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모르드의 경고

레온의 손가락이 준호의 어깨 위에서 떨렸다. 손가락 끝이 파고드는 힘으로 봐서는 저주의 진행이 92% 근처까지 올라온 모양이었다. 준호는 천천히 돌아서서 레온의 눈을 마주했다.

"나는 누가 될 거야?"

같은 질문을 세 번째 반복하는 레온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광기와 이성 사이의 줄타기에서 미끄러지고 있는 목소리. 준호는 상태창을 켰다.

【레온 아르투르 | 광기 저주 진행률 92% | 신뢰도 58%】

신뢰도가 떨어진 건 어제 밤 이후 계속 준호를 괴롭히고 있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저주의 진행률이 아니었다. 준호는 침대 끝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일단 앉아."

레온이 말을 들었다. 이것만으로도 진전이었다. 준호는 옆에 앉으며 천천히 말했다.

"넌 지금 누가 되고 싶어?"

"...모르겠어."

"그게 정답이야."

준호의 말에 레온이 고개를 들었다. 미세한 떨림이 눈동자에서 멈췄다.

"넌 저주 때문에 뭔가 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뭔가가 되지 않으려고 하고 있어. 그 차이가 중요해."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한 진실도 아니었다. 준호는 레온의 저주를 풀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그 대가로 레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 생각이었다. 전생에서 광기에 빠져 자신을 괴롭혔던 그 레온을.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이 정말 복수를 원하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이 아카데미에서 살아남기 위해 권력을 원하는 건가? 레온의 광기 저주, 에스텔의 기억 소실, 칼리아의 완벽함 추구—이 모든 것이 자신을 괴롭혔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을 보는 준호의 눈빛은 단순한 분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레온이 천천히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한테서 뭘 원하는 거야?"

정확한 질문이었다.

"나중에 말할게. 지금은 그냥 쉬어."

준호는 방을 나갔다. 기숙사 복도는 한밤중의 고요함으로 가득했다. 창밖으로 아카데미의 야경이 보였다. 고급스럽게 설계된 석조 건물들, 귀족 자제들을 위한 완벽한 교육 시설. 하지만 그 모든 것 아래에는 뭔가가 있었다. 도서관에서 읽은 낡은 기록들—특히 '지하 7층의 악의 결정체'라는 표현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리고 계속 반복되는 저주들.

아침 식사 시간. 식당은 귀족 학생들로 붐볐다. 준호는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텔이 나타났다.

"어제 우리 만났어?"

에스텔의 기억은 또 소실되었다. 상태창으로 확인하자 기억 소실 저주가 46%까지 진행되어 있었다. 준호는 웃음을 참으며 다시 설명했다.

"응. 어제 도서관에서."

"아, 그래? 미안해. 요즘 자꾸 기억이..."

에스텔은 말을 흐렸다. 그리고 준호의 손을 잡았다. 아주 가볍게, 마치 자신이 물에 빠져가고 있다는 느낌으로.

"도와줄래? 나 뭔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자꾸 들어."

이 순간이 기회였다. 준호는 에스텔의 눈을 똑바로 봤다.

"도와줄게. 대신 나도 도와줘."

"뭘?"

"나중에 말할게. 지금은 그냥 내 말을 들어주면 돼."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즉시 신뢰도가 떨어졌다.

【신뢰도 90% → 88%】 【기한 100일 → 99일】

복수를 위한 거래. 준호는 자신의 계획이 명확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주를 풀어주되, 그 과정에서 저주받은 자들을 자신의 도구로 만드는 것. 하지만 그 계획 뒤에는 또 다른 의문이 따라붙었다. 정말 그것만이 목표인가? 자신은 왜 이들을 도와주려고 하는가?

"준호."

칼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호가 고개를 들자 칼리아가 서 있었다. 오늘따라 더 창백해 보였다.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식당 뒤편 정원으로 나간 그들은 아무도 없는 벤치에 앉았다. 칼리아는 손을 깍지 끼며 한참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도..."

칼리아가 마침내 말했다.

"저주가 있어."

준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침묵을 지켰다.

"칼리스 가의 완벽함이라는 저주. 모든 게 완벽해야 한다고 느껴. 공부, 마법, 용모, 말투, 인간관계. 뭔가 조금이라도 빠지면 가슴이 철렁해. 그리고 자꾸 생각해. 이 완벽함이 정말 내 것일까? 아니면 저주가 만들어낸 환상일까?"

칼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는 날 봐서 알 수 있어, 그치? 상태창으로."

준호의 심장이 철렁했다. 칼리아가 이미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레온이가 말했어. 어제 밤에 너한테서 뭔가 이상한 걸 봤대. 그리고 너는 사람들을 보는 방식이 달라. 마치 뭔가 읽는 것처럼."

칼리아가 준호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나를 도와줄 수 있어?"

이것도 기회였다. 준호는 천천히 상태창을 켰다.

【칼리아 칼리스 | 완벽함의 저주 진행률 78% | 신뢰도 62%】

"응. 도와줄 수 있어."

준호가 대답하는 순간, 뒤에서 손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차갑고, 예리한 움직임이었다.

"흥미롭네."

모르드 페리온이었다. 검은색 교복을 입은 모르드는 준호를 위에서 내려다봤다. 그의 눈빛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새내기 치고는 이상한 친구들이 자주 찾아오네."

칼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모르드, 이건..."

"괜찮아, 칼리아. 나는 그냥 궁금한 거야."

모르드가 칼리아를 무시하고 준호에게 집중했다.

"넌 뭐하는 녀석이야? 노비 신분으로 아카데미에 들어왔는데, 벌써 에스텔을 사로잡고, 칼리아까지. 레온도 밤새 넌 생각만 한대."

준호는 천천히 일어섰다. 모르드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졌다. 이 순간, 준호는 상태창을 켰다.

【모르드 페리온 | 권력 중독 저주 진행률 73% | 신뢰도 ???】

신뢰도가 물음표로 표시되어 있었다. 상태창이 처음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저주의 이름은 명확했다. 권력 중독.

"뭘 보는 거야?"

모르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차갑고 위협적이었다.

"상태창? 그런 거 있다는 거 내가 알고 있어. 하지만 넌 실수했어. 내 정보에 접근하려고 했어."

모르드가 손을 뻗어 준호의 가슴팍을 밀었다. 준호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모르드의 손가락 끝에서 검은 마력이 피어올랐다.

"감히 나한테 상태창을?"

상태창 화면에 경고창이 떴다.

【접근 거부 | 신뢰도 급감】

신뢰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신뢰도 88% → 75%】 【기한 99일 → 97일】

준호는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이 녀석도 저주에 갇혀 있다. 권력 중독이라는 저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모르드는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이 놈은 저주 때문에 준호를 막으려고 하는 게 아니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저주의 구조를 지키기 위해 막으려고 했다. 마치 자신이 지은 감옥을 스스로 지키는 죄수처럼.

"이 놈도 갇혀 있는 거네."

준호가 중얼거렸다.

모르드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가 준호의 목깃을 잡으려는 순간, 칼리아가 얼음 마법을 발동했다. 모르드 주변의 공기가 순간 차가워졌다. 얼음 결정이 모르드의 팔을 감싸며 그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만해, 모르드."

칼리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모르드는 천천히 손을 놨다. 얼음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뭔가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분노? 아니면 두려움?

"조심해라, 새내기."

모르드가 말했다.

"이 아카데미는 넌 상상도 못 할 규칙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그 규칙을 깨려고 하면, 규칙이 너를 깨부순다."

모르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그 규칙이 무엇인지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돌아서며 걸어갔다. 정원은 다시 고요해졌다. 하지만 고요함은 순간일 뿐이었다.

식당의 학생들이 준호를 바라봤다. 복도에서 지나가던 상급생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중정의 귀족 학생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마치 뭔가 감지한 포식자처럼.

준호는 느꼈다. 이제 더 이상 숨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단순한 개인적 복수를 넘어 뭔가 더 큰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신뢰도 75%. 기한 97일.

남은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모르드가 사라진 후에도 정원의 공기는 차가웠다. 칼리아는 여전히 얼음 마법을 풀지 않고 있었고, 에스텔은 준호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셋 모두 침묵 속에 있었다.

"너 뭐 했어?"

칼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는 분명한 공포가 섞여 있었다.

"모르드는... 모르드 페리온은 이 아카데미에서 가장 위험한 학생이야. 가문의 권력도 강하지만, 그 자신의 실력도 우리 중 누구도 따라갈 수 없어. 그런데 넌 그 앞에서 대놓고 상태창을 켰어?"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아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은 방금 실수를 했다. 상태창을 켠 순간, 모르드는 그것을 감지했고, 준호의 의도를 읽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도가 떨어졌어."

준호가 중얼거렸다.

【신뢰도 75% → 62%】

화면을 다시 확인했을 때, 신뢰도는 더 떨어져 있었다. 단순히 상태창 접근 거부만이 아니었다. 모르드와의 대면 자체가 신뢰도를 깎아먹었다. 아마도 모르드가 준호의 움직임을 다른 학생들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저주를 해제하려고 하는 외부인, 질서를 흔들려고 하는 위험분자.

"62%면..."

준호는 손가락으로 계산했다. 신뢰도 100에서 시작했을 때, 이미 38%를 소비했다. 에스텔의 거래로 2%, 칼리아와의 손 접촉으로 14%, 그리고 모르드 접근으로 13%. 남은 신뢰도는 62%.

"이 속도면 한 달도 못 간다."

"뭐하는 거야?"

에스텔이 물었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밝지만, 뭔가 불안정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준호는 방금 자신이 걸린 함정을 깨달았다. 저주를 풀수록 신뢰도가 떨어진다. 신뢰도가 떨어질수록 기한이 단축된다. 그리고 기한이 단축될수록,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든다. 이것은 악순환이었다.

"넌 뭐하려고 하는 거야?"

칼리아가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진정한 궁금증이 섞여 있었다.

"저주를 풀어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모르드까지 건드릴 생각이야? 그럼 이 아카데미에서 살 수 없어. 모르드는—"

"모르드도 저주에 걸려 있어."

준호가 끊었다.

칼리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 뭐라고?"

"권력 중독이라는 저주. 아마도 모르드 가의 가문 저주일 거야. 그리고 그게 해제되면,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권력을 잃을 거야."

준호는 천천히 정원의 벤치에 앉았다. 칼리아도 그 옆에 앉았다. 에스텔은 여전히 준호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럼 모르드가 너를 막는 거구나. 자신의 저주가 해제되지 않도록."

"아니야."

준호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드는 자신의 저주가 뭔지도 모를 거야. 그냥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거야. 왜냐하면 그것이 저주의 일부니까. 저주는 단순한 능력 제약이 아니야. 그건 생각 자체를 지배하는 거야. 모르드는 자신이 권력을 원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저주가 그렇게 생각하라고 강요하고 있는 거야."

칼리아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럼... 그럼 나도? 나도 저주 때문에 이렇게 되어 있는 거야? 내가 느끼는 불안감, 완벽함을 추구하려는 강박, 이 모든 게 나 때문이 아니라..."

"칼리스 가의 저주 때문이야."

준호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담담했다.

"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태어나는 순간 이미 정해져 있었어. 칼리스 가는 자존심이 높고, 완벽함을 추구하는 가문이라는 저주 속에. 그리고 그걸 따르지 않으면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끼게 돼.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돼."

칼리아의 눈빛이 변했다. 그것은 분노였다. 하지만 그 분노는 준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 어쩌라고? 그냥 받아들이라고? 이 저주와 함께 살아가라고?"

"아니야."

준호가 일어섰다.

"저주를 풀어줄 수 있어. 내 상태창으로. 하지만 그 대신—"

"뭔가 원하는 거구나."

칼리아가 끝을 맺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렇다. 준호는 저주를 풀어주는 대신 뭔가를 원하고 있었다. 권력. 영향력. 이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모든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전생에서 당한 모욕들. 레온의 광기에 짓밟혔던 기억들. 칼리아의 완벽함 앞에서 느꼈던 무력감들. 에스텔의 기억 소실로 인해 반복되었던 고통들. 그 모든 것에 대한 복수.

하지만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준호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도 함께 떠올랐다. 모르드의 말. '이 아카데미는 넌 상상도 못 할 규칙으로 움직인다.'

규칙.

준호는 지금까지 규칙을 깨려고 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지만 지금 깨달은 것은, 규칙을 깨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개인 개인을 상대로 저주를 풀고 권력을 얻으려는 것. 그건 규칙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었다. 규칙을 깨는 게 아니라.

준호는 다시 생각했다. 모르드의 저주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 자신과의 대면 이후 73%에서 81%로 올라갔다는 것. 그것은 모르드가 준호를 억압할수록, 더욱 저주에 잠식된다는 뜻이었다. 저주의 논리는 명확했다. 권력을 유지하려고 할수록, 권력 중독은 심해진다. 그렇다면 역으로, 권력을 내려놓을 때만 저주가 풀린다는 뜻이 아닐까?

"대신에 뭐를 원하는데?"

칼리아가 다시 물었다.

준호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넌 날 믿어줄 수 있어?"

"뭘 믿으라고?"

"내가 이 저주들을 풀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뭔가 일어날 거라는 것. 좋은 일일 수도 있고, 나쁜 일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뭔가는 일어날 거라는 것."

칼리아는 준호를 오래 바라봤다. 그 눈빛은 복잡했다. 두려움과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넌 위험한 애네."

그녀가 말했다.

"알고 있어."

준호가 대답했다.

"그래도?"

"그래도."

칼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준호는 그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맞닿는 순간, 준호의 손가락 끝에서 따뜻함이 흘러들어왔다. 칼리아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 속에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공명. 마력이 서로 만나는 순간의 공명. 준호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손가락 끝의 온도가 변했다. 차갑던 칼리아의 손이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준호의 상태창이 반응했다.

【칼리아 칼리스 | 저주 해제 진행률 45% → 78% | 신뢰도 ???】 【신뢰도 62% → 48%】 【기한 97일 → 95일】

화면에 급격한 변화가 나타났다. 칼리아의 저주 해제 진행률이 33% 올라갔다. 그리고 동시에 신뢰도는 다시 떨어졌다. 48%. 이제 절반도 남지 않았다.

신뢰도가 떨어진 이유를 준호는 이해했다. 저주를 해제하는 것 자체가 이 아카데미의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저주받은 자들을 도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을 돕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신뢰도 시스템은 준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칼리아의 몸이 떨렸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뭐... 뭐야?"

칼리아가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낯설었다. 강박에서 벗어난 목소리.

칼리아는 자신의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떨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떨리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펼쳤다가 다시 주먹을 쥐었다. 손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였다. 아무런 긴장도 없이.

"나 지금...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 같아."

칼리아는 천천히 숨을 쉬었다. 가슴이 편해졌다. 그동안 느껴왔던 무게가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이게... 이상해. 무섭고... 그런데 좋아."

그 순간, 칼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뭐하는 거야?"

에스텔이 중얼거렸다.

"뭐가?"

"모르겠어. 그냥... 뭔가 밝아진 것 같아. 하늘이. 아니면 넌 그런 건 못 느껴?"

준호는 하늘을 봤다. 별들이 더 선명해 보였다. 칼리아의 저주 해제로 인해 뭔가가 바뀌고 있었다. 아카데미 자체가. 마치 무거운 짐이 조금씩 벗겨지는 것처럼.

식당에서 학생들이 준호를 피하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상급생들이 고개를 돌렸다. 중정의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준호를 보는 눈빛이 변했다. 호기심에서 경계로. 경계에서 두려움으로.

모르드는 자신의 방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펜이 들려 있었고, 책상 위에는 준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이름 아래에는 수많은 선들이 그어져 있었다. 다른 학생들의 이름으로 향하는 선들. 그는 더 많은 학생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더 많은 권력을 손에 쥐어야 했다.

【모르드 페리온 | 권력 중독 저주 진행률 73% → 81%】

모르드의 저주도 진행되고 있었다. 준호와의 대면이 끝난 후, 모르드의 저주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준호의 존재 자체가 모르드의 권력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주는 그 위협에 반응하고 있었다. 더욱 강해지며. 모르드는 더 많은 학생들을 통제하려고 했다. 더 많은 권력을 손에 쥐려고 했다. 그것이 저주의 악순환이었다.

아카데미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깨어 있었다. 준호 때문에.

【신뢰도 48% | 기한 95일 | 에스텔 기억 소실 진행률 44%】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신뢰도는 떨어지고 있었다. 기한은 단축되고 있었다.

준호는 정원의 벤치에 앉아 다음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모르드를 막을 방법. 아니, 모르드를 깨울 방법. 그리고 이 아카데미의 진짜 규칙을 찾을 방법. 지하 7층이 뭔지, 왜 계속 저주들이 반복되는지, 자신의 상태창이 정확히 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 모든 것을 하는 이유가 정말 복수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 에스텔을 도구로 쓸 것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돕는가. 그 선택이 자신을 정의할 것이었다.

준호는 손을 펼쳤다. 손가락 끝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올랐다. 상태창의 빛. 그 빛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에스텔의 기억 소실이 44%까지 진행되고 있다는 것. 그것은 곧 에스텔이 완전히 자신을 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에스텔과의 거래는 무효가 될 것이다. 신뢰도는 더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모르드. 그 녀석이 다른 학생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면, 이 아카데미 전체가 준호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지하 7층이라는 표현. 그것이 뭔지 알아야 한다. 도서관 기록에서 읽었던 '악의 결정체'라는 표현. 그 답이 이 모든 것의 열쇠일 수도 있다.

준호는 일어섰다. 칼리아가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뭐 하려고?"

"도서관. 다시."

"이 시간에?"

"응. 뭔가 놓친 게 있어."

준호는 정원을 빠져나갔다. 아카데미의 밤거리는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모두가 준호의 다음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준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더 이상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전쟁이었다. 저주라는 시스템 자체와의 전쟁. 그리고 그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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