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두 번째 기적

새벽 4시 37분. 응급실 침상 2번에서 심정지 환자의 제세동기 패드가 떨어져 나간다. 간호사가 몸을 날려 집어올렸지만, 이미 심박동은 돌아오지 않았다.

준호는 휴게실 거울 앞에 섰다. 눈가에 새로운 주름이 그어져 있다. 어제는 없던 것 같은데. 손가락을 대고 문질러본다. 피부가 당겨진다. 손가락을 펼쳤다 주먹을 쥔다. 떨림이 계속된다. 거울 속 자신의 눈빛이 낯설다. 부정과 두려움이 섞여 있다.

복도로 나오다가 장수연 수석 간호사와 마주친다.

"어제 일 좀 생각해 봤어?"

장수연의 얼굴에는 피로가 깊게 패여 있다. 25년을 응급실에서 보낸 사람의 얼굴이다. 준호는 발걸음을 멈춘다.

"어제 무슨 일이요?"

"환자 침상 4번. 심정지 15분 만에 회생했어. 그런 일은 없어. 의학적으로."

준호의 입술이 굳었다. 장수연이 한 발 더 가까워진다.

"나는 25년을 봤어. 죽음은 의료진의 실패가 아니야. 그걸 받아들일 수 없는 의사는 번아웃된다. 너도 알겠지?"

준호는 대답하지 않는다. 장수연이 그를 바라본다. 그 눈빛에는 동정이 있었다. 그리고 경고.

"환자들을 더 잘 보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런 말은 하지 마. 이미 본 사람의 눈은 거짓을 따라간다."

장수연은 복도를 지나간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준호는 손을 주머니에 넣는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린다.

아니다. 피로 탓이다.

그것밖에 아니다. 준호는 자신을 설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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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43분. 응급실에 119 구급차가 들어온다. 환자 이송 신호음이 울린다. 준호는 침상 6번으로 달려간다.

"67세 남성, 의식 저하, 호흡 부전, 현장에서 농약 중독 의심. 동공산대, 유연증. 산소 포화도 73%."

구급대원의 보고가 빠르게 흘러나온다. 준호는 환자의 얼굴을 본다. 입가에 하얀 거품. 몸에서 나는 냄새는 농약의 그것이었다. 준호의 손이 환자의 주머니에 들어간다. 의료용 장갑을 낀 손가락이 비닐봉지를 만진다. 약병. 준호가 꺼낸다.

"네오스티그민 30밀리그람? 이건..."

준호의 눈이 반짝였다. 이것은 농약 중독이 아니다. 항콜린에스터라제 약물의 과다복용. 자살 시도. 표준 프로토콜은 작동하지 않는다. 위세척, 기계 환기—이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될 수 있다. 환자는 이미 호흡 근육 마비 상태다. 맥박이 분당 38. 떨어지고 있다.

"산소 포화도?"

"60%로 내려갑니다."

김수진 인턴이 모니터를 바라본다. 손에는 자극제 주사기가 들려 있다. 박영준 과장이 다가온다.

"기계 환기 준비. 위세척은..."

"과장님, 이건 농약이 아닙니다."

준호가 약병을 들어올린다. 박영준의 눈빛이 변한다. 그는 약병을 읽는다. 네오스티그민. 그리고 이해한다. 준호의 얼굴을 본다.

"항독성제?"

"네. 아트로핀 5밀리그람 정맥주사. 즉시."

준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모니터에서 나오는 신호음은 점점 느려진다. 분당 22. 환자의 입술이 파래진다. 호흡이 멈춘다. 심전도 위에 일직선이 그어진다.

"심정지. 제세동 준비."

박영준이 외친다. 간호사들이 움직인다. 제세동 패드가 환자의 가슴에 붙는다. 준호는 그 장면을 바라본다. 환자의 얼굴. 죽음 직전의 그 표정.

준호의 가슴에서 무언가가 울린다. 금빛이다. 아니, 금빛이 아니다. 시간이다.

준호의 눈이 감긴다. 손가락이 떨린다. 심박동이 불규칙해진다. 시야가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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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38분.

준호의 눈이 떠진다. 환자는 아직 의식 저하 상태. 호흡 부전. 산소 포화도 73%. 준호는 즉시 움직인다.

"아트로핀 5밀리그람 정맥주사. 지금 당장."

박영준이 준호를 바라본다. 준호의 얼굴에는 확신이 있었다. 박영준은 명령한다.

"아트로핀 5밀리그람."

간호사가 움직인다. 주사기가 IV 라인에 들어간다. 약물이 흘러들어간다. 모니터 위의 심박동이 변한다. 분당 38에서 62로. 그리고 계속 올라간다. 호흡이 돌아온다. 산소 포화도가 85%로 회복된다. 환자의 입술이 분홍색을 되찾는다.

"기계 환기 준비는?"

"준비 완료했습니다."

김수진이 대답한다. 그녀의 눈이 준호를 향한다. 그 눈빛에는 놀라움이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더 있었다. 경외감.

그런데 그 경외감 뒤에 의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선생님, 어떻게 농약이 아니라는 걸..."

김수진이 물었다. 준호는 그 질문을 피했다.

"현장 정보를 종합하면 보입니다."

"하지만 약병 없이는 진단이..."

"환자를 잘 보는 것뿐입니다."

준호가 말을 끊고 돌아섰다. 김수진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뭔가 이상했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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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12분. 응급실 중환자 관찰실.

환자 박민수는 기계 환기를 받으며 안정적인 생명 징후를 유지하고 있다. 준호는 환자의 옆에 서 있다. 모니터의 심박동을 본다. 규칙적인 리듬. 준호의 손가락도 그에 맞춰 리듬을 탄다. 한 박, 두 박, 세 박. 그리고 놓친다.

준호의 손이 멈춘다. 그의 손가락이 떨린다. 다시 살펴본다. 아니다. 규칙적이다.

준호는 자신의 손을 본다. 손가락이 분명히 떨렸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다.

"대단하네."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준호가 돌아본다. 민준영 과장이 서 있다. 55세의 그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입술에만 있었다.

"농약 중독으로 들어온 환자를 항독성제로 살렸다고 들었어. 진단력이 정말 뛰어나시네."

"환자를 잘 보는 것뿐입니다."

준호가 대답한다. 민준영이 한 발 다가온다.

"그런데 말이야. 그런 수준의 진단을 하려면 보통 신경독성학 전공이 필요해. 넌 그 과목 이수했어?"

"현장 경험으로 배웁니다."

"현장 경험으로?"

민준영의 눈이 좁혀진다. 그의 얼굴이 준호에 더 가까워진다.

"인턴이 어떻게 그런 판단?"

준호는 대답하지 않는다. 민준영이 준호를 한 바퀴 돈다. 마치 사냥감을 살피는 육식동물처럼.

"너 최근에 성공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잖아. 심정지 환자들이 자꾸 살아나. 의료 기록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일이 계속되고 있어. 이상하지 않아?"

"의료진의 협력이 좋아서입니다."

"협력?"

민준영이 웃는다. 그 웃음에는 악의가 없었다. 오히려 친절했다. 더 위험한 친절이었다.

"그럼 혈액 검사 한 번 받아볼래? 건강 상태 체크. 나는 신경외과 전문의니까 너의 신체 상태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수 있어. 최근에 피로 많지? 얼굴도 좀... 지쳐 보이던데."

준호의 몸이 경직된다. 민준영이 웃음을 유지한 채 떠난다. 복도를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가볍다. 준호는 자신의 손을 다시 본다. 떨림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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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47분. 응급실 로비.

준호는 침상을 정리하고 나온다. 로비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병원 홍보팀 직원들이다. 그들 사이에는 카메라가 있었다.

"이준호 선생님?"

홍보팀 팀장이 다가온다. 그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있었다.

"기적의 의사라고 불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늘도 심정지 환자를 살렸다고요?"

준호가 대답한다. 차분한 목소리로.

"환자를 잘 관찰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기적이잖아요. 병원에서도 당신 사례를 마케팅하고 싶어요. 짧은 인터뷰 한 번?"

카메라가 준호를 향한다. 조명이 켜진다. 준호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리고 그 순간, 준호의 시선이 옮겨간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다. 눈가의 주름이 더 깊어져 있다. 어제보다 확실히 깊다. 손가락이 떨린다. 그는 손을 주머니에 넣는다.

미소를 유지하면서도 가슴이 뛴다. 박자가 불규칙하다. 한 박, 두 박, 세 박. 그리고 건너뛴다. 다시 한 박. 박자가 엇갈린다. 준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카메라는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좋은 인터뷰 감사합니다. 이건 큰 뉴스가 될 것 같은데요."

홍보팀 팀장이 말한다. 카메라를 내린다. 준호는 미소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가슴도. 심장이 뛰는 박자가 점점 더 불규칙해진다. 준호는 벽에 기댄다.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한다. 모두 이미 떠났다.

로비의 조명이 준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 얼굴은 이제 52세 남자의 얼굴이었다. 실제 나이는 32세였지만.

거울 앞에서 준호는 중얼거렸다. 이건 피로다. 스트레스다. 일시적인 증상이다. 내일이면 괜찮을 거다. 하지만 손가락은 계속 떨렸고, 가슴은 계속 불규칙했다. 준호는 자신의 눈을 마주쳤다. 그 눈빛이 낯설었다. 두려움과 부정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더 있었다. 죄책감. 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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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22분. 박영준 과장의 사무실.

민준영이 들어간다. 준호가 떠난 직후였다. 박영준은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그 화면에는 홍보팀이 촬영한 준호의 인터뷰 영상이 있었다. 준호가 미소 짓는 얼굴. 준호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모습.

"좋은 자료네. 이걸 병원 뉴스레터에 올리자."

박영준이 말한다. 민준영이 옆에 선다. 그는 영상을 본다. 준호의 얼굴을. 그 얼굴에 남겨진 주름들을. 그리고 카메라가 포착한 그 순간의 흔들림을.

"과장님."

"뭐?"

"이준호 레지던트. 최근 진료 기록들을 보셨어요?"

박영준이 민준영을 본다.

"왜?"

"최근 3주간의 성공 사례들이 의학적으로 설명이 안 돼. 그리고 신체 데이터를 보면..."

민준영이 영상을 일시정지한다. 준호의 얼굴이 멈춘다. 그 얼굴 위의 떨림이 고착된다.

"이 사람의 신체 상태. 제가 이미 입수한 최근 혈액 검사 결과를 보면 비정상적으로 악화되고 있어요. 혈소판 수치, 간 기능 지표, 신장 수치. 모두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의학적으로 이건 심각한 신호예요."

박영준은 화면을 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민준영을 향해.

"그 데이터는 어디서?"

"병원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는 선이 있습니다."

"차트는 건드리지 마."

"과장님?"

"내가 말했어. 차트는 건드리지 마. 알겠어?"

박영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절대 명령이 있었다. 민준영은 웃는다. 그 웃음도 친절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과장님도 이 상황이 비정상적이라는 건 아시겠죠?"

박영준은 대답하지 않는다. 민준영이 사무실을 나간다. 복도로 나오면서 그는 휴대폰을 꺼낸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이준호 레지던트. 의료 기록 전체 접근 필요. 신체 데이터 추적. 비용은 상의.'

메시지가 전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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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시 11분. 응급실 침상 3번.

새로운 환자가 들어온다. 교통사고. 척추 손상 의심. 준호는 환자를 본다. 나이는 45세. 차량 손상이 심했다. 생존 확률은 낮다. 준호의 눈이 환자를 따라간다. 모니터의 심박동. 혈압. 산소 포화도. 모든 수치가 떨어지고 있다.

"CT 촬영 준비."

박영준이 지시한다. 간호사들이 움직인다. 준호는 환자의 옆에 선다. 그리고 기다린다. 심정지를 기다린다. 그 순간이 올 때까지.

가슴이 또 뛴다. 박자가 불규칙하다. 한 박, 두 박. 건너뛴다. 다시 한 박. 준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다. 그는 그것을 닦지 않는다.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환자만 중요하다. 환자만.

모니터의 신호음이 변한다. 심정지다.

"제세동 준비."

박영준이 외친다.

준호의 눈이 감긴다. 손가락이 떨린다. 시간이 역행한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리바운드 시간이 5분이 아니다. 30초다. 단 3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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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시 6분.

준호가 움직인다. 척추 손상이 심하지 않다. 준호는 기관 삽관을 지시한다. 산소 공급을 강화한다. 혈압 강화제를 투여한다. 환자의 생명 징후가 안정화된다. 모니터의 리듬이 규칙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준호는 이미 알고 있다. 능력의 범위가 축소됐다는 것을. 5분에서 30초로. 그것은 신체 악화의 속도가 빨라졌다는 뜻이다.

"대단하네."

음성이 뒤에서 들린다. 준호가 돌아본다. 5층 신경외과 교수 오명준이 서 있다. 응급실에 거의 내려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미소가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차갑다.

"응급 진단이 뛰어나시네요."

"감사합니다."

"당신 최근 건강 상태는 어떠세요?"

준호의 몸이 경직된다.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 사실 당신 같은 의료진은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해. 특히 응급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많으니까. 신경 써야 해."

오명준이 미소를 유지한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의 최근 신체 수치들을 봤거든. 꽤 흥미로운 변화들이 있더라고. 혈소판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고, 간 기능도 악화되고 있어. 신부전 초기 단계로 진행 중이야. 일반적인 피로로는 설명이 안 되는 패턴이야."

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신부전. 그 단어가 준호의 가슴을 관통한다.

"어떻게 제 검사 결과를..."

"병원 시스템은 열려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신경외과 교수니까 접근 권한이 있지. 당신도 알겠지?"

오명준이 한 발 다가온다.

"혹시 최근에 특별한 일이 있었어? 약물을 복용했다거나, 아니면 다른 이유로 신체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거나?"

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오명준이 계속했다.

"내일 오전 10시에 신경외과로 와. 더 정밀한 검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신부전이 맞는지, 아니면 다른 원인인지 확인해야 하니까. 당신의 건강이 정말 중요하니까."

오명준이 떠난다. 그의 발걸음은 여유로웠다. 준호는 환자를 다시 본다. 모니터의 리듬. 규칙적이다. 하지만 준호의 가슴은 여전히 불규칙하게 뛰고 있다. 이제 두려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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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시 33분. 응급실 로비.

준호는 퇴근을 준비한다. 옷을 입고 가방을 맨다. 거울을 본다. 눈가의 주름이 더 깊어져 있다. 어제보다. 그 어제보다도. 준호는 손을 대고 문질러 본다. 피부가 푸석거린다. 손가락도 떨린다. 주머니에 넣는다.

휴대폰이 울린다. 메시지다. 박영준 과장에게서.

'좋은 인터뷰 영상이 나왔다. 내일 병원 뉴스레터에 올린다. 고생했어.'

준호는 메시지를 본다. 그리고 또 다른 메시지를 받는다. 오명준 교수에게서.

'내일 오전 10시 신경외과로. 정밀 검사 준비해 두겠다. 신부전 초기 단계 확진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또.

'이준호 선생님, 기적의 의사 기사 준비 중입니다. 확인 차 인터뷰 한 번 더 할 수 있을까요? - 이은지 기자'

준호는 메시지를 본다. 세 개의 메시지. 세 개의 덫.

박영준은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하지만 오명준은 진실을 파고들 것이다. 신부전 초기 단계. 그것은 신체 악화의 구체적 증거다. 그리고 그것이 외부에 알려지면, 자신의 능력도 함께 노출될 것이다. 민준영은 이미 그 정보를 수집하고 있을 것이다. 누가 먼저 폭로할 것인가. 어떤 거래가 오갈 것인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홍보팀과 기자는 자신을 기적의 의사로 추앙하며 더욱 노출시킬 것이다.

준호는 이제 알고 있다. 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도.

응급실 벽에 기대선 준호의 손가락이 떨린다. 그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뛴다. 이것이 능력의 대가라는 것을. 시간을 되돌릴 때마다 자신의 신체가 급속도로 노화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그것이 외부에 노출되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5분이 30초로 줄었다. 다음엔 10초일까. 아니면 완전히 사라질까. 준호는 눈을 감는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응급실의 소리는 계속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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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9시 14분. 응급실 침상 5번.

새로운 환자가 들어온다. 심정지 상태. 나이는 58세. 심근경색. 준호는 그 장면을 본다. 하지만 준호는 움직이지 않는다. 박영준과 다른 의료진들이 움직인다. 제세동. 약물 투여. 기관 삽관. 모든 표준 프로토콜이 작동한다.

하지만 환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신호음이 일직선이 된다. 박영준이 시간을 확인한다.

"사망 선고. 오후 9시 18분."

침상 5번의 환자는 죽는다. 준호가 보는 앞에서. 준호가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환자가. 하지만 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의 신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호사들이 시신을 정리한다. 준호는 그것을 바라본다. 손가락이 떨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것이 죄책감이다. 자신이 구할 수 있었던 환자를 포기한 죄책감. 심장 박동이 불규칙해진다. 한 박, 두 박, 건너뛴다. 다시 한 박.

준호의 시야가 흔들린다. 침상 5번의 환자 얼굴이 겹친다. 어제 구한 환자 4번의 얼굴이 겹친다. 어제 구한 환자 8번의 얼굴도. 그들의 얼굴이 모두 겹쳐진다.

그리고 준호는 처음으로 깨닫는다. 자신이 구한 환자들 뒤에 자신이 구하지 못한 환자들이 있다는 것을.

어제 구한 심정지 환자 4번은 오늘 퇴원했다. 그 환자는 택시 기사였다. 내일 다시 일을 나갈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태울 것이다. 그 누군가가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도 있다. 혹은 교통사고를 유발할 수도 있다.

준호가 구한 환자들의 그림자는 길다. 그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는 죽을 것이다.

준호는 침상 5번을 다시 본다. 58세 남자. 심근경색. 표준 프로토콜로는 살릴 수 없는 환자였다. 하지만 준호라면 살릴 수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면.

그 대가가 자신의 신체라는 것을 알면서도.

환각이 지나간다. 준호의 기억이 공백이 된다. 몇 초가 빠진다.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린다. 침상 5번은 이미 정리되고 있었다.

김수진이 준호를 본다. 그 눈빛에는 경외감이 아니라 의심이 가득했다. 왜 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는가. 왜 저 환자를 살리려 하지 않았는가. 김수진의 입술이 움직인다. 질문이 나올 것 같다. 하지만 그 순간, 박영준이 그녀를 불러낸다.

준호는 혼자 남겨진다. 응급실의 소음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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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9시 47분. 응급실 복도.

김수진이 준호에게 다가온다. 그 얼굴에는 결연한 표정이 있었다.

"선생님, 침상 5번 환자 왜 안 했어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는다.

"저 환자는 표준 프로토콜로도 살릴 수 있었어요. 선생님이라면 더 빨리 진단할 수 있었을 거고."

"인턴은 그런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판단이 아니라 사실이잖아요. 선생님은 뭔가 숨기고 있어요."

준호가 김수진을 본다. 그 눈빛에는 경고가 있었다. 하지만 김수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선생님을 도와드리고 싶어요. 뭐가 문제인지 말씀해 주세요."

준호의 입술이 움직인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김수진의 눈이 반짝인다. 그것은 경외감이 아니라 결의였다. 그녀는 준호를 돕기로 결정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일 오전 10시. 신경외과 검사 받으신 후에 저를 찾아주세요. 저도 준비하겠습니다."

김수진이 말한다. 그리고 떠난다. 준호는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제 또 다른 덫이 생겼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것은 도움의 손길이다.

응급실은 쉬지 않는다. 준호도 이제 멈출 수 없다.

내일 오전 10시, 오명준의 정밀 검사 결과가 나올 것이다. 신부전 초기 단계. 그것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증거가 될 수도, 아니면 자신을 파멸로 이끌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 순간을 앞두고 준호는 응급실의 소음 속에서 혼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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