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 크로스의 사무실은 준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단순했다. 창밖으로 밤의 아카데미가 검푸르게 물들어 있었고, 책장에는 수백 년 된 서적들이 먼지를 머금고 있었다. 원장은 의자에 앉지 않은 채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태창이라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네."
준호의 심장이 철렁했다. 하지만 얼굴은 움직이지 않았다.
"부정하지 마. 레온, 에스텔, 칼리아. 셋 모두 이상적인 회복 속도를 보였다. 의료진도 이해할 수 없는 변화들이지." 발렌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눈은 준호를 꿰뚫고 있었다. "너는 무엇을 원하는가?"
"저주를 푸는 것입니다."
"거짓말이다."
준호는 침묵했다.
발렌이 책장에서 검은 표지의 낡은 책 하나를 꺼냈다. 표지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그는 책을 펼쳤고, 오래된 종이에서 곰팡이 냄새가 풍겼다.
"300년 전이야. 다섯 개의 대귀족 가문이 대륙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 레온 가, 칼리스 가, 모르드 가, 에스텔 가, 발렌 가. 수십만의 병사가 죽었고, 마법으로 인한 피해는 계산할 수 없었다." 발렌이 책장을 넘겼다. 낡은 그림이 보였다. 불타는 도시, 흩어지는 시체들. "그 원한들이 모여서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
"악의 결정체."
"그렇다. 아카데미 지하 7층에 봉인되어 있다. 수백 년 동안."
준호는 이제 의심하지 않았다. 발렌이 이 정보를 줄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준호가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정체가 무엇을 하는가?"
"매 세대마다 저주를 생성한다. 귀족 가문들을 영원히 묶어두는 기제로." 발렌이 책을 닫았다. "우리 최고 권력층은 이 상황을 유지함으로써 귀족 간의 권력 균형을 유지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한 가문이 다른 가문을 완전히 압도한다면 대륙이 한 번에 무너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저주를 유지한다."
"학생들을 짓밟으면서?"
"그들은 귀족이다. 귀족은 대가를 치르는 법이다." 발렌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넌 다르지 않은가? 넌 노비다. 그런데도 상태창이라는 능력을 가졌다. 그건 이상하다. 매우 이상하다."
준호는 발렌의 눈을 마주쳤다.
"넌 시스템을 바꾸려고 하는 것 같은데." 발렌이 한 발 다가섰다. "그럼 넌 알아야 해. 이 시스템은 수백 년을 유지해왔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지키려고 할 거야. 특히 그 시스템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자들이 말이다."
그 순간, 준호의 상태창에 모르드 페리온의 정보가 떠올랐다. 저주 진행률: 0%. 아니, 그게 아니었다. 상태창의 화면이 깜빡였다. 저주 진행률 대신 다른 수치들이 나타났다.
권력 유지도: 100% 신뢰도 감소 메커니즘: 활성화
준호의 눈이 좁혀졌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목적이었다.
모르드는 저주에 갇혀 있지 않았다. 모르드는 저주를 유지하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발렌의 말이 맞다면, 저주는 귀족 간의 권력 균형을 유지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모르드의 상태창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권력 유지도 100%는 단순한 유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강화였다. 모르드는 저주를 파괴하지 않았다. 저주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아니, 저주 자체를 자신의 도구로 만들었다. 학생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준호는 이제 확신했다. 모르드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는 시스템의 공모자였다.
―
밤 2시.
준호는 기숙사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신뢰도는 거의 0에 가까웠다. 기한은 71시간 42분.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자꾸만 흐르고 있었다.
"이준호."
모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호는 멈추지 않았다. 계단 아래에는 모르드와 함께 상급생 여섯 명이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심각했다. 아니, 심각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사냥꾼의 얼굴이었다.
"지하로 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신경 쓸 바 아닙니다."
"정말? 그럼 너는 모르는 거네." 모르드가 천천히 계단을 올라왔다. "이 아카데미에서 누가 너를 지지하는지."
준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에스텔은 자신의 기억을 되찾느라 바빴고, 칼리아는 불안에 떨고 있었으며, 레온은 광기에 잠식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준호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다. 아니,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떠나가도록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너를 반대하는지도."
모르드의 손가락이 움직였고, 어둠의 마법이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준호의 상태창조차 정확히 포착할 수 없는 영역을 만들어냈다. 절단된 시야. 고립된 공간.
준호는 상태창을 사용했다. 마지막 남은 신뢰도를 깎아내며.
신뢰도가 급락했다. 상태창의 화면이 빨갛게 변했다. 능력이 제약되기 시작했다. 준호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모르드의 마법이 더욱 빠르게 다가왔다.
준호는 도망쳤다.
―
칼리아는 밤 2시 30분에 자신의 기숙사 방에서 창문을 통해 지하 복도의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을 봤다. 그 순간 그녀는 알았다. 준호가 지하로 내려갔다는 것을.
그녀는 오늘 오후 모르드를 만났었다.
"칼리아, 그 녀석과 거리를 둬."
"왜요?"
"넌 지금 위험에 빠져 있는 거야. 그 녀석이 너를 이용하려고 한다. 저주를 풀어준다는 명목으로."
칼리아는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준호는 자신의 저주를 풀어주었다. 진심으로. 거래 없이. 그런데 모르드는 왜 거짓을 말했을까? 그것은 단순한 거짓이 아니었다. 그것은 칼리아를 준호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였다.
칼리아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메시지를 썼다.
―준호, 미안해. 나는... 나는 너를 도울 수 없을 것 같아―
그 메시지는 전송되지 않았다. 신뢰도가 0이 되면서 상태창이 모든 연결을 끊었기 때문이다.
칼리아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들었다. 화면에는 여전히 전송 대기 중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다. 영원히 전송될 수 없는 메시지.
모르드의 거짓말. 준호의 진심. 그 사이에서 칼리아는 깨달았다. 모르드가 자신을 고립시키려고 한 것이라는 걸. 그 깨달음이 칼리아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자신은 준호를 믿고 싶었다. 하지만 모르드의 말도 무시할 수 없었다. 둘 사이에서 흔들리던 그 순간, 칼리아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다.
진실이었다.
모르드가 준호를 고립시키려고 했다면, 그것은 준호가 뭔가 중요한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진실을 알아야만 칼리아는 자신의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모르드의 거짓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준호의 진심을 믿을 것인지.
칼리아는 일어섰다. 외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방을 나갔다.
―
준호는 기숙사 뒤의 숲으로 도망쳤다. 모르드의 마법이 계속해서 뒤따라왔지만, 상태창의 마지막 사용으로 얻은 정보로 겨우 숨을 수 있었다.
신뢰도: 0%
화면이 빨갛게 변했다. 상태창이 울리기 시작했다. 경고음이었다.
기한: 71시간 15분
상태창은 더 이상 저주를 해제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정보를 제공할 수 없었다. 준호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단순한 노비. 상태창도 없는, 신뢰도도 없는, 기한만 남은 노비.
그리고 71시간 15분 안에 악의 결정체를 찾아야 했다.
지하로 가는 길은 여전히 먼 것 같았다.
준호는 숲 속의 어둠 속에 몸을 날렸다. 절망이 밀려왔다. 신뢰도는 바닥이었고,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었고,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 순간, 준호의 머릿속에 발렌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최고 권력층은 이 상황을 유지함으로써 귀족 간의 권력 균형을 유지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르드의 상태창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권력 유지도: 100%. 그것은 유지가 아니라 강화였다. 모르드는 저주를 파괴하지 않았다. 저주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저주를 푸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만드는 시스템 자체를 부수는 것이 답이 아닐까?
준호는 일어섰다. 숲 속의 어둠이 그를 집어삼키려 했지만, 그는 그것을 밀어냈다. 절망은 사라졌다. 대신 명확한 목표가 생겼다. 더 이상 개인의 저주를 푸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두고 있는 이 구조 자체를 파괴하는 것. 그것만이 진정한 해방이었다.
준호는 아카데미 본관을 향해 걸어갔다. 지하로 가는 입구는 원장실 아래에 있다는 것을 발렌의 책에서 이미 읽었다. 신뢰도는 0이지만, 눈은 여전히 볼 수 있었고, 다리는 여전히 움직일 수 있었다.
밤 2시 45분.
준호는 본관 지하 복도에 도착했다. 어둠이 깊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호흡하고 있었다. 아니, 호흡이 아니었다. 그것은 울음이었다. 지하 7층에서 올라오는 울음.
상태창이 울렸다. 마지막 경고.
기한: 71시간
그리고 그 순간, 지하 깊은 곳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기운이 아니었다. 복도의 벽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온도가 급락했다. 공기 자체가 무거워졌다. 악의 결정체가 깨어나고 있었다.
준호는 지하 복도의 벽에 손을 짚고 섰다. 어둠이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전생의 기억이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복도의 끝에 있는 철문. 그 뒤의 계단. 그리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짙어지는 것—
준호의 중얼거림이 복도에 울렸다. 상태창의 화면은 이제 거의 검은색이었다. 저주 정보는 표시되지 않았다. 상대의 약점도 보이지 않았다. 남은 건 기한뿐이었다. 71시간. 71시간 안에 악의 결정체를 찾고, 파괴하고, 돌아와야 했다. 그것도 혼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그때였다.
"준호."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준호가 가장 듣고 싶으면서도 가장 듣기 싫어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였다. 뒤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발걸음. 그 목소리의 주인.
칼리아였다.
"칼리아? 여긴 위험하다."
준호는 몸을 돌렸다. 칼리아는 기숙사 잠옷 차림에 외투를 걸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모르드가 말했어. 너를 피하라고. 너와 거리를 두라고. 그리고..." 칼리아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믿으려고 했어. 정말 믿으려고 했어. 넌 위험한 놈이고, 넌 날 이용하려고 한다고. 근데 말이야..."
"칼리아."
"내 저주가 풀렸어. 넌 거래하지 않고 나를 도와줬어. 왜?"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대답 자체가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칼리아를 더 깊게 물어뜯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 돌아가."
"싫어."
칼리아가 앞으로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그 순간, 지하에서 울려오는 호흡음이 더욱 커졌다. 아니, 호흡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울음이었다. 울부짖음이었다. 수백 년을 기다린 무언가가 마침내 깨어나고 있다는 신호였다.
복도 전체가 진동했다.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온도는 계속 내려갔다.
"이 소리 들려? 이게 뭐야?"
"악의 결정체다."
"결정체?"
칼리아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준호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너는 정말 가야 한다. 난 진심이야."
"나도 진심이야. 나도 가고 싶어. 너랑."
그 순간, 복도의 반대편에서 불이 켜졌다. 횃불이었다. 여러 개의 횃불이 한 번에 켜지면서 복도 전체가 밝혀졌다.
모르드였다.
그의 뒤에는 5명의 상급생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결정적이었다. 더 이상 사냥이 아니라 포획의 시간이었다.
"칼리아, 그 녀석한테서 떨어져."
모르드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치 아이에게 위험한 물건을 빼앗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싫어요."
칼리아가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저항이었다.
모르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칼리아, 넌 지금 뭘 하는 거야?"
"내가 원하는 걸 하는 거예요."
"그게 뭐지?"
"내가 정말 원하는 사람을 지키는 것."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이건 예상 밖이었다. 칼리아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 위험했다.
"칼리아, 물러나. 지금."
준호가 그녀를 뒤로 밀어냈다.
그 순간, 준호의 가슴에 후회가 몰려왔다. 칼리아를 밀어내는 손가락이 떨렸다. 자신이 하는 일이 맞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칼리아는 자신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 칼리아는 이 지옥 같은 시스템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 생각이 준호의 몸을 움직이게 했다.
칼리아는 옆으로 몸을 날렸고, 준호와 모르드 사이에 섰다.
"공격하지 마."
칼리아의 손가락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녀의 팔이 떨렸다. 얼음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다. 특히 이렇게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입술이 파랬다.
모르드의 거짓말과 준호의 진심. 그 사이에서 칼리아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모르드의 말을 따르는 것. 그렇게 하면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준호를 믿는 것. 그렇게 하면 위험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선택을 하는 것이었다.
칼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마법 회로가 활성화되었다. 칼리아의 손끝에서 파란 빛이 피어올랐다. 복도의 온도가 더욱 떨어졌다. 그녀의 숨이 하얀 연기로 변했다. 마법을 시전할 때마다 자신의 체온이 빼앗겨 가는 것을 느꼈다. 손가락이 파래지고, 팔이 경직되고, 가슴이 철렁해졌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준호를 지켜야 했다. 자신이 믿는 사람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복도 전체가 얼음으로 뒤덮였다. 얼음 벽이 준호와 칼리아를 모르드와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분리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컸다. 칼리아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그녀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얼음 마법은 시술자의 체온을 빼앗아가는 마법이었다. 신뢰도가 0인 상태에서 상태창의 보호도 없었다.
"가. 지금 가!"
칼리아가 준호를 밀어냈다. 그리고 준호는 도망쳤다. 뒤에서 모르드의 "잡아!"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순간 칼리아의 얼음 벽이 더욱 커져 복도를 완전히 차단했다.
하지만 준호는 뒤를 돌아봤다. 칼리아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얼음 마법을 사용한 대가로 그녀의 몸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모르드가 그 얼음을 부수려고 어둠의 마법을 날렸다. 칼리아가 그것을 막으려고 다시 손을 들었다.
그 순간, 칼리아는 자신의 생명을 깎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 번 더 마법을 쓸 때마다 자신의 수명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선택은 이미 끝났다. 자신은 준호를 믿기로 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칼리아는 두 번째 마법을 시전했다. 의식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깎아내면서.
그 순간, 그녀의 입에서 피가 더욱 많이 흘렀다.
"칼리아!"
준호가 외쳤다.
"가! 돌아오지 마!"
칼리아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그 목소리는 약했지만, 그 속에는 흔들리지 않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준호는 달렸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아 달렸다. 전생의 기억을 따라 달렸다. 왼쪽 복도, 오른쪽 복도, 그리고 그 끝에 있는 철문.
철문이 보였다.
준호는 몸을 날려 철문을 열었다. 그 뒤에는 계단이 있었다. 내려가는 계단. 어둠으로 향하는 계단.
뒤에서 모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멍청한 놈!"
그리고 그 순간, 어둠 마법이 계단을 덮으려고 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준호는 상태창을 다시 켰다.
신뢰도: -5%
빨간 경고음이 울렸다. 상태창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울렸다. 준호의 머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흘렀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뇌를 집어짜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눈앞이 흐려졌다.
기한: 70시간 45분
1시간이 더 줄어들었다. 그리고 신뢰도가 음수가 되었다. 이제 상태창은 더 이상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준호의 생명을 깎아내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마치 칼리아가 자신의 생명을 깎아내며 마법을 시전했던 것처럼.
준호는 계단을 내려갔다. 한 층, 두 층, 세 층. 고통을 씹으며 내려갔다. 분노가 타올랐다. 칼리아가 자신을 위해 흘린 피. 그 피가 준호의 가슴을 태웠다. 모르드에 대한 분노, 이 시스템에 대한 분노,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지킬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
하지만 그 분노 속에서 준호는 다짐했다. 칼리아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 이 지옥 같은 시스템을 반드시 부수겠다는 다짐.
5층에서 멈췄다.
벽에 손을 짚고 숨을 고르고 있는 준호의 앞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백 년 전부터 있었던 문이었다. 그 위에는 기호가 새겨져 있었다. 준호는 그 기호를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본 것 같은 기호.
그리고 그 기호가 빛나기 시작했다.
지하 7층에서 검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기운이 아니었다. 벽이 흔들렸다. 천장에서 돌이 떨어졌다. 온도는 영하로 내려갔다. 마치 지하 전체가 얼어붙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울음이 났다. 인간의 울음이 아니었다. 원한과 분노가 뒤섞인 울음. 수백 년을 기다린 악의 결정체가 마침내 깨어나고 있었다.
그 울음 속에서 무언가가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검은 기운이 모여 거대한 형체를 이루었다. 그것은 결정체였다. 검은 수정처럼 빛나는 표면. 그 위에서 붉은 에너지가 맥동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결정체의 표면에서 검은 파동이 방출되고 있었다. 그 파동이 닿는 곳마다 벽이 부서지고, 돌이 부스러졌다.
준호의 상태창 화면이 깜빡였다. 마지막 남은 정보였다.
―기한: 70시간 40분―
그리고 그 화면에 새로운 텍스트가 표시되었다.
―악의 결정체 활성화: 1단계―
―신뢰도 복구 불가능―
―당신은 이제 혼자입니다―
준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절망의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노의 웃음이었다. 칼리아가 자신을 위해 피를 흘렸다. 그 피가 준호의 모든 것을 태웠다. 더 이상 자신만을 생각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절망할 수 없었다.
준호의 주먹이 쥐어졌다. 숨이 가빠졌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것은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의의 눈물이었다. 칼리아를 지키겠다는 결의. 모든 학생을 이 지옥에서 해방시키겠다는 결의.
칼리아가 자신을 위해 피를 흘렸다. 그것은 단순한 도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준호를 변화시켰다. 더 이상 자신의 저주만을 생각하지 않게 했다. 모든 학생을 가두고 있는 이 시스템을 부수겠다는 다짐으로.
준호는 거대한 문을 밀었다.
기한은 70시간 40분.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