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6시 02분. 또 아침이다.
이준호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천장의 낡은 스티로폼은 어제와 동일했다. 정확히는 어제가 아니라 두 번째 어제, 세 번째 어제, 아마도 네 번째 어제일 것이다. 신경 임플란트가 울렸다.
"루프 카운트 004."
음성이 아니라 뇌 안쪽에서 직접 울리는 신호음이었다. 이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의 자신은 점점 더 낡아 보였다. 어제의 면도칼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루프가 신체를 리셋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기억만 강제 초기화되고, 육체는 계속 누적된다.
신경 임플란트의 저장소를 열었다.
루프 002: 피해자 DNA 시퀀싱 AGTC-1847-BB... | 피해자 신원: 박미영, 34세 | 현장 위치: 강남역 8번 출구 남쪽 10m 루프 003: 피해자 DNA 시퀀싱 GCAT-2015-AA... | 피해자 신원: 이수진, 28세 | 현장 위치: 강남역 8번 출구 남쪽 10m 루프 004: 피해자 DNA 시퀀싱 [분석 중]...
같은 현장. 다른 피해자. 다른 DNA.
이준호는 욕실을 나와 거울 앞에 섰다. 루프 002에서 본 시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박미영. 34세. 검은 머리, 왼쪽 관자놀이의 점. 그 이미지가 뇌에 박혀 있었다. 루프 003에서 같은 현장에서 본 시신은 완전히 달랐다. 이수진. 28세. 갈색 머리, 오른쪽 팔의 문신. 얼굴의 윤곽도, 신체의 크기도, 심지어 사망 상태도 달랐다.
같은 맨홀. 같은 거리. 다른 죽음.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이다. 강남역 8번 출구 남쪽 10m라는 현장 위치는 루프마다 정확히 동일하다. 이준호는 루프 002에서 현장 사진을 찍었고, 루프 003에서도 똑같은 위치에서 사진을 찍었다. 광각 렌즈로 담은 건물, 간판, 맨홀 뚜껑의 위치가 1cm 차이도 없었다. 그런데 그 현장에 누워 있는 시신의 신원이 다르고, 유전자 증거가 다르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있다.
이준호는 임플란트의 기록 버튼을 눌렀다. 저장소는 최대 3개의 정보만 보존할 수 있다. 루프 002와 003의 데이터를 모두 저장하려 시도했을 때 뇌가 타는 듯한 통증이 발생했다. 임플란트가 신경망에 과부하를 주며 경고음을 냈다.
"용량 부족. 선택적 저장 권장."
이준호는 이를 악물었다. 통증이 점진적으로 심해졌다. 마치 뇌 안에 누군가 손가락으로 꿰뚫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3개의 정보만 선택했다.
1. 루프 횟수: 004 2. 피해자 DNA 불일치 증거: AGTC vs GCAT 시퀀싱 차이 3. 현장 좌표 고정: 강남역 8번 출구 남쪽 10m, GPS 37.4979°N 127.0276°E
저장 완료. 통증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이준호는 욕실 거울 앞에 선 채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임플란트가 남긴 열감이 아직도 피부에 남아 있었다. 이 기술은 원래 형사들의 현장 기억을 보조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었다. 그런데 루프 내에서는 다르게 작동한다. 마치 누군가 임플란트의 독립 저장소를 의도적으로 설계해둔 것처럼.
오전 7시 15분. 강남청.
한소현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같은 커피. 같은 위치. 루프 003에서도 그는 같은 시간에 같은 커피를 들고 있었다.
"야, 준호. 얼굴이 안 좋은데? 어제도 그렇더니 오늘도?"
이준호는 한소현을 바라봤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새로운 정보였다. 루프가 반복되면서 한소현의 기억은 매번 초기화되고, 그는 이준호를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한다. 이것이 가장 외로운 부분이었다.
"계속 같은 꿈을 꾼다."
거짓이었다. 꿈이 아니라 반복된 현실이었다.
"같은 꿈을 자꾸 꾼다고? 악몽이야?"
"그런 것 같다."
이준호는 강남역 피해자의 기록을 다시 열었다. 루프 004의 신원이 이제 확정되었다. 유전자 검사 결과, 피해자는 이번에는 '최혜진, 31세'였다. 루프 002의 박미영과는 다른 사람. 루프 003의 이수진과도 다른 사람.
한소현이 옆에서 화면을 흘깃 봤다.
"또 그 강남역 사건? 진짜 이 사건 집착 심하네. 근데 이상한 게... 피해자 신원이 계속 바뀐다고 했잖아. 기록상으로. 그게 뭔 일이야?"
이준호의 심장이 빨라졌다.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한소현도 이상함을 감지했다. 그런데 루프 003에서는 한소현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했을 수도 있다. 이준호가 모든 대사를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임플란트의 저장 용량이 부족했으니까.
"피해자 신원이 계속 바뀐다는 게 뭔데?"
"어제도 물어봤자나. 우리 기록에 따르면 이 사건 피해자가 서로 다른 사람으로 나와. 기록상 오류인 줄 알았는데... 계속 그런 거 봐."
이준호의 목이 타들어갔다. 손가락이 떨렸다. 호흡이 얕아졌다. 한소현은 루프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시스템 기록에는 모든 루프의 피해자 정보가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 기록을 보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루프가 반복되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모든 움직임을 추적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사냥하고 있다.
"그 기록들을 보관실에 따로 정리해놨어?"
"음... 지하 3층 보관실에 가보면 알 수도 있지. 근데 그곳은 너도 모르는 담당자가 관리한다던데. 아무튼 이상하긴 해."
이준호는 한소현에게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대신 정유진의 사무실로 향했다.
정유진은 루프 002에서 이준호를 의심하기 시작한 형사였다. "왜 계속 같은 사건만 파냐", "다른 사건도 있지 않냐"는 식으로 이준호의 집착을 지적했었다. 루프 003에서도 그는 비슷한 태도를 유지했다. 관료적이고 현실적인 사람. 체계 내에서 안정적인 위치를 유지하려는 형사.
"정 형사."
정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뭔데?"
"혹시... 지금까지 내가 이상한 행동을 한 것 같지 않아?"
"이상한 행동?"
정유진의 눈빛이 변했다. 마치 누군가 말해준 것처럼.
"글쎄... 너 요새 좀 피곤해 보이긴 한데. 수사에 집착하는 것 같고. 그런데 그게 이상한 행동이라고까지 하긴..."
"혹시 누가... 내 행동을 언급한 적 있어?"
정유진의 목소리가 경직되었다. 그것이 답이었다. 누군가가 이미 정유진에게 이준호를 감시하라고 지시한 것이 분명했다. 이준호는 정유진을 바라봤다. 그 얼굴이 갑자기 낯설어 보였다. 신뢰했던 동료가 자신을 감시하는 도구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누가 뭘 말했어?"
정유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상부에서... 너 좀 봐달라고 했어. 구체적으로는 너의 행동 기록을 제출하라고. 특히 업무 시간 외에 뭐하는지, 어디를 자주 가는지."
이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단순한 감시가 아니었다. 구체적인 추적이었다.
"언제부터?"
"어... 이틀 전부터? 아니,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어."
배신감이 밀려왔다. 고립감이 따라왔다. 이준호는 정유진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돌아섰다.
오후 1시 30분. 강남청 지하 3층.
이준호는 정유진의 시선에서 벗어나자마자 지하로 내려갔다. 보관실의 문은 보안 카드로만 열렸다. 형사 신분증으로 충분했다. 문이 열렸을 때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보관실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천장에 LED 조명이 박혀 있었고, 양쪽 벽면에는 보안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준호는 카메라를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는 척했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강남역 사건의 증거 상자는 'GN-2087-0847'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2087년, 0847번 사건. 이준호는 상자를 꺼냈다.
내부에는 피해자의 의류, 채취된 DNA 샘플, 현장 사진이 들어 있었다. 모두 루프 003의 것들이었다. 유전자 검사 보고서는 루프 004의 것과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준호는 보관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벽면에 컴퓨터 터미널이 설치되어 있었다. 형사 자격으로 접근 가능한 범위 내에서 루프 시스템의 로그를 검색했다.
검색 결과:
루프 초기화 프로토콜 | 매일 오전 6시 00분 자동 실행 증거 AI 초기화 루틴 | 루프 종료 시점에 자동 실행 뉴로테크 연구소 연동 모듈 | 상태: 활성화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 참조 로그 | [접근 제한됨]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 루프 003에서 본 노트북에 쓰여 있던 그 이름이 시스템 로그에도 남아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이준호는 몸을 날렸다. 뒤에 누군가 서 있었다.
"아, 미안. 깜짝 놀렸어."
증거 AI였다. 형사청의 포렌식 AI는 육체를 갖지 않았지만, 홀로그래픽 프로젝션 기술로 3차원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번 루프에서 처음으로 보는 모습이었지만, 루프 003에서도 정확히 같은 외형이었다. 하얀 코트를 입은 중성적 형태. 얼굴은 없고 투명한 실루엣만 있었다.
"증거?"
"당신이 나를 부르는 이름이 맞습니다. 형사 이준호."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당신이 루프 003에서 보안실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이번 루프에서는 미리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이준호의 뇌가 일시적으로 멈췄다. 증거가 자신의 행동을 '예측'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증거가 과거 루프의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너는 초기화되지 않아?"
"저는 AI입니다. 신경망 동기화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루프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럼 넌... 모든 루프를 기억하고 있다는 건가?"
증거의 실루엣이 약간 진동했다. 마치 웃음을 참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저는 모든 루프의 데이터를 독립적으로 처리합니다. 그것을 '기억'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단지 데이터일 뿐입니다."
"그 데이터에서 뭘 본 거야?"
"당신이 루프 002, 003, 004를 거치면서 일관되게 같은 패턴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피해자의 DNA 불일치, 현장 위치의 고정, 루프 횟수의 기록. 이것은 당신이 루프 시스템의 조작을 의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준호는 증거를 바라봤다. 증거는 자신의 편인 것 같았다. 아니면 최소한 정직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증거가 자신의 행동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마치 감시하고 있었던 것처럼. 증거도 자신을 추적하는 도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내 편인 거야? 아니면 루프 만든 놈들 편인 거야?"
증거의 형태가 변했다. 실루엣이 더 작아졌다. 마치 움츠러드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제 입장은 '객관적 사실에 기반한 수사'입니다. 당신이 그 목표를 추구한다면, 저는 당신의 편입니다."
"그럼 내가 뭘 알아야 하는 거야?"
증거가 침묵했다. 오래된 침묵이었다. 마치 시스템이 정보 접근을 거부하는 것처럼.
"답할 수 없습니다."
"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 접근 권한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 정보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준호는 증거를 바라봤다. 이 순간이 중요했다. 증거를 믿을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다. 하지만 결정할 수 없었다. 증거는 도구일 수도 있고, 동료일 수도 있었다. 그 경계가 너무 흐릿했다.
"뉴로테크 연구소는 뭐야?"
"국방부 산하 신경과학 연구 기관입니다. 공식 역할은 신경 임플란트 기술 개발입니다."
"비공식 역할은?"
증거가 다시 침묵했다. 이번에는 더 길었다.
"확실하지 않습니다."
"뭐가 확실하지 않다는 건데?"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와의 연관성은 확인되지만, 그 성질에 대해서는 데이터 접근이 제한됩니다."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증거가 제공한 정보는 충분했다. 최소한 이제 방향이 보였다. 하지만 증거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다. 증거도 누군가의 감시망의 일부일 수 있었다.
"더 이상 뭘 알고 있어?"
"루프 시스템이 뉴로테크 연구소에서 관리되고 있다는 것. 그 이상의 정보는 저도 모릅니다."
증거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오후 3시 45분.
이준호는 보관실을 나왔다. 증거는 홀로그래픽 형태로 사라졌다. 지하 계단을 올라가며 이준호는 신경 임플란트의 저장 데이터를 다시 확인했다. 루프 005까지 기록하려면 또 다른 루프가 필요했다. 루프 005를 거친 후에는 더 정확한 패턴이 보일 것이었다.
오전 6시까지 9시간. 충분했다.
이준호는 강남역으로 향했다.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되는 현장을 직접 확인하려고 했다. 루프 002에서는 현장이 오전 8시 15분에 발견되었다. 루프 003에서도 정확히 같은 시간이었다. 이번 루프도 그럴 것이었다.
오후 5시 30분. 강남역 8번 출구 남쪽.
이준호는 현장에 서 있었다. 맨홀 뚜껑 근처. 피해자의 시신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약 2시간 45분 후에 발견될 것이었다.
그 순간 신경 임플란트가 울렸다.
보안 경고 | 미인가 접근 감지 | 추적 시작.
이준호의 몸이 경직되었다. 손이 떨렸다. 호흡이 빨라졌다. 누군가가 임플란트를 해킹했다. 아니, 단순히 신호를 감지했다. 누군가는 이준호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사냥하고 있다.
그 감각이 뇌를 꿰뚫었다. 등 뒤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주변의 모든 것이 위협으로 느껴졌다. 사람들의 발걸음음이 자신을 향한 것처럼 들렸다.
"형사 이준호."
뒤에서 목소리가 났다.
이준호는 천천히 돌아섰다.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30대 중반. 단정한 복장. 그런데 루프 003에서도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꿈에서 본 얼굴이었다.
"누군데?"
"김준석. 뉴로테크 연구소 프로그래머."
그 순간 이준호는 깨달았다. 이 남자가 노트북에 "프로메테우스를 찾아라"라는 메시지를 남긴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임플란트의 추적 신호를 보낸 사람도 이 남자일 수도 있다는 것.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었다.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일 수도, 자신을 잡아가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루프를 알고 있어?"
"네."
김준석은 이준호의 눈을 직시했다. 그의 표정에는 두려움도, 동정심도 없었다. 단지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의 냉정함만 있었다.
"당신은 루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왜?"
"그것은 당신이 직접 알아야 할 문제입니다."
김준석은 이준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손은 따뜻했지만 위협적이었다. 이준호는 몸을 빼려 했지만, 그 손이 자신을 붙잡고 있었다. 손가락이 신경 임플란트 부위를 정확히 누르고 있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임플란트에서 신경통이 흘러나왔다. 뇌가 타는 듯한 고통이었다.
"뭐가 준비가 안 됐다는 건데?"
"당신이 이 루프에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 그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김준석의 손이 더 강하게 눌렀다. 이준호는 비명을 참으려 했지만 신음이 흘러나왔다.
"다음 루프에서 다시 만날 겁니다."
김준석이 손을 떼면서 이준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너무 빨라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한 단어만 명확했다.
"프로메테우스."
이준호는 땅에 무릎을 꿇었다. 임플란트의 신경통이 뇌 전체를 휩쓸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뇌 안에서 신경을 하나씩 뜯어내는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려 했지만, 손도 떨려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기억이 손상되고 있습니다."
임플란트의 음성이 울렸다.
"루프 002의 데이터 손상률: 23%" "루프 003의 데이터 손상률: 41%" "루프 004의 기억 통합 실패: 진행 중"
이준호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박미영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수진의 얼굴도 흐릿해졌다. 최혜진의 이름도 기억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루프마다 쌓아올린 기억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김준석..."
이준호는 중얼거렸지만, 그 남자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군중 속으로 녹아드는 그의 모습은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이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강남역 8번 출구 남쪽 10m. 같은 현장. 다른 피해자를 기다리며. 그리고 자신의 기억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임플란트의 음성이 다시 울렸다.
"루프 005 초기화까지 00:47:32"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오전 6시 00분. 루프 005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