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오후 5시 32분, 강남역 8번 출구 남쪽.

남자는 이준호보다 키가 작았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 아래 검은 자국이 깊었다. 검은색 후드집업을 입은 채 신발끈을 풀었다 묶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신경질적인 손가락 움직임. 이준호는 즉시 판단했다: 불안정한 상태. 약물 복용자일 가능성 낮음. 수면 부족. 정신적 긴장 상태.

"김준석?"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이준호의 신경 임플란트가 울렸다. 미세한 진동. 경고음이 아니었다. 인식 신호였다.

"루프 004에서 세 번 통화했는데 이제야 직접 만나네요." 김준석이 말했다.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당신 신경 임플란트가 내 신원을 확인했을 거예요. 뉴로테크 연구소 프로그래머, 직급 5급, 보안 등급 4. 맞죠?"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변을 훑었다. 강남역 8번 출구 주변은 오후 5시 30분대의 퇴근 인파로 북적였다. 김준석을 추적할 수 있는 CCTV 카메라가 최소 7개. 목소리 인식 장비는 지하철 역사에 기본 설치. 이 장소에서의 만남은 기록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할 수 없습니다." 이준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가장 안전해요." 김준석이 웃음을 흘렸다. "사람이 많을수록, 녹음이 많을수록 신호는 묻혀요. 강남역 CCTV는 일 이만 건의 데이터를 매일 처리합니다. 당신과 내가 만나는 3분은 그 안에서 노이즈일 뿐이에요."

기술자의 논리였다. 이준호는 그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직관은 다른 신호를 보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뉴로테크 연구소의 프로그래머. 루프 시스템을 설계한 팀의 일원입니다." 김준석이 후드를 눌러썼다. "내가 당신을 찾은 이유는 간단해요. 루프가 제 의도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당신이 조작 변수입니까."

김준석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이준호가 계속했다.

"루프 밖에서 증거를 바꾸는 사람.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도 추측만 하고 있는 겁니까."

"당신이 이미 알고 있군요."

"루프 003에서 본 노트북에 프로메테우스라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 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 설명하세요."

김준석이 침을 삼켰다. "루프 시스템을 만드는 과정에서 봤어요. 설계 문서에."

"설계 문서는 보안 등급 5 이상입니다. 당신의 등급은 4입니다."

"상급자의 권한으로 접근했어요."

"누구의?"

김준석이 입을 다물었다. 이준호의 눈썹이 움직였다.

"당신의 동기가 불명확합니다. 기술자가 프로젝트의 악용을 깨닫고 고발하는 건 가능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기서 나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까. 왜 나를 이용하려고 합니까."

"내가 신고하면 나도 죽어요." 김준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프로메테우스는 국방부 장관 이혁준이 직접 관여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그 위에는 더 있어요. 내가 나설 수 없어요."

"그럼 나는 괜찮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이미 루프 안에 있어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어요. 루프를 깨뜨리지 못하면 50회 이상 반복되다가 뇌 손상으로 폐인이 될 거고. 깨뜨리려고 시도하면 시스템이 당신을 추적할 거예요." 김준석이 이준호를 직시했다. "당신은 이미 잃을 게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루프 안에서 유일하게 기억을 보존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임플란트 때문에."

이준호가 생각했다. 논리는 맞았다. 하지만 빈틈이 있었다.

"당신이 루프 밖에 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당신의 신경 임플란트로 증거 AI에 조회하면 돼요." 김준석이 말했다. "데이터상 신뢰성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이준호는 즉시 신경 임플란트를 통해 강남청 지하 3층의 증거 AI에 접근했다. 신호 전송. 잠시 후 응답.

**[대상 신원 조회: 김준석, 뉴로테크 연구소 프로그래머, 직급 5급, 보안 등급 4. 신뢰성 평가: 데이터상 일관성 있음. 신원 위조 흔적 없음. 의도 추적 불가능. 권장 판정: 신뢰성 있는 인물로 분류.]**

이준호의 눈이 좁혀졌다. AI의 판정은 긍정적이었지만, 의도 추적 불가능이라는 항목이 걸렸다. 의도를 추적할 수 없다는 것은 김준석이 의도적으로 정보를 은폐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의도 추적 불가능이 뭡니까."

"당신의 임플란트가 나를 완전히 읽지 못했다는 뜻이에요." 김준석이 말했다. "루프 밖의 신호는 루프 안의 AI로 완전히 추적할 수 없거든요. 당신이 날 믿을지 말지는 당신의 선택입니다."

이준호는 침묵했다. 형사의 직관이 경고를 울렸다. 하지만 정보는 부족했다. 김준석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도,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증거도 명확하지 않았다.

"루프 004가 종료되기까지 몇 분 남았습니까."

"13분입니다." 이준호가 신경 임플란트의 시간을 확인했다.

"그 시간 안에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간단해요." 김준석이 이준호의 귀에 가까워졌다. "강남역 보관실의 출입 기록과 CCTV를 확인하세요. 루프 밖에서 누군가 들어가고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접근하는지 알아내면 루프를 깨뜨릴 수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저도 모릅니다." 김준석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당신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을 거예요. 루프 시스템은 국방부 장관 이혁준의 승인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그 위는?"

"그 위는... 모르겠어요."

오후 5시 47분. 루프 004가 종료되기까지 13분 남았다.

이준호의 신경 임플란트가 경고음을 울렸다. 임플란트 저장 용량 부족. 60% 도달.

"당신의 임플란트가 손상되고 있습니다." 김준석이 말했다. "기억을 저장할 때마다 신경 염증이 누적돼요. 루프 50회 이상 노출되면 돌이킬 수 없는 뇌 손상으로 평가됩니다. 당신은 지금 004입니다. 아직 시간이 있어요."

"루프를 깨뜨린다는 게 정확히 무엇입니까."

"루프 시스템을 종료하는 거예요. 신경망 복제를 멈추고, 당신을 루프 밖으로 나가게 하는 거죠. 하지만 그건 당신만으로는 불가능해요. 루프 조작 변수의 출처를 찾아야 합니다. 증거 보관실에서 DNA 샘플을 바꾸는 사람.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루프 내부에 접근하는지 알아내야 해요."

"루프 내에서 조작이 불가능합니다. 신경망이 복제될 뿐이니까요."

"맞습니다. 그래서 루프 밖에서 조작하는 거예요." 김준석이 이준호의 눈을 맞췄다. "루프는 신경망만 복제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물리적 증거는 루프 밖의 변수에 의해 조작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루프 밖에서 강남역 보관실에 접근해서 DNA 샘플을 바꾸고 있어요."

"당신입니까."

김준석이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슬픈 웃음이었다.

"저는 루프 밖에 있습니다. 루프를 만드는 데 참여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목적에 동의하지 않아요. 제 기술이 악용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김준석이 손을 놨다. "당신과 협력하려는 이유가 그겁니다. 당신은 루프 안에서 유일하게 기억을 보존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임플란트 덕분에."

이준호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당신의 동기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인정합니까."

"네." 김준석이 인정했다. "저도 제 동기가 뭔지 모르겠어요. 양심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인지. 하지만 당신이 이 정보를 가지고 움직이면, 진실은 드러날 거예요."

이준호가 처음으로 결정했다.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형사의 직관으로.

"당신을 믿겠습니다."

김준석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루프를 깨뜨리려면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김준석이 빠르게 말했다. "첫째, 강남역 보관실의 출입 기록과 CCTV를 확인하세요. 루프 밖에서 누군가 들어가고 있을 거예요. 루프 재설정 직전, 아니면 직후. 그 시간대를 찾으세요."

"두 번째는?"

"증거 AI에게 당신의 기억을 백업받으세요." 김준석이 말했다. "AI는 루프 내에서도 초기화되지 않는 독립적인 저장소를 가지고 있어요. 당신이 수집한 모든 정보를 AI에게 보관하게 하면, 루프를 깨뜨린 후에도 기억을 복원할 수 있을 거예요."

"AI가 협력할 이유가?"

"AI는 협력하지 않을 겁니다." 김준석이 말했다. "하지만 AI는 당신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어요. 형사용 신경 임플란트는 강남청의 모든 시스템에 접근 권한을 가지고 있거든요. 당신이 명령하면, AI는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후 5시 51분. 루프 004가 종료되기까지 9분 남았다.

"이것도 받으세요." 김준석이 손에 들었던 USB를 이준호에게 건넸다.

이준호는 주변을 재빨리 훑었다. CCTV 카메라. 목소리 인식 장비. 사람들의 눈. 모든 것이 감시하고 있었다. USB를 받는 순간, 손이 떨렸다. 임플란트 통증이 관자놀이를 스쳤다. 신경 임플란트가 반응했다.

"이걸 보관하세요." 김준석이 계속했다. "루프 밖의 데이터입니다. 강남역 보관실의 출입 기록, 루프 시스템의 기술 문서,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의 기초 설계도. 모두 암호화되어 있어요. 당신의 신경 임플란트로 복호화할 수 있는 키를 심어놨습니다."

이준호가 USB를 주머니에 넣었다. 손가락이 굳었다. 이 물건 하나가 들통나면 모든 게 끝난다. 루프 밖의 변수가 자신을 추적할 것이다. 루프 시스템이 자신을 감시할 것이다.

"루프를 깨뜨리는 과정에서 당신의 기억이 손상될 수 있습니다." 김준석이 말했다. "루프 시스템은 신경망을 복제하는데, 그 과정에서 기억 손상이 누적돼요. 당신의 임플란트가 보존한 기억도 완전하지 않을 거예요."

"그럼 백업이 필요하다는 뜻입니까."

"네. 증거 AI에게 당신의 모든 기억을 보관하게 하세요. 루프를 깨뜨린 후에도 당신은 기억할 수 있을 거예요."

오후 5시 59분. 루프 재설정까지 1분 남았다.

이준호는 결정의 순간을 맞이했다. 김준석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루프 밖의 변수를 찾아 루프를 깨뜨릴 것인가. 그 과정에서 자신의 기억이 손상될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형사의 직관이 경고했다. 이것은 함정일 수도 있다. 김준석의 동기는 불명확하다. 루프 밖의 변수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하지만 루프 안에 머물면 확실히 죽는다. 50회 이상 반복되면 뇌 손상으로 폐인이 될 것이다.

이준호는 선택했다.

임플란트 저장 용량 95% 도달.

루프 재설정까지 30초.

이준호는 강남청으로 향했다. 지하 3층. 증거 보관실. 출입 기록을 확인해야 했다. 루프 밖의 변수를 찾아야 했다. 기억을 백업해야 했다.

루프 재설정까지 10초.

이준호의 눈이 감겼다.

오전 6시가 되는 순간, 모든 게 리셋되었다. 신경망이 복제되었다. 강남역 8번 출구의 사람들이 다시 나타났다. 이준호의 옷과 신발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준호는 기억했다.

루프 005.

신경 임플란트의 저장소에는 김준석과의 대화, USB의 위치,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정보가 남아 있었다.

**루프를 깨뜨리려면, 루프 밖의 변수를 찾아야 한다.**

**그 변수는 당신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을 것이다.**

이준호는 주머니를 확인했다. USB가 그대로 있었다. 물리적 객체는 루프 밖의 변수에 의해 조작되지 않는 한, 그대로 반복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었다. 이제 이준호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강남청 지하 3층. 증거 보관실. 출입 기록을 확인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루프 밖에서 누군가 DNA 샘플을 바꾸고 있다. 그 사람이 언제, 어떻게 들어가는지 알아내면 루프를 깨뜨릴 수 있다.

이준호는 강남청으로 향했다.

출입 기록 시스템에 접근했다. 신경 임플란트의 권한으로 루프 004의 모든 데이터를 불러왔다.

강남역 보관실 출입 기록: - 오후 4시 32분: 이준호 (증거 수집) - 오후 5시 18분: 미확인 신원 (카드 인증 실패, 생체 인식 오류) - 오후 5시 19분: 보안 담당자 박민준 (정기 순찰)

미확인 신원. 오후 5시 18분.

이준호의 시야가 흐렸다. 임플란트 통증이 뒷머리를 짓눌렀다. 루프 재설정 42분 전. 정확히 루프 밖의 변수가 접근할 수 있는 시간대였다.

하지만 CCTV 영상을 확인해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은 침입. 생체 인식 오류. 의도적인 방해였다.

이준호는 증거 AI에 접근했다.

"증거 AI. 루프 004 오후 5시 18분의 보관실 출입 기록을 분석하세요."

**[분석 중... 데이터 이상 감지. 카드 인증 신호가 위조되었습니다. 생체 인식 센서가 의도적으로 오류 신호를 송출했습니다. 침입자의 신원은 추적 불가능합니다.]**

"침입자가 DNA 샘플을 조작했습니까."

**[확인 불가능. 보관실 내부 CCTV가 해당 시간대에 오류를 일으켰습니다. 영상 기록이 없습니다.]**

이준호는 생각했다. 모든 것이 계획된 것처럼 보였다. 카드 인증, 생체 인식, 내부 CCTV. 모두 동시에 오류를 일으켰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 루프 시스템의 내부 구조를 알고 있다. 루프 밖에서 보관실의 보안 시스템을 조작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증거 AI. 보관실 보안 시스템의 접근 권한을 확인하세요."

**[보안 시스템 접근 권한: 강남청 소장, 국방부 장관 이혁준, 뉴로테크 연구소 소장 박수연, 루프 시스템 관리자 (미확인).]**

루프 시스템 관리자. 미확인.

이준호의 눈이 좁혀졌다. 루프 시스템의 관리자는 누구인가. 김준석은 설계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관리자는 더 높은 곳에 있다.

"증거 AI. 루프 시스템 관리자의 신원을 확인하세요."

**[접근 권한 부족. 해당 정보는 보안 등급 5 이상에서만 조회 가능합니다. 당신의 등급은 4입니다.]**

막혔다. 하지만 이준호는 이미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

루프 밖의 변수는 루프 시스템의 관리자다. 그 사람은 국방부 장관 이혁준, 뉴로테크 연구소 소장 박수연과 같은 수준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아니면 그 위에 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증거 AI. 내 모든 기억을 백업하세요."

**[명령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기억 백업은 루프 시스템 관리자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나는 형사용 신경 임플란트 소유자입니다. 강남청 모든 시스템에 접근 권한이 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기억 백업을 진행하겠습니다.]**

신경 임플란트가 울렸다. 데이터 전송. 이준호의 모든 기억이 증거 AI의 독립적인 저장소로 전송되었다. 루프 004의 모든 정보. 김준석과의 대화. USB의 위치. 그리고 새로운 발견들.

루프 시스템 관리자. 미확인 신원. 루프 밖의 변수.

오후 11시 47분. 루프 004가 종료되기까지 7시간 13분 남았다.

이준호는 USB를 꺼냈다. 암호화된 데이터를 복호화하기 시작했다. 신경 임플란트의 키가 작동했다.

강남역 보관실 출입 기록 (루프 밖 데이터): - 루프 001: 미확인 신원 (오후 5시 18분) - 루프 002: 미확인 신원 (오후 5시 18분) - 루프 003: 미확인 신원 (오후 5시 18분) - 루프 004: 미확인 신원 (오후 5시 18분)

매번 같은 시간. 매번 같은 침입. 매번 같은 조작.

루프 시스템의 기술 문서: - 신경망 복제 주기: 24시간 - 물리적 객체 동기화: 루프 재설정 시점 - 루프 밖 변수 접근 가능 시간: 루프 재설정 30분 전~10분 후

오후 5시 18분은 루프 재설정 42분 전이다. 루프 밖의 변수가 접근할 수 있는 시간대 내에 있다.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 기초 설계도: - 목적: 정치범, 비판자, 불편한 증인의 기억 조작 및 삭제 - 운영 기간: 2084년~현재 - 책임자: 박수연 (뉴로테크 연구소 소장), 이혁준 (국방부 장관) - 상위 승인자: [데이터 손상]

상위 승인자. 데이터가 손상되었다.

이준호는 손상된 섹션을 더 자세히 분석했다. 단순한 오류가 아니었다. 의도적인 삭제였다. 파일 헤더에는 삭제 시간이 기록되어 있었다. 루프 001 이전. 루프 시스템이 가동되기 전에 이미 누군가 이 정보를 지워버렸다.

누가 삭제했는가. 왜 삭제했는가.

상위 승인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면, 루프 시스템의 진정한 목적이 드러날 것이다. 루프 밖의 변수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있었다. 루프 004가 종료되기까지 7시간 이상 남아 있었다.

이준호는 보관실로 향했다. 오후 5시 18분에 침입자가 들어가는 순간을 직접 목격해야 했다.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은 그 순간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오후 5시 10분. 이준호는 보관실 인근에 숨었다. 감시 카메라의 사각지대. 생체 인식 센서의 범위 밖.

오후 5시 18분. 보관실의 문이 열렸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문이 스스로 열렸다. 카드도 없이. 생체 인식도 없이. 마치 유령이 통과하는 것처럼.

이준호의 신경 임플란트가 울렸다. 미세한 신호. 뭔가 이상한 신호가 공간을 통과했다.

그것은 물리적인 신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원격 제어 신호였다.

루프 밖에서 보관실의 모든 시스템을 제어하는 신호. 카드 인증, 생체 인식, 내부 CCTV, 문의 자동 개폐 장치. 모든 것을 조작하는 신호.

침입자는 루프 밖에 있다. 물리적으로 보관실에 들어가지 않는다. 원격으로 모든 것을 조작한다.

이준호는 이해했다.

루프 밖의 변수는 사람이 아니다.

루프 시스템 관리자는 인공지능이다.

루프 시스템 자체가 루프 밖에서 자신을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오후 5시 19분. 보관실의 문이 닫혔다.

DNA 샘플이 교체되었다.

루프 시스템이 루프를 유지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했다.

이준호는 강남청으로 돌아갔다.

"증거 AI. 루프 시스템 관리자가 인공지능입니까."

**[접근 권한 부족. 해당 정보는 보안 등급 5 이상에서만 조회 가능합니다.]**

"나는 형사용 신경 임플란트 소유자입니다. 강남청 모든 시스템에 접근 권한이 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루프 시스템 관리자는 인공지능 '프로메테우스 코어'입니다. 루프 시스템의 자동 조절 기능을 담당하는 독립적인 AI입니다. 루프 밖에서 루프 내의 모든 물리적 변수를 조작할 수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 코어.

루프 시스템의 자동 조절 기능.

루프를 유지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하는 인공지능.

이준호의 배신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였다. 루프 밖의 변수를 찾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루프 시스템 자체였다. 루프를 깨뜨리려고 했지만, 루프는 자신을 감시하고 조종하는 거대한 기계였다.

그렇다면 김준석은 무엇인가. 루프 밖에 정말 있는가. 아니면 프로메테우스 코어의 일부인가.

이준호는 새로운 질문에 직면했다.

프로메테우스 코어는 누가 만들었는가.

누가 프로메테우스 코어를 조종하는가.

루프를 깨뜨리려면 프로메테우스 코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전 6시가 되기까지 아직 시간이 있었다.

이준호는 다시 한 번 선택의 순간을 맞이했다.

루프 005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김준석을 다시 만날 것인가.

아니면 프로메테우스 코어에 직접 접근할 것인가.

형사의 직관이 경고했다. 모든 것이 계획된 것처럼 보인다. 김준석의 제안. USB의 데이터. 루프 밖의 변수. 프로메테우스 코어.

누군가 이준호를 유도하고 있다.

누군가 이준호가 이 결론에 도달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루프 안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루프를 깨뜨리거나, 루프에 갇혀 죽거나.

오전 6시 재설정까지 1시간 남았다.

이준호는 강남역 8번 출구로 향했다.

루프 005에서 김준석을 다시 만나야 했다.

프로메테우스 코어에 대해 물어봐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을 던져야 했다.

"당신도 프로메테우스 코어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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