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최은미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흘러나왔을 때, 은혜는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한 번만 해봐. 내가 고른 옷들이야. 당신이 느껴보면 알 거야. 이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

은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선실의 불을 꺼가며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창밖으로 눈이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의 한복판. 저 눈이 녹기까지 아직 몇 주가 남았다.

"내일 가져올게. 당신 수선실에."

전화는 끝났다.

은혜는 재봉틀 앞에 앉았다. 정수의 스웨터는 거의 다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한 땀 한 땀, 할머니의 손길이 담긴 울 섬유를 따라 바늘이 움직였다. 그 옷에서 느껴지는 것은 기다림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 정수가 할머니를 기다리듯이.

은혜의 손은 멈춰 있었다. 최은미의 제안. 거절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목소리는 자꾸 자신 안에서 맴돌까. '한 번만 해봐. 알 거야.' 그 말이 자꾸 반복되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눈은 더 소복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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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후, 최은미는 검은 종이봉투를 들고 수선실에 나타났다. 그 안에는 여섯 벌의 옷이 들어 있었다.

"이건 내가 모은 거고, 이건 내 직원들 거고, 이건..." 최은미는 한 장 한 장 펼쳐 놓으며 설명했다. "당신이 이것들을 느껴보면, 우린 정말 큰일을 할 수 있어. 박현숙한테 일 년에 오백만 원씩 주기로 했고, 이준호한테는 천만 원을 제시했어. 당신은 얼마를 원해?"

은혜는 말하지 않았다. 최은미가 돌아선 후, 그 옷들을 바라봤다. 검은색, 회색, 짙은 남색. 색깔들이 마치 그림자처럼 탁자 위에 누워 있었다.

한 장을 집었다. 검은 가디건. 손가락이 천에 닿는 순간, 무언가 들어왔다.

불안감.

한 장을 더 집었다. 회색 팬츠. 절망감. 그리고 또 다른 옷. 분노. 외로움. 공포. 욕망. 후회.

은혜는 모든 옷을 한 번에 집었다.

세상이 기울어졌다.

색이 빨려나갔다. 마치 누군가 거대한 빨판으로 세상을 빨아당기는 것처럼. 빨간 실타래가 먼저 사라졌다. 그 다음 노란색 재봉틀. 초록색 의자 쿠션. 하나둘씩,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변해갔다.

은혜의 무릎이 꺾였다.

바닥에 앉았다. 손에서 옷이 떨어졌다. 세상은 이제 흑백 사진이 되어 있었다. 오직 검은색과 흰색만 남았다.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공포였다. 이것이 끝인가? 이것이 자신의 능력의 끝인가?

신체가 움직였다. 자동으로. 누가 은혜를 움직이는 것 같았다. 손이 옷을 접었다. 옷장에 넣었다. 재봉틀을 정리했다. 모든 것이 기계적이었다. 감정이 없었다. 오직 동작만 남았다. 인형. 자신은 인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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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날.

정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스웨터가 완성되었는지 묻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은혜는 그 아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보는 것처럼 했지만, 보지 못했다. 말을 걸었다. "스웨터는 내일이에요." 목소리는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음정이 평탄했고, 감정의 결이 사라져 있었다. 정수는 은혜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 아이도 그렇게 배웠을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을.

두 번째 날.

박현숙이 찾아왔다. 새로운 옷을 들고. 검은색 코트였다. 은혜는 옷을 받아 옷장에 걸었다. 박현숙이 무언가 말을 걸었다. 은혜는 대답했다. 대사처럼. 대본처럼. 박현숙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 여자는 은혜의 손을 잡았다. 차갑다고 말했다. 은혜는 손을 빼었다.

세 번째 날.

수선실은 고요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눈은 계속 내렸다. 창밖의 세상은 흰색과 검은색뿐이었다. 은혜는 탁자에 앉아 있었다. 바느질을 했다. 하지만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바늘이 천을 뚫었다. 손가락 끝이 저렸다. 피가 나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감각이 끊긴 손가락 끝에서만 바늘이 천을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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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날, 아침.

문이 열렸다. 통장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은혜를 보자마자 말없이 앉았다. 옆에. 은혜는 할머니의 얼굴을 봤다. 할머니의 주름. 할머니의 눈. 할머니의 입. 모두 흑백이었다. 회색이었다. 할머니는 은혜의 손을 잡았다.

시간이 흘렀다. 눈이 계속 내렸다. 할머니와 은혜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마치 같은 색깔로 물들어 있는 사람과 사람처럼.

할머니가 중얼거렸다. 노래였을까. 기도였을까. 은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할머니가 계속 옆에 있다는 것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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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날, 정오.

은혜의 눈이 떠졌다.

감각이 돌아왔다. 천천히. 먼저 따뜻함이 돌아왔다. 할머니의 손.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할머니의 손. 손가락 마디마디가 살짝 불거진 손. 그 손의 온도가 은혜의 팔뚝까지 흘러들었다.

피부가 반응했다. 손가락 끝부터 팔뚝까지, 따뜻함이 퍼져 나갔다. 한 점, 한 점.

그 다음 색깔.

할머니의 얼굴에 주름이 생겼다. 깊은 주름. 그 주름이 살아 있었다. 할머니의 눈이 다시 보였다. 회색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회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따뜻한 회색이었다. 할머니의 회색.

귀가 깨어났다. 할머니의 숨소리. 창밖의 눈이 내리는 소리. 그 소리들이 하나하나 들려왔다.

창밖을 봤다.

눈이 흰색이었다. 정말 흰색이었다. 처음으로 흰색이 보였다. 하얀 눈. 희고 소복한 눈.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랐다.

은혜의 눈에서 눈물이 났다.

"할머니..."

목소리가 떨렸다. 감정이 돌아왔다. 슬픔이 돌아왔다. 두려움이 돌아왔다. 그리고 사랑이. 할머니의 손길이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자신도 누군가에게 버려지지 않은 존재라는 증명이었다.

할머니가 은혜를 껴안았다. 말하지 않았다. 그냥 껴안았다. 은혜는 할머니의 어깨에서 울었다. 사흘 동안 흘리지 못했던 눈물을 모두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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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간 후, 은혜는 휴대폰을 집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최은미의 번호를 눌렀다.

전화가 울렸다.

"은혜. 어때? 내 옷들 느껐어?"

최은미의 목소리는 명랑했다. 마치 친구에게 이야기하듯이.

"더 이상 거래는 없어요."

은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알았어. 근데 당신이 거절해도 상관없어. 나는 이미 당신의 능력이 뭔지 알았거든. 그리고 당신의 고객들과도 이미 연락했어."

침묵이 흘렀다.

"박현숙한테는 월 오백만 원에 매달 옷을 수선해주기로 했고, 이준호한테는 할아버지 셔츠를 팔아주는 대신 천만 원을 제시했어. 정수는 다르지. 그 아이를 내가 데려가겠어. 당신이 못 해주는 것을 해주겠다고 약속했거든. 누군가를 정말로 돌보는 법. 누군가에게 진짜 필요해지는 법. 당신은 그걸 못 해주잖아."

"뭐라고..."

"당신의 능력은 귀해. 그런데 위험해. 그 위험을 나는 관리할 수 있어. 당신은 못 하지. 그래서 그들은 결국 나한테로 올 거야. 특히 정수는."

전화가 끊겼다.

은혜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이 계속 떨렸다. 색깔들이 다시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아직 아닌데. 아직 감정이 돌아온 지 몇 시간도 안 됐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박현숙이었다.

"은혜야. 최은미가 나한테 연락했어. 더 싼 가격에 옷을 수선해준대. 근데 나는 당신이 좋아. 당신 옆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거절했어. 미안해."

그 다음, 이준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은혜. 최은미가 내 할아버지 셔츠를 팔아준대고 했어. 근데 그건 못 해. 그건 할아버지와 내 이야기야. 그건 팔 수 없어. 고맙고, 미안해."

은혜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이 다시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두려움의 떨림이 아니었다. 따뜻한 떨림이었다.

그러나 최은미의 목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정수는 다르지. 그 아이를 내가 데려가겠어.' 그 말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가슴을 눌렀다.

은혜는 일어나 창문으로 갔다. 창밖을 내다봤다. 골목은 조용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정수가 와야 할 시간이었다. 스웨터를 받으러.

휴대폰을 집었다. 정수에게 전화했다.

"정수? 너 지금 어디야?"

"...은혜 언니. 나 최은미 언니 집에 있어."

은혜의 몸이 굳었다.

"뭐? 왜?"

"최은미 언니가... 나한테 할머니 이야기를 해줬어. 나 혼자가 아니라고. 할머니를 돌보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그리고..."

정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리고 언니를 도와달라고 했어. 언니를 구하는 거라고."

전화가 끊겼다.

은혜는 휴대폰을 들었다. 손가락이 번호판을 누르려다 멈췄다. 최은미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까. 아니면 경찰에 신고해야 할까. 아니면 할머니에게 연락해야 할까.

창밖의 눈이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 그 아래 숨겨진 것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위험들.

은혜는 코트를 집었다. 수선실을 나갔다. 골목의 눈을 밟으며 걸었다. 최은미의 주소를 찾기 위해 휴대폰을 켰다.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멈추지 않았다.

정수를 데려와야 했다.

그리고 최은미를 멈춰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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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에 알록달록한 실타래들이 달려 있었다. 밤의 불빛에 비춰 그것들이 반짝였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 그리고 회색. 할머니의 회색. 통장 할머니가 자주 입던 색깔.

수선실은 비어 있었다. 정수의 스웨터만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완성된 회색 울 스웨터. 누군가를 기다리는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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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는 최은미의 건물 앞에 섰다. 손가락이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

최은미의 목소리가 울렸다.

"저예요. 은혜."

문이 열렸다. 최은미가 웃고 있었다. 그 얼굴 뒤로 정수가 보였다. 아이의 표정은 불안했다.

"은혜. 왔네. 이제 우리 함께 일할 거야."

최은미가 말했다.

은혜는 정수를 봤다. 아이의 눈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

"정수. 나랑 가자."

은혜가 손을 내밀었다.

최은미가 웃음을 멈췄다.

"은혜. 당신이 이 아이를 돌볼 수 없다는 건 당신도 알잖아. 당신은 감정이 너무 많아. 그래서 자꾸 상처 입지. 나는 다르지. 나는 감정 없이 이 아이를 관리할 수 있어. 당신이 못 해주는 것을 해줄 수 있어."

"정수는 감정이 필요해. 관리가 아니라."

은혜가 말했다.

"감정? 감정 때문에 상처 입는 거야. 나는 이 아이를 그런 고통에서 구해줄 거야."

최은미가 정수의 어깨를 잡았다. 정수의 얼굴이 굳었다.

은혜는 한 발 더 들어갔다.

"정수. 넌 감정이 있어야 해. 슬픔도, 기쁨도, 두려움도. 그래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어. 그래야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어."

정수가 최은미의 손을 뿌렸다. 아이가 은혜에게 달려왔다.

최은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신이 이 아이를 빼앗으면, 당신의 능력을 공개할 거야. 당신이 뭘 할 수 있는지 모두에게 알려줄 거야. 그럼 당신은 더 이상 수선실에서 조용히 살 수 없어. 실험실에 끌려가게 될 거야. 당신의 능력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몰려올 거야."

은혜는 정수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괜찮아."

은혜가 말했다.

"내 능력보다 정수가 더 중요해."

둘은 최은미의 집을 나갔다. 골목의 눈을 밟으며 걸었다. 뒤에서 최은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은혜는 돌아보지 않았다.

정수가 은혜의 손을 꼭 잡았다.

"언니. 미안해."

"괜찮아. 이제 괜찮아."

둘은 수선실로 돌아갔다. 창문의 실타래들이 여전히 반짝였다. 탁자 위의 스웨터가 정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혜는 정수에게 스웨터를 입혀줬다. 회색 울. 따뜻한 회색.

"이제 할머니를 찾아야 해."

은혜가 말했다.

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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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 할머니는 집에 있었다. 은혜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할머니는 창밖의 눈을 보고 있었다.

"할머니. 정수를 데려왔어요."

할머니가 돌아봤다. 할머니의 눈이 정수를 찾았다. 아이가 회색 스웨터를 입고 서 있었다.

"할머니."

정수가 작게 말했다.

할머니가 아이를 껴안았다. 말하지 않았다. 그냥 껴안았다.

은혜는 할머니 집의 창문으로 골목을 봤다. 눈이 여전히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겨울 속에서 누군가의 손길이 누군가를 구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손길이 정수를 구하고 있었다. 은혜의 손길이 정수를 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길이 은혜를 구하고 있었다.

창밖의 눈은 계속 내렸다. 하얀 눈. 모든 것을 덮는 눈. 하지만 그 아래서 누군가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은혜는 알았다.

이 겨울도 누군가의 손길로 봄이 될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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