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루프 너머의 기억

오전 6시 1분, 강남역 승강장.

신경 임플란트의 경고음이 울렸다. 손상도 92%.

이준호는 눈을 떴다. 천장의 형광등이 흐릿했다. 초점이 맞지 않았다. 루프 024의 기억이 거의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박수연의 얼굴과 주사기였다. 그 다음은 검은색이었다.

강남역. 같은 장소. 다른 시간.

휴대폰을 들었다. 시간이 밤 11시 47분이었다. 어제가 아니라 오늘 저녁. 루프 024가 진짜였다면, 루프는 정확히 24시간 반복되었다는 뜻이었다. 오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그런데 지금은 오전이 아니라 밤 11시였다.

이준호는 천천히 일어났다. 몸이 무거웠다. 신경 임플란트가 주기적으로 울렸다. 손상도 94%로 증가 중이었다.

승강장을 나갔다. 강남역 로비는 늦은 시간이라 한산했다. 사람들은 그를 지나쳤다. 아무도 그를 보지 않았다.

휴대폰 메모 앱을 열었다. 손이 떨렸다. 루프 024에서 무엇을 기억해야 했는지 쓰려고 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멈췄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다.

기억이 파편처럼 떠올랐다. 박수연이라는 이름. 뉴로테크 연구소. 프로메테우스. 단어들만 남아있었다. 그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준호는 메모를 시작했다.

"프로메테우스. 국방부. 박수연. 이혁준. 기억 조작."

타이핑이 느렸다. 다음 단어가 무엇이어야 할지 자꾸만 잊었다.

강남청으로 향했다. 밤 11시 반이었다. 형사청은 24시간 운영되었다.

경찰청 현관을 밀고 들어갔을 때, 정유진이 복도에서 나타났다.

"이준호?"

정유진의 얼굴을 보자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의 의심. 그의 거리감. 루프 내에서 정유진은 이미 이준호를 감시하고 있었다.

"증거가 있다,"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가 쉬었다. "루프에 대한 증거."

정유진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루프? 이준호,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휴직 신청이 처리되었다. 내일부터 한 달간 강제 휴직이다."

"내가 신청했나?"

"아니다. 의료진이 신청했다. 임플란트 손상도 과다 경고. 당신은 정신과 검사가 필요하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꺼냈다. 루프 내에서 촬영한 사진들을 보여주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멈췄다. 사진 폴더가 비어있었다. 모든 이미지 파일이 삭제되어 있었다.

"당신의 신경 임플란트 기록도 조사했다," 정유진이 계속했다. "루프 015 이후 기억이 연속성이 없다. 의료진은 환각 증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게 아니다. 루프는 실제로—"

"이준호, 당신을 신뢰한다. 하지만 이건 증거가 아니다. 이건 신뢰할 수 없는 뇌 신호다."

정유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뒤에는 공포가 있었다. 이준호를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졌다. 더 이상 동료가 아니라 위험한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언론에 공개하겠다," 이준호가 말했다.

"공개할 무엇을? 사진도 없고, 문서도 없고, 증인도 없다. 당신의 말만 있다. 그리고 당신의 말은 신뢰할 수 없다. 이미 모든 매체에 경고가 전달되었다. 당신의 주장을 보도하면 의료 정보 유출로 고소될 것이다."

정유진이 손을 들었다. 증거 파일을 압수하는 제스처였다. "이 파일들을 넘겨받겠다. 정식 수사 절차에 따라 처리하겠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정유진의 손이 내려왔다.

"한 달 쉬어라. 의료 치료를 받아라. 그 다음에 우리가 이야기하자," 정유진이 말했다. "그게 최선이다."

정유진이 돌아섰다. 이준호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한 달. 그 동안 박수연과 이혁준은 무엇을 할까. 프로메테우스는 계속 진행될 것이었다.

강남청 지하 3층의 특수 증거 보관실로 내려갔다. 루프 내에서 여러 번 내려갔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카드키가 작동하지 않았다.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보안 시스템이 말했다.

이준호는 층계를 올라왔다. 강남청을 나갔다. 밤 거리는 텅 빴다.

휴대폰이 울렸다. 한소현이었다.

"당신 지금 어디야? 정유진 말 들었어?"

"응."

"휴직 좀 해. 정신 좀 차려. 당신 요즘 말이 이상해. 매일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고, 같은 장소에만 가고. 이건 병이야, 이준호."

이준호는 전화를 끊었다.

강남역으로 돌아갔다. 밤 11시 50분이었다. 승강장의 벤치에 앉았다. 메모를 다시 열었다.

"프로메테우스."

그것만 남아있었다. 다른 모든 것은 사라졌다.

신경 임플란트가 울렸다. 손상도 96%로 증가했다.

이준호는 임플란트 인터페이스를 켜려 했다. 루프 내에서 기록했던 모든 메시지를 복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임플란트가 거부했다.

"저장 용량 초과. 기억 복구 불가능. 뇌 손상 수준: 심각. 추가 개입 금지."

같은 경고였다. 루프 내에서 본 것과 같은 경고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루프 밖이었다. 루프를 다시 돌릴 수 없었다. 기억은 영구적으로 손상되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알려지지 않은 번호였다.

"안녕하세요. 이준호 형사님."

목소리가 낯설었다.

"누군가요?"

"김준석입니다. 루프 024에서 당신이 임플란트에 신호를 남겨놨어요. 루프 탈출 직전에. 당신이 루프를 빠져나오면 자동으로 연락이 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루프 024의 기억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신호가 실제로 있었다면, 자신이 루프 안에서 뭔가를 준비했다는 뜻이었다.

"당신의 기억이 손상되었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연락했습니다. 만나야 합니다. 당신이 루프 내에서 남긴 것들을 찾아야 합니다. 루프 밖에서 프로메테우스를 중단시켜야 합니다."

"어디서 만나지?"

"강남역 출구에서 나가세요. 1번 출구. 왼쪽 골목. 편의점 옆 건물. 지하 1층. 30분 있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이준호는 일어났다. 강남역 1번 출구로 향했다. 밤 거리가 더 차가워졌다. 손상도 98%였다.

1번 출구를 나갔다. 왼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편의점이 보였다. 옆 건물의 지하 계단으로 내려갔다.

지하 1층은 오래된 창고처럼 보였다. 형광등 하나만 켜져있었다. 그 아래에 박수연이 서 있었다.

"이준호."

박수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어딘가요?"

"루프 너머입니다."

박수연이 한 발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신이 루프를 나가길 원했던 건 저였어요. 당신의 불완전한 기억과 증거 없는 증언은 우리에게 위협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제 고립된 사람이 되었거든요."

이준호는 말하려 했다. 하지만 목이 마른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루프는 당신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 만든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미 시작되었고, 당신이 루프 내에서 본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루프 밖에서도 계속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박수연이 미소지었다.

"프로메테우스는 국가 안보입니다. 국가 안보는 개인의 기억보다 중요합니다. 당신은 그걸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것이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박수연이 돌아섰다. 지하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창고의 형광등만이 계속 울렸다.

휴대폰이 울렸다. 김준석이었다.

"당신을 봤습니다. 박수연이 있었나요?"

"응."

"그럼 당신은 이제 정말 혼자입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이 루프 내에서 기록한 것들은 아직 남아있을 겁니다. 문서, 사진, 음성 기록. 당신이 루프 내에서 수집한 물리적 증거들이요."

"어디에?"

"당신이 찾아야 합니다. 당신이 루프 내에서 숨긴 것들을 찾아야 합니다. 루프 019에서 강남청 옥상에 갔던 거 기억해요? 당신은 분명히 대비했을 겁니다. 루프가 끝날 때를 위해."

전화가 끊겼다.

이준호는 지하 창고에서 나왔다. 밤 거리가 새벽으로 변하고 있었다. 강남역 부근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신경 임플란트가 울렸다. 손상도 98%였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메모를 다시 열었다. 남아있는 단어들이 이제 세 개였다.

"프로메테우스. 증거. 기억."

그것이 전부였다.

이제 이준호는 진정한 고독 속에서, 자신의 불완전한 기억과 물리적 증거만으로 거대한 국가 권력에 맞서야 했다. 루프 내에서는 루프를 깨뜨리는 것이 목표였다. 루프 밖에서는 프로메테우스 자체를 중단시켜야 했다.

하지만 그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지하 창고를 나온 이준호는 강남역 1번 출구로 올라왔다. 밤거리가 여전히 검었다. 휴대폰의 시각은 오전 5시 47분. 루프 밖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루프 내에서 24시간를 반복했지만, 루프 밖에서는 단 몇 시간만 경과한 것이다. 박수연의 말이 맞다면, 루프는 정확히 어제 오후 11시 43분에 시작되었고, 지금은 오늘 새벽이다. 이준호가 루프 안에서 보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강남청으로 가야 했다. 휴대폰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녹음기였다. 루프 내에서 확보한 물리적 증거들이다. 음성 파일 7개, 사진 12장, 촬영한 문서 3개. 이것이 루프의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신경 임플란트의 손상도가 98%라는 것은 자신의 기억이 거의 사라졌다는 뜻이다. 루프 1~10회차는 완전히 지워졌다. 루프 11~24회차도 불완전하다. 그 기억들을 설명할 수 없으면, 증거들은 단순한 파일에 불과할 것이다.

강남청 정문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6시 15분이었다. 이른 아침이지만 경찰청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야간 당직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준호는 복도를 따라 2층 강남형사팀으로 올라갔다.

증거 AI가 있는 포렌식실의 불이 켜져 있었다.

"이준호 형사님," 증거의 음성이 울렸다. "루프 024에서 임플란트 메시지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당신의 신경 손상도는 98%입니다. 의료 프로토콜상 추가적인 데이터 입출력은 권장되지 않습니다."

"알고 있다."

"당신이 루프를 벗어났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루프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현재 시각 오전 6시 16분. 표준 시간대입니다."

이준호는 증거 AI 옆의 단말기에 녹음기를 연결했다. 음성 파일들이 로드되기 시작했다.

"이것들을 분석해줄 수 있나?"

"음성 인식 분석 결과: 7개 파일 중 5개는 박수연의 음성입니다. 2개는 이혁준 국방부 장관의 음성으로 추정됩니다. 음성 위조 가능성: 0.3%. 매우 낮습니다. 원본으로 판단됩니다."

"사진은?"

"촬영 장소 분석 결과: 국방부 건물 내부로 확인됩니다. 특히 지하 5층 제한 구역. 문서 사진은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 운영 지침서'로 판단됩니다. 정부 기밀 문서입니다."

증거 AI의 분석은 명확했다. 루프 내에서 수집한 증거들은 모두 진짜였다.

"이것을 정유진 형사에게 제출해야 한다."

"권장하지 않습니다," 증거가 말했다. "현재 당신의 신경 손상도는 98%입니다. 당신의 증언은 법정에서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 증거들의 출처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지?"

"당신이 루프 내에서 이 증거들을 어떻게 수집했는지, 당신의 기억이 손상되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루프 024 전후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법적으로 유효한 증거가 되려면 증거의 출처가 명확해야 합니다. 당신의 증언 없이는 이 파일들은 위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될 것입니다."

이준호는 침묵했다. 증거 AI의 논리는 정확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증거가 계속했다, "이 증거들을 보관하고, 당신의 신경 상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신경과 의사의 진료를 권장합니다. 당신의 임플란트는 더 이상 데이터 저장에 사용될 수 없습니다."

오전 6시 30분, 정유진이 들어왔다. 그녀는 이준호를 보자 눈썹을 올렸다.

"이준호? 이렇게 일찍?"

"정유진, 당신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

이준호는 녹음기를 들었다. 증거 AI가 준 이어폰을 정유진에게 건넸다. 첫 번째 음성 파일을 재생했다.

박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는 2084년부터 운영되어 왔습니다. 목표는 국가 안보를 위한 기억 조작입니다. 현재까지 총 847명의 기억이 조작되었거나 삭제되었습니다."

정유진의 얼굴이 굳었다. 음성이 재생되는 동안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의심에서 동요로. 한 순간, 그녀의 눈이 이준호를 향했다. 그것은 신뢰의 신호였다.

하지만 음성이 끝나자 정유진의 표정은 다시 경직되었다.

"이건... 어디서 나온 거야?"

"루프 내에서 기록했다."

"루프?"

이준호는 루프에 대해 설명했다. 루프 024까지의 기억을 최대한 재구성해 설명했다. 하지만 그의 기억은 불완전했다. 루프 15회차 이후의 기억들이 끊어져 있었다. 마치 영화를 본 후 불완전하게 기억하는 것처럼, 이준호는 자신이 무엇을 해왔는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정유진은 이어폰을 벗었다. 그녀의 표정은 불신으로 가득했다.

"이준호, 당신... 이 음성 파일이 어디서 나왔는지 설명할 수 있어?"

"국방부 건물 지하 5층에서 녹음했다."

"국방부 건물에? 당신이 어떻게 거기 들어갔어?"

"루프 내에서..."

"루프라는 게 뭐야?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겠어? 이 음성 파일은 위조될 수 있어. 당신이 어떻게 이걸 만들었는지 설명해야 돼. 그리고 당신의 신경 임플란트 기록은?"

이준호는 임플란트를 열었다. 손상도 98%가 표시되었다.

정유진의 눈빛이 변했다. 그것은 이준호를 바라보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의미했다.

"당신, 신경 손상도가 98%야? 어떻게 이렇게 됐어?"

"루프에서..."

"루프. 당신이 계속 루프라는 말을 하는데, 이게 정신적 문제는 아니야? 당신은 어제 휴직 권고를 받았어. 기억해?"

이준호는 기억하지 못했다. 루프 015 이후의 기억이 너무 손상되어 있었다.

"정유진, 이 증거들은 실제야.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가 존재한다."

"이 증거들이 실제라고 해도, 당신이 어떻게 이걸 얻었는지 설명할 수 없으면 법적으로 무효야. 그리고 당신의 신경 상태가 이 정도면..."

정유진이 증거 파일을 가리켰다. "이 파일들을 넘겨받겠다. 정식 수사 절차에 따라 처리하겠다. 당신은 신경과에 가야 한다."

이준호는 항의하려 했지만, 정유진의 표정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이건 명령이야, 이준호. 당신은 휴직한다. 그리고 신경 치료를 받아야 해. 이 상태로는 수사를 진행할 수 없어."

강남청을 나온 이준호는 신경과 병원으로 향했다. 의료 센터는 강남역 근처에 있었다. 의사는 이준호의 신경 상태를 검사한 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신경 손상도 98%는 매우 심각합니다. 임플란트 사용 기록을 보면, 당신은 지난 몇 일 사이에 엄청난 양의 데이터 입출력을 했어요. 이것은 뇌 손상을 초래합니다. 당신은 지금 신경 퇴행의 초기 단계에 있습니다. 추가 악화를 막기 위해서는 임플란트를 비활성화해야 합니다."

"비활성화하면 어떻게 되나?"

"당신이 임플란트에 저장한 데이터는 모두 접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당신의 손상된 기억도 복구할 수 없습니다."

이준호는 침묵했다. 그의 임플란트를 비활성화하는 것은, 루프 내에서 수집한 모든 기억을 영구적으로 잃는 것과 같았다.

"그럼 임플란트를 비활성화하지 않으면?"

"당신의 뇌 손상이 계속 진행될 것입니다. 신경 퇴행성 질환으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결국 당신은 기억을 잃을 것입니다. 하지만 느리게, 고통스럽게."

의사가 비활성화 버튼을 제시했다. 이준호는 손을 떨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김준석이었다.

"당신을 봤습니다. 병원에 들어가는 당신을 봤어요. 임플란트를 비활성화하려고 하죠? 하지 마세요."

"어떻게 알았어?"

"나는 루프 밖에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당신의 임플란트 신호를 추적할 수 있거든요.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임플란트를 비활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루프 내에서 숨긴 것들을 찾는 것입니다."

"뭔데?"

"당신은 루프 024에서 자신에게 메시지를 남겼어요. '루프를 나왔군요. 나는 루프 밖에서 당신을 도울 수 있습니다. 만나자.'라는 메시지를 임플란트에 기록했던 것입니다."

이준호는 기억하려고 했다. 루프 024의 기억이 너무 희미했다. 하지만 임플란트 인터페이스를 확인해보니 정말로 그런 메시지가 있었다. '신호 전송 완료'라는 기록이 루프 024의 마지막 순간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당신은 다른 것도 준비했을 겁니다. 당신이 루프 내에서 숨긴 물리적 증거들이 어디 있는지 기억해요?"

이준호는 기억하려고 했다. 하지만 루프 20회차 이후의 기억이 너무 희미했다.

"기억이 안 난다."

"그럼 당신이 루프 내에서 자주 방문했던 장소들을 생각해봐요. 강남역, 강남청 포렌식실, 그리고..."

"그리고?"

"당신이 루프 018과 019에서 옥상에 갔어요. 강남청 건물 옥상. 당신은 거기 뭔가를 남겨놨을 겁니다."

이준호의 뇌가 깨어났다. 루프 019의 불완전한 기억이 떠올랐다. 옥상에서 뭔가를 했었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뭔가 중요한 것을 숨겼던 것 같았다.

"임플란트를 비활성화하지 말고, 강남청 옥상으로 가세요. 당신이 찾던 것이 거기 있을 겁니다."

전화가 끊겼다.

의사가 비활성화 버튼을 다시 제시했다.

"결정해야 합니다. 비활성화할 건가요, 아니면 더 기다릴 건가요?"

이준호는 병원을 나갔다. 의사의 말을 무시했다.

강남청으로 돌아갔을 때는 오전 8시 30분이었다. 정유진은 이미 자신의 휴직 관련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한소현은 이준호를 보자 고개를 돌렸다. 그들 모두는 이준호를 더 이상 형사로 취급하지 않고 있었다.

이준호는 옥상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갔다. 옥상의 문이 잠겨 있었다. 하지만 형사 신분증으로 열 수 있었다.

옥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준호는 옥상 전체를 돌아다녔다. 가장자리, 환기구, 천장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김준석의 말은 거짓이었을까?

이준호가 다시 계단으로 내려가려고 했을 때, 발아래 뭔가 걸렸다. 포장지였다. 방수 처리된 검은 포장지.

이준호가 펼쳤다. 안에는 USB 드라이브가 있었다. 그리고 손글씨 메모가 있었다.

"루프 밖에서의 당신이 봐야 할 것들. 프로메테우스의 전체 코드, 박수연의 개인 파일, 국방부 내부 문서. 이것이 증거다. 당신의 기억이 손상되었으니까, 이 파일들이 당신의 기억을 대신할 것이다. 루프를 깨뜨렸지만,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루프 밖에서 당신을 도울 사람은 나뿐이다. 김준석. PS: 이 파일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마. 당신의 휴대폰과 컴퓨터도 감시당하고 있다."

이준호는 USB 드라이브를 들었다. 손이 떨렸다.

신경 임플란트가 울렸다. 손상도 99%.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이준호는 옥상에서 내려왔다. 강남청 건물을 나갔다. 밖은 여전히 새벽이었다. 아니, 이미 오전 9시가 되어 있었다.

이준호는 거리를 헤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도 몰랐다. 정유진은 자신을 정신 환자로 취급하고 있었고, 한소현도 거리감을 두고 있었다. 강남청의 모든 동료들이 자신을 배제했다.

그리고 박수연의 말이 계속 반복되었다.

"루프는 당신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 만든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미 시작되었고, 루프 밖에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준호는 강남역 지하 창고로 다시 돌아갔다. 어두운 공간에서 USB 드라이브를 들었다. 이것이 자신의 기억을 대신할 증거다. 루프 내에서 수집한 모든 증거들이 이 작은 드라이브 안에 있다.

하지만 이제 이준호는 이 증거들을 누구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자신의 신경이 손상되었고, 루프에 대한 자신의 증언은 신뢰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증거 없는 증언, 기억 없는 진실 주장. 그것은 단순한 망상으로 취급될 것이다.

이준호는 지하 창고에서 나왔다. 거리로 나갔다. 서울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신경 임플란트가 마지막으로 울렸다. 손상도 100%.

더 이상의 데이터 입출력은 불가능했다. 이준호의 기억은 완전히 손상되었다.

하지만 USB 드라이브는 여전히 그의 주머니에 있었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김준석으로부터 새로운 메시지가 왔다.

"강남역 A4 출구 근처 카페 '메모리'에서 만나자. 30분 후. 당신의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이준호는 카페로 향했다. 밝아오는 거리를 걸으며, 자신의 불완전한 기억과 USB 드라이브만을 믿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루프 너머에서, 진정한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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