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돌 문을 밀어낸 순간, 지하 7층의 공기가 바뀌었다.
악의 결정체는 생각보다 작았다. 거대한 궁전의 중앙에 떠 있는 그것은 주먹만 한 크기의 검은 돌이었다. 하지만 그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아카데미 전체를 짓누르고도 남았다. 발렌의 은색 빛이 결정체를 감싸고 있었지만, 그 봉인은 완벽하지 않았다. 검은 기운이 사이사이로 샌다.
모르드 페리온이 가로막았다.
"이걸 깨면 뭐가 될 줄 알아?"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진짜 침착했다. "저주가 풀리겠지. 모든 저주가. 하지만 그 순간, 귀족 사회의 질서도 붕괴돼. 300년간 유지되던 모든 것이 무너져. 그럼 넌 뭘 하고 싶어?"
준호는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래도 해야 해."
모르드의 눈이 좁혀졌다. "대가를 생각했어?"
"이미 치렀어."
그것이 진실이었다. 준호의 신뢰도는 음수였다. 상태창은 이제 그의 생명을 깎아내는 도구일 뿐이었다. 48시간 내에 그것이 영구 봉인되면, 준호는 이 시간대에서 소멸한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에스텔, 칼리아, 레온도. 그들이 알았다면 함께 내려오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준호는 이미 결정했다. 이 선택 외에는 없었다. 저주에 갇힌 학생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자유를 위해.
칼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손이 준호의 팔을 잡았다.
"함께."
레온도. 에스텔도. 발렌 크로스도. 모두가 한 줄을 이루었다.
모르드는 한 발 물러섰다. 그의 어둠 마법이 일렁였지만, 칼리아의 빙결 마법이 그것을 막았다. 레온의 검이 그 틈을 벌렸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준호가 상태창을 열었다.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
**[대상: 악의 결정체]** **[분류: 저주의 근원]** **[생성: 300년 전 귀족 대전쟁]** **[영향도: 999%]** **[회귀 기한 영향: -1시간/스캔]**
신뢰도가 떨어졌다.
0%.
그리고 아래로.
-5%.
-10%.
-15%.
상태창의 틀이 검게 변했다. 화면의 글씨가 흐려졌다. 준호의 몸에서 피가 흘렀다. 콧구멍에서. 귀에서. 눈가에서.
하지만 그 순간, 준호는 깨달았다.
능력이 없어도 된다는 걸.
손가락이 결정체에 닿았다. 상태창의 정보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이 결정체가 뭔지, 왜 이걸 깨야 하는지, 그리고 그 대가가 뭔지. 모든 걸 알면서 여기 왔다.
손가락을 누르는 순간.
검은 돌이 갈라졌다.
처음엔 가느다란 금이 하나였다. 그다음 둘. 셋. 열. 백. 천. 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악의 결정체가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진동이었다. 색깔이었다. 냄새였다.
아카데미 전체가 흔들렸다.
지상의 탑들이 기울었다. 도서관의 책들이 쏟아졌다. 학생들이 깨어났다. 모두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통증. 그것이 저주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발렌이 손을 들었다. "이제 끝이야."
그의 은색 빛이 결정체를 완전히 감쌌다. 마지막 폭발. 검은 돌이 부서졌다. 먼지처럼 흩어졌다. 사라졌다. 완전히.
300년 동안 이 대륙을 짓눌렀던 저주의 근원이.
준호는 무릎을 꿇었다.
상태창이 보였다. 마지막 메시지.
**[신뢰도: -25%]** **[회귀 기한: 47시간 12분 → 2시간 43분]** **[상태창 봉인 카운트다운: 02:43:00]**
에스텔이 손을 잡았다. "준호?"
"괜찮아. 괜찮아."
거짓이었다. 준호의 몸은 흐릿해지고 있었다.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마치 처음 회귀했을 때처럼.
칼리아가 준호를 부축했다. "뭐야, 뭐 하는 거야?"
"시간이 다 됐어."
레온이 준호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뭐가 다 됐다는 거야? 넌 여기 남아야 해. 함께 있어야 해."
준호가 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웃음이 나왔다. 이상했다. 죽어가면서 웃을 줄이야. 하지만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날 잊지 말아줄래?"
에스텔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우리가 어떻게 잊어. 넌 우리를 구했고, 우리도 너를 구했고..."
칼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손이 떨렸다. 완벽하기만 하던 그녀가 떨고 있었다.
"날 기억해 줄래. 진짜 날. 저주에 갇힌 게 아닌, 날."
레온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준호를 꽉 안았다. 얼굴을 묻었다. 어깨가 들썩였다.
발렌 크로스가 무릎을 꿇었다. 300년을 산 원장이 한 청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내가 놓친 게 뭔지 이제 알 것 같아.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짓밟았어. 넌 그 자유를 보여줬어. 정말로."
"원장님..."
"잊지 않을 거야. 너를. 이 선택을. 너와 함께 있던 이 시간들을."
준호의 몸이 더 흐려졌다. 이제 팔이 안 보였다. 다리도.
에스텔이 목소리를 높였다. "넌 혼자가 아니야. 넌 절대 혼자가 아니야. 우리가 여기 있어."
칼리아가 준호의 손을 부여잡았다. "약속해. 어떻게든 넌 돌아올 거야.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넌 충분히 강했으니까."
레온이 속삭였다. "고맙고, 미안해. 정말."
준호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감각이 희미해져도 들렸다. 시각이 사라져도 들렸다. 목소리는 마지막까지 남았다.
"기억해 줄래?"
"그래. 기억할 거야. 영원히."
준호의 실루엣이 완전히 사라졌다.
지하 7층은 고요해졌다.
악의 결정체가 남긴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네 명이 손을 맞잡은 채 무릎을 꿇고 있을 뿐이었다.
---
화면이 검어졌다.
그 검은 화면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100일이 끝났다.*
*하지만 변화는 계속된다.*
아카데미가 빠르게 지나갔다. 무너지던 탑들이 다시 서 있었다. 학생들이 일어났다. 눈빛이 달랐다. 저주에서 풀려난 눈빛이었다. 모르드 페리온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저주도 풀렸다. 권력 유지의 저주가.
칼리아가 다른 학생들에게 말했다. 준호의 이야기를.
에스텔이 도서관의 책을 정렬했다. 역사를 기록했다. 이 변화의 역사를.
레온이 검을 내려놨다. 폭력성에서 자유로워진 검을.
발렌 크로스가 새로운 규칙을 썼다. 신분제 없는, 저주 없는.
그리고 마지막 장면.
아카데미의 정문 앞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준호였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였다.
그의 눈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직 그가 걸어가고 있다는 것만 보였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 가득 찬 발걸음으로.
# 악의 결정체, 열린 선택
검은 돌 문이 완전히 열렸다.
지하 7층의 궁전 같은 공간이 드러났다. 천장은 없었다. 그저 끝없는 어둠만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은색 빛이 흘러나왔다. 발렌 크로스의 마법이 악의 결정체를 임시 봉인한 것이었다.
준호는 그 은색 빛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떨렸다. 신뢰도 음수. 상태창 봉인까지 2시간 43분. 회귀 기한 47시간 12분. 모든 숫자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준호."
모르드 페리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직 서 있었다. 무릎을 꿇지 않았다. 준호가 결정체를 깨웠을 때도, 발렌이 은색 빛으로 봉인했을 때도, 모르드는 서 있었다.
"이 결정체를 완전히 부수면 어떻게 될지 알아?"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상태창의 경고 메시지. 이 시간대 전체가 붕괴된다는 뜻. 회귀 불가능. 소멸의 끝.
"300년간 유지된 질서가 무너진다. 귀족 사회의 기반이 흔들린다. 저주가 풀리면서 동시에 모든 권력 구조가 재편된다. 혼란이 온다. 피흘림이 온다. 새로운 전쟁이 온다."
모르드가 한 발짝 다가섰다.
"그 모든 걸 감수할 건가?"
에스텔이 준호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칼리아가 숨을 삼켰다. 레온의 어깨가 경직됐다.
준호가 입을 열었다.
"그래."
한 단어였다. 흔한 단어였다. 하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300년의 무게를 짓눌렀던 시스템. 그것을 깨부수겠다는 선택. 돌아갈 수 없는 선택.
"왜?"
"왜냐고?"
준호가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이 모르드의 얼굴을 때렸다.
"저주에 갇혀서 매일 죽어가는 아이들을 봤거든. 기억을 잃어가는 에스텔을 봤고. 완벽해야만 하는 칼리아를 봤고. 폭력성을 억누르는 레온을 봤고. 모두가 이 시스템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어. 그래서야 안정이라고 부를 수 있어? 그게 질서라고 부를 수 있어?"
"그렇다면 넌 뭘 원해?"
"변화를."
준호가 모르드를 똑바로 봤다.
"혼란이든 피흘림이든 상관없어. 그게 진정한 자유를 향한 첫 발이라면."
모르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의 저주도 읽혔다. 상태창이 아직 조금 남아있었으니까. 권력 유지의 저주. 그것이 풀리는 순간, 모르드도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넌 죽어야 해."
모르드의 손에 검은 빛이 모였다. 어둠 마법. 상태창으로도 감지 불가능했던 그 힘이.
하지만 에스텔이 앞으로 나섰다.
"안 돼."
그녀의 손에 흰 빛이 모였다. 회복 마법. 저주에 갇혀 본 모습이 아닌, 진정한 능력.
칼리아도 움직였다. 빙결 마법. 모르드의 어둠 마법을 얼음으로 봉인하기 시작했다.
레온은 검을 뽑았다. 더 이상 억누르지 않는 검. 광기에서 풀려난 진정한 검술.
모르드는 밀려났다. 세 명의 저주 해제자와 한 명의 최강자 앞에서. 그는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준호는 모르드를 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은색 빛으로 봉인된 악의 결정체를 향했다.
상태창을 켰다.
마지막이었다. 신뢰도가 0이 되면 영구 봉인. 상태창의 모든 기능이 사라진다. 하지만 한 번 더 필요했다. 결정체의 정보. 그것을 읽으면, 어떻게 부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준호가 손을 내밀었다. 은색 빛 안의 결정체를 향해.
상태창이 켜졌다.
**[대상: 악의 결정체]**
**[분류: 초월 존재]**
**[신뢰도: -100% → -101%]**
**[상태창 봉인 카운트다운: 00:00:00]**
세상이 하얀색으로 변했다.
준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무언가가 사라지는 감각. 마치 처음 회귀했을 때처럼. 하지만 이번엔 다했다. 돌아갈 길이 없었다.
상태창이 사라졌다.
완전히.
준호의 손이 악의 결정체에 닿았다.
손가락이 은색 빛을 뚫었다.
그 순간, 결정체가 울음을 내질렀다. 300년의 원한이 한 순간에 폭발했다.
아카데미 전체가 흔들렸다.
발렌 크로스가 소리쳤다.
"함께! 함께 밀어!"
에스텔, 칼리아, 레온이 준호 옆에 섰다. 손을 맞잡았다. 연대 저주가 활성화됐다. 네 명의 신뢰가 한 줄기 빛이 되었다.
그들이 함께 밀었다.
악의 결정체가 깨졌다.
검은 돌이 금이 가고, 은색 빛이 쏟아져 나왔다. 300년의 저주가 해방되었다. 에스텔의 기억이 돌아왔다. 칼리아의 완벽함이 풀렸다. 레온의 폭력성이 사라졌다.
모르드의 권력 유지의 저주도 깨졌다.
그리고 준호.
상태창 없이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능력이 없어도 변화는 가능하다. 손으로 누군가와 함께 밀면, 세상도 움직인다.
아카데미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다시 서 있었다. 다른 모양으로. 저주 없는 모양으로.
준호의 몸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회귀 기한이 끝났다.
100일이 끝났다.
에스텔이 손을 잡았다. "준호?"
"괜찮아. 괜찮아."
거짓이었다. 준호의 몸은 흐릿해지고 있었다.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마치 처음 회귀했을 때처럼.
칼리아가 준호를 부축했다. "뭐야, 뭐 하는 거야?"
"시간이 다 됐어."
레온이 준호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뭐가 다 됐다는 거야? 넌 여기 남아야 해. 함께 있어야 해."
준호가 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웃음이 나왔다. 이상했다. 죽어가면서 웃을 줄이야. 하지만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날 잊지 말아줄래?"
에스텔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우리가 어떻게 잊어. 넌 우리를 구했고, 우리도 너를 구했고..."
칼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손이 떨렸다. 완벽하기만 하던 그녀가 떨고 있었다.
"날 기억해 줄래. 진짜 날. 저주에 갇힌 게 아닌, 날."
레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준호를 꽉 안았다. 얼굴을 묻었다. 어깨가 들썩였다.
발렌 크로스가 무릎을 꿇었다. 300년을 산 원장이 한 청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내가 놓친 게 뭔지 이제 알 것 같아.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짓밟았어. 넌 그 자유를 보여줬어. 정말로."
"원장님..."
"잊지 않을 거야. 너를. 이 선택을. 너와 함께 있던 이 시간들을."
준호의 몸이 더 흐려졌다. 이제 팔이 안 보였다. 다리도.
에스텔이 목소리를 높였다. "넌 혼자가 아니야. 넌 절대 혼자가 아니야. 우리가 여기 있어."
칼리아가 준호의 손을 부여잡았다. "약속해. 어떻게든 넌 돌아올 거야.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넌 충분히 강했으니까."
레온이 속삭였다. "고맙고, 미안해. 정말."
준호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감각이 희미해져도 들렸다. 시각이 사라져도 들렸다. 목소리는 마지막까지 남았다.
"기억해 줄래?"
"그래. 기억할 거야. 영원히."
준호의 실루엣이 완전히 사라졌다.
지하 7층은 고요해졌다.
악의 결정체가 남긴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네 명이 손을 맞잡은 채 무릎을 꿇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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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이 검어졌다.
그 검은 화면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100일이 끝났다.*
*하지만 변화는 계속된다.*
아카데미가 빠르게 지나갔다. 무너지던 탑들이 다시 서 있었다. 학생들이 일어났다. 눈빛이 달랐다. 저주에서 풀려난 눈빛이었다. 모르드 페리온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저주도 풀렸다. 권력 유지의 저주가.
칼리아가 다른 학생들에게 말했다. 준호의 이야기를.
에스텔이 도서관의 책을 정렬했다. 역사를 기록했다. 이 변화의 역사를.
레온이 검을 내려놨다. 폭력성에서 자유로워진 검을.
발렌 크로스가 새로운 규칙을 썼다. 신분제 없는, 저주 없는.
그리고 마지막 장면.
아카데미의 정문 앞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준호였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였다.
그의 눈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직 그가 걸어가고 있다는 것만 보였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 가득 찬 발걸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