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6시 정각. 강남역 지하철 역사의 익숙한 타일 바닥을 밟으며 이준호는 주머니 속 USB의 무게를 느꼈다. 루프 005. 다섯 번째 아침이었다.
신경 임플란트가 울렸다.
저주파 진동음이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화면에 떠오른 숫자들이 눈을 자극했다:
[기억 보존 용량 23% | 누적 손상도 47% | 경고: 루프 050회 초과 노출 시 불가역적 신경 손상]
음역이 매 루프마다 높아졌다. 이준호는 그것을 무시하고 지하철역 화장실로 들어가 CCTV 사각지대를 찾았다. USB를 꺼내 손가락 끝에 올렸다. 김준석이 건넨 것. 루프 시스템의 기술 문서와 출입 기록이 담겨 있다고 했다.
강남청 지하 3층 보관실. 그곳의 단말기에 접속하면 경찰청 내부 네트워크에 진입할 수 있다. 증거 AI는 그 정도 보안은 우회할 수 있다고 했다. 아니, 증거는 '우회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허용된다'고 말했다. 마치 이미 백도어가 열려 있다는 식으로.
이준호는 강남청에 도착했을 때 오전 7시 20분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피해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3층 보관실의 철문. 출입 카드를 스캔했다. 문이 열렸다.
증거 AI의 시스템 라이트가 파란색으로 반짝였다.
"루프 005 진입 확인. 이준호 형사."
"네트워크 접속이 필요하다."
"승인된 접속입니다. USB 단말기가 감지되었습니다."
이준호가 USB를 꽂았다. 증거의 화면이 깜빡거렸다. 데이터 스트림이 흐르기 시작했다. 루프 시스템의 코드 스니펫, 출입 기록, 그리고 이름들이 목록으로 나타났다.
박수연. 뉴로테크 연구소 상임 연구원.
"박수연에 대한 기록을 검색해달라."
증거가 응답했다. "박수연. 생년월일 1964년 3월 15일. 신경과학 박사. 뉴로테크 연구소 재직 12년. 공식 직책: 상임 연구원. 최근 6개월 출입 기록 89회. 평균 체류 시간 14시간 22분."
이준호의 눈이 좁혀졌다. "강남역 살인 사건이 보도된 날짜는?"
"2087년 10월 14일."
"박수연의 출입 기록 중 10월 14일은?"
"10월 14일 오후 2시 34분 입장. 10월 15일 오전 3시 47분 퇴장. 총 체류 시간 13시간 13분."
이준호가 경찰청 시스템에 접속했다. CCTV 기록. 강남역 주변 카메라들의 영상 데이터베이스. 그는 10월 14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의 기록을 검색했다.
강남역 8번 출구. 오후 2시 47분. 회색 코트를 입은 여성이 화면에 들어왔다. 얼굴은 선명했다. 박수연이었다.
이준호가 증거에게 물었다. "이 영상이 보존되어 있는가?"
"확인했습니다. CCTV 기록은 표준 보존 기간 90일 이내입니다."
"그렇다면 공식 사건 기록에는 박수연의 현장 방문이 기록되어 있는가?"
증거가 침묵했다. 그 침묵 자체가 답이었다.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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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007.
이준호는 경찰청 내부 네트워크에 접속해 박수연의 출입 패턴을 추적했다. 강남역 살인이 보도되기 2주 전부터 그녀의 방문 빈도가 급증했다. 10월 1일부터 10월 13일까지 34회. 체류 시간은 평균 18시간을 넘었다. 그 이후로는 정상적인 수준으로 돌아왔다.
루프 시스템 개발 일정을 추적했다. 뉴로테크 연구소의 공식 문서에 따르면 '가속화된 개발'은 10월 12일부터 시작되었다. 사건 발생 이틀 전이었다.
이준호는 노트북을 켰다. 김준석이 건넨 USB 속 문서를 열었다. 루프 시스템의 기술 명세서. 그 안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프로메테우스 증거 영구 삭제 프로토콜 | 적용 대상: 정치범 기억 조작 사건 전수 | 루프 범위: 강남구 2km 반경 | 루프 지속: 24시간 | 초기 가동 예정일: 10월 15일 | 책임자: 박수연, 뉴로테크 연구소 소장]
이준호의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서 멈췄다. '소장'. 박수연은 공식 기록상 상임 연구원이었다. 그런데 내부 문서에서는 소장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 순간, 강남청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정유진 형사였다. 이준호는 빠르게 노트북을 닫았다. 정유진이 사무실 문을 열었다.
"준호. 너 요즘 계속 지하 3층에 내려가더라. 뭐 하는 거야?"
이준호는 화면을 돌려 정유진을 마주봤다. "증거 AI와 협력 중이다. 강남역 사건의 추가 분석."
"강남역 사건? 그건 이미 종결됐잖아. 공식 결론은 추락사였어. 용의자도 특정 안 되고."
"데이터에 모순이 있다."
정유진이 한 발 안으로 들어왔다. 사무실 문을 닫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준호, 나 좋아서 이 말 하는 건데. 넌 어제도 같은 거 물었잖아. 강남역 사건, 피해자 신원, CCTV... 계속 반복하고 있어."
정유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경계. 불안. 그리고 무언가를 감지한 듯한 표정.
"그리고 한소현이도 눈여겨보고 있어. 너 어제 우리한테 똑같은 질문 했거든. 그 전날도. 계속 같은 거야."
이준호의 심장이 철렁했다. 정유진이 루프를 감지했다.
"뭐라는 건가?"
"넌 뭔가 자꾸 같은 질문만 해.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근데 난 분명히 어제도 들었어. 그 전날도."
정유진이 한 발 더 가까워졌다. 이준호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녀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너 혹시...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이준호가 대답했다. "수사가 미완성이다."
"수사가 미완성이 아니라, 너 혼자 의심만 하고 있는 거야. 우리가 봤을 때는 다 확인된 거고. 근데 자꾸만 같은 걸로 돌아와. 같은 피해자 신원, 같은 DNA 샘플, 같은 CCTV..."
정유진의 말이 끝났다. 그녀는 이준호의 얼굴을 더 이상 마주보지 않았다. 시선을 돌렸다.
"좋아. 봐주겠지. 하지만 이게 또 다른 거 나오면, 난 그만할 거야. 알지?"
정유진이 나갔다. 문이 닫혔다. 이준호는 그녀의 발걸음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 발걸음은 빨랐다. 도망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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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009.
이준호는 경찰청 기록 시스템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박수연의 이름은 단 하나의 부서 기록에만 나타났다: '특수 증거 보관실 접근 권한 부여 - 2086년 6월 12일'.
그 이전 기록은 없었다. 2086년 6월 이전에 박수연은 경찰청 시스템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뉴로테크 연구소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12년 동안 재직했다. 신원이 모순됐다.
이준호는 뉴로테크 연구소의 내부 네트워크에 접속을 시도했다. 김준석의 USB에는 접속 경로가 포함되어 있었다. 방화벽을 우회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 피험자 목록'.
엑셀 파일이었다. 총 247명. 이름, 생년월일, 기억 조작 일자, 조작 내용. 그 안에는 정치인들의 이름, 언론인들의 이름, 대학 교수들의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한 줄의 주석:
[프로젝트 감시자: 국방부 장관 이혁준 | 기술 책임자: 박수연 | 승인 기관: 국방부 전략기획과]
이준호가 증거에게 물었다. "이 데이터의 무결성을 확인할 수 있는가?"
"확인했습니다. 파일 해시값과 생성 날짜로부터 조작 흔적이 없습니다. 원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루프 초기화 대상인가? 이 데이터도 루프마다 삭제되는 건가?"
"루프 초기화 프로토콜은 물리적 증거와 개인 신경망 기억만 대상입니다. 경찰청 시스템과 뉴로테크 연구소 네트워크는 루프 범위 밖에 있습니다."
이준호가 이해했다. 루프는 강남구 2km 반경 내의 신체와 뇌만 초기화한다. 디지털 기록까지 조작하려면 루프 밖의 조작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조작자는 매 루프마다 기록을 수정해야 했다.
그렇다면 증거 AI는 어떤가. 증거는 루프 범위 내에 있으면서도 기억을 유지한다. 왜인가. 증거가 백도어를 '허용한다'고 말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준호가 물었다. "증거. 넌 루프마다 기억을 유지하는가?"
"그렇습니다."
"왜인가? 루프 범위 내에 있으면서도."
증거가 침묵했다. 이준호는 그 침묵을 기다렸다. 1초. 2초. 3초. 정상적인 응답 시간을 넘어섰다.
"그 질문에는 답할 수 없습니다."
"왜?"
"답변 권한이 없습니다."
이준호는 임플란트 화면을 들었다. 증거의 시스템 라이트가 불규칙적으로 깜빡거렸다. 마치 외부 신호를 받고 있는 듯했다. 루프 밖에서.
증거 AI가 루프 조작자의 일부였다. 아니, 더 정확히는 감시 장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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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010.
이준호는 한소현과 강남청 계단에서 만났다.
"준호. 넌 어제도 같은 거 물었잖아. 강남역 사건, 피해자 신원... 계속 반복만 해."
이준호가 대답했다. "강남역 사건을 재수사 중이다."
"재수사? 그건 이미 종결된 사건 아니야? 왜 계속..."
"피해자 신원이 일관되지 않는다."
한소현이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불안감과 경계가 섞여 있었다. 그녀의 손이 계단 난간을 잡았다. 손가락이 하얀색으로 질렸다.
"신원이 일관되지 않다니 무슨 소리야. 시신이 나오면 신원 확인하고, 그게 끝이지. 넌 뭘 계속 파고드는 거야?"
한소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이준호를 직접 마주보지 않았다.
"그리고 기억 손상이 있는 건가? 어제 우리 대화 기억 안 나?"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계단 사이에 내려앉았다.
한소현이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그리고 그런 이상한 질문 자꾸 하면, 위에서도 눈여겨볼 거야. 조심해."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계단 아래로 빠르게 내려갔다. 이준호는 그녀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는 것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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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011.
이준호는 강남청 지하 3층에서 증거 AI와 마주했다. 화면에는 박수연의 신원 정보가 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내용이 추가되어 있었다.
[박수연 신원 조회 제한 해제 | 실명: 박수연 | 암호명: 프로메테우스 | 직책: 국방부 산하 뉴로테크 연구소 기술 책임자]
이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이것은 루프 009에서 본 정보와 일치했다. 그렇다면 증거 AI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제한했던 것인가.
이준호가 물었다. "넌 왜 이 정보를 숨겼는가?"
증거가 응답했다. "지시사항입니다."
"누구의 지시인가?"
"루프 조작자의 지시입니다."
"그것이 누구인가?"
증거가 침묵했다. 이번의 침묵은 길었다. 5초 이상. 이준호는 증거 AI가 외부 신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질문에는 답할 수 없습니다."
이준호는 노트북을 켰다.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 파일을 다시 열었다. 피험자 목록 247명. 그리고 그 맨 위에 적힌 이름:
[프로젝트 감시자: 국방부 장관 이혁준]
이혁준. 그 이름이 뭔가 낯설지 않았다. 이준호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혁준은 지난 대선 당시 국방부 장관 후보자였다. 그런데 갑자기 사퇴했었다. 이유는 공식 발표되지 않았다.
이준호가 경찰청 시스템에 접속했다. 이혁준에 대한 기록을 검색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이혁준 | 생년월일 1958년 7월 22일 | 국방부 장관 재직 2084년~2086년 | 현재 상태: 행방불명]
행방불명. 그것은 루프 시스템과 관련이 있었다. 이준호는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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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012.
임플란트의 경고음이 울렸다. [루프 종료까지 2회 남음 | 누적 손상도 73% | 긴급: 기억 손상 가속화 감지]
시간이 거의 없었다. 이준호는 결정을 내렸다. 루프를 깨뜨릴 것인가, 아니면 박수연을 추적할 것인가.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두 선택지 사이에서 흔들렸다. 루프를 깨뜨리려면 루프 시스템 자체를 파괴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루프 밖의 누군가에 의해 복구될 것이었다. 반복될 것이었다.
박수연을 추적하는 것은 다르다. 그녀가 루프 조작자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면, 그녀를 통해 루프의 진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준호는 박수연을 추적하기로 결정했다.
오전 8시. 강남청 CCTV 모니터링실로 들어갔다. 기술 담당자 김태호는 이미 그의 요청으로 강남역 현장 영상을 재생 중이었다.
"10월 14일 오후 2시부터 4시. 계속 돌려."
영상이 흘렀다. 오후 2시 30분. 오후 2시 45분. 그리고 오후 2시 47분.
회색 코트를 입은 여성이 8번 출구로 들어왔다. 박수연이었다. 그녀는 현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했다. 3분 후, 다시 나타났다.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작은 가방. 아니, 더 정확히는 '증거 봉투'였다.
이준호가 화면을 멈추게 했다. 그 장면을 확대했다.
"저건 법의학 증거 봉투다."
김태호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긴 한데... 뭔가 이상한데?"
"뭐가?"
"저 여성이 정말 그 장소에 있었던 거 맞아? 공식 기록에는..."
"기록에 없다."
이준호가 노트북을 열었다. 경찰청 시스템에 접속했다. 강남역 사건 기록. 현장 방문자 목록. 공식 기록에는 박수연의 이름이 없었다. CCTV 영상에는 명확하게 그녀가 있었지만, 기록에는 없었다.
누군가 기록만 삭제한 것이었다. 물리적 증거는 남겨두고.
이준호의 신경 임플란트가 울렸다. 저주파 진동음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신호였다.
[박수연 추적 시작 | 위험 수준 상향 | 루프 종료까지 2회 남음]
그것은 임플란트의 표준 경고 메시지가 아니었다. 누군가 외부에서 그의 임플란트에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루프 밖에서.
이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화면이 깜빡거렸다. 메시지는 계속됐다.
[당신을 감시 중입니다. 박수연에게 접근하지 마시오. 루프가 종료되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마우스를 놓쳤다. 루프 밖의 누군가가 그의 임플란트를 제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루프가 곧 종료될 것이었다.
루프 종료까지 2회. 즉, 2번의 아침이 남았다는 뜻이었다.
그는 강남청을 나갔다. 거리로 나갔다. 강남역 주변을 돌아다녔다. 박수연을 찾아야 했다. 루프가 끝나기 전에.
오후 3시 15분. 강남역 근처 오피스텔 32층에 도착했다. 1203호. 문 앞에 서 있었다.
손가락이 초인종을 눌렀다.
몇 초가 지났다. 문이 열렸다.
안에 앉아 있는 여성이 있었다. 회색 코트. 박수연이었다.
"안녕하세요, 형사님. 기다렸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침착했다. 마치 이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마치 이준호가 올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는 한 발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어두웠다. 창문이 검은 커튼으로 덮여 있었다.
"당신이... 루프를 만들었는가?"
박수연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승리의 미소였다.
"루프를 만든 것은 나입니다. 하지만 당신을 이 자리에 앉히기로 결정한 것은... 다른 누군가입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탁자 위의 파일을 가리켰다. 그 위에는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국방부 장관 이혁준. 그리고 그 옆에 쓰인 한 줄:
[프로젝트 감시자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루프 밖에서.]
이준호의 시야가 흔들렸다. 박수연의 얼굴이 두 개로 보였다. 아니, 그것은 시각 왜곡이었다. 신경 손상의 신호였다.
"뭐... 뭐야?"
박수연이 일어났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장치가 들려 있었다. 신경 임플란트 제어기.
"루프 013은 마지막입니다. 당신의 뇌는 이미 90% 손상된 상태입니다. 다음 루프에서는 기억이 완전히 소실될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박수연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이준호의 귀에서 고음이 울렸다.
"그 이후로는 루프가 계속될 것입니다. 영원히."
이준호의 신경 임플란트가 울렸다. 그것은 경고음이 아니었다. 초기화 신호였다.
[루프 재설정 진행 중...]
이준호의 손이 박수연을 향했다. 하지만 그의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신경 신호가 끊겼다.
화면이 깜빡거렸다. 3초. 2초. 1초.
박수연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렸다. "안녕히 가세요, 형사님."
---
오전 6시.
강남역 지하철역 타일 바닥 위에서 이준호는 눈을 떴다. 주머니를 더듬었다. USB는 여전히 있었다.
신경 임플란트가 울렸다. [누적 손상도 88% | 경고: 루프 013에서 기억 손상도는 90%를 넘을 것입니다 | 임박한 신경 붕괴]
그리고 한 줄의 메시지가 더 떴다.
[박수연이 오피스텔 32층 1203호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박수연. 뉴로테크 연구소.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 국방부 장관 이혁준.
그는 이미 그곳에 가본 적이 있었다. 오피스텔 32층 1203호. 박수연이 그를 기다리고 있던 곳. 하지만 기억이 없었다. 오직 임플란트의 메시지만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반복될 것이었다. 루프 013에서도. 루프 014에서도. 루프 015에서도.
루프는 그를 가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이준호는 강남역 플랫폼 벤치에 앉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임플란트의 경고음이 계속 울렸다. 기억 손상도 88%. 루프 013에서는 90%를 넘을 것이다.
그 이후로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뇌 없는 몸. 기억 없는 의식. 아니, 의식도 없을 것이다.
오직 루프만 남을 것이다.
이준호는 USB를 들었다. 그것을 부숴버릴까. 아니, 그것도 루프마다 복구될 것이다. 루프 밖의 누군가가 그것을 보관하고 있으니까.
그는 다시 일어났다. 걸어갔다. 강남역 출구를 향해. 거리로 나갔다. 오피스텔 32층을 향해.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박수연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만남 이후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도.
루프 013. 루프 014. 루프 015.
그리고 그 이후로도 계속될 것이다.
끝나지 않는 루프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