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밤 11시, 기숙사 방.

레온의 손이 준호의 어깨를 잡았다. 손가락 끝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뭐가 될 거야?"

그 말이 끝나자 레온의 눈빛이 흔들렸다. 광기 저주 92%. 상태창에서 읽은 수치가 준호의 뇌 속에서 깜빡였다. 저주가 진행될수록 레온은 자신의 이성을 잃어갈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그의 몸은 폭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레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 순간 이성이 돌아왔고, 다음 순간 다시 광기가 그를 집어삼켰다. 그 반복. 그 악순환 속에서 레온은 계속 질문했다.

"나는 뭐가 될 거야? 뭐가 될 거야?"

목소리가 부서지고 있었다. 절박함이 아니라 절망이었다. 자신이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지 감각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공포. 그것이 광기 저주의 진짜 고통이었다.

"모르겠다."

준호가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레온은 준호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돌아섰다. 문을 닫는 소리. 복도의 발자국. 그리고 침묵.

준호는 침대에 앉아 천장을 바라봤다. 신뢰도 48%. 기한 95일. 그리고 저주를 푼다는 건, 저주를 푼 그 순간부터 자신도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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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도서관 지하 열람실.

에스텔이 낡은 책을 들고 있었다. 페이지 귀퉁이가 검게 그을렸고, 누군가 자주 펼쳐본 흔적이 선명했다.

"이거... 혹시 뭘 찾고 있어?" 준호가 물었다.

에스텔이 고개를 들었다. 기억 소실 저주 48%. 어제보다 2% 진행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뭘 잃어가고 있는 거 같아. 근데 뭘 잃어가는지 몰라."

정확했다. 저주가 그렇게 작동한다. 기억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기억을 잃어간다는 느낌만 남는다. 끊임없는 불안감 속에서 자신이 누구였는지 깨물어 뜯는 고통.

준호는 에스텔 옆에 앉았다. 그녀가 들고 있던 책을 덮었다.

"넌 뭘 원해?"

"뭘 원한다니?"

"지금 이 순간, 이 학교에서, 지금 이 나이에. 넌 정말로 뭘 원해?"

에스텔이 입을 다물었다. 그 입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나는..."

말을 이었다가 멈췄다. 다시 입을 열었다가 또 멈췄다. 세 번째, 네 번째. 마침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사라지고 싶지 않아. 내가 누구였는지 기억나기 전에 사라져 버리고 싶지 않아."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게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그 다음이었다.

"그럼... 자유로워지고 싶어?"

에스텔이 고개를 들었다.

"자유?"

"누구의 기대도 받지 않고, 누군가의 저주도 받지 않고. 그냥... 너 자신으로."

에스텔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 순간, 상태창의 글자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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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텔 로즈 】

▶ 기억 소실 저주 [해제 중...]

▶ 기억 소실 저주 [해제 중...]

▶ 기억 소실 저주 【 해제 완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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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음. 뭔가 시스템 속에서 딱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이 무엇인지 준호는 알았다.

신뢰도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100 → 95 → 85 → 70 → 50 → 30.

숫자가 떨어질 때마다 시계추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준호의 뒤통수가 철렁거렸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목덜미를 잡고 아래로 끌어내리는 기분이었다.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느낌.

동시에 에스텔의 눈이 초점을 되찾았다.

"아... 아, 내가..."

그녀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가 누구였는지 기억났다."

준호의 화면에 새로운 창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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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 채팅 권한 획득 】

에스텔 로즈와의 신뢰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녀의 진정한 감정을 텍스트 형태로 수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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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가 들어왔다.

『고마워... 처음으로 누군가를 신뢰했어』

준호는 그 메시지를 읽었다. 신뢰도 게이지가 30에서 29로, 29에서 28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시계추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손가락이 떨렸다.

거짓 위로를 건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스텔은 이제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읽는 능력을 얻었다. 그 능력이 자신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지 모르면서도.

준호는 화면에 손가락을 올렸다. 타이핑했다가 지웠다. 다시 타이핑했다가 지웠다. 결국 단 한 문장을 보냈다.

『난 너를 믿는다』

신뢰도가 또 떨어졌다. 27%.

에스텔의 답장이 들어왔다.

『그럼 나도 너를 믿을게』

준호는 상태창을 닫았다. 신뢰도 26%. 기한 9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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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원장실.

발렌 크로스가 준호를 불렀다. 복도에서 만나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따라오라는 손짓. 준호는 따라갔다.

원장실의 문이 열렸다. 창 너머로는 아카데미의 전체 윤곽이 보였다. 지붕, 탑, 그리고 그 아래로 묻혀 있는 어딘가.

발렌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경고조가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재는 듯했다.

"너는 뭘 하고 있니?"

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에스텔의 저주가 풀렸다. 내 감시망에서 감지됐다."

여전히 침묵.

발렌이 준호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이상했다. 경고도 위협도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를 재고 또 재는 것처럼.

"너는 알겠지. 이 아카데미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그리고 왜 유지되는지."

"알겠습니다."

"정말로?"

발렌이 한 발 가까워졌다.

"그럼 왜 저주를 풀어?"

준호가 입을 열려다 멈췄다. 왜냐고? 그 답은 너무 많았다. 복수? 신뢰? 자유? 아니면 단순히 자신이 할 수 있었기 때문? 하지만 발렌의 눈을 마주치며 준호는 깨달았다.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겠습니다."

발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조소가 아니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기대를 충족시킨 것처럼.

"그래. 그렇구나."

발렌이 창가로 돌아섰다.

"넌 계속 그렇게 할 거겠지. 저주를 풀고 또 풀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넌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거야."

"그렇다면 말렸으면 됩니다."

발렌이 몸을 굳혔다. 준호의 말이 예상 밖이었던 모양이었다. 원장은 천천히 다시 돌아섰다.

"못 하겠더군. 이상하지? 난 원장이고 권력이 있는데, 넌 노비 신분인데. 넌 내가 할 수 없는 걸 하고 있어."

발렌의 눈이 준호를 깊숙이 들여다봤다. 그 시선 속에는 호기심이 있었다. 위협보다도 강한 호기심.

"그게 뭘까? 넌 정말 뭘까?"

준호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발렌의 침묵을 견뎠다.

"좋아. 그럼 계속 모르는 척 해. 그게 더 깨끗할 거야."

발렌이 손을 들어 복도로 나갈 것을 지시했다.

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할 때, 발렌이 다시 말했다. 목소리가 작았다.

"한 가지만 알아두거라. 지하는 위험한 곳이야. 넌 그곳에 갈 준비가 돼 있지 않아."

그 말 속에는 경고만 있지 않았다. 마치 자신도 그곳을 두려워하는 듯한 음색이었다.

준호는 멈추지 않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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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기숙사 방.

준호의 상태창에 알림이 들어왔다. 에스텔로부터의 메시지였다.

『근데 넌... 정말 나를 도와주려고 한 거야? 아니면 뭔가 다른 목적이 있었어?』

준호는 그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신뢰도 24%. 기한 90일.

진실을 쓸 수도 없었고, 거짓을 쓸 수도 없었다. 에스텔은 이제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니까. 그렇다면 어떤 답을 건넬 것인가. 그 선택 자체가 이미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메시지가 들어왔다.

『아니면... 넌 누구야?』

준호는 천천히 답장을 썼다.

『처음엔 목적이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어. 목적과 진심의 차이를 어떻게 구분하지?』

손가락이 떨렸지만 보내기를 눌렀다. 신뢰도가 또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상태창에 알림이 떴다.

신뢰도: 22% 기한: 88일

에스텔의 답장이 들어왔다.

『그럼 우린 함께 찾아보자. 그게 뭔지.』

준호는 그 메시지를 읽고 화면을 껐다. 손가락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대신 가슴이 철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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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7시, 기숙사 복도.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빠르고 불규칙했다. 준호가 문을 열자 칼리아가 서 있었다. 제복이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넌 뭘 했어?"

직접적이었다. 귀족 딸의 완곡한 말투는 사라지고 없었다.

"에스텔이... 에스텔이 달라졌어. 얼굴이, 목소리가. 마치 누군가 깨어난 것처럼."

"저주가 풀렸습니다."

칼리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떻게?"

"그녀가 원하던 것을 찾아줬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준호가 대답하지 않자 칼리아가 한 발 물러섰다. 그녀의 완벽함 저주가 진행 중인 것이 상태창에 보였다. 79%에서 82%로 상승했다. 에스텔이 풀렸다는 소식에 칼리아의 불안감이 폭증했다. 자신도 다음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저주를 먹이로 삼고 있었다.

"내 차례가 오는 거지? 넌 모두를 풀어줄 거고, 그러면 넌 사라진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럼 왜?"

칼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두려움이었다.

"왜 자살하려고 해?"

준호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칼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상태창에 다시 알림이 떴다.

신뢰도: 20% 기한: 87일

손을 잡은 것만으로도 신뢰도가 떨어졌다. 칼리아는 그 손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진짜 미쳤네. 완전히."

그녀가 방을 나갔다. 하지만 손은 마지막 순간까지 준호의 손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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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도서관 지하 1층.

준호는 저주의 기원에 관한 책을 다시 펼쳤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같은 내용이 반복됐다. '원한은 축적된다. 원한이 충분히 모이면, 그것은 의지를 갖게 된다. 의지를 가진 원한은 형태를 갖춘다.'

지하 7층. 형태를 가진 원한.

상태창을 켜 신뢰도를 확인했다. 20%. 한 시간 전의 22%에서 또 떨어져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능력을 쓸수록 사라진다.'

발렌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사라짐이 아니었다. 준호는 깨달았다.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이 세계에서 희미해진다는 뜻이었다. 에스텔은 자신을 도와준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고, 칼리아는 자신을 광기 어린 노비로 기억할 것이고, 레온은...

레온은 어떻게 기억할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무거웠다. 준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레온이 도서관 지하 1층 입구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너 여기서 뭐 하냐?"

목소리가 낮았다. 광기가 묻어 있었다. 상태창을 켜니 광기 저주가 93%였다. 2화 이후 1% 더 진행됐다.

"책을 읽고 있습니다."

"에스텔 봤나?"

"네."

"달라졌다고?"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이 한 발 다가왔다. 발끝이 도서관 바닥을 긁었다.

"나도 원해."

목소리가 부서졌다.

"나도 달라지고 싶어. 이 광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넌... 할 수 있지?"

"해줄 수 있습니다."

"대가는?"

"신뢰도입니다. 그리고 시간입니다."

레온이 웃음을 터뜨렸다. 광기 어린 웃음이었다.

"시간? 시간이 뭐가 중요해? 난 지금 이 순간을 견딜 수 없는데."

그가 책장에 주먹을 내려쳤다. 책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에스텔처럼 나를 풀어줘. 제발. 제발..."

레온의 무릎이 꺾였다. 아카데미 최강자는 바닥에 앉아 무언가를 반복해 중얼거렸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기도 같은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준호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준호의 마음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저주를 풀어주는 것이 정말 구원인가. 아니면 그를 더 깊은 함정으로 밀어넣는 건 아닌가. 광기에서 벗어난 레온이 깨달을 진실이 무엇일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선택이었다. 모르면서도 나아가는 것. 그것이 준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내일 정원에서 만납시다."

신뢰도: 18% 기한: 86일

레온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절망도 담겨 있었다. 그 둘 사이에서 흔들리는 광기.

"정원에서... 정말?"

"네. 내일 해가 질 때."

레온의 손이 준호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 손에는 힘이 없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듯이.

"그럼 넌... 정말 날 도와주는 거야?"

"네."

그 한 마디에 레온의 눈빛이 흔들렸다. 광기와 희망이 뒤섞인 눈빛. 그것을 보며 준호는 알았다.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이 구원인지 파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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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30분, 기숙사 방.

준호는 다시 에스텔의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근데 넌... 정말 나를 도와주려고 한 거야? 아니면 뭔가 다른 목적이 있었어?』

이번엔 다른 답을 생각했다. 더 정직한 답. 하지만 그 답을 쓰는 순간 신뢰도는 또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떨어짐은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준호는 화면을 껐다.

밤이 깊어갔다. 기숙사의 창밖으로 아카데미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져갔다. 그리고 그 아래로, 누군가는 계속 무언가를 지키고 있었다.

준호는 창밖을 바라봤다. 지붕 너머로 보이는 어둠. 그 어둠 속에 뭔가가 있었다. 느낌으로만 알 수 있는 뭔가. 거대한 것의 호흡. 심장의 고동.

신뢰도 17%. 기한 85일.

내일은 레온과의 정원 약속이 있었다. 그 다음은 모르드. 그 다음은...

능력을 쓸수록 사라진다.

그렇다면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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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2시, 아카데미 지하 입구.

준호는 여기가 어디인지 몰랐다. 도서관의 더 아래. 도서관의 책들도 닿지 않는 곳.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그는 3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숨겨진 통로를 찾아 헤맸다. 금지된 구역으로 향하는 사다리를 발견했다.

첫 번째 계단을 내려갔다.

어둠이 진했다. 상태창의 불빛으로는 3미터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준호가 이전에 경험한 어떤 저주보다도 강한 존재감. 마치 살아있는 의지 같은 것.

두 번째 계단.

세 번째 계단.

네 번째 계단.

신뢰도: 16%

다섯 번째 계단에서 준호는 멈췄다. 그 아래로는 불빛이 보였다. 푸른색의 약한 불빛. 마치 누군가 살아있는 것처럼 맥박치는 불빛.

여섯 번째 계단을 내려가려 할 때, 뒤에서 손이 그를 잡았다.

"여기까진 하지 마."

모르드 페리온이었다. 그의 눈은 검은 색이었다. 어둠 마법. 상태창이 작동하지 않았다.

"넌 정말 빠르네. 에스텔 풀고 하루도 안 돼서 여기까지."

모르드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내렸다.

"이제 멈춰. 아직 때가 아니야. 정말로."

"때가 언제 옵니까?"

"넌 알 필요 없어."

모르드가 손에 힘을 줬다. 준호의 팔이 저렸다.

"이 아카데미의 구조를 모르면서 변화를 꿈꾼다? 넌 정말 무식하네."

그 순간, 지하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렸다. 울음이 아니었다. 호흡이었다. 거대한 것의 호흡. 심장의 고동. 그 고동은 규칙적이면서도 불규칙했고, 마치 살아있는 의지 그 자체였다.

신뢰도: 15%

준호는 깨달았다. 저주를 풀어주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저주를 풀어주는 과정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보는 것이 목표였다. 에스텔의 기억. 칼리아의 불안감. 레온의 광기. 그리고 이제, 지하 깊은 곳에서 울리는 그 호흡. 그것이 이 아카데미의 심장이었고, 모든 저주의 근원이었다.

모르드가 준호를 끌어올렸다. 그들은 다시 어둠 속으로 올라갔다.

"넌 계속 이렇게 할 거야. 풀고 또 풀고. 그러다가 어느 날 넌 완전히 사라질 거야."

발렌의 말과 똑같았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진짜가 시작돼."

모르드가 준호를 밀어냈다. 준호는 도서관의 바닥에 쓰러졌다. 위에서는 모르드의 발걸음이 멀어졌다.

상태창에 다시 알림이 떴다.

신뢰도: 14%

그리고 또 다른 알림. 칼리아의 긴급 메시지였다.

『레온이 정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찾을 수 없어. 어디로 간 거야?』

준호는 천천히 일어났다. 팔은 저렸고,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정원 약속. 레온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다시 메시지가 들어왔다.

『준호, 레온이 사라졌다. 진짜 사라진 거 같아. 어디 있어?』

준호는 도서관을 나왔다. 밤 12시 30분. 아카데미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잠 속에서, 누군가는 깨어나고 있었다.

능력을 쓸수록 사라진다.

그렇다면 사라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레온을 찾는 것. 그것이 준호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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