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신뢰도 -3%

상태창의 숫자가 깜빡였다. 음수. 준호는 스마트폰을 내려놨다 집어 올렸다를 반복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화면에 띄워진 문구는 더 끔찍했다.

**【경고】신뢰도 임계점 도달. 상태창 영구 봉인까지 72시간.**

72시간. 악의 결정체를 찾고, 봉인을 풀고, 파괴하기까지.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런데 상태창은 이제 쓸 수 없다. 신뢰도가 음수라는 건 상태창 자체가 준호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뜻이었다. 화면 오른쪽 상단의 체력 표시가 999에서 998로, 998에서 997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핸드폰을 놨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그 순간이었다.

—준호.

발렌 크로스의 목소리였다. 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복도 끝 원장실의 불이 켜져 있었다. 그곳으로 가야 했다. 아니,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발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준호는 복도를 통해 원장실로 들어갔다.

"상태창이 봉인되고 있군."

발렌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아래, 지하에서 자욱한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신뢰도가 음수까지 떨어졌다는 건 당신이 얼마나 많은 신뢰를 배반했는지를 의미한다."

"그게... 뭘 의미하는 건가요?"

준호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발렌이 돌아섰다. 그의 눈이 준호를 관통했다.

"당신은 그들에게 거짓을 팔았어. 자유를 팔았어. 하지만 자유는 개인이 주는 게 아니야. 시스템이 허용하는 것이야."

"그들이... 누군가요?"

"에스텔. 칼리아. 레온. 당신이 저주를 풀어줬다고 약속한 사람들이지."

준호의 호흡이 멈췄다.

"당신이 상태창으로 본 것은 저주가 아니라 시스템 자체야. 그리고 당신이 그걸 해제한다고 생각한 건, 실은 그 시스템을 더 효율적으로 재편하는 것뿐이었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렌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이 아카데미는 300년을 유지해 왔어. 악의 결정체는 그 기초 위에 있고, 모든 귀족은 그걸 알고 있지 않으면서도 알아.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그 체계를 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패턴을 찾는 것뿐이야."

"그럼... 넘어가야 한다는 건가요?"

준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선택은 당신의 것이야. 하지만 당신이 해야 할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을 가능성이 높아."

발렌이 다시 창밖을 봤다. 검은 기운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악의 결정체는 72시간 후 완전히 깨어날 거야. 그땐 이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주변 지역까지 영향을 받을 거야."

"그럼 지하로 내려가서 봉인을 풀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준호가 물었다. 절박함이 목소리에 묻어났다.

발렌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모르드가 당신을 막을 거야. 그는 당신이 지하로 내려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어제도 그랬고."

발렌이 준호에게 한 발 다가섰다.

"그리고 당신이 부수려는 건 저주가 아니라 나 자신일 거야."

발렌의 눈에는 수백 년의 피로가 담겨 있었다.

---

준호는 원장실을 나왔다. 복도는 깜깜했다. 밤 2시가 넘었다. 아카데미는 잠들어 있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다.

발렌의 말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모르드. 그 이름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발렌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준호는 여학생 기숙사로 향했다.

지하로 내려간다고 말해야 했다. 함께 가자고. 그들을 다시 한 번 거짓으로 묶어야 했다.

야간 관리인이 졸고 있었다. 준호는 조용히 계단을 올랐다.

에스텔의 방은 3층. 문을 두드렸다.

"누구... 세요?"

에스텔이 문을 열었다. 잠옷 차림이었다. 눈이 흐렸다. 그런데 준호를 본 순간 그 눈이 변했다.

"준호... 오빠?"

"에스텔. 나랑 얘기 좀 하자."

"이 시간에?"

"응. 중요한 얘기야."

에스텔이 문을 열어줬다. 준호는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작았다. 침대, 책상, 그게 다였다. 에스텔이 침대에 앉았다. 준호는 책상 의자에 앉았다.

"뭐... 뭔데?"

준호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다시 열었다.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했어."

에스텔의 눈이 커졌다.

"넌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고 했잖아. 그건 맞아. 하지만 내가 그걸 풀어주려고 한 이유는... 너를 도와주려는 게 아니었어."

"뭐?"

"너의 신뢰도를 올리기 위해서였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넌 내게 더 의존하게 됐고, 난 그걸 알면서도..."

에스텔의 입술이 떨렸다.

"내가... 뭘 한 거야?"

"넌 모르드에게 노출됐어. 어제 그가 복도에서 널 봤어. 넌 그걸 모르겠지만, 넌 이제 그의 표적이 됐어. 그리고 난 그걸 알면서도 널 계속 내 곁에 뒀어."

에스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오빠는... 날 도와줬어. 내 기억을..."

"기억이 돌아왔어?"

"네."

"그럼 기억나니? 내가 너한테 뭘 요구했는지? 모르드에게 노출된 너의 약점들?"

에스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침묵이 모든 것을 말했다.

준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감정 채팅 알림이었다. 하지만 화면에는 빨간 글씨가 떴다.

**【감정 채팅 종료】신뢰도 0% 이하로 인해 채팅 권한이 박탈되었습니다.**

"에스텔... 미안해."

준호가 일어났다.

"어디... 어디 가?"

"다른 사람들을 봐야 해."

"혼자?"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방을 나갔다.

---

칼리아의 방은 4층 끝 복도였다. 준호는 문을 두드렸다.

"누구예요?"

칼리아의 목소리였다. 잠에서 덜 깬 것처럼 들렸다.

"나야."

문이 열렸다. 칼리아는 준호를 본 순간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넌 오지 마."

"칼리아—"

"모르드가 날 봤어. 어제. 넌 내 약점을 알고 있었어. 그리고 그걸 숨기지 않았어. 넌 내 저주를 풀어줬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내 약점을 더 깊이 파고들게 했어. 그 약점 때문에 모르드가 날 노릴 수 있게 만들었어."

칼리아의 눈이 차가워졌다.

"넌 내 약점을 이용했고, 난 그 약점 때문에 더 깊이 빠졌어. 넌 가. 나랑 얘기하지 마."

"잠깐—"

문이 닫혔다.

준호는 복도에 서 있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숨을 쉴 수 없었다. 손가락의 떨림이 팔 전체로 퍼졌다.

레온은 남학생 기숙사에 있었다. 5층 구석방.

준호가 문을 두드렸을 때, 레온은 이미 깨어 있었다.

"나가."

"레온—"

"너 때문에 난 100% 광기에 도달했어.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해. 내 이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파괴욕만 남았던 그 순간. 그리고 그 상태에서 상급생들을 때렸을 때, 넌 뭘 했니?"

레온의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넌 내 신뢰도를 깎아내고 있었어. 내 광기를 자유라고 불렀지만, 그건 자유가 아니었어. 그건 너 자신을 위한 도구였어. 우린 그냥 도구일 뿐이야. 남의 고통을 수치로 만들고, 그 수치를 올리기 위해 거짓을 파는 너의 도구."

"난 널 돕고 싶었어."

"거짓말. 넌 자신을 도우려고 했던 거야. 이 모든 게 너를 위한 거야."

레온이 문을 닫았다.

---

준호는 복도에 서 있었다. 밤 3시.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손가락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상태창을 켰다. 화면에 떴다.

**【경고】신뢰도 -12%. 체력 992/1000. 상태창 봉인까지 71시간 52분.**

그 숫자들. 992. 매 초마다 깎여나가는 그 수치는, 준호가 그들을 배반할 때마다 더 빨리 떨어지고 있었다.

-3%였던 신뢰도가 -12%가 된 것. 3시간 만에 9% 더 떨어졌다는 뜻이었다.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

교실.

준호는 밤샘 자습실로 사용되는 교실에 있었다. 책상 위에는 준호의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지하 구조도, 악의 결정체의 위치, 봉인 해제 방법. 모두 그곳에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였다.

준호는 상태창을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켰다. 신뢰도 -15%. 껐다. 켰다. -16%. 껐다.

매 초마다 떨어지는 수치. 매 번의 사용으로 더 가속화되는 기한.

'내가... 모두를 상처 줬네.'

그 깨달음이 파고들었다. 에스텔의 눈물. 칼리아의 차가운 목소리. 레온의 분노. 모두가 준호가 만든 것이었다.

상태창을 켰다.

**이준호** - 신뢰도: -18% - 체력: 985/1000 - 기한: 71시간 5분

저주 정보 탭을 열었다.

**【이준호의 저주】** **- 유형: 시스템 적응 저주** **- 진행률: 0% → 100% (활성화 임박)** **- 내용: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시스템을 부수려는 모든 시도가 시스템의 강화로 귀결된다.**

준호의 손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화면을 들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내가... 저주를 당한 건가?'

화면을 넘겼다. 그 다음 항목이 떴다.

**【체크 사항】** **- 상태창 사용 횟수: 147회** **- 신뢰도 기반 기한 감소량: 총 28시간 39분** **- 저주 해제 성공 인원: 4명** **- 신뢰도 배반 인원: 4명**

모든 것이 원점이었다. 해제한 저주의 개수와 배반한 신뢰도가 정확히 같다.

준호가 누군가를 돕기 위해 신뢰도를 썼고, 그 신뢰도를 쓸 때마다 다른 누군가의 신뢰도가 깎여나갔다.

하나의 거울이었다. 준호의 모든 행동이 그대로 반사되어 자신에게 돌아왔다.

절망이 밀려왔다. 이건 저주가 아니라 구조였다. 이 모든 시스템 자체가 자신을 향한 함정이었다.

준호는 상태창을 내렸다.

그 순간.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교실 문이 열렸다.

에스텔이었다. 그 뒤로 칼리아가 들어왔다. 그리고 레온이.

"넌 혼자 가지 않아."

에스텔이 말했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빨갛게 부어 있었지만, 그 안에는 결연함이 있었다.

"기억이 돌아왔어.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넌 절대 날 버리지 않았어. 넌 거짓말을 했지만, 동시에 날 지켜줬어. 모르드가 내 약점을 알아내려고 할 때, 넌 나한테 그 약점을 말해줬어. 넌 내 약점을 이용하지 않았어. 넌 나한테 말해줬어. 그게 다야."

칼리아가 한 발 나섰다.

"모르드가 나한테 한 것들, 그리고 넌 내 약점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넌 그걸 모르드에게 팔지 않았어. 어제 그가 물었을 때, 넌 침묵했어. 그냥 날 지켜줬어. 유일하게 그렇게 한 사람이 넌데, 내가 어떻게 널 버려?"

레온이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슬펐지만, 동시에 단단했다.

"100% 광기 상태에서 넌 나한테 말했어. 돌아와, 라고. 넌 내 광기를 자유라고 부르지 않았어. 그냥 나를 원했어. 그 상태의 나를. 거짓이든 진실이든, 난 그 말을 믿기로 했어."

준호의 상태창이 울렸다.

**【감정 채팅 복구】신뢰도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화면에 떴다.

**신뢰도: -18% → -12% → -5% → 3%**

그리고 가장 아래에.

**【새로운 저주 생성】** **- 대상: 이준호, 에스텔 로즈, 칼리아 칼리스, 레온 아르투르** **- 유형: 연대 저주** **- 내용: 함께 시스템을 부수기로 맹세한 자들은, 함께 부수거나 함께 소멸한다.** **- 진행률: 0%**

준호는 상태창을 내렸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일어섰다.

"이거... 뭐야?"

준호가 물었다.

"뭐라고?"

에스텔이 물었다.

"새로운 저주가 생겼어. 우리 넷이."

"그게... 좋은 건가?"

칼리아가 물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밀었다.

네 명은 손을 모았다.

그리고 함께 교실을 나갔다.

복도를 지났다. 계단을 내려갔다. 아카데미의 심장부로.

지하로.

어둠 속으로.

그들의 발걸음 소리는 흙의 냄새를 가르며 내려갔다. 온도가 떨어졌다. 한 걸음 내려갈 때마다 5도씩. 뼈를 깎는 추위였다. 동시에 공기가 무거워졌다. 마치 누군가의 손이 목을 조이는 듯한 압박감이 가슴팍에 내려앉았다.

지하 3층. 검은 안개가 계단 모서리를 감싸고 있었다.

지하 4층. 멀리서 저음의 울림이 들렸다. 심장 박동처럼.

지하 5층. 마침내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검은색 돌로 만들어진, 높이가 5미터를 넘는 문. 그 위에 새겨진 글씨는 이미 닳아 없어졌다. 하지만 문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은 생생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준호는 알았다.

그 뒤에 있는 게 뭔지.

"준비됐니?"

준호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함께 손을 모았다.

그리고 문을 밀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