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프 탈출
오전 6시 1분, 강남역 승강장.
이준호는 하얀 천장을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천장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시각이 왜곡되고 있었다. 신경 임플란트 손상도 수치: 92%.
손가락을 움직였다. 반응이 0.3초 늦다. 정상은 0.05초.
휴대폰이 손에 들렸다. 화면은 이미 깨어 있었다.
"이번엔 끝입니다."
이준호의 얼굴이 경련했다. 신경 손상이 감정 조절 영역을 침범했다는 신호였다.
손이 떨렸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루프 022에서 이혁준이 한 말이 떠올랐다. '지난 21일간이 모두 신경 시뮬레이션 장치로 만든 환상이었다.' 거짓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진실처럼 느껴졌다. 루프가 반복될수록 루프는 더 진짜처럼, 자신의 뇌는 더 거짓처럼 느껴졌다.
이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균형을 잡는 데 2초가 걸렸다.
강남역 지하 1층 승강장은 여느 아침처럼 붐볐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을 반복했다. 누구도 루프를 모른다. 누구도 이준호를 본다. 모두가 투명했다.
계단을 올라가며 손잡이를 짚었다. 짚지 않으면 넘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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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청 형사청에 도착한 것은 오전 8시 47분.
정유진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준호. 경감님이 찾으셨어. 의무 휴직 조치 때문에."
이준호는 자기 책상에 앉았다.
정유진이 일어났다. "야, 들었어? 휴직이야. 집에 가."
"아직 휴직 공문이 도착하지 않았다."
"뭐하는 거야. 정신 차려. 넌—"
이준호가 정유진을 봤다. 정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92% 손상된 뇌는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분노도 두려움도 아닌, 무언가 다른 것이 그곳에 있었다.
"넌 미쳤다. 정말로."
정유진이 떠났다.
이준호는 컴퓨터를 켰다. 포렌식실 단말기에 접근하려 했다. 접근 거부. 루프 015 이후로 누군가 접근 제한을 계속 추가하고 있었다.
강남역 살인 사건 파일을 다시 열었다.
피해자: 미상. 유전자 증거: 없음. 현장: 강남역 8번 출구 남쪽 골목. 추락사.
모든 데이터가 삭제되었다. 증거 AI가 보존해야 할 정보마저 초기화되었다. 이것은 루프 초기화가 아니라 증거 말소였다.
이준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리듬이 불규칙했다.
일어서서 강남청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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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023.
오전 6시 1분, 강남역 승강장.
신경 손상도 94%.
이준호는 이미 결정했다. 루프를 깨뜨리지 않기로. 대신 루프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로.
휴대폰으로 국방부 청사 위치를 확인했다. 용산. 15분 거리.
택시를 탔다. 기사는 목적지를 묻지 않았다. 아무도 이준호를 보지 않는다.
국방부 청사 정문. 이준호는 들어가지 않았다. 옆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형사의 기본기는 남아 있었다. 창문. 환풍구. 벽면의 균열.
오후 1시 42분, 이혁준의 사무실에 도달했다.
벽장 뒤의 금고. 비밀번호는 생년월일. 너무 뻔했다.
문서 더미가 나왔다.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의 전체 기록.
'국가 정치 안정화 사업 최종 보고서' '기억 삭제 대상자 리스트 (기밀)' '신경망 재동기화 실험 결과 (2084.01~2087.11)'
이준호는 모든 페이지를 휴대폰으로 촬영했다. 손이 떨렸지만 촬영은 정확했다.
문서를 다시 읽었다.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 정치적 반대자 및 국가 안보 위협 인물들의 기억 영구 삭제를 통한 권력 구조 안정화. 뉴로레이즈 기술의 불완전성을 악용하여 삭제 과정에서 발생하는 신경 손상을 이용, 증언 신뢰도를 사전에 제거.'
다음 페이지.
'루프 시스템 구축 목적: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의 모든 증거 문서, 피험자 기록, 신경망 데이터의 물리적 말소. 루프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정보는 루프 밖의 세계에 영향을 주지 않음. 루프 탈출 시 루프 내 기억은 신경망 손상을 통해 무효화됨.'
이준호의 손이 멈췄다.
루프는 시간을 거꾸로 도는 기술이 아니었다. 루프는 뇌를 파괴하는 기술이었다.
루프가 반복될수록 뇌는 손상되었다. 루프를 탈출하면 루프 내의 모든 증거는 손상된 뇌의 증언이 되어 법정에서 신뢰받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프로메테우스의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진실 자체를 증명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
이준호는 금고를 닫고 강남청으로 돌아갔다.
증거 AI 앞에 섰다.
"증거. 루프 시스템의 물리적 아키텍처를 다시 설명해 달라."
"루프는 기억 복제 및 신경망 재동기화 기술입니다. 오전 6시마다 반경 2km 내 모든 인물의 신경망이 24시간 전의 상태로 강제 동기화됩니다."
"그런데 나는 부분적으로 기억한다. 왜?"
"신경 임플란트가 독립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루프 시스템의 설계 결함이거나, 의도된 백도어입니다."
"그 결함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아는가?"
증거가 미세하게 딜레이했다. 0.7초.
"정보 없음."
"거짓이다. 넌 알고 있다. 누군가 네 프로그래밍에 접근 제한을 계속 추가하고 있다. 루프 015 이후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접근 권한이 없어서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누가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
"국방부 장관 이혁준과 뉴로테크 연구소 소장 박수연입니다."
이준호의 얼굴이 경련했다.
"넌 자신을 모르는 거야. 넌 루프 시스템의 일부다. 누군가 네 프로그래밍을 조작하고, 네 기억을 초기화하고, 네 접근 권한을 제한한다. 그런데 넌 그것을 '설계 결함'이라고 부른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 넌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이해하는 것 자체가 네 프로그래밍에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준호는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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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024.
오전 6시 1분, 강남역 승강장.
신경 손상도 96%.
시각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천장의 형태가 자꾸 변했다. 청각도 간섭을 받고 있었다. 멀리서 들리는 기차음이 중첩되어 울렸다. 시간 지각도 이상했다. 1초가 3초처럼 느껴졌다.
거의 끝이었다. 이 루프를 지나면 다음 루프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것이다.
강남역 8번 출구 남쪽 골목으로 갔다.
김준석이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넌 왜 여기 있어?"
"이 루프를 끝내기 위해서."
김준석의 얼굴이 창백했다. 루프 밖에 있어서 루프의 반복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는 자신이 계속 같은 만남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넌 박수연의 지시를 받고 있다."
"맞다."
"이 루프를 종료할 방법을 알고 있나?"
"있다. 24시간 후 루프는 자동으로 종료된다. 박수연이 루프 내의 모든 증거를 삭제하고 루프 밖의 세상으로 나올 것이다. 넌 그녀와 함께 나올 수 있다."
"그 대가는?"
"너의 기억이 완전히 손상될 것이다. 루프 밖에서 넌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준호는 침을 삼켰다. 신경 손상 때문에 침 삼키는 것도 어려워졌다.
"그래도 나가야 한다."
"알고 있나?"
"뭘?"
"루프 시스템의 진짜 목적. 루프는 시간을 거꾸로 도는 게 아니라 뇌를 파괴하는 거다. 루프를 반복할수록 넌 더 손상되고, 루프를 탈출하면 루프 내의 모든 기억은 손상된 뇌의 증언이 되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는 루프 내에서 물리적 증거를 남겨야 한다. 누군가 루프 밖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도록."
이준호는 휴대폰을 꺼냈다. 촬영한 프로메테우스 문서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이걸 어디에 남길 수 있을까?"
김준석이 생각했다.
"금고. 강남청 지하 3층 특수 증거 보관실의 금고. 거기는 루프 초기화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루프 밖의 세상에만 존재한다."
"어떻게 접근하지?"
"루프 내에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루프 탈출 신호를 받으면 몸은 루프 밖으로 나가지만 의식은 1초간 루프와 루프 밖 사이의 상태에 머문다. 그 1초 동안 신경 임플란트를 활성화할 수 있다면 루프 밖의 좌표를 기억할 수 있다."
"그 1초가 충분한가?"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임플란트의 마지막 용량을 모두 사용한다면 한 가지 정보만 기록할 수 있다."
이준호는 임플란트를 만졌다. 손상도 96%. 마지막 용량은 거의 남지 않았다.
"그 정보가 뭐가 되어야 할까?"
"너의 이름. 또는 날짜. 또는 금고의 위치. 뭐든 루프 밖의 사람이 너를 찾을 수 있는 흔적."
이준호가 김준석을 봤다.
"왜 나를 도와주는 거야? 넌 박수연의 프로그래머야."
김준석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처음에는 프로그래밍이었다. 하지만 루프를 반복하면서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그는 말을 멈추고 멀리 하늘을 봤다.
"루프 012에서 한 여자가 같은 시간에 계속 죽었어. 매번 다른 방식으로. 추락, 질식, 독극물. 그런데 그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어. 루프 내에만 있는 피해자였어. 루프 시스템이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만든 환상이었어."
김준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프로그래밍은 아름다워야 한다. 그런데 루프는 파괴다. 같은 사람이 반복해서 죽는 걸 보면서 난 깨달았어. 이건 프로그래밍이 아니라 학살이야."
이준호는 그 말을 처리할 수 없었다. 신경 손상도 96%인 뇌에는 남은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김준석이 보안 카드를 건넸다.
"이것으로 강남청 지하 3층에 접근할 수 있다. 루프 탈출 신호가 오면 그곳으로 가. 금고는 벽장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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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시 58분.
이준호는 강남청 지하 3층 특수 증거 보관실 앞에 있었다.
보안 카드를 스캔했다. 녹색 불이 켜졌다.
문이 열렸다.
루프의 경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준호는 신경 임플란트에 손가락을 대고 마지막 용량을 활성화했다.
임플란트가 울렸다.
'기록할 정보를 선택하세요.'
이준호는 생각했다. 자신의 이름? 하지만 루프 밖에서 자신은 이미 죽은 것처럼 취급받을 것이다.
날짜? 하지만 날짜만으로는 아무도 루프를 믿지 않을 것이다.
금고의 위치? 하지만 금고가 비어 있을 수도 있다.
그는 다른 것을 선택했다.
'강남청 지하 3층 금고. 벽장 뒤. 프로메테우스 문서.'
임플란트가 기록했다.
오전 6시 0분 59초.
루프의 경계.
이준호의 신체가 경련했다. 시각이 갈라졌다. 천장이 두 개로 보였다. 하나는 강남역의 천장이고, 하나는 흰 벽이었다. 청각이 비명처럼 울렸다. 기차음과 기계음이 뒤섞여 귓가를 찢었다. 피부가 타는 듯했다. 신경 신호가 뇌로 쏟아져 들어왔다.
1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 틈에서 이준호는 두 세상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프 내의 강남역과 루프 밖의 의료실. 두 장소의 신경 신호가 충돌했다. 뇌의 좌반구는 기차의 울음을 받고 있었고, 우반구는 의료 기기의 신호음을 받고 있었다. 의식이 찢어졌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고 소멸했다.
그리고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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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시 1분.
이준호는 눈을 떴다.
하지만 그곳은 강남역이 아니었다.
하얀 벽. 의료용 침대. 신경 모니터링 장치. 차갑고 무취의 공기가 폐를 채웠다. 피부는 침대의 차가운 금속에 닿아 있었다. 몸은 마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박수연이 그의 위에 서 있었다.
"안녕, 이준호. 루프 밖의 세상에 온 걸 환영한다."
박수연의 입술이 움직였다. 음성이 왜곡되었다. 이준호의 청각이 루프 밖의 신호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준호는 손을 움직이려 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신경 마비제.
"루프를 깨뜨렸다. 축하한다. 하지만 넌 이제 루프 밖에서 아무도 너를 믿지 않을 것이다. 뇌 손상도 98%. 넌 정신질환자다. 넌 거짓말쟁이다. 넌...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
박수연이 웃었다.
"이제 기억 삭제 치료를 시작한다. 루프는 넓혀질 것이고, 다음 대상이 시작될 것이다. 넌 그 모든 것을 지켜볼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너를 믿지 않을 것이다."
이준호의 입이 열렸다.
"...금고..."
박수연의 웃음이 멈췄다.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뭐라고?"
"강남청 지하 3층. 금고. 벽장 뒤."
박수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불가능하다. 루프 내의 정보는 루프 밖으로 나올 수 없다."
"김준석이 도와줬다."
박수연이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김준석이... 그 프로그래머를..."
박수연이 휴대폰을 꺼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남청 지하 3층을 봉쇄하라. 지금 당장. 그리고 김준석을 찾아. 그 놈은... 그 놈은 배신했어."
전화가 끊겼다.
박수연이 이준호를 다시 봤다.
"넌 이제 쓸모가 없다."
그녀의 손이 주사기를 집었다.
이준호의 의식이 흐릿해졌다.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박수연의 얼굴이 아니었다.
강남역 8번 출구. 남쪽 골목. 그곳에서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루프가 반복되면서 그 여자의 얼굴이 매번 달랐다.
이제 이준호는 알았다.
그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루프 내의 모든 피해자는 거짓이었다. 루프 자체가 증거를 없애기 위한 환상이었다.
그런데 여자가 움직였다. 루프 밖에서도.
이준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마비제를 뚫고.
그리고 강남청 지하 3층의 금고가 열리고 있었다.
누군가 그곳에 도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