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돌 문이 밀려 내려갔다.
준호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신뢰도 0%. 상태창 봉인. 악의 결정체 앞에 선 그는 이미 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에스텔, 칼리아, 레온이 함께 밀고 있었다. 셋의 손이 준호의 손 위에 겹쳐 있었고, 그 무게는 생각보다 뜨거웠다.
"우리... 함께 가자."
에스텔의 목소리였다. 떨리고 있었지만, 결연했다. 준호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뭔가 부서질 것 같았다.
"넌 우리를 도와주려고 했어. 맨날."
칼리아가 말했다. 그녀의 음성은 차갑고 정확했지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신뢰도 0%였잖아. 상태창도 봉인됐고."
레온이 덧붙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진지했다. 광기 진행률 78%를 억누르는 목소리.
"그래도 우린 너를 믿어."
그 순간이었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능력치가 아닌 다른 것이 표시되었다.
**[신뢰도 복구 중...]** **[연대 저주: 활성화]** **[현재 신뢰도: 34%]**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신뢰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음수로 떨어졌던 신뢰도가, 셋의 손의 무게로 인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상승하고 있었다.
"내가... 신뢰받고 있네."
준호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깨달음이었다. 100일 전으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상태창이 보여주는 수치가 아닌, 손가락 끝에 전해지는 온기로.
검은 돌 문이 완전히 밀려 내려갔다.
지하 7층으로 향하는 통로가 열렸다.
---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공기가 차가워졌다. 준호는 앞장을 섰고, 셋은 뒤를 따랐다. 통로의 벽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마치 호흡하는 생물처럼.
레온이 검을 뽑았다. 칼리아는 양손에 푸른 마력을 모았다. 에스텔은 준호의 옷자락을 잡았다.
"계단이 끝나가."
칼리아가 말했다. 호흡이 빨라졌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내려갔다.
마지막 계단을 밟는 순간, 세상이 열렸다.
---
지하 7층은 동굴이 아니었다.
거대한 지하 궁전이었다. 천장은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았고, 바닥은 검은 돌로 깔려 있었다. 그 중앙에 있었다.
악의 결정체.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검은 돌덩어리가 떠 있었다. 수백 개의 쇠사슬로 천장과 바닥,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각각의 쇠사슬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 기운은 마치 혈관처럼 지하 궁전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결정체 표면에는 수백 개의 인간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는 표정으로.
"저게..."
에스텔이 중얼거렸다.
"저주의 근원이야."
칼리아가 말했다.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봤다. 300년 전 다섯 귀족 가문의 전쟁으로 만들어진 원한이, 응축되어, 결정화된 모습을.
결정체에서 검은 파동이 터져나갔다. 일행이 밀려났다. 레온이 검으로 바닥을 찍어 자세를 잡았고, 칼리아는 얼음 벽을 세워 충격을 흡수했다. 에스텔은 준호에게 기대어 서 있었다.
파동이 멈췄다.
그 순간, 결정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왜... 나를 파괴하려고 해?]**
음성이 아니었다. 직접 뇌에 울려 퍼지는 속삭임이었다.
**[난 이 세상의 질서야. 300년 동안 이 대륙의 귀족들을 지배해온 기둥이야. 난 없으면 안 돼.]**
준호의 몸이 움직였다.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결정체의 목소리가 그의 신체를 조종하고 있었다. 칼리아와 레온도 마찬가지였다. 셋의 몸이 천천히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에스텔만 버텼다.
"아니야."
그 목소리는 작았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명확했다.
에스텔이 한 발 내딛었다.
"넌... 질서가 아니야."
준호의 머리가 들렸다. 결정체의 강제력이 한 순간 흔들렸다.
"넌 감옥이야."
준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무릎을 꿇던 몸을 일으켰다. 결정체의 강제력에 저항하며.
"우린 넌 없어도 괜찮아. 우린 이미 자유를 맛봤거든."
칼리아가 일어섰다. 푸른 마력이 그녀의 손에서 폭발했다.
"넌 질서가 아니라 족쇄야."
레온이 검을 들었다. 광기 진행률이 얼마나 올라갔든 상관없었다. 그는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알았다.
"자유."
준호가 한 발 내딛었다. 그 다음 한 발. 그 다음 또 한 발. 결정체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우린 자유를 원해."
결정체에서 검은 파동이 터져나갔다. 더 강하게. 더 격렬하게. 이번엔 저항하려는 의지 자체를 짓누르려는 듯.
준호의 신뢰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신뢰도: 34% → 41% → 48% → 55%]**
셋의 손이 다시 맞닿았다. 준호의 손 위에. 결정체의 강제력에 맞서 함께 버티며. 에스텔의 손이 먼저 닿았고, 그 위에 칼리아의 손이, 레온의 손이 포개졌다. 네 명의 손이 하나로 뭉쳤을 때, 그들의 몸 위에 새로운 빛이 피어올랐다. 에스텔의 기억이 흰 빛으로 폭발했고, 칼리아의 얼음이 은색으로 변했으며, 레온의 검이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아카데미 지하의 깊은 곳에서 또 다른 기운이 솟아올랐다. 검은 기운이 아닌, 은색 빛. 마치 달빛처럼 부드럽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결단이 담겨 있었다.
지하 7층의 벽이 갈라졌다.
그 틈 사이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발렌 크로스였다. 아카데미의 원장이었다.
그의 모습은 다르게 보였다. 마치 오랜 시간 짐을 짊어지다가 마침내 그것을 놓으려는 사람처럼. 그의 눈은 준호를 향했고, 동시에 결정체를 향했다.
"300년 동안..."
발렌이 천천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지하 전체를 울렸다.
"난 이것을 지켜왔다. 모르드 가의 비밀과 함께."
그가 손을 들었다. 은색 빛이 폭발했다.
그 순간, 또 다른 검은 포탈이 열렸다. 모르드 페리온이 나타났다.
그는 지하 7층의 한쪽 벽에서 검은 포탈을 통해 출현했다. 그의 뒤에는 아카데미의 상급생들이 떠 있었다. 십여 명. 모두 모르드의 마법으로 조종당하고 있었다.
"결정체를 깨우는 데 성공했군."
모르드가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 있었지만, 눈은 차갑고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야. 이제 그만해."
그가 손을 들었다.
검은 파동이 터져나갔다. 결정체에서 나오는 파동이 아닌, 모르드 자신이 내보내는 파동. 더 강력하고, 더 정확하고, 더 치명적인 파동.
준호와 일행이 밀려났다. 칼리아의 얼음 벽이 산산조각 났다. 레온이 검으로 바닥을 그으며 저항했지만, 그의 몸도 뒤로 밀려났다. 에스텔은 준호에 기대어 있다가 함께 날아갔다.
준호는 공중에서 상태창을 떠올렸다.
**[회귀 기한: 2일 남음]**
2일. 48시간. 그게 전부였다.
모르드는 준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서 검은 마력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결정체를 파괴할 수 없어."
모르드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는 절박함이 숨어 있었다.
"난 그걸 지킬 거야. 왜냐하면..."
그가 손을 뻗었다. 검은 마력의 폭발이 터져나갔고, 준호는 그것을 정면으로 맞았다.
검은 마력이 준호의 가슴을 향했다. 레온이 나타났다. 그의 검이 모르드의 마력을 두 갈래로 쪼갔다. 검은 기운이 준호의 양옆을 지나갔고, 지하 벽면에 검은 자국을 남겼다. 석조 벽이 녹아내렸다.
"이게... 뭐야?"
준호가 물었다. 숨이 가빴다. 모르드의 마력은 저주와도 다른 무언가였다. 더 직접적이었다. 더 원초적이었다.
칼리아가 준호의 옆에 섰다. 그녀의 손에서 얼음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손이 떨렸다. 모르드의 마력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었을 것이다.
"물러서."
모르드가 말했다. 상급생들에게였다. 그들이 한 발 물러섰다. 모두가 공중에 떠 있었다. 모르드의 마법이 그들의 몸을 띄우고 있었다.
"너희 셋은 여기서 나가."
모르드가 에스텔, 칼리아, 레온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녀석을 남겨둬."
에스텔이 앞으로 나갔다. 준호의 팔을 잡았다.
"싫어."
그녀의 목소리는 작지만 단호했다. 준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에스텔의 기억이 많이 돌아왔다는 것을. 그녀의 눈이 맑아졌다. 마치 오랜 안개가 걷혀나간 것처럼.
"우린... 함께하기로 했어."
칼리아도 앞으로 나왔다. 그녀의 손에서 얼음이 더 강하게 피어올랐다. 불안감은 여전했지만, 그것을 밀어낸 무언가가 있었다. 결단력. 신뢰.
"우린 너를 혼자 두지 않아."
레온이 검을 들었다. 준호를 향한 것이 아니라, 모르드를 향한 것이었다. 그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광기 진행률이 높아졌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 광기 속에는 명확한 의지가 있었다.
"우린 넌 없어도 괜찮아. 우린 이미 자유를 알았으니까."
모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처음으로 그의 표정에 감정이 드러났다. 분노. 아니, 더 깊은 무언가. 절망에 가까운.
그의 입이 움직였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넌 이해할 수 없겠지."
준호가 한 발 내디뎠다.
"넌 이 시스템의 일부였으니까. 이 저주의 수혜자였으니까."
모르드의 눈이 흔들렸다.
"레온 가와 칼리스 가의 저주가 모르드 가를 강하게 만들었어. 에스텔 가의 저주가 넌 권력을 더 집중시켰고. 이 결정체가 있어야 그 모든 게 유지된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피해자여야 하니까."
준호가 더 가까워졌다. 칼리아와 레온, 에스텔이 그를 따랐다.
"근데 넌 놓쳤어. 하나."
그가 모르드의 눈을 마주했다.
"셋이 함께하면 이 결정체를 깨울 수 있다는 걸."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모르드의 몸이 떨렸다. 그의 검은 마력이 흔들렸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검은 마력이 자신의 손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건... 뭐야?"
모르드가 외쳤다.
"난 이 결정체를 제어하고 있었어. 모르드 가의 비밀을 사용해서 300년 동안 이것을 조종해왔어. 난 이것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의 말이 끊겼다. 그의 무릎이 천천히 구부러졌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무언가 더 강한 힘에 의해.
"아니야... 아니야..."
모르드가 중얼거렸다. 그의 논리가 무너지고 있었다. 300년 동안 자신을 지탱해온 신념이 깨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이 저주의 일부였다. 이 시스템의 기둥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난 필요해. 난 이것 없이는..."
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절망으로 가득했다.
아카데미 지하 7층 전체가 흔들렸다.
악의 결정체가 반응했다. 더 강하게. 더 격렬하게. 마치 누군가의 목소리에 깨어난 아이처럼.
검은 기운이 폭발했다. 모르드가 소리쳤다. 손을 들어 그 기운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엔 결정체의 기운이 그의 기운을 밀어냈다. 그가 조종하던 상급생들이 떨어졌다. 공중에서 추락했다.
준호가 손을 들었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신뢰도: 55% → 63% → 71% → 80%]**
숫자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빠르게. 마치 누군가가 계속해서 준호를 신뢰하고 있는 것처럼.
준호는 돌아봤다.
에스텔이 그를 보고 있었다. 칼리아도. 레온도. 그들의 눈이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준호를 향해.
"우린 너를 믿어."
에스텔이 말했다. 그녀의 손이 준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
"넌 우리를 도와주려고 했고, 우린 너를 돕고 싶어."
칼리아가 말했다. 그녀의 손이 준호의 손 위에 포개졌다. 차가운 손.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손.
"이게 뭔지 몰라도 우린 함께할 거야."
레온이 말했다. 그의 손이 마지막으로 포개졌다. 검을 쥔 손. 하지만 지금은 준호를 잡은 손.
"우린... 혼자가 아니니까."
그 말들이 준호의 가슴을 쳤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을 열어주는 것처럼.
준호의 신뢰도가 계속 올라갔다.
**[신뢰도: 80% → 87% → 93%]**
네 명의 손이 하나로 뭉쳤을 때, 그들의 몸 위에 빛이 피어올랐다. 에스텔의 기억이 흰 빛으로 폭발했고, 칼리아의 얼음이 은색으로 변했으며, 레온의 검이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그리고 준호의 손에서는 무지개빛이 나타났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신뢰도: 93% → 100%]** **[연대 저주: 깊화 중]**
발렌이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오랜 세월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300년 동안..."
발렌이 천천히 말했다.
"난 이것의 일부였다. 모르드 가의 비밀을 지켜왔고, 이 결정체를 봉인해왔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나갔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이 저주를 유지해야 했거든. 그래야 이 대륙이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
발렌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넌... 다른 방법을 찾았다."
그가 준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제 끝낼 수 있어. 진정으로."
모르드가 외쳤다.
"원장님, 이건..."
"알아."
발렌이 말했다. 그의 눈은 준호에게로 향했다.
"그 아이가 맞다. 넌 이미 패배했다."
발렌의 손에서 은색 빛이 폭발했다. 그것이 악의 결정체를 감쌌다. 검은 기운과 은색 빛이 충돌했다.
지하 전체가 백색으로 타올랐다.
준호는 칼리아를 끌어당겼다. 레온과 에스텔도 함께 몸을 날렸다. 벽 쪽으로.
폭발이 지나갔다.
준호가 눈을 떴다. 지하 7층은 거의 파괴되었다. 천장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렸고, 벽은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결정체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다만, 이전보다 작아 보였다. 은색 빛이 그것을 감싸고 있었다. 마치 감옥처럼.
발렌이 준호 앞에 섰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마치 모든 힘을 소진한 것처럼.
"이제 넌 할 수 있다."
그가 말했다.
"이것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어."
준호가 물었다. 목이 말라 있었다.
"넌... 왜?"
발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슬픈 웃음이었다. 동시에 해방된 웃음이었다.
"왜냐하면 난 이제... 자유롭고 싶어."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상태창이 떠올랐다.
**[회귀 기한: 47시간 12분 남음]**
그리고 그 아래,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경고: 악의 결정체 봉인 해제. 완전한 파괴 시도 시 이 시간대 전체가 붕괴될 수 있습니다. 회귀 불가능. 돌아갈 수 없음.]**
준호의 손이 떨렸다. 칼리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레온이 옆에 섰다. 에스텔이 앞으로 나갔다.
"우린 함께야."
에스텔이 말했다. 그녀의 눈은 맑았다.
"넌 혼자가 아니야."
준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악의 결정체를 향해. 그 검은 돌을 향해. 칼리아의 손이 자신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레온의 검이 여전히 준호를 지키고 있었다. 에스텔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여기 있었다.
준호는 첫 번째 검은 쇠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