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할머니의 손길

한겨울 오전, 산 위 납골당 앞이었다.

은혜는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납골당의 돌은 차가워서, 무릎이 아팠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이 추위가 할머니와의 마지막 인사처럼 느껴졌다.

"할머니, 저 왔어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만 움직였다.

납골당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은혜가 알고 있는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폐지를 수거하던 할머니들, 골목 편의점 주인, 세탁소 아주머니, 그 외에도 이름 모를 사람들. 모두 할머니가 도웠던 사람들이었다. 누군가는 할머니가 겨울에 나눠준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누군가는 할머니가 빌려준 돈으로 가게를 차렸다고 했다. 누군가는 할머니가 없었으면 아이를 낳지 못했을 거라고 울었다.

은혜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이 사람들을 모두 기억했을까? 아니다. 할머니는 기억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저 "필요하면 줘"라고만 했다. 폐지를 주우며 모은 옷을 수거하고, 밥을 해주고, 말 없이 그것들을 내밀었다.

"버려진 것도 누군가는 필요로 할 거야."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혜의 귀 속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은혜는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다. 할머니는 옷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았다. 사람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었다. 버려진 사람도, 버림받은 사람도, 누군가는 그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가 되려고 할머니는 매일을 살았다.

은혜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콧물도 흘렀다. 손가락으로 훔쳤다가, 그냥 놔뒀다. 이 추위 속에서 흘리는 눈물이 할머니에게 가는 마지막 인사인 것 같았다.

추도식이 끝났다. 사람들이 하나둘 떠났다. 은혜는 마지막까지 남았다. 납골당 앞에서 한 발도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등을 두드렸다.

"은혜."

은혜가 돌아봤다. 이준호였다.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당신, 할머니 추도식이 있다고 했을 때 말이에요." 이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그 회색 셔츠, 기억하세요? 제가 처음 당신한테 가져갔던 셔츠."

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제 할아버지가 입으셨던 거예요." 이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안쪽에 글씨가 있었죠. 제 할아버지가 써놓은 글씨."

은혜는 그 글씨를 기억했다. 펜으로 투박하게 쓴 글씨였다. '내 손주, 준호야'라고.

"할아버지는 저를 필요로 했어요. 제가 있어야 했어요. 그런데 저는 그 동안 할아버지가 저를 필요로 한다는 걸 몰랐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준호가 눈을 감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에요?"

은혜가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이준호의 질문이 은혜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혔다.

"제 할아버지는 저한테 할머니 옷을 고쳐달라고 했어요. 그건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기억하는 방식이었어요. 당신이 할머니 옷을 손으로 만지면서 할머니를 기억하듯이."

이준호가 은혜를 바라봤다.

"당신도 누군가를 그렇게 기억할 수 있어요. 당신의 손으로. 당신이 필요한 사람이 되는 방식은 그거예요. 할머니처럼."

이준호가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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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실로 돌아가는 길은 길었다.

은혜는 천천히 걸었다. 골목의 눈이 발에 밟혀 소리를 냈다. 까드득까드득. 그 소리가 유일한 세상의 목소리였다.

"버려진 것도 누군가는 필요로 할 거야."

할머니의 말이 계속 들렸다.

그렇다면 나도? 나도 누군가에게 필요할 수 있을까? 아니, 필요한가?

은혜는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하지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희미한 것처럼, 그 질문에 대한 대답도 희미했다.

수선실의 불이 켜져 있었다.

은혜가 문을 열었다. 따뜻한 공기가 나왔다.

박현숙과 정수가 수선실 안에 있었다.

박현숙은 재봉틀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 정수가 서 있었다. 두 사람 앞에는 여러 벌의 옷이 펼쳐져 있었다.

"은혜, 다 왔어?"

박현숙이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었다. 대신 무언가 결연한 표정이 있었다.

"제 남편이랑 얘기했어요. 지난 일 주일간." 박현숙이 천천히 말했다. "제가 항상 가만히 있다고 했죠.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내로만 살다가, 정작 저는 누구인지 모르면서."

박현숙이 재봉틀 앞에 앉았다. 손이 천을 집었다.

"당신이 저한테 해준 말들을 생각해봤어요. 당신은 나를 보고 있었어요. 박현숙이라는 사람을 말이에요."

박현숙의 손이 천을 재봉틀에 넣었다. 바늘이 움직였다. 까다닥. 한 땀씩.

"남편이 깜짝 놀랐어요. 갑자기 제가 '나'를 말하니까. 그 동안 제가 얼마나 자신을 잃고 있었는지 깨달았대요. 그리고..."

박현숙이 손을 멈추고 은혜를 바라봤다.

"제 남편도, 아이들도 말했어요. 엄마가, 아내가 필요하다고. 단지 누군가의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박현숙이라는 사람 자체가."

박현숙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당신도 그래야 해요, 은혜. 당신도 누군가의 손이 아니라, 은혜라는 사람으로서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해요."

은혜는 대답하지 못했다. 박현숙의 말이 이준호의 질문과 겹쳤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메시지였다. 당신은 필요한가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것.

정수가 은혜에게 다가왔다. 아이의 손이 은혜의 손을 잡았다. 말이 없었다. 단지 손을 잡을 뿐이었다.

손가락 끝이 저렸다. 따뜻함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은혜의 목이 메었다.

정수의 손. 그것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은혜는 정수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의 손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은혜 자신이 아니라, 은혜의 능력이 아니라, 그저 은혜라는 사람 자체가.

"추도식은 어땠어?" 박현숙이 물었다.

"할머니 친구분들이 많으셨어요." 은혜가 말했다. "할머니가 도웠던 사람들이."

"그렇겠지." 박현숙이 웃음을 지었다. "당신 할머니는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셨어. 그래서 많은 사람이 와서 할머니를 기억했던 거야."

은혜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당신도 그래야 해. 은혜. 당신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어."

박현숙이 은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

밤이 깊어졌다.

박현숙과 정수가 떠난 후, 은혜는 수선실에 혼자 남았다. 창밖의 거리는 조용했다. 눈이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은혜는 재봉틀 앞에 앉았다. 손님들의 옷들이 탁자 위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은혜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최은미였다. 메시지였다.

"은혜, 다시 생각해 봤어. 당신의 능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아. 단순히 옷을 고치는 것만이 아니라, 감정을 판매하는 거야.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남기고 싶어 해. 당신의 손을 통해서. 그걸 상품화하면 얼마나 큰 돈이 될까? 당신은 지금 뭐 하고 있어? 계속 이 좁은 골목에서 손가락을 까지고 있을 건가? 아니면 세상에 나가서 당신의 능력을 증명할 건가?"

메시지가 길었다. 은혜의 손이 떨렸다. 최은미의 말은 달콤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독이 있었다. 은혜의 약점을 정확히 겨냥한 독.

"그런데 당신은 곧 선택할 수밖에 없을 거야. 지난주 신문사 기자가 수선실에 왔었잖아. 내일 신문에 당신의 사진과 함께 기사가 나올 거야. 당신의 손이 어떻게 일하는지. 그 기사가 나오면, 모든 게 바뀔 거야. 그때가 되면 너무 늦을 수도 있어. 지금 결정해. 할머니처럼 살 건가, 아니면 나처럼 살 건가."

메시지가 끝났다.

내일. 신문이 내일 나온다.

은혜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재봉틀에 손을 올렸다. 바늘이 천을 뚫었다. 까다닥, 까다닥. 재봉틀의 소리가 수선실을 채웠다.

손가락이 바느질을 반복했다. 한 땀, 한 땀.

"버려진 것도 누군가는 필요로 할 거야."

할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와중에 수선실의 문이 열렸다.

"은혜, 미안해. 이 시간에."

통장 할머니였다. 은혜의 할머니의 오랜 친구였다.

그 뒤로 또 다른 할머니들이 들어왔다. 세 명의 할머니가 더. 모두 은혜의 할머니와 함께 폐지를 주우며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우리 할머니가 남겨놓은 게 있다고 해서, 너한테 건네주러 왔어." 통장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들이 보자기를 펼쳤다. 그 안에는 옷들이 가득했다.

색깔 있는 스웨터. 낡은 청바지. 하얀 앞치마. 검은 니트. 분홍 치마.

할머니가 입던 옷들이었다.

"우리 할머니가 이 옷들을 너한테 줄 때까지 잘 간직해달라고 했어." 통장 할머니가 말했다. "너를 위한 거라고."

은혜가 손을 내밀었다. 옷에 손을 대는 순간, 손가락 끝이 저렸다.

따뜻함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목이 메었다. 숨이 멎었다.

할머니의 손이 직접 은혜의 손을 감싸는 듯했다. 할머니가 이 옷들을 입고, 은혜를 안고, 밥을 해주고, 밤새 바느질하던 그 모든 순간들이 한 번에 밀려왔다.

그 속에는 단 하나의 메시지만 있었다.

'너는 버려진 게 아니야. 너는 필요한 아이야. 너는 내가 가장 필요로 했던 아이야.'

은혜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목이 메었다. 몸이 떨렸다.

할머니의 옷들이 은혜의 손 안에서 온기를 발했다. 마치 할머니가 직접 안아주는 것처럼.

"우리 할머니는 너한테 이 말을 꼭 해달라고 했어." 통장 할머니가 은혜의 옆에 앉았다. "버려진 것도 누군가는 필요로 할 거라고.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너라고. 너는 우리 할머니가 가장 필요로 했던 사람이었어."

은혜는 할머니의 옷을 안았다. 그 속에서 할머니의 냄새를 맡았다. 세탁 세제와 겨울 햇빛의 냄새. 그 아래로 흐르는 할머니의 온기.

"그래서 우리 할머니는 지금도 말하고 싶어 해. 은혜야, 너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너는 이미 그런 사람이라고."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수선실을 채웠다. 통장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친구들.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은 은혜에게 다르게 들렸다.

당신은 필요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이미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에요.

은혜는 할머니의 옷들을 가슴에 안았다. 정수의 손 온기와 박현숙의 위로, 그리고 할머니의 사랑이 모두 이 옷 안에 담겨 있었다.

할머니들이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은혜는 할머니의 옷들을 탁자 위에 펼쳤다. 한 장, 한 장.

그리고 천천히 바느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마음으로.

아직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서.

손가락이 천을 꿰었다. 한 땀, 한 땀. 재봉틀의 소리가 수선실을 채웠다.

그 과정에서, 은혜는 깨닫고 있었다.

최은미의 메시지가 자꾸만 떠올랐다. 내일 신문에 기사가 나온다. 은혜의 비밀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감정을 직조하는 손. 그 능력이 공개되면,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찾을 것이다.

그때 은혜는 선택해야 한다.

할머니처럼,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 것인가.

아니면 최은미처럼, 자신의 능력을 팔아 돈을 벌 것인가.

은혜는 할머니의 옷을 다시 내려다봤다. 그 옷들 속에는 할머니의 사랑이 가득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옷들은 이제 은혜의 것이었다. 은혜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혜가 일어섰다. 수선실의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할머니의 옷들을 조심스럽게 상자에 담았다. 그리고 수선실의 뒤편,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겼다.

내일 신문이 나오면, 모든 게 바뀔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옷들만큼은 지켜야 했다. 이것은 할머니의 마지막 선물이자, 은혜의 선택을 위한 증거였다.

휴대폰을 들었다. 최은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당신의 제안은 거절합니다."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은혜의 손가락 끝이 따뜻했다. 할머니의 손길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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