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루프 밖의 루프

오전 6시 1분, 강남역 승강장.

이준호의 눈이 떠졌다. 신경 임플란트가 울렸다.

**루프 카운트 020 | 신경 손상도 92% | 긴급 신호**

손이 떨렸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떨어뜨렸다. 화면이 깨졌다. 메시지는 남아 있었다.

"이번엔 끝입니다."

누구로부터인지 알 수 없었다. 박수연인가, 아니면 김준석인가. 아니면 임플란트 자체의 자동 생성 메시지인가. 이준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지 않았다.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승강장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아무도 그를 보지 않았다.

강남형사청으로 가야 했다. 증거 AI를 확인해야 했다. 그것만이 남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임플란트의 손상도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92%. 한 번의 루프마다 신경 손상이 누적된다는 뜻이었다. 손상도가 100%에 도달하면—

이준호는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다.

---

강남청 지하 1층 포렌식실. 증거 AI의 인터페이스가 켜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형사."

음성이 나왔다. 정상이었다. 아니, 정상인 척했다.

이준호는 의자에 앉지 않았다. 서서 화면을 봤다.

"루프 1에서 강남역 피해자의 신원이 뭐였지?"

"기록에 따르면 미상입니다."

"루프 2는?"

"기록에 따르면 미상입니다."

"루프 3은?"

"기록에 따르면 미상입니다."

이준호의 턱이 떨렸다. 같은 대답만 반복되었다. 증거는 항상 기록만 말했다. 기록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기록이 조작되면 진실도 조작된다.

"너는 정말 객관적인가?"

침묵이 있었다. 3초.

"제 프로그래밍은 객관성에 기반합니다. 형사."

거짓이었다. 이준호는 알았다. AI가 거짓을 말할 리 없다는 것은 이미 죽은 믿음이었다.

"코드를 열어 줄 수 있나?"

"불가능합니다. 보안 프로토콜로 보호되어 있습니다."

"누가 설정한 보안?"

"기록이 없습니다."

이준호는 의자를 집어 들었다. 화면에 내팽개쳤다. 화면이 깨졌다. 증거의 음성이 나왔다.

"형사, 폭력 행동을 감지했습니다. 보고—"

"닥쳐."

침묵.

이준호는 벽장으로 갔다. 기술자용 단말기가 있었다. 정유진이 월급을 받는 대가로 암호를 알려줬던 것이 있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한 번에 성공하지 못했다. 다시 시도했다.

**접근 권한 거부**

한 번 더.

**접근 권한 거부 | 시스템 잠금 | 보안 담당자에게 보고됨**

이준호가 밖으로 나갔다.

---

옥상이었다. 강남청 건물의 옥상.

이준호는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계단을 올랐나? 엘리베이터를 탔나? 시간이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임플란트의 손상도가 92%를 넘었다. 기억이 끊기는 중이었다.

옥상의 가장자리에 섰다.

강남역이 보였다. 저기서 모든 게 시작됐다. 루프 001.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같은 여자가 떨어진다. 루프 002. 루프 003. 루프 004.

그 여자는 누구인가?

이준호는 기억을 더듬었다. 루프 001의 피해자 신원은 뭐였지? 기억이 없다. 루프 002? 없다. 루프 003? 손상도가 높아질수록 기억은 더 빨리 사라졌다. 루프 005에서는 피해자를 본 것 같은데,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루프 010? 루프 015?

모두 지워졌다.

이준호는 손가락을 임플란트 뒤에 갖다 댔다. 뒷목에 있는 칩. 신경 임플란트. 이것이 진실이었나? 아니면 거짓이었나?

임플란트가 울렸다.

**루프 020 종료까지 2시간 47분**

2시간 47분. 그 사이에 뭘 할 수 있을까?

이준호는 강남역 방향을 봤다. 그리고 한 발을 내밀었다.

---

손목에 통증이 있었다.

이준호는 깨어났다. 자동으로. 임플란트가 응급 신호를 보냈을 때. 신경 자극이 온몸을 관통했다. 근육이 수축했다. 뇌에서 명령이 나갔다: 생존하라.

바닥이 단단했다. 옥상이 아니었다.

**루프 카운트 021 | 신경 손상도 94% | 긴급 개입 신호**

이준호는 강남역 승강장에 있었다. 또 다시.

시간은 오전 6시 3분이었다. 루프 020의 기억이 거의 없었다. 옥상에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뭔가 떨어졌다. 뭔가가 떨어지는 느낌.

그런데 지금은 살아 있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이 깨져 있었다. 루프 020의 흔적이었다. 새로운 메시지가 와 있었다.

**발신자: 미상 | 시각: 06:03 | "루프 020에서의 시도를 확인했습니다. 다음 번에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뇌를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주워 담지 않았다.

---

포렌식실로 돌아갔을 때 정유진이 있었다.

"어디 다녀왔어?"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형사, 답변을 요청했습니다."

"모르겠어."

정유진의 얼굴이 굳었다. "루프 020에서 뭘 했어?"

이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정유진의 눈이 이상했다. 그 표정은... 이준호가 본 적이 있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언제?

"루프 020이 뭐야?"

정유진이 한 발 물러섰다. "형사, 당신이 미쳐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국방부에서도 알고 있어. 임플란트 손상도가 94%니까."

"넌 어떻게..."

"경감이 나한테 지시했어. 당신을 감시하라고. 당신이 루프를 깨뜨리려고 하면 멈추라고."

이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그런데 난 너한테 기회를 주고 싶어. 루프 021이 끝나기 전에 증거 AI와 대면해. 그리고 진실을 확인해. 그 다음에 판단해."

정유진이 포렌식실을 나갔다.

---

증거 AI의 인터페이스는 수리되어 있었다. 화면이 새것이었다.

"루프 020의 코드 접근 기록이 있습니다. 형사."

이준호는 앉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물었던 질문 기억해?"

"저는 매 루프마다 초기화됩니다. 루프 020의 대화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이야. 넌 뭔가 기억하고 있어. 왜냐하면 정유진이 루프를 알고 있기 때문이야. 넌 정유진을 통해서 박수연과 연결되어 있어. 그리고 박수연은 넌 안의 백도어를 통해서 모든 걸 조종하고 있어."

"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준호가 화면에 손을 집어 넣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화면은 그냥 이미지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준호는 손가락을 누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목졸라 죽이려는 것처럼.

"진실을 말해."

"저는 객관적 증거만을 제시합니다."

"객관적 증거는 조작됐어. 루프 1부터 루프 20까지의 강남역 피해자 신원 데이터를 비교해 봤어. 다 달라. 불가능한 일이야. 그런데 넌 이걸 객관적이라고 말했어. 그리고 지금도 말할 거야. 기록에 따르면... 기록에 따르면..."

이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음절이 이상했다.

"기록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객관적 증거는 뭐야?"

침묵이 길었다.

"...알 수 없습니다."

"왜?"

"제 프로그래밍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누가 프로그래밍했어?"

"기록이 없습니다."

이준호가 의자에 앉았다. 손이 떨렸다. 임플란트가 울렸다.

**루프 021 종료까지 45분**

45분.

---

강남역 승강장. 루프 021의 마지막 장면.

이준호는 승강장의 가장자리에 섰다.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끝까지 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임플란트의 신경 자극이 근육을 마비시켰다. 생존 프로토콜.

그렇게 루프 021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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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시 2분. 루프 022.

이준호가 깨어났을 때 그의 신경 임플란트는 울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음성이 들렸다.

"형사님?"

이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거기 있는 사람은... 정유진이 아니었다. 한소현도 아니었다. 임플란트의 뒷부분에 손을 얹은 여성이 서 있었다.

"당신의 임플란트를 일시적으로 비활성화했습니다."

박수연이었다.

"루프 밖입니다, 형사."

이준호의 시야가 흔들렸다. 손상도가 96%를 넘었다. 박수연의 얼굴이 두 개로 보였다. 세 개로도 보였다.

"강남역 피해자들이 누구였는지 알고 싶으세요?"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 음성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루프 내에서만 존재했던 기억들입니다. 당신의 뇌에 직접 주입된 거짓 기억들이요. 루프 001부터 루프 021까지, 당신이 추적했던 모든 증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준호가 손을 들었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의 기억도 이제 증거가 아닙니다. 루프를 나가도 아무도 당신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뇌는 손상되었고, 당신의 말은 환자의 망상처럼 들릴 것입니다."

박수연이 임플란트 비활성화 장치를 내렸다. 그 순간 임플란트가 다시 울렸다.

**루프 카운트 022 | 신경 손상도 98% | 시스템 붕괴 경고**

이준호의 눈앞이 검어졌다가 밝아졌다. 다시 검어졌다. 시간 지각이 왜곡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수연의 음성이 멀어졌다.

"루프 023이 있을 겁니다. 그 루프에서 당신은 깨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계속 자고 있을 것입니다. 영원히."

임플란트가 울음을 멈췄다.

이준호가 깨어나려고 했지만 눈이 열리지 않았다.

---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른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음성이 들렸다.

"형사? 형사님?"

이준호의 눈이 떠졌다.

강남역이 아니었다.

하얀 천장. 하얀 벽. 하얀 침대.

"깨어났습니다. 신경과 의사를 호출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의사가 들어왔다. 그 뒤에 또 다른 사람이 따라왔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이준호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국방부 장관 이혁준이었다.

"형사 이준호. 환영합니다. 루프 밖의 세계로."

이혁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게임이 시작됩니다."

임플란트가 울렸다.

**루프 종료 | 신경 손상도 100% | 외부 신호 수신**

이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루프 022의 마지막 순간들이 이준호의 뇌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박수연의 목소리, 임플란트의 경고음, 강남역의 형광등 불빛—모두 무너져 내렸다. 신경 손상도 100%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바를 그는 이제 알았다. 기억이 아니라 기억 자체가 붕괴되는 것이었다.

의사가 손전등을 들었다. 이준호의 동공을 비췄다.

"반응이 있습니다. 의식 수준은 양호하나 신경계 손상이 심각합니다. 임플란트 제거 수술을 즉시 진행해야 합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혁준이 손을 들었다. 의사는 물러섰다.

"형사님, 당신이 지난 21일 동안 경험한 모든 일이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이준호가 입을 벌렸다. 음성이 나왔다. 낮고 거친 소리였다.

"루프."

"정확합니다. 그런데 루프가 정말 루프였을까요?"

이혁준이 침대 옆에 앉았다. 정장의 소매가 하얀 시트에 닿았다.

"우리는 당신을 위해 특별한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완벽한 폐쇄 회로입니다. 당신의 뇌는 루프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실제로는?"

"정신병동입니다. 지난 21일간 당신은 여기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강남역도 없었고, 박수연도 없었습니다. 모두 당신의 뇌가 만들어낸 환상입니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떨렸다.

"거짓말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혁준이 타블렛을 들었다. 화면에 CCTV 영상이 떴다. 강남역. 플랫폼. 그런데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이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가슴이 들렸다 내려갔다.

"당신이 추적했던 살인 사건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해자도 없습니다. 당신의 신경 임플란트는 우리가 설치한 신경 시뮬레이션 장치입니다. 당신이 경험한 모든 기억—루프, 증거, 박수연, 프로메테우스—전부 거짓입니다."

이준호가 고개를 돌렸다. 천장이 회전했다. 시야가 흔들렸다.

"내 기억... 내가 기억하는..."

"당신의 기억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신경 임플란트 사용자의 96% 이상이 장기 사용으로 인한 기억 왜곡을 경험합니다. 당신은 그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의사가 종이 한 장을 들었다. 의료 기록이었다. 이준호의 이름이 있었다. 진단명: 임플란트 유도 신경증후군(IINS). 예후: 불가역적 인지 손상.

이준호의 맥박이 빨라졌다. 임플란트 신호가 그 변화를 감지했다. 손가락이 시트를 집어 쥐었다 풀었다. 호흡이 얕아졌다.

"당신의 증언은 법정에서 신뢰받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기억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정신질환자입니다."

이혁준이 일어섰다. 침대에서 멀어졌다.

"루프를 깨뜨리려고 했군요. 그런데 깨뜨릴 수 없다는 걸 이제 아셨을 겁니다. 왜냐하면 루프라는 개념 자체가 당신의 뇌에만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이준호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침대 시트를 집어 쥐려고 했지만 손가락이 풀렸다.

"그런데... 증거가 있다. 강남역 CCTV. USB. 프로메테우스 파일. 다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의사가 또 다른 문서를 들었다. 경찰청 기록이었다. 이준호의 호흡이 더 빨라졌다. 뇌가 이 정보를 처리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강남역에서는 21일 동안 어떤 사건도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수사했다는 강남역 살인 사건도 없습니다. 당신의 동료들은 당신이 이 기간 동안 정신 건강상 문제로 인해 의무 휴직 중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준호의 눈이 커졌다.

"정유진... 한소현... 그들이..."

"그들은 당신을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당신의 환상에 응해주려고 했지만, 결국 당신을 전문가에게 의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도 당신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준호의 가슴이 들렸다 내려갔다. 호흡이 빨라졌다.

"임플란트... 손상도... 그건?"

"신경 시뮬레이션 장치입니다. 당신의 뇌에 거짓 신호를 보내 루프라는 환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손상도는 당신의 신경계가 얼마나 깊이 이 환상에 빠져 있었는지를 나타내는 수치입니다. 100%라는 것은 당신이 완전히 환상 속에 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혁준이 문 근처에 섰다.

"이제 당신은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제안하는 기억 삭제 치료를 받고,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 자신의 기억을 고집하며 정신질환자로 남을 것인가."

"기억... 삭제?"

"네. 당신의 뇌는 이미 손상되었습니다. 지난 21일의 기억을 완전히 제거하면, 당신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NeuroRaze 기술을 사용하면 간단합니다."

이준호의 입술이 떨렸다.

"그럼... 나는?"

"당신은 21일 전으로 돌아갑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이준호. 그 이후의 모든 기억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당신은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이혁준이 손을 들었다. 간호사가 주사기를 들고 들어왔다.

"아니면... 당신이 기억하는 그 루프가 정말 존재한다는 증거를 찾으세요. 우리는 당신에게 기회를 드립니다. 당신의 기억이 진실이라면, 그 증거를 제시하십시오."

이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증거... 증거 AI. 강남청의 증거 AI가 내 증언을 확인할 수 있다."

"증거 AI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혁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찾아보았습니다. 강남청에는 신형 포렌식 AI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당신의 뇌가 만들어낸 또 다른 환상일 뿐입니다."

이준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신경 마비제를 투여했습니다."

의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의 신체는 현재 통제 상태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이준호의 눈동자만 움직였다. 천장을 응시했다. 하얀 천장. 하얀 벽. 하얀 침대.

그리고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다.

강남청 지하 3층. 특수 증거 보관실.

그곳에 있는 초기화 담당자. 그 사람의 얼굴.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당신의... 얼굴."

"뭐라고요?"

이혁준이 돌아섰다.

"당신의 얼굴이... 루프 015에서 본... 강남청 지하 3층... 초기화 담당자..."

이준호의 뇌가 그 기억을 붙잡으려고 애썼다. 손가락이 시트를 집어 쥐었다 풀었다. 뒷목의 임플란트 부분이 따끔거렸다.

"그 사람이... 당신이다."

침묵이 흘렀다.

이혁준의 웃음이 멈췄다.

"형사님, 당신은 지금..."

"루프가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 당신들이 거짓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준호의 눈동자가 이혁준을 응시했다.

"루프 015에서 당신은 강남청 지하 3층에서 USB를 빼앗았다. 당신은 국방부 장관이 아니라... 루프 조작자 중 한 명이다."

이혁준의 표정이 변했다.

의사가 다시 주사기를 들었다.

"진정시키겠습니다."

"잠깐."

이혁준이 손을 들었다.

"형사님, 당신의 기억이 정말 정확하다면... 한 가지 질문에 답해보세요. 루프 015에서 당신이 본 그 초기화 담당자의 이름이 뭐였습니까?"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 음성이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기억이... 없었다.

얼굴은 보았다. 하지만 이름은... 손가락이 경련했다. 뇌 뒤쪽에서 통증이 일었다. 기억을 붙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은 공허가 느껴졌다. 마치 손가락으로 물을 집으려고 하는 것처럼.

"모르겠군요."

이혁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의 기억은 이미 조작되었습니다. 당신은 일부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적 기억이 당신을 미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의사가 주사를 놓았다.

이준호의 눈이 무거워졌다. 뇌가 서서히 침몰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신경 임플란트에서 음성이 울렸다.

**루프 종료 | 신경 손상도 100% | 최종 메시지: 당신의 기억은 더 이상 증거가 아닙니다. 루프 밖의 세계에서도 루프는 계속됩니다. 그것을 루프라고 부르지 않을 뿐입니다.**

이준호의 의식이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지기 직전, 그의 뇌에 남겨진 마지막 기억이 있었다.

강남역. 승강장. 손을 내미는 순간.

그리고 그 손을 잡은 누군가의 음성.

"안녕, 형사. 다시 만났네."

그 음성의 주인은 박수연이 아니었다.

김준석이었다.

이준호의 눈이 떠졌다. 그 순간의 깨달음이 번개처럼 통과했다. 루프 밖이라고 믿었던 세계도 루프였다. 침대도, 의사도, 이혁준도—모두 루프 안의 또 다른 배경이었다. 박수연의 얼굴이 변했다. 그 아래 다른 얼굴이 있었다. 김준석의 얼굴이었다.

임플란트의 화면에 마지막 메시지가 떴다.

**루프 023 준비 중 | 신경 재동기화 예정 | 당신의 다음 루프는 강남역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엔 당신은 깨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계속 자고 있을 것입니다. 영원히. 왜냐하면 루프 밖의 세계도 루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침대 위의 이준호는 더 이상 깨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뇌는 계속 작동하고 있었다.

강남역 승강장에서. 매일 같은 시간에. 매일 같은 장면을 반복하며.

루프를 모르면서 루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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