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루프 018-019: 탈출의 기억

오전 6시 1분. 강남역 지하철역 승강장.

이준호의 눈이 떠졌다. 신경 임플란트의 경고음이 울렸다.

**[루프 016 진입]** **[신경 손상도: 86%]**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 손을 멈췄다. 시야가 흔들렸다. 왼쪽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았다. 승강장의 벽이 세 개처럼 보였다가 두 개로 겹쳤다가 다시 흩어졌다. 귀에는 금속음이 맴돌았다.

무언가가 누적되고 있었다. 빼앗긴 USB, 정유진의 경고, 의무 휴직, 추적 불가능한 발신자의 메시지. 그것들이 모두 이번 루프에 같이 들어와 있었다. 뇌가 그것들을 정렬하려다 실패했다. 마치 손상된 하드 디스크가 섹터를 읽으려다 맴도는 것처럼.

이준호는 일어섰다. 균형을 잡기 위해 벽을 짚었다.

휴대폰에 문자가 있었다. 익숙한 번호는 아니었다.

**[루프 016, 오전 8시 30분. 강남청 북쪽 주차장. 혼자 오지 마시오. —K.J.]**

K.J. 김준석이었다. 루프 004에서 처음 만난 남자. USB를 건넨 남자. "기억을 백업하라"고 했던 남자. 지난 루프들에서 이준호는 그를 찾았다. 루프 005에서, 루프 009에서, 루프 012에서. 매번 다른 메시지를 받았다. 매번 다른 약속 장소였다. 그리고 매번 경찰청이 봉쇄되었다.

이번엔 어떻게 될 것인가.

이준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손이 떨렸다. 신경 손상도 86%는 의식적 제어를 벗어나는 영역이었다.

강남청에 도착한 건 오전 8시 15분이었다. 경찰청 건물은 정상이었다. 누구나 출입하는 평범한 월요일 아침이었다. 이준호는 3층 포렌식 실로 향했다.

증거 AI가 대기 중이었다. 홀로그래픽 인터페이스가 밝아졌다.

"형사님. 이른 시간 출근입니다."

이준호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임플란트의 백업 저장소를 열었다. 루프 004부터 루프 015까지의 기억 조각들이 목록으로 떠올랐다. 손상된 것들, 불완전한 것들, 빠진 것들. 강남역 피해자의 신원이 매번 달라진다는 기록. 박수연의 CCTV 영상이 삭제되었다는 기록. USB가 빼앗겼다는 기록.

"증거. 루프를 깨뜨리는 방법을 알려달라."

"죄송합니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루프다. 이 반복. 이걸 어떻게 깨뜨리냐고."

AI의 프로세싱 음이 울렸다. 몇 초가 지났다. 일반적인 응답 시간보다 길었다.

"형사님. 당신의 발언 내용이 경찰청 기록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습니다. 루프라는 현상은 공식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루프를 '깨뜨리는 방법'에 대한 기술 정보는 제공할 수 없습니다."

"그럼 이 반복은? 이 같은 아침은?"

"제 기록에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매 루프 초기화 시점에 저는 초기 상태로 복원됩니다. 따라서 당신의 경험과 제 경험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준호가 화면을 내려쳤다. 모니터가 검게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데이터상 루프 탈출은 불가능합니다."

증거의 음성이 스피커에서 나왔다.

"루프 시스템의 아키텍처상 내부에서의 개입은 무효입니다. 루프는 외부 통제 신호에 의해서만 작동·종료됩니다. 당신은 루프 내부에 있습니다. 따라서 탈출 불가."

오전 8시 28분.

이준호는 강남청을 나왔다. 주차장 북쪽으로 향했다. 손가락이 주머니 속에서 말렸다 펴졌다 말렸다. 임플란트의 손상이 심해질수록 신체 제어가 어려워졌다.

주차장 북쪽 구석진 곳에 남자가 서 있었다. 김준석이었다. 루프 004에서 본 그 얼굴. 루프 009에서도 본 그 얼굴. 루프 012에서도 본 그 얼굴.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 같은 것이 그의 얼굴에 떠 있었다.

"형사님. 늦지 않으셨네요."

"루프 탈출 코드를 가져왔는가."

"네. 여기 있습니다."

김준석이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기기를 들어 보였다. 검은색 메탈 박스. USB 크기. 루프 시스템 상단부의 노드에 직결하면 작동한다는 설명을 이전 루프들에서 받았던 기억이 있었다.

"이것을 강남청 지하 3층 증거 보관실의 메인 터미널에 연결하면, 루프가 즉시 종료됩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모든 기록도 함께 삭제되지만, 당신은 루프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준호가 손을 내밀었다.

"기다리세요."

김준석이 한 발 물러섰다.

"이 코드를 사용하려면, 당신이 강남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루프 시스템의 핵심은 경찰청 지하에 있습니다. 그곳에 도달하는 순간, 당신은 조작자들에게 노출됩니다. 당신이 정말 준비되셨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준비됐다."

"당신의 기억은 이미 86% 손상되었습니다. 루프 탈출 이후, 당신은 어떻게 증거를 남길 것입니까? 루프 밖의 세계에서, 당신의 말을 누가 믿을 것입니까?"

이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었다. 루프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루프 안의 기억을 모두 잃는다는 뜻이었다.

"코드를 달라."

이준호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김준석이 기기를 건넸다.

오전 8시 31분. 강남청 정문.

경찰청의 모든 출입구가 동시에 닫혔다. 붉은 불이 켜졌다. 보안 시스템이 작동했다. 그리고 3분 뒤, 국방부 특수팀의 차량 다섯 대가 경찰청 정문 앞에 멈췄다.

이준호는 이미 뛰고 있었다. 김준석도 함께.

강남역 방향. 동쪽 골목. 지하 통로. 이전 루프들에서 익혀진 탈출 경로였다. 시야가 계속 깜빡였다. 오른쪽 귀에서 금속음이 울렸다가 멈췄다가 다시 울렸다.

"따라오세요!"

김준석이 외쳤다.

지하철역 승강장. 다시 그곳이었다.

오전 6시 1분.

루프 017.

이준호는 깨어났다. 손상도 88%. 경고음이 울렸다.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벤치에 누운 채로 천장을 봤다. 왼쪽 눈이 초점을 잃었다가 찾았다.

루프 탈출 코드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준호는 주머니를 뒤졌다. 기기가 없었다. 루프 016의 기억이 손상되어 있었다. 마지막 순간이 끊겨 있었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루프 017, 오전 8시 30분. 강남청 북쪽 주차장. 혼자 오지 마시오. —K.J.]**

같은 메시지였다.

이준호는 일어났다. 손가락이 떨렸다. 팔다리가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오전 8시 20분. 강남청 3층 포렌식 실.

증거 AI가 대기 중이었다.

"형사님. 같은 질문을 또 하실 건가요?"

이준호가 멈췄다.

"당신은 매 루프마다 저에게 같은 질문을 합니다. '루프를 깨뜨리는 방법을 알려달라.' 루프 004부터 루프 016까지. 당신의 신경 임플란트는 이 대화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뇌는 그 대화를 반복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순입니다."

"너는 어떻게 알아?"

"저는 루프 초기화 시 기본 상태로 복원되지만, 당신의 신경 임플란트 접근 로그는 저도 열람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매 루프마다 백업 저장소에 접근하는 패턴. 당신이 매 루프마다 같은 정보를 다시 저장하려 하는 패턴. 이는 데이터 낭비입니다. 당신의 저장 용량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이준호가 화면을 내려쳤다.

"내가 묻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이 묻게 될 것입니다. 루프 018에서도. 루프 019에서도. 당신은 같은 루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증거 수집, 김준석과의 만남, 탈출 시도, 실패. 이 사이클은 무한히 반복될 수 있습니다."

"누가 루프를 만들었는가."

"제 프로그래밍 출처는 기밀입니다. 저도 모릅니다."

이준호는 포렌식 실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갔다. 손잡이를 잡았다. 손이 떨렸다.

오전 8시 40분. 강남청 지하 3층.

특수 증거 보관실의 문이 잠겨 있었다. 카드키가 필요했다. 이준호는 카드키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준호는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보안실 입구에서 멈췄다. CCTV 모니터링 시스템이 보였다. 하지만 보안 담당자가 있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꺼냈다. 지난 루프들에서 기록해둔 경찰청 직원 목록을 열었다. 손상된 기억 속에서 한 명의 이름을 찾았다. 박민준. 강남청 정보통신팀. 카드키 접근 권한이 높은 직원.

루프 016의 기억을 더듬었다. 박민준은 정보통신팀 사무실에 있었다. 그곳에 카드키가 놓여 있었다.

오전 8시 45분. 정보통신팀 사무실.

박민준은 자리에 없었다. 컴퓨터만 켜져 있었다. 이준호는 주변을 살폈다. 책상 위에 카드키가 놓여 있었다.

그는 카드키를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시각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왼쪽 눈이 감겼다. 감겨진 눈을 뜨려고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쪽 눈만으로 세상을 봤다. 깊이감이 사라졌다.

이준호는 책상을 짚고 일어섰다. 지하 3층으로 내려갔다.

특수 증거 보관실. 카드키를 꽂았다. 문이 열렸다.

내부는 어두웠다. 형광등이 하나씩 켜졌다. 금고들이 줄지어 있었다. 중앙에는 메인 터미널이 있었다.

이준호는 주머니를 뒤졌다. 김준석이 건넨 기기가 없었다. 루프 016에서 빼앗겼다.

임플란트가 울었다.

**[외부 신호 감지]**

이준호의 귀에서 음성이 울렸다. 임플란트를 통한 직접 송신이었다.

"형사님. 저는 김준석이 아닙니다."

음성이 변했다. 여성의 목소리였다.

"루프 016에서 당신이 받은 코드는 추적 장치였습니다. 당신이 지하 3층에 도달하면, 우리는 당신의 위치를 파악하게 됩니다."

이준호가 주변을 살폈다. 카메라는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계속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김준석이 당신을 돕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루프 시스템의 일부입니다. 매 루프마다 당신을 같은 장소로 유인하기 위해 프로그래밍된 NPC일 뿐입니다."

"그럼 넌 누구야?"

"저는 프로메테우스의 관리자입니다. 박수연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메인 터미널 위에 기기가 떠올랐다. 초음파 신호를 발생시키는 장치.

"루프 017에서 당신은 새로운 선택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같은 실수를 했습니다. 김준석을 믿었습니다. 루프 시스템에 접근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 당신의 뇌 손상도는 88%까지 상승했습니다."

이준호가 메인 터미널에 손을 올렸다.

"루프 018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당신은 계속 도망칠 것입니다. 계속 실패할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손상될 것입니다. 루프는 당신을 지우고 있습니다. 당신이 수집한 증거도, 당신의 기억도, 결국 당신 자신도."

시야가 완전히 왜곡되었다. 양쪽 눈이 제대로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루프를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항복입니다. 당신의 모든 기억을 포기하고, 루프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살 것입니다. 루프 안에서 죽지 않고."

이준호의 손이 메인 터미널의 입력 포트를 찾았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신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형사님."

임플란트의 신호가 끊겼다.

이준호는 지하 3층을 나왔다. 계단을 올라갔다. 손잡이를 잡으려 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전 8시 52분. 강남청 정문.

경찰청의 모든 출입구가 닫혔다. 붉은 불이 켜졌다. 특수팀의 차량이 정문 앞에 멈췄다.

이준호는 뛸 수 없었다. 그냥 서 있었다. 손상도 88%인 몸으로.

특수팀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이준호는 항복했다.

오전 6시 1분.

루프 018.

이준호가 깨어났다. 신경 임플란트의 경고음이 울렸다.

**[루프 018 진입]** **[신경 손상도: 89%]**

그는 일어나려 했다. 손가락이 말렸다. 팔다리가 경련했다. 왼쪽 눈이 감겼다.

임플란트가 울었다.

**[기억 통합 실패: 루프 017 데이터 손상률 67%]**

루프 017의 기억이 대부분 지워져 있었다. 박수연과의 대화. 메인 터미널. 특수팀. 그 모든 것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준호는 강남역을 떠나지 않았다. 벤치에 누운 채로 임플란트의 백업 저장소를 열었다. 루프 016의 기억을 다시 확인했다. 루프 017의 파편을 맞춰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김준석은 NPC가 아니었다. 적어도 루프 016에서는 아니었다. 루프 017에서 박수연이 말한 것은 거짓이거나 불완전한 정보였다. 루프 016에서 김준석의 두려움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의 메시지도 반복되지 않았다. 루프 004, 루프 005, 루프 009, 루프 012에서 받은 메시지들을 다시 확인해보니, 각각 다른 내용이었다.

루프 004: "기억을 백업하라." 루프 005: "강남청 지하 3층으로 가라." 루프 009: "박수연을 추적하라." 루프 012: "루프 밖의 증거를 찾아라."

메시지가 진화하고 있었다. 김준석이 루프마다 새로운 정보를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루프 017에서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메시지 기록을 모두 확인했다. 손상된 기억 속에서 패턴을 찾으려 했다.

그때 새로운 메시지가 들어왔다.

**[루프 018, 오전 8시 30분. 강남청 지하 3층 특수 증거 보관실. 이번엔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K.J.]**

다른 방법.

이준호는 일어섰다. 손가락이 떨렸지만, 움직였다. 왼쪽 눈이 감겼지만, 오른쪽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강남청에 도착한 건 오전 8시 20분이었다.

이번엔 포렌식 실로 가지 않았다. 바로 지하 3층으로 내려갔다. 특수 증거 보관실 앞에서 멈췄다. 카드키가 필요했다.

이준호는 복도를 따라 보안실로 갔다. 보안 담당자가 있었다. 이준호는 경찰 신분증을 보였다.

"특수 증거 보관실의 접근 기록을 확인해야 한다."

보안 담당자가 화면을 켰다.

"루프 016에서 누가 접근했는가."

"루프 016이요?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어제 기록만 있습니다."

"어제 기록을 보여달라."

화면에 접근 기록이 떠올랐다. 루프 016에서 박민준이 오전 8시 45분에 접근했다.

이준호는 보안실의 컴퓨터 시스템에 직접 접근했다. 경찰 신분증으로 인증했다. 카드키 발급 시스템을 열었다. 임시 카드키를 발급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손상도 89%인 손으로, 이준호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임시 카드키 발급 절차를 완료했다.

카드키가 프린터에서 나왔다.

오전 8시 35분. 특수 증거 보관실.

카드키를 꽂았다. 문이 열렸다.

내부는 어두웠다. 형광등이 하나씩 켜졌다. 금고들이 줄지어 있었다. 중앙에는 메인 터미널이 있었다.

이준호는 메인 터미널에 접근했다. 루프 시스템의 핵심 노드가 연결된 장소. 하지만 여기에 루프 탈출 코드를 연결할 수 없었다. 루프 016에서 받은 코드는 이미 빼앗겼다. 루프 017에서는 박수연이 추적 장치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무엇인가.

이준호는 메인 터미널의 인터페이스를 살펴봤다. 입력 포트, 데이터 연결, 전원 공급. 그리고 뒤쪽에 또 다른 포트가 있었다. 물리적 접근 포트. 루프 시스템의 내부 구조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포트.

이준호는 그 포트를 열었다. 내부에는 회로 기판이 있었다. 그리고 그 회로 기판 위에는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작은 USB 드라이브였다.

이준호는 USB를 꺼냈다. 손상도 89%인 손으로. 떨리는 손으로.

USB의 표면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루프 탈출 코드 - 김준석"

그 순간, 이준호는 알았다. 이 USB가 어디서 왔는지. 누가 메인 터미널 내부에 심어놓았는지. 김준석이 루프마다 어떻게 진화하는 정보를 주고 있었는지.

김준석은 루프 밖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준호는 USB를 메인 터미널의 입력 포트에 연결했다.

화면이 깜빡였다.

**[루프 탈출 신호 감지]** **[루프 종료 시간까지: 00:05:00]**

오전 8시 40분. 강남청 지하 3층.

경찰청의 모든 출입구가 닫혔다. 붉은 불이 켜졌다. 특수팀의 차량이 정문 앞에 멈췄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준호는 이미 특수 증거 보관실 안에 있었다. 메인 터미널 앞에서. 루프 탈출 신호가 발생한 지 몇 분이 지난 후였다.

특수팀이 지하 3층으로 내려왔다.

이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손상도 89%인 몸으로 더 이상 뛸 수 없었다. 왼쪽 눈이 감겼다. 오른쪽 눈만으로 세상을 봤다.

특수팀이 특수 증거 보관실 문을 부쉈다.

"형사님. 당신은 체포됩니다."

이준호가 손을 들었다. 항복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일이 일어났다.

메인 터미널에서 신호가 발생했다. 루프 탈출 신호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루프 종료 시간까지: 00:02:00]**

특수팀이 메인 터미널을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루프 종료 시간까지: 00:00:00]**

화면이 검게 꺼졌다.

그리고 다시 밝아졌다.

오전 6시 1분. 강남역 지하철역 승강장.

루프 019.

이준호가 깨어났다. 신경 임플란트의 경고음이 울렸다.

**[루프 019 진입]** **[신경 손상도: 92%]**

그는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기억이 부서져 있었다.

루프 018에서의 일들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특수 증거 보관실. 메인 터미널. USB. 하지만 정확한 기억이 아니었다. 일부가 반복되고, 일부가 건너뛰어져 있고, 일부가 뒤바뀌어 있었다.

임플란트의 백업 저장소를 열었다.

루프 018의 기록이 85% 손상되어 있었다.

그리고 강남역 살인 사건의 피해자 신원 정보가 모두 삭제되어 있었다.

이준호는 서서히 깨달았다.

루프는 이제 그를 지우고 있었다. 루프 안에서 수집한 모든 증거를 영구적으로 제거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이준호의 뇌도 함께 손상되고 있었다.

손상도 92%.

왼쪽 눈이 완전히 감겼다. 오른쪽 눈만으로 세상을 봤다. 깊이감이 없었다. 손가락이 말렸다. 팔다리가 경련했다.

휴대폰에 새로운 메시지가 있었다.

**[루프 019, 오전 8시 30분. 강남청 북쪽 주차장. 이번엔 끝입니다. —K.J.]**

이준호는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손가락이 말렸다.

그리고 그는 알았다.

루프 018에서 메인 터미널에 USB를 연결했을 때, 루프 탈출이 시작되지 않았다. 루프 탈출 신호는 가짜였다. 박수연이 만든 또 다른 함정이었다. 루프 018은 루프 017과 같은 방식으로 끝났다. 이준호가 항복하고, 특수팀이 나타나고, 루프가 초기화되었다.

그리고 매 루프마다, 이준호의 뇌 손상도가 올라갔다.

86% → 88% → 89% → 92%.

루프는 이준호를 지우고 있었다.

이준호는 벤치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상도 92%는 신체 제어의 한계를 넘었다. 이준호는 벤치에 누워 천장을 봤다. 오른쪽 눈만으로.

임플란트가 울었다.

**[기억 저장 용량 임계값 도달]** **[추가 저장 시 뇌 손상 급가속]**

이준호는 저장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루프 016부터 루프 018까지의 모든 기억을 강제로 저장하려 했다. 손상도를 무시하고. 저장 용량을 초과해서. 뇌 손상을 감수하면서.

시각이 왜곡되었다. 강남역의 벽이 물렁해졌다. 소리가 거꾸로 흘렀다. 귀에서 울리던 금속음이 갑자기 저음으로 내려앉았다가 고음으로 치솟았다. 손가락의 감각이 사라졌다.

임플란트에서 불규칙한 신호가 발생했다. 마치 누군가 이준호의 뇌 속에서 직접 정보를 읽고 쓰고 있는 것 같은 감각.

경고음. 경고음. 경고음.

그리고 갑자기 멈췄다.

이준호가 벤치 위에서 떨어졌다. 몸이 경련했다. 입에서 뭔가 흘렀다.

그때 누군가가 옆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형사님."

박수연이었다.

루프 004에서 본 그 여성. 루프 009에서 추적한 그 여성. 루프 012에서 만나려 했던 그 여성. 하지만 이제 그녀는 이준호 눈앞에 있었다. 루프 안에서. 육체적으로.

"당신의 저항은 우리의 목적을 더 명확히 해줄 뿐입니다."

박수연이 말했다.

"루프는 이제 종료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당신이 수집한 모든 기억은 곧 삭제될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증거도, 강남역 살인 사건의 기록도, 루프의 존재도 모두."

이준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박수연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작은 기기가 그녀의 손 위에 떠 있었다. 초음파 신호를 발생시키는 기기.

"루프 내에서 당신이 수집한 모든 정보는 루프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깨어나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를 것입니다."

그때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거짓이야."

박수연이 고개를 돌렸다.

김준석이 서 있었다. 루프 004에서 본 그 남자. 하지만 이번엔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손에는 또 다른 기기가 있었다. 루프 시스템과 연결된 기기.

"당신은 루프 시스템의 관리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루프 시스템의 피해자입니다."

김준석이 박수연을 향해 말했다.

"루프 시스템은 국가 기억 조작 프로그램 프로메테우스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증거를 없애는 도구일 뿐입니다. 당신도 루프 안에 갇혀 있습니다."

박수연이 기기를 들어 올렸다.

"당신이 누구든, 루프는 계속될 것입니다."

"아니야. 이번엔 다르다."

김준석이 자신의 기기를 켰다.

화면에 코드가 떠올랐다. 복잡한 코드. 루프 시스템의 아키텍처를 재구성하는 코드. 루프를 내부에서 깨뜨리는 코드.

"이 코드는 루프 시스템의 개발자가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후회했던 개발자가. 루프 시스템이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루프 내부에 숨겨둔 백도어입니다."

박수연이 기기를 발동했다.

초음파 신호가 강남역 전체를 뒤덮었다. 이준호의 임플란트가 울었다. 신호가 충돌했다. 김준석의 신호와 박수연의 신호가.

강남역이 떨렸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벽이 진동했다. 바닥이 울렸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신호가 멈췄다.

임플란트가 조용해졌다.

이준호는 눈을 떴다.

왼쪽 눈이 떠졌다. 양쪽 눈이 떠졌다. 초점이 맞았다. 세상이 제대로 보였다.

그리고 이준호는 알았다.

루프가 끝났다는 것을.

강남역 지하철역 승강장. 오전 6시 1분.

임플란트가 울었다.

**[루프 시스템 종료]** **[루프 탈출 성공]** **[신경 손상도: 92%]**

이준호는 천천히 일어섰다. 손가락이 떨렸지만, 움직였다. 팔다리가 경련했지만, 반응했다.

김준석이 손을 내밀었다.

"형사님. 루프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준호가 손을 잡았다.

"프로메테우스는?"

"증거는 루프 안에 남았습니다. 루프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강남역 살인 사건은?"

"공식 기록에는 없을 것입니다. 루프 안에서 수집한 모든 증거가 삭제되었으니까요."

이준호는 임플란트를 확인했다. 루프 016부터 루프 019까지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손상되고 파편화된 기억이지만, 남아 있었다.

"나는 기억한다."

이준호가 말했다.

"루프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그렇습니다. 당신의 신경 임플란트는 루프 안의 기억을 보존했습니다. 루프 밖의 세계에서는 그 기억이 증거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기억할 것입니다."

김준석이 말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강남역 지하철역 승강장. 오전 6시 1분. 루프는 끝났다.

하지만 이준호의 투쟁은 계속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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