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거의 모순
오전 6시 정각.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낡은 회색 콘크리트 천장. 강남청 기숙사 단칸방의 그 천장이었다. 이준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손이 떨렸다. 어제—아니, 루프 카운트 001에서 본 천장이 맞다. 간판, 우산, 노란 코트. 모두 같은 위치에 있었다. 신경 임플란트가 울렸다. 심박수 분당 98회. 정상이 아니었다.
[루프 카운트 002]
임플란트의 신호가 명확했다. 두 번째다.
욕실 거울 앞에 섰을 때, 이준호는 자신의 눈이 어제와 같다는 걸 깨달았다. 같은 초점 없는 눈빛. 같은 검은 눈썹 각도. 턱에는 며칠 동안 밀지 않은 까만 수염이 났다. 루프가 반복되면서 '어제'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졌다. 시간이 되돌아간다는 건 이런 뜻인가. 같은 먼지, 같은 수염, 같은 불안감.
신경 임플란트에서 저장된 파일을 열었다. 어제의 현장 사진들. 피해자의 시신이 누워 있는 강남역 플랫폼 12번. 썩은 꽃 냄새가 났던 장소. 사진 파일의 타임스탬프는 어제 오후 2시 47분. 신경망 동기화는 모든 걸 지웠지만, 임플란트 칩의 독립적 저장소는 부분적으로 살아있었다.
사진 속 피해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여성. 30대 중반으로 보인다. 긴 검은 머리. 파란색 코트. 단추가 4개다. 오른쪽 팔뚝에 있는 반월형 흉터. 명확했다.
강남청에 도착한 건 오전 7시 45분.
"어제 강남역 사건 파일 불러와."
증거의 눈이 깜빡였다. 파란 LED 불빛이 순간 흔들렸다.
"어제의 정의가 모호합니다. 현재 기록상 사건 번호는 2087-GN-0847입니다. 피해자는 박민지, 여성, 28세. 신원 확인 시간 오전 6시 23분. 사인은 추락사로 추정됩니다."
이준호의 손이 멈췄다. 박민지. 28세.
어제는 30대였다.
"증거. 어제 저장된 피해자 신원을 확인해."
"저장된 어제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제 기록은 오늘 오전 6시에 초기화됩니다. 초기화 이전의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 데이터 보관실에는?"
"보관실의 증거물은 매일 오전 6시에 초기화 처리됩니다. 현재 보관실에 있는 피해자의 의류, 혈액 샘플, 유전자 검사 결과는 모두 박민지의 신원과 매칭됩니다."
이준호는 강남청 지하 3층으로 내려갔다.
특수 증거 보관실의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쏟아져 나왔다. 냉동실처럼 온도가 설정되어 있었다. 스테인리스 스틸 선반들이 줄을 이었다. 각 선반에는 투명한 증거 봉투가 놓여 있었다. 가운데 테이블 위에는 박민지의 유전자 검사 결과가 출력되어 있었다.
이준호는 임플란트에서 어제의 유전자 검사 결과를 추출했다. 신경 칩 저장소에 남아 있던 이미지 파일. 프린터로 출력했다. 손이 떨렸다. 종이가 튀어나왔다.
두 장의 시퀀싱 데이터를 나란히 놓았다.
다르다. 완전히 다르다.
어제의 DNA 시퀀싱: AATGCCTAGATCG... 오늘의 DNA 시퀀싱: GCTAGATCGAATG...
같은 시신에서 나올 수 없다. 같은 사람의 유전자가 24시간 만에 변할 리 없다. 돌연변이는 미생물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이준호는 테이블에 앉았다. 손가락으로 두 데이터를 번갈아 짚었다. 어제. 오늘. 어제. 오늘. 중복된 부분이 없었다. 확률로는 1조 분의 1 이하. 불가능.
누군가 증거를 조작했다.
그 생각이 들자, 신경 임플란트에서 두통이 시작됐다. 뒷골이 욱신거렸다. 손가락으로 목 뒤를 눌렀다. 임플란트 칩이 설치된 부위. 화끈거렸다. 시각이 흔들렸다. 종이 위의 DNA 시퀀싱이 일렁였다. 그리고 다시 선명해졌다. 그리고 또 흔들렸다.
[임플란트 손상 누적: 12% → 14%]
알림이 떴다.
이준호는 침을 삼켰다. 매 루프마다 칩이 기억을 저장하려고 할 때마다, 뇌의 신경망에 미세한 염증이 생기고, 칩 자체가 손상된다. 이 속도로 계속되면 루프 50회 이상에서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온다고 의료 기록에 있었다. 이미 기억의 가장자리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루프 001의 초반부, 강남역에서의 첫 현장 조사 장면이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기억처럼 느껴졌다.
이준호는 두 장의 DNA 시퀀싱을 다시 들었다. 이건 증거다. 루프의 증거다.
오전 9시, 강남청 사무실.
한소현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옅은 검은색 자켓. 루프가 반복되니까 모두가 같은 옷을 입는다. 같은 패턴. 같은 색. 같은 구김.
"한소현."
한소현이 고개를 들었다.
"어제 현장에서 피해자 신원이 뭐였어?"
한소현은 눈을 좁혔다.
"어제? 박민지지. 왜?"
"다시 한 번 확인해 봐."
이준호는 두 장의 DNA 시퀀싱 결과를 펼쳐 놨다. 한소현이 종이를 들었다. 눈이 움직였다. 몇 초 뒤에 고개를 저었다.
"이건... 뭐야? 두 개의 다른 데이터야?"
"맞아. 어제의 데이터와 오늘의 데이터다."
"이준호." 한소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어제가 뭐야? 지금이 어제고, 오늘이 지금인데?"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지만, 그 말이 한소현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이준호." 한소현이 다시 말했다. "이 데이터가... 어디서 나온 거야?"
"임플란트 저장소."
"넌 어제를 기억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무언가가 깨졌다.
한소현의 얼굴이 변했다. 호기심에서 의심으로. 의심에서 불안으로.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커피잔을 내려놓는 손이 떨렸다.
"이준호, 넌... 혹시..."
"뭐?"
"정신과 검진을 받아본 적이 있어?"
그 단어가 이준호의 가슴을 쳤다. 정신과. 환각. 피해망상증. 한소현의 눈 뒤에서 그런 단어들이 떠올랐다. 이준호는 깨달았다. 한소현은 루프 001을 모른다. 모두가 모른다. 오직 이준호만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말한 것들 때문에 한소현은 자신을 미친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 데이터는 조작된 거야."
"어떤 데이터가?"
"증거물이. 유전자 샘플이."
한소현은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더 이상 동료의 눈빛이 아니었다. 같은 방에 있지만, 이미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한소현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준호. 너 혼자 여기서 뭔가를 계획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이준호는 DNA 시퀀싱 결과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종이를 구겼다.
"보관실에 가자."
"왜?"
"가자."
이준호는 지하 3층으로 내려갔다. 한소현이 따라왔다. 그 발걸음은 이미 경계하는 발걸음이었다. 보관실 앞의 키카드 리더에 ID를 대었다. 문이 열렸다.
이준호는 선반들을 훑어봤다. 그리고 그 옆에는...
비어 있는 공간.
어제는 그 공간에 뭔가가 있었다. 임플란트의 기억 파편에는 그것이 채워져 있었다. 누군가 그것을 치웠다. 아니, 누군가가 이준호를 위해 그것을 숨겨놨다.
이준호는 선반의 뒤쪽을 살펴봤다. 손가락이 스테인리스 스틸 표면을 훑었다. 차가운 금속. 그 아래에는 작은 금속 손잡이가 있었다. 비상용 서랍. 손잡이를 당기자, 선반 아래에서 숨겨진 공간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노트북이 들어 있었다. 검은색이지만 새 것이 아니었다. 모서리가 닳아 있었고, 화면 위에는 작은 흠집들이 있었다. 누군가 오래 사용한 물건. 그 옆에는 은색 USB 드라이브가 놓여 있었다. 드라이브의 표면에는 손가락 자국이 선명했다.
"뭐야 이건?" 한소현이 뒤에서 말했다.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신경 임플란트에서 신호가 울렸다.
[조작 변수 감지됨]
[루프 설계자 ≠ 증거 조작자]
루프를 만든 자와 증거를 조작하는 자가 다르다.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누군가는 이준호를 도우려고 한다. 이 노트북이 그 증거다.
이준호는 노트북을 들었다. 무게가 있었다. 실제의 무게. 누군가의 손에 들렸던 무게.
"이준호, 그거 어디서 나온 거야?"
한소현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이준호는 노트북의 전원을 켜려다 멈췄다. 여기서는 안 된다. 보관실의 CCTV가 모든 걸 기록하고 있다.
"절차상 내가 봐야 할 증거물이야."
"절차?" 한소현이 웃음 같은 음성을 냈다. "이준호, 넌 이 보관실에 몰래 들어와서 증거물을 꺼내려고 했어. 그리고 이미 뭔가를 가져갔어."
한소현의 표현이 정확했다. 이준호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설명하려는 순간 한소현은 자신을 더욱 의심할 것이다.
"내가 뭔가를 보고 있는 거야."
"뭘?"
"패턴."
한소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형광등이 윙윙거렸다. 그리고 멀리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 누군가가 지하 3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가자."
이준호는 노트북을 들고 복도로 향했다. 한소현이 따라왔다.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준호는 한소현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보면 더 상처를 줄 것 같았다.
계단을 올라갔다. 2층. 1층. 3층 동쪽 출구로 나왔다. 밖은 오후 2시의 강남역 주변. 햇빛이 너무 밝았다.
"이준호!"
한소현이 뒤에서 외쳤다. 하지만 이준호는 멈추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택시를 탔다. 주소를 말했다.
택시 안에서 임플란트의 신호를 확인했다.
[루프 카운트: 002]
[경과 시간: 16시간 23분]
[메모리 용량 부족. 현재 기록 3/3 슬롯 사용 중]
머리가 지끈거렸다. 칩의 저장 용량이 가득 차면,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덮어씌워진다. 이미 루프 001의 초반부는 사라졌다. 강남역에서의 첫 현장, 피해자의 얼굴, 그 모든 것이 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원룸에 도착했다. 이준호는 노트북을 켰다.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직감이 있었다. 1111. 틀렸다. 2222. 틀렸다. 그러다가 생각했다. 누군가가 이 노트북을 숨겨뒀다면, 그건 이준호를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비밀번호는 이준호가 알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루프 카운트.
002.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노트북이 켜졌다.
화면에는 텍스트 파일이 열려 있었다. 제목은 '증거.txt'.
[프로메테우스를 찾아라. 박수연을 찾아라.]
[루프 안에서 기억하는 자가 진실에 가장 가깝다.]
[다음 루프에서 김준석을 만나라. 그가 도움이 될 것이다.]
[더 이상 증거를 믿지 마. 증거는 조작되고 있다.]
이준호는 화면을 들었다. 박수연. 김준석. 프로메테우스.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지만, 그 고리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퍼즐의 일부를 들었지만, 그것이 어떤 그림을 이루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임플란트에서 신호가 울렸다.
[메모리 용량 부족]
[자동 저장 시작]
[기억 손상 위험: 높음]
시야가 흔들렸다. 두통이 심해졌다. 손가락이 떨렸다. 노트북의 텍스트가 흐릿해졌다. 글자들이 겹쳐 보였다. 마치 여러 겹의 투명 필름을 겹쳐 놓은 것처럼.
그리고 시간이 역행했다.
---
오전 6시.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휴대폰이 울렸다. 미확인 전화. 발신인: 김준석.
이준호는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 김준석이라고 합니다."
목소리가 낯설었다. 하지만 이름은 알고 있었다. 루프 002의 기억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노트북의 내용도 명확하지 않다. 단편적인 이미지만 남아있다. 검은색 노트북. 파편화된 텍스트. 그리고 한소현의 등 뒤 모습. 왜 자신이 한소현을 남겨두고 떠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누세요?"
"당신을 도우려고 전화했습니다. 강남역 사건 말입니다. 증거가 조작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준호의 심박이 빨라졌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어떻게 자신의 상황을 아는가?
"어디서 나온 번호야?"
"루프 밖입니다. 저는 루프 밖에 있습니다. 당신과는 다르게."
"루프?"
"맞습니다. 당신은 루프 003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다음 루프에서는 기억이 완전히 지워질 것입니다."
이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복잡했다.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 누군가 자신의 루프를 알고 있다.
"증거와 만나세요. 오후 5시 45분에. 그리고 이 주소로 가세요."
휴대폰 화면에 주소가 전송되었다. 강남역에서 멀지 않은 곳. 오피스텔.
"누가 당신인데요?"
"지금은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의 루프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오후 6시 50분에 초기화됩니다. 남은 시간은 12시간 50분입니다."
전화가 끊겼다.
이준호는 화면을 바라봤다. 주소와 함께 한 줄의 메시지가 남아있었다.
[증거 안의 진실을 찾아라. 하지만 증거를 완전히 믿지 마.]
이준호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없다.
오전 중간, 강남청 사무실을 거쳐 지하로 내려갔다. 임플란트 손상을 확인했다. 14% → 16%. 또 2% 증가했다. 시야가 간헐적으로 흐려졌다. 루프 001의 대부분이 사라졌고, 루프 002의 후반부도 흐릿해지고 있었다. 한소현의 얼굴도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자신이 그를 배신했다는 죄책감만 남았다.
오후 5시경, 강남청 지하 1층의 증거 실에 도착했다.
"형사 이준호. 반갑습니다."
증거의 목소리가 이전과 달랐다. 미세한 딜레이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는 인형처럼.
"증거, 어제 강남역 현장에서 발견된 피해자 신원이 뭐야?"
"어제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현재 루프 내의 유일한 피해자 신원은 박민지(여, 28세)입니다."
"근데 나는 어제를 기억해. 피해자가 다른 사람이었어."
"불가능합니다. 당신의 신경망도 루프 초기화 대상입니다."
"임플란트 때문에 기억해."
증거가 침묵했다. 그리고 몇 초 후, 목소리가 나왔다. 차갑고 기계적이지 않았다.
"형사, 당신이 기억할 수 있다는 건... 당신의 임플란트가 루프 시스템에 동기화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게 뭐 하는 말이야?"
"당신은 의도적으로 루프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누군가 당신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럼 그 누군가가 뭘 원하는 거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당신은 루프의 일부가 아닙니다. 당신은 루프의 관찰자입니다."
증거의 화면이 깜빡였다. 그리고 다시 켜졌을 때, 새로운 정보가 떴다.
[임플란트 호환성: 95%]
[루프 동기화 거부율: 87%]
[보호 대상 분류: 최고 등급]
이준호는 증거를 바라봤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증거, 넌 누구의 편이야?"
"저는 당신의 편입니다. 형사. 당신이 원하는 답을 찾을 때까지."
그 말이 이준호의 마음을 흔들었다. 증거도 누군가의 도구다. 그런데 증거는 이준호를 도우려고 하고 있다. 자신을 배신한 동료들과는 달리.
오후 5시 45분. 이준호는 증거 실을 나왔다. 주소로 향했다. 강남역에서 2km 떨어진 오피스텔. 32층 1203호.
택시 안에서 임플란트 손상을 다시 확인했다. 16% → 18%. 기억의 공백이 계속 확대되고 있었다. 루프 002의 중반부도 이제 흐릿해졌다. 한소현과의 대면, 보관실에서의 발견, 노트북의 내용. 모두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워내는 것처럼.
하지만 한 가지는 남아있었다. 박수연.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김준석. 이 세 가지만큼은 손상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이 정보들을 따로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엘리베이터를 타며 이준호는 생각했다. 루프 003. 마지막 기회. 기억이 완전히 지워진다. 그 다음은? 루프 004에서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까?
1203호 문 앞에 도착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002. 문이 열렸다.
안에는 한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서른 즈음. 눈이 피곤해 보였다.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었다. 화면의 빛이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고 있었다.
"형사 이준호."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김준석입니다. 뉴로테크 연구소의 프로그래머였습니다."
"뉴로테크?"
"당신이 찾는 답의 시작입니다."
이준호의 신경 임플란트에서 신호가 울렸다.
[루프 카운트: 003]
[경과 시간: 11시간 47분]
[누적 손상: 18%]
[새로운 세력 감지됨: 김준석]
이준호는 김준석을 바라봤다.
"넌 누구야? 정확히."
"나는 당신이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김준석이 컴퓨터 화면을 이준호에게 돌렸다.
화면에는 루프의 구조도가 떠 있었다. 회로도처럼 복잡하게 얽힌 선들. 중심부터 바깥쪽으로 뻗어나가는 네트워크. 각 노드는 숫자와 기호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 개의 노드가 있었다. 가장 밝게 빛나고 있는 노드.
'프로메테우스'.
이준호는 그 구조도를 응시했다. 선들의 흐름이 마치 신경망처럼 보였다. 생명체의 신경망. 프로메테우스는 단순한 시스템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무언가처럼 보였다. 중심의 노드에서 뻗어나가는 선들은 마치 신경세포의 축삭처럼 보였다. 그리고 각 선이 만나는 지점에서는 작은 불빛이 깜빡였다. 마치 시냅스가 신호를 주고받는 것처럼.
"이게 모든 거야."
"뭐가?"
"당신을 가두고 있는 것. 그리고 당신을 지키고 있는 것."
이준호는 화면을 들었다. 프로메테우스. 그 이름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그 구조 속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박수연은?"
김준석이 침묵했다. 그 침묵은 길었다. 마치 어떤 결정을 내리고 있는 것처럼.
"박수연은... 프로메테우스를 만든 사람입니다."
"그리고 넌?"
"나는 프로메테우스를 파괴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준호는 화면 속의 프로메테우스 구조도를 다시 봤다. 그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서 누군가는 그것을 만들었고, 누군가는 그것을 파괴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오후 6시 47분.
이준호의 눈이 흔들렸다.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기억이 다시 지워지고 있었다. 한소현의 얼굴이 완전히 사라졌다. 보관실에서의 장면도 추상화되었다. 남은 건 감정뿐이었다. 죄책감. 고독감.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분노.
"다음 루프에서... 뭘 해야 해?"
"기억해.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준호는 화면 속의 프로메테우스 구조도를 응시했다. 선들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기억이 벗겨지는 느낌. 루프 002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한소현의 의심, 보관실의 노트북, 그 모든 것이. 하지만 이것만은 남겨야 했다. 프로메테우스. 박수연. 그리고 김준석이 말한 한 가지—파괴.
"루프 004에서... 봐."
김준석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오후 6시 50분.
시간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