8시 3분, 박영준의 사무실.

문이 닫혔다. 박영준이 의자에 앉았다. 준호는 서 있었다.

"너 뭐하는 거야?"

박영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그 평온 속에는 분노가 있었다.

"뭔데 갑자기 자백?"

"환자를 살릴 수 있었는데, 살리지 않았어요."

"그래. 그래서?"

박영준이 준호를 봤다.

"넌 그 환자를 살리려고 했어?"

"네. 하지만..."

"하지만 뭐?"

박영준이 일어섰다.

"나 때문에? 내가 막아서?"

"네."

준호가 대답했다.

박영준이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너 생각이 얼마나 단순한지 알아? 넌 지금 뭐라고 생각해? 내가 너를 막아서 환자가 죽었다고? 그래서 넌 자책하고 있어?"

"아니라면..."

박영준이 책상 서랍을 열었다. 의료 기록 파일을 꺼냈다. 환자의 사전의료지시서.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뇌사 상태에서의 생명 연장 거부. 장기 기증 동의.

"뇌사 판정이 났어. 30분. 기준을 충족했어. 그리고 가족이 장기 기증을 동의했어. 넌 그걸 알아?"

준호가 멈췄다.

"그 환자는 뇌사 상태에서 네 능력으로 회생되더라도 식물인간이 되는 거야. 그리고 그 환자는 그걸 원하지 않았어. 사전의료지시서에 명확하게 적혀 있어."

박영준이 문서를 펼쳐 보였다. 환자의 서명. 날짜. 증인의 도장.

"그래서 나는 너를 막은 거야. 너 때문이 아니라 환자 때문에. 이해해?"

준호가 말하지 않았다. 박영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자신이 환자를 살릴 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그 환자는 식물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

박영준이 다시 앉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그리고 이제 넌 뭐라고 할 거야? 윤리 위원회에 가서 '내가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라고 자백할 거야? 그럼 넌 미친 놈이 되는 거고, 나 병원은 의료 부정행위 기관이 되는 거야."

박영준이 책상을 짚었다.

"그래서 넌 이제부터 입을 다물어야 해. 아무도 모르는 게 낫다. 윤리 위원회, 민준영, 이 기자들... 모두 추측만 할 뿐, 증명은 못 해."

"제 능력이..."

"내 말 들어?"

박영준이 목소리를 높였다.

"넌 이제 병가야. 3주. 그 사이에 우리가 정리할 거야. 의료 기록, 통계, 모든 게. 그리고 넌 돌아올 때 평범한 의사가 되는 거야. 기적은 끝이야. 이해했어?"

준호가 말하지 않았다.

"대답해."

"네."

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동의가 아니었다. 항복이었다.

박영준이 책상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준호를 직시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박영준이 준호를 봤다.

"너 자신을 자책하지 마. 넌 의사로서 잘한 거야. 더 이상 할 수 없는 선까지 했어. 그게 의료의 한계야. 그걸 받아들이는 게 성숙한 의사야."

준호의 입술이 떨렸다.

"그 환자는 이제 기증자가 될 거야. 심장, 간, 신장, 각막. 4명의 생명을 살릴 거야."

박영준이 차트를 펼쳤다. 수혜자 리스트. 심부전 환자, 간경변증 환자, 말기 신부전 환자, 각막 이식이 필요한 환자. 각각의 이름, 나이, 진단명. 모두 실제 데이터였다.

"개별 환자를 살리는 것만이 의료가 아니야. 시스템이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도 의료야. 그 환자는 죽음으로써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 거야. 그게 의료 윤리의 진정한 의미야."

박영준이 자료를 준호 앞에 놓았다.

"이 네 명 중 한 명이라도 당신의 능력으로 살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넌 그럴 수 없었지. 그래서 이 시스템이 있는 거야. 개인의 능력을 넘어선 구조의 논리."

준호의 눈이 박영준을 바라봤다. 그 말이 맞는지 틀렸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시스템의 논리. 개인의 도덕성을 넘어선 구조의 필연성.

박영준은 준호의 표정 변화를 읽었다.

"넌 이제 그걸 이해해야 해. 개별 환자를 살리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하는 거야. 그게 더 큰 선이야."

박영준이 의자에 기대었다.

"그리고 기억해. 그 환자의 장기로 살아날 네 명의 생명. 그들이 너의 진정한 환자야."

준호는 박영준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시스템의 논리는 개인의 죽음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그 정당화는 그럴듯했다. 4명의 생명을 살린다는 논리는 1명의 죽음을 흡수했다.

하지만 준호의 가슴 속에는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외부의 강요에 대한 저항이었다.

준호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박영준이 손을 들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마. 넌 이제 이해했어. 그게 전부야."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동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저항의 침묵이었다. 시스템의 논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침묵이었다.

박영준이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보였다. 준호가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결정이 너한테 힘들겠지. 하지만 이게 의료인이 해야 할 선택이야. 개인의 감정을 넘어서는 것. 그게 전문성이야."

박영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설득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

오후 9시 12분, 응급실.

준호가 로비로 나왔다. 수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

"괜찮아."

준호가 수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그 손은 떨리고 있었다.

"너는 잘 했어. 정말 잘 했어."

수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전... 뭘 했어요?"

"너는 내가 멈추게 해줬어. 그게 다야."

수진이 준호를 봤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공허했다. 하지만 그 공허함 속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 항복이 아니라 결정.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내린 결정.

"선배, 당신..."

"가. 너는 퇴근해. 충분히 했어."

수진이 물러섰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준호를 떠나가면서도 자신이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응급실 밖 거리. 밤 하늘은 검었다. 서울의 불빛들이 준호를 비추고 있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떨림 속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 자책이 아니라 깨달음. 죽음을 돌릴 수 없다는 깨달음이 아니라, 죽음이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는 깨달음.

하지만 그 깨달음도 금방 흔들렸다.

응급실에서 또 다른 알람이 울렸다.

준호의 눈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침상 5번. 아니, 침상 3번. 또 다른 심정지.

5분을 되돌릴 수 있다.

준호의 발이 멈췄다. 손이 떨렸다.

박영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 환자는 기증자가 될 거야. 4명의 생명을 살릴 거야. 시스템이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하는 게 성숙한 의사야.

그리고 그 말 뒤에는 또 다른 질문이 있었다.

박영준이 막지 않으면?

준호의 발이 응급실 방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는 선택이다.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을 신뢰할 것인가. 개인의 도덕성인가, 아니면 구조의 필연성인가.

응급실 문이 준호 앞에 있었다. 그의 손이 문 손잡이에 닿았다.

금빛이 더 강해졌다.

5분을 되돌릴 수 있다.

준호는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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