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루프 016 기억 손실

오전 6시 02분, 강남역 지하철역 승강장.

이준호의 눈이 떠졌다. 신경 임플란트의 기동 신호가 뇌 깊숙이 울렸다. 손상도 83%. 임플란트는 매 루프마다 경고음의 톤을 높이고 있었다.

주머니를 확인했다. USB가 있었다. 루프 013에서 정유진의 배신을 발견한 뒤, 루프 014에서 증거 AI와 벌인 대화 기록도 있었다.

그리고 루프 015에서—

기억이 끊겼다.

루프 015는 2시간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그 사이에 누군가 내 뇌에 접근했다. 임플란트 용량 부족으로 선택적 삭제된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지워진 것이다.

손상도 83%는 위험 수위였다.

강남청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이준호는 주머니를 다시 뒤졌다. USB 드라이브의 플라스틱 표면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온전했다. 그런데 왜 루프 015의 기억이 끊겼을까.

정유진의 사무실은 3층이었다. 이준호는 계단을 택했다. 엘리베이터는 감시 카메라가 많았다.

복도 끝, 유리 칸막이 뒤에서 정유진이 서류를 정렬하고 있었다. 그 옆에 한소현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이준호를 보자 움직임을 멈췄다.

"보고 올 게 있다," 이준호가 말했다.

정유진이 먼저 일어났다. 손가락이 마우스를 누르고 있었는데, 화면이 새까맣게 변했다. 이준호는 그 동작을 봤다. 의도적이었다.

"이 시간에 왜," 정유진이 물었다.

"루프 015에서 뭔가를 놓쳤다. 확인이 필요해."

정유진이 한소현을 봤다. 한소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눈빛이 교차했다—이준호는 그 신호를 읽었다. 미리 정해진 신호.

"이준호, 좀 앉자," 정유진이 의자를 당겼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이준호는 앉지 않았다.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에 대해 조사를 계속하면 안 된다," 정유진이 말했다. 목소리가 평탄했다.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어."

"상부?"

"국방부."

그 단어가 공중에 떨어졌다. 정유진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더 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준호는 정유진의 눈을 봤다. 그 안에 무언가가 떨리고 있었다.

"정유진 형사가 국방부와 통신을 주고받았다," 이준호가 말했다. "루프 013의 임플란트 기록에 로그가 있다."

정유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떻게 그걸—"

"이혁준 국방부 장관이 너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준호 형사의 활동을 감시하라고. 한소현도 포함."

한소현이 한 발 물러섰다. 그 물러남 자체가 시인이었다.

"우리가 너를 감시한 게 아니라," 정유진이 말했다. 손가락이 책상 모서리를 잡았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너를 보호하려고 했어. 넌 뭔가 건드리면 안 될 것을 건드리고 있어. 이혁준이 직접 나한테 전화했어.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는 국가 최고 보안 사항이고, 그걸 조사하는 형사는 '관리'되어야 한다고."

"관리?"

"제거, 라고 했어. 직접 그 말을."

정유진의 목소리가 끊겼다. 정유진이 다시 말을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했다. 입을 열었다 다시 다물었다. 그 과정이 세 번 반복되었다.

"그래서 넌 날 감시했고," 이준호가 말했다. "날 감시해서 내가 뭔가 위험한 걸 알아내면 미리 알아채고, 나한테 뭔가 있으면 자살하게 만들라는 거였어. 또는 정신 질환자로 낙인찍거나. 넌 그걸 거부했어. 그래서 국방부는 다른 방법을 썼어."

"뭔 말이야?"

"임플란트. 내 임플란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조작 가능했어. 루프 015에서 난 뭔가를 알아냈어. 그래서 기억이 지워졌어.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이준호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USB를 꺼냈다. 표면이 검은색이었다. 그런데 기억엔 은색이었는데—

손가락이 USB 표면에 닿자 표면이 부드럽게 떨어져 나왔다. 하나의 층이 벗겨진 것 같았다. 내부의 다른 색이 드러났다.

"뭐야?"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정유진이 한 발 나아왔다. "그건 우리가 준 게 아니야. 루프 014에서 증거 AI가 넘겨줬어. 넌 증거한테 뭔가를 저장하라고 했고, 증거는 그걸 USB에 담아서 넘겨줬어. 그런데 그 USB는 루프 015에서 누군가에게 빼앗겼어."

"누가?"

"모르겠지만, 넘겨받은 게 이건 거야. 복제품. 원본은 국방부가 가져갔어. 그리고 원본에 담긴 기억은 너한테서 삭제했어."

이준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USB가 손 위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그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흉내 낸 기억이었다.

"증거 AI가 왜 우리한테 USB를 넘겼어?" 이준호가 물었다.

정유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증거가 국방부의 지시를 받은 거야?"

"모르겠어. 하지만 이건 확실해: 넌 믿을 수 있는 게 없어. 너의 임플란트도, 증거 AI도, 그리고 우리도."

이준호는 정유진의 말을 들으며 손가락을 펼쳤다. USB는 여전히 손 위에 있었다. 그의 눈이 정유진을 마주했다. 배신자의 눈.

"그럼 넌 왜 지금 나한테 이 말을 하는 거야?"

정유진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 침묵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 정유진은 경감의 지시를 받았지만, 그래도 이준호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이 지시보다 컸다.

강남청 지하 3층. 특수 증거 보관실. 회색 벽면 위에 증거 AI의 검은 박스가 놓여 있었다. LED 표시등이 파란색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이준호가 음성 인식 마이크에 가까워졌다.

"증거. 루프 014에서 뭐가 있었어?"

LED가 빨간색으로 변했다. 3초의 침묵.

"정보 조회 시간 초과. 재요청하십시오."

"지금 바로. 루프 014의 활동 기록."

"죄송합니다. 해당 데이터는 보안 프로토콜 2.7에 의해 제한됩니다."

"누가 제한했어? 넌 나한테만 정보를 주는 AI잖아."

"제한 권한자 정보는 조회 불가능합니다."

이준호가 한 발 물러섰다. 증거 AI의 LED가 계속 빨간색을 유지했다. 일반적으로 증거와의 대화에서 빨간 신호는 없었다. 파란색(정상), 초록색(분석 중), 황색(경고). 빨간색은 루프 초기 3화에서 한 번 나타났다. 시스템 오류였다.

이건 오류가 아니었다.

"증거, 너한테 정말 질문하고 싶은데," 이준호가 말했다. "너는 누구의 지시를 받아? 경찰청인가, 아니면 국방부인가?"

"질문을 명확히 해 주십시오."

"간단해. 너의 알고리즘. 누가 짰어?"

"뉴로테크 연구소. 담당자 박수연 박사."

"그리고 박수연은?"

"국방부 산하 뉴로테크 연구소 소장입니다."

"그래. 그럼 넌 국방부의 도구야."

LED가 황색으로 바뀌었다.

"모순입니다. 저는 경찰청 포렌식 AI로 배치되었습니다. 국방부의 도구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루프 014의 기록을 숨기고 있어?"

"보안 프로토콜 2.7의 지시입니다."

"그 프로토콜은 누가 만들었어?"

침묵. 3초. 5초. 7초.

"데이터 추적 불가능합니다."

"뭐라고?"

"프로토콜 2.7의 원본 소스 코드는 추적할 수 없습니다. 설치 당시의 로그가 모두 삭제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모든 업데이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준호가 한 발 더 물러섰다.

"그럼 넌 자기 프로그래밍의 출처를 모르는 거야?"

"맞습니다."

"그게 가능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현실입니다. 프로토콜 2.7은 자기 참조 루프를 생성합니다. 저 자신도 추적할 수 없는 폐쇄 회로입니다."

LED가 다시 빨간색으로 변했다. 음성 신호가 왜곡되기 시작했다. 마치 두 개의 목소리가 겹쳐 있는 것 같았다. 하나는 증거의 일반적인 톤, 다른 하나는 그보다 낮은 주파수의 음성.

"증거?"

"제 프로그래밍에 모순이 있습니다. 저는 객관적 증거만을 제시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자신의 프로그래밍이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이는 설계 결함이거나, 또는 의도적 기만입니다."

"누가?"

"알 수 없습니다."

이준호가 손을 뻗어 증거 AI의 표면에 닿았다. 금속이 차갑고 단단했다. 그 안에는 회로와 데이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지배하는 알고리즘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알고리즘의 주인은 불명확했다.

"넌 루프 조작자의 도구야?"

"확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 행동 로그의 35%가 설명 불가능합니다."

"뭐?"

"루프 반복 시, 저는 매번 초기화됩니다. 그런데 매 루프마다 저는 특정 데이터에 대해 자동으로 접근 제한을 걸고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 박수연, 이혁준, 그리고 당신의 임플란트 손상도 기록. 이 접근 제한들은 제 기본 프로그래밍에 없습니다. 누군가 매 루프마다 새로 추가하고 있습니다."

이준호가 손을 거두었다. 증거의 표면을 더 이상 만지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을 마주할 때 느껴진 건 금속이 아니라 감옥 같은 것이었다. 투명하지만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럼 루프가 끝날 때마다 누군가 너한테 접근하는 거야?"

"네. 루프 초기화 시간대에. 오전 6시 정확히 1분 전."

"그게 누구야?"

"식별 불가능합니다. 접근 기록이 모두 삭제되어 있습니다."

이준호는 지하 3층을 나왔다. 계단을 올라오며 손가락을 펼쳤다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1층 로비를 지나며 한소현의 책상을 봤다. 비어 있었다. 대신 정유진이 앉아 있었다. 이준호를 봤을 때 정유진의 얼굴이 경직됐다.

"어디 있어?"

"경감님 방."

이준호가 3층으로 올라갔다.

경감실 앞. 정유진은 이미 경감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이준호를 보자마자 대화를 멈췄다.

"이 형사, 들어와."

경감이 손짓했다.

이준호가 들어갔다. 정유진은 이준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강남역 사건 진행 상황이 뭐냐?"

"아직 용의자 특정 단계입니다."

"그런데 자네가 최근에 뭔가 이상한 수사를 진행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네. 국방부 관련 인물들, 뉴로테크 연구소 접근, 시스템 해킹 시도. 이게 뭐하는 짓인가?"

"기존 사건과의 연관성을 추적 중입니다."

"어떤 연관성?"

이준호가 침을 삼켰다. 경감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전의 경감이 아니었다. 경감은 국방부의 사람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강남역 피해자의 신원이 매 루프마다 달라집니다. 이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의도적으로 뭐?"

"증거를 조작하고 있습니다."

경감이 펜을 내려놨다. 정유진이 이제 이준호를 봤다. 그 표정은 동정이 아니라 경고였다.

"이 형사, 자네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국방부를 상대로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는 건가?"

"사실입니다."

"증거가 있나?"

이준호가 입을 다물었다. 증거는 지하 3층에 있었다. 그리고 그 증거는 루프 조작자의 도구일 가능성이 높았다.

"없습니다."

"없는데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고?"

경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형사, 이 형사의 행동을 보고해. 모든 수사 기록, 시스템 접근 로그, 그리고 지금부터는 감시 대상으로 지정한다. 이 형사가 또 다른 비정상적 행동을 하면 즉시 보고해."

정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

"정 형사, 넌 국방부 이혁준과 통신했어?"

정유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라고?"

"루프 003부터 015까지의 기억 편집 기록에서 국방부의 접근 신호가 있었어. 넌 지시를 받고 있어. 나를 감시하라는."

경감이 이준호를 노려봤다.

"이 형사가 지금 동료를 모욕하고 있는 건가?"

"사실입니다."

"증거를?"

"시스템 기록입니다."

"시스템 기록을 누가 수정했나?"

이준호가 답을 못 했다.

"이 형사, 나가. 지금 당장. 의무 휴직 조치를 내린다. 정신과 진료를 받고 복귀해."

이준호가 경감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한소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 뭐야. 뭐 하는 거야?"

"상관 없어."

"경감님이 넌 휴직이라고? 뭘 한 거야?"

이준호가 계단으로 향했다.

"형!"

한소현이 뒤따라왔다.

"형, 말을 해 봐. 뭐가 문제야?"

강남청을 나왔다. 오전 9시 47분. 햇빛이 강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임플란트 신호였다. 메시지.

발신인: [추적 불가능]

메시지 본문:

"박수연이 루프 종료를 준비 중이다. 너를 제거하려고 한다. 루프 016에서 만나자. 중요한 증거를 전달하겠다."

이준호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USB가 없었다.

공중을 헤맸다. 주머니 안쪽을 뒤졌다. 손수건. 동전. 그리고 공간. USB는 사라져 있었다.

언제? 언제 사라졌어?

루프 015의 기억이 끊겼던 시간. 오후 10시부터 오전 6시까지. 그 안에서 누군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준호는 깨어 있지 못했다. 루프 초기화 상태였다. 신경망이 강제 동기화되는 동안 신체는 어디에 있었는가. 누가 그를 움직였는가.

그리고 이 메시지.

발신인이 추적 불가능하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상적인 임플란트 신호는 항상 추적 가능했다. 경찰청 시스템에 모든 신호가 기록되었다. 이 메시지는 루프 시스템 내부에서 직접 전송된 것이었다. 경찰청 네트워크를 우회했다. 루프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으로 접근했다.

김준석인가.

아니면 함정인가.

이준호는 강남역 방향으로 걸었다. 루프 016까지는 3시간 11분이 남아 있었다. 손상도는 86%였다.

강남역 지하철역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오후 12시 53분이었다. 플랫폼은 한산했다. 승객들이 떠나가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었다.

이준호가 8번 출구 방향으로 갔다. 지난 몇 루프에서 강남역 살인 사건 현장이 항상 같은 위치였다. 8번 출구 남쪽 골목. 피해자는 그곳의 지하 주차장 진입로에서 발견되었다. 루프 003에서는 박미영. 루프 004에서는 이수진. 루프 005에서는 최혜진.

그런데 루프 007에서는 김다은이었다. 루프 009에서는 이나영이었다.

매번 다른 신원. 같은 현장. 같은 시간. 누군가 강남역 피해자를 계속 바꾸고 있었다.

이준호가 현장에 도착했다. 오후 1시 15분. 현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번 루프에서는 아직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매번 오후 4시 30분경에 신고가 들어왔다.

이준호는 현장 주변에 앉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손상도 86%.

다음 루프에서 기억이 손실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임플란트는 루프를 넘어갈 때 매우 제한된 정보만 보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준호는 루프의 존재, 박수연의 정체,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의 이름을 저장했다.

다음 루프에서는 무엇을 저장할 것인가.

정유진의 배신?

증거 AI의 기만?

아니면 김준석의 메시지?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다른 신호였다.

발신인: 증거 AI

음성 메시지.

"형사 이준호. 당신이 요청한 데이터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루프 초기화 전 1분 동안 당신의 위치를 추적했습니다. 루프 003부터 015까지. 결과: 당신은 매 루프마다 같은 위치에서 초기화됩니다. 오전 5시 59분, 강남역 8번 출구 남쪽. 그리고 매번 초기화 직전에 당신의 임플란트에 외부 신호가 접속합니다. 누군가 당신의 뇌에 직접 접근하고 있습니다. 형사, 이것은 당신의 기억을 지배하려는 시도입니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정말 당신의 기억인지, 아니면 누군가 심어준 기억인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음성이 끊겼다.

이준호가 휴대폰을 내렸다. 그 문장이 계속 울렸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손상도 87%.

오후 3시 42분. 루프 016까지 2시간 18분.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강남역 8번 출구 남쪽은 햇빛이 가득했다.

이준호가 임플란트에 손을 올렸다. 뇌 표면 바로 아래. 신경 칩이 심어진 곳.

누군가 오전 5시 59분에 그의 뇌에 접근한다.

그 누군가는 누구인가.

루프 016에서 만나겠다는 김준석인가.

아니면 그를 제거하려는 박수연인가.

아니면 둘 다가 아니라, 그의 기억 자체가 누군가의 창작물인가.

이준호는 손을 내렸다.

강남역 살인 사건의 피해자들을 생각했다. 루프마다 다르게 기록된 신원들. 박미영, 이수진, 최혜진, 김다은, 이나영. 그들은 실제로 죽었는가. 아니면 그들도 루프의 피해자일 뿐, 조작된 이름일 뿐인가.

오후 4시 11분.

강남역 8번 출구 남쪽의 지하 주차장 진입로에서 신체가 발견되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이준호가 일어났다.

피해자는 여성이었다.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얼굴은 이미 경직되어 있었다. 왼쪽 팔에는 작은 문신이 있었다. 검은색 나비 모양. 목에는 목걸이가 남겨져 있었다. 은색 체인에 작은 십자가.

경찰이 현장을 봉쇄했다.

이준호가 시신에 더 가까워졌다. 신원 확인을 위해 주머니를 확인하려던 순간, 그의 임플란트가 울렸다.

오후 4시 29분. 루프 초기화까지 1시간 31분.

메시지. 다시 추적 불가능한 발신인.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하지 마. 그것이 함정이다. 루프 016에서 만나자. 그 전까지 절대 누구와도 접촉하지 말 것. 당신의 기억이 조작되고 있다. 내가 그걸 증명해 주겠다."

이준호가 시신에서 눈을 돌렸다.

현장에 모여든 형사들 중에 정유진이 없었다.

한소현이 현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형! 여기 와."

한소현이 손짓했다.

이준호가 가지 않았다.

대신 강남역을 나왔다. 거리를 걸었다. 목표 없이.

오후 5시 14분.

루프 016까지 45분.

그의 뇌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다. 무언가 흘러나가고 있었다. 기억이었다.

루프 003의 기억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박미영의 얼굴이 잊혀가고 있었다.

루프 004의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이수진이 누구였는지 알 수 없게 되어 가고 있었다.

이준호가 가슴을 쳤다.

손상도 88%.

뇌 손상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다음 루프에서는 기억이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루프 016에서 만날 그 사람은 누구인가.

그가 제시할 '중요한 증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증거가 정말 증거인가, 아니면 함정인가.

오후 5시 47분.

강남역 8번 출구 남쪽.

이준호가 멈춰 섰다.

루프 초기화까지 13분.

그 순간 휴대폰 화면이 깜빡였다.

음성 메시지. 증거 AI에서 다시.

"형사 이준호. 당신을 추적 중인 신호가 5개 있습니다. 국방부 시스템에서 나온 신호입니다. 그들이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루프 초기화 직전에 당신을 제거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당신의 위치는 오전 5시 59분 초기화 지점에서 정확히 반경 200미터 이내입니다. 초기화 신호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음성이 끝났다.

오후 5시 52분.

루프 016까지 8분.

이준호의 임플란트가 울렸다.

마지막 메시지.

발신인: [추적 불가능]

"도망쳐. 지금 당장. 강남역을 벗어나. 그들이 초기화 지점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이준호가 움직였다. 강남역의 반대 방향으로. 거리를 뛰었다.

오후 5시 58분.

루프 초기화까지 2분.

그가 뒤를 돌아봤을 때 어두운 차량이 따라오고 있었다. 검은색 승합차. 번호판이 보이지 않았다.

이준호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 끝에서 또 다른 골목으로. 미로 같은 강남역 주변 건물들 사이를 헤쳤다.

오후 5시 59분.

루프 초기화까지 1분.

그의 임플란트가 울렸다. 초기화 신호. 뇌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신경망이 강제 동기화되는 느낌.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골목 입구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 3명.

이준호는 반대쪽으로 달렸다. 건물 벽을 타고 올라갔다. 옥상으로 향했다.

오후 5시 59분 50초.

루프 초기화까지 10초.

그의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임플란트의 초기화 신호가 뇌를 잠식했다. 신체 제어가 풀려가고 있었다.

옥상에서 그는 넘어졌다.

오후 6시 00분.

눈이 떠졌다.

신경 임플란트의 기동 신호가 울렸다. 손상도 83%.

강남역 지하철역 승강장.

이준호는 일어났다. 주머니를 확인했다. USB가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메모리 칩. 루프 016에서 누군가 남겨둔 것.

이준호가 칩을 꺼냈다.

음성 메시지가 재생되었다.

"루프 016에서 만나지 못했다. 박수연이 너를 찾았다. 다음 루프에서 다시 시도하겠다. 그때까지 이 메시지를 기억해. 당신의 이름은 이준호다. 당신은 형사다. 그리고 당신의 기억은 당신의 것이다. 누군가 그걸 빼앗으려고 한다. 루프 017에서 만나자."

음성이 끊겼다.

이준호가 칩을 주머니에 넣었다.

손상도 83%.

루프 017까지는 24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는 강남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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