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

정수가 문을 열었을 때, 은혜는 바느질 중이던 손을 멈췄다. 그 아이는 항상 그런 식으로 들어온다—마치 누군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다가, 실제로 열리는 순간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이번엔 달랐다.

정수의 얼굴이 피곤했다. 어깨가 축 처져 있었고, 손에 들린 스웨터는 회색이었다. 은혜가 전에 본 그 스웨터. 엄마가 만들었다던 것. 하지만 손에 쥔 방식이 달랐다. 전에는 마치 자신을 버리려는 마음으로 들었다면, 이번엔 마치 누군가 소중한 것을 맡기는 아이의 손길이었다.

"정수야."

은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스스로도 놀랐다.

"네. 저... 이 스웨터요." 정수가 천천히 다가왔다. "제 할머니가 입던 거예요. 고쳐주실 수 있을까요?"

은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정수가 스웨터를 건넸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은혜의 눈이 감겼다.

따뜻함이 밀려들었다. 할머니의 손가락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것 같은 따뜻함. 그 안에는 기다림이 있었다. 누군가가 돌아올 때까지의 기다림. 아직도 그 누군가를 기다리는, 옷감에 배인 기다림.

은혜의 손가락이 떨렸다.

"왜 이 옷을 갖고 왔어?"

"버릴 거였어요." 정수의 목소리가 작았다. "엄마한테 맡겨졌는데... 엄마도 힘들고, 저도 입을 수 없고. 그냥..."

정수가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은혜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은혜의 얼굴에 닿는 순간, 뭔가 변했다. 아이의 눈빛이 달라졌다.

"당신을 보니까..." 정수가 천천히 말했다. "저도 누군가에게 필요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은혜의 손이 멈췄다. 스웨터를 쥔 손가락이 경직되었다. 호흡이 얕아졌다. 아이의 말이 그냥 말이 아니라, 화살처럼 가슴에 박혔다.

'누군가에게 필요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은혜는 자신도 모르게 정수를 바라봤다. 회색 스웨터를 입은 그 아이. 할머니의 손길이 담긴 옷을 들고 온 그 아이가, 자신을 보고 그런 말을 한다고?

눈물이 맺혔다. 은혜는 고개를 돌렸다. 바느질 도구들이 놓인 책상 쪽으로. 그곳에는 어머니의 청바지가 펼쳐져 있었다. 정수의 스웨터 옆에는 박현숙의 검은 원피스가 있었고, 그 아래엔 아직 완성하지 못한 여러 벌의 옷들이 있었다.

모두 버려진 옷들이었다. 모두 누군가의 기다림을 담은 옷들이었다.

그리고 그 옷들을 다시 살려내는 자신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일 수 있다는 말.

은혜가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흘렀다. 그것을 닦지 않고 정수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가 함께 할까? 이 스웨터를 다시 살려내는 거."

"네." 정수가 조용히 대답했다. "네, 좋아요."

수선실 안이 조용해졌다. 은혜는 정수를 위해 낮은 의자를 꺼냈다. 아이가 앉자, 은혜는 스웨터를 펼쳤다. 목 부분의 해어진 실, 소매 끝의 작은 구멍, 앞자락의 얼룩. 모두 시간의 흔적이었다.

"여기부터 시작할까?" 은혜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천천히."

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혜가 재봉틀 위에 스웨터를 올렸다. 발판을 밟자 익숙한 기계음이 울렸다. 한 땀, 한 땀. 은혜의 손이 움직였다.

정수는 그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 손이 자신을 다시 만드는 것처럼.

"언제쯤 끝나요?"

"글쎄." 은혜가 대답했다. "내일쯤? 모레쯤? 계절이 바뀔 때쯤이면 돼. 괜찮아?"

"네. 괜찮아요."

정수가 다시 올 거라는 것을 은혜는 알았다. 매일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시간이 흘렀다. 은혜는 계속 바느질했다. 정수는 옆에서 지켜봤다. 창밖으로 해가 저물었다. 수선실의 불이 켜졌다. 알록달록한 실타래들이 창에 비치며 골목에 색을 드렸다.

"다 됐어요?"

정수가 물었다. 은혜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많이 남았어. 다음에 와."

"약속이에요?"

"약속이야."

정수가 일어났다. 문을 열려 했다가 멈췄다. 돌아서서 은혜를 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웃었다. 그 웃음이 은혜의 가슴을 또 한 번 울렸다.

정수가 나간 후, 은혜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손에 든 스웨터를 바라봤다. 할머니의 손길이 담긴 옷. 그리고 정수의 약속이 담긴 옷. 이제 그것은 버려진 옷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다림이 담긴 옷이 되었다.

은혜는 스웨터를 조심스럽게 옷걸이에 걸었다. 어머니의 청바지 옆에. 박현숙의 검은 원피스 옆에.

문이 열렸다.

은혜의 얼굴이 굳었다. 최은미가 들어왔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손에 가득 옷을 들고 있었다. 여러 벌. 검은색, 회색, 검은색. 모두 낡은 옷들이었다.

"은혜." 최은미가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봤어?"

"뭘."

"내 제안."

최은미가 옷들을 탁자 위에 펼쳤다. 옷감이 부스럭거렸다. 은혜의 눈가가 떨렸다. 각각의 옷에서 감정이 느껴졌다. 절망, 외로움, 분노. 한 번에 너무 많은 감정.

"이 옷들 봐줄 수 있어?" 최은미가 계속 말했다. "당신이 이 옷들을 분석해주면, 나는 그걸 바탕으로 스토리를 만들어. 누가 입던 옷인지, 어떤 기억이 담겨 있는지, 그걸 팔면 돼.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좋아해. 당신은 수수료를 받고."

"아니야."

은혜가 바로 대답했다.

"뭐가 아니야? 돈이 문제야? 내가 더 줄 수 있어."

"아니다."

은혜가 일어났다. 최은미의 옷들을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감정이 계속 밀려들었다. 누군가의 절망. 누군가의 외로움. 그것들을 상품으로 만들라고?

"왜 아니야? 당신은 이미 하고 있잖아." 최은미가 다가왔다. "사람들한테 옷을 고쳐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걸 돈으로 받는 게 뭐가 나빠?"

"다르다."

"뭐가 달라?"

은혜가 최은미를 바라봤다. 그 여자의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감정이 없었다. 옷에 담긴 누군가의 기억도, 누군가의 절망도 보지 않는 눈.

"여기 오는 사람들은 자신의 옷을 버리려는 게 아니야." 은혜가 천천히 말했다. "자신의 감정을 누군가에게 맡기려는 거야. 그걸 다시 돌려받으려는 거야."

"그래서?"

"그래서 그건 팔 수 없는 거야."

최은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공허했다. 은혜는 고개를 돌렸다. 최은미의 옷들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당신 착각하고 있어." 최은미가 말했다. "당신의 능력은 특별한 게 아니야. 그냥 사람들이 당신을 믿을 뿐이야. 내가 다른 사람을 데려와도 된다는 거 알지?"

은혜의 손이 떨렸다.

"당신의 능력을 세상에 알리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알아?" 최은미가 계속했다. "SNS 한두 개 포스팅이면 돼. 당신 같은 사람이 여기 있다는 걸 알면, 사람들은 몰려올 거야. 돈도 벌고, 유명해지고. 나는 당신을 도와주는 거야."

"그건 도움이 아니야."

은혜가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목소리를 높인 것이.

"그건 뭐야?"

"파괴야."

최은미의 웃음이 멎었다. 은혜가 계속 말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이 가게를 찾는 건 자신의 감정을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야. 그런데 만약 이게 유명해지고, 돈이 되고, 상품이 되면? 그럼 이건 더 이상 그런 곳이 아니야."

은혜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야. 당신은 그걸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최은미가 은혜를 노려봤다. 그 눈에는 처음으로 감정이 보였다. 분노였다.

"알겠어. 그럼 이 옷들을 가져가야겠네." 최은미가 손을 뻗었다.

은혜가 빠르게 탁자를 밀었다. 최은미의 옷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은혜와 최은미가 마주봤다. 한 템포의 침묵.

"조금 있으면 후회하게 될 거야." 최은미가 말했다.

"아니야."

은혜가 단호했다.

최은미가 돌아섰다. 문을 열며 중얼거렸다. "당신의 능력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나뿐만 아니야. 곧 알게 될 거야."

문이 닫혔다.

은혜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에 흩어진 옷들을 봤다. 절망, 외로움, 분노. 모두 누군가의 감정이었다. 그것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은혜는 천천히 몸을 굽혔다. 하나하나 집어올렸다. 조심스럽게. 마치 누군가를 일으켜세우듯이. 옷들을 정리했다. 옷걸이에 걸었다. 정수의 할머니 스웨터 옆에. 박현숙의 검은 원피스 옆에. 어머니의 청바지 옆에.

그리고 천천히 한 걸음 물러섰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 눈이었다. 하얀 눈이 골목을 소복이 덮고 있었다. 은혜는 그 풍경을 봤다. 버려진 것들도, 버린 것도 모두 같은 눈 아래 누워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들을 다시 필요로 할 거라는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은혜는 손을 모았다. 가슴 앞에서.

그 순간, 창밖의 눈이 더 소복이 내렸다. 옷걸이에 걸린 옷들이 희미한 불빛에 비쳤다. 각각의 옷이 가진 색깔이 드러났다. 회색, 검은색, 파란색, 흰색. 모두 다른 색이었고, 모두 같은 따뜻함을 담고 있었다.

은혜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번엔 슬픔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 그렇다면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말.

은혜는 재봉틀 앞으로 다시 앉았다. 정수의 할머니 스웨터를 다시 펼쳤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한 땀, 한 땀. 그 손이 비로소 자신의 손인 것 같았다. 누군가를 위한 손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손. 자신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손.

밤이 깊어졌다. 수선실의 불은 계속 켜져 있었다. 알록달록한 실타래들이 창에 비쳤다. 그리고 그 불빛 아래, 은혜는 계속 바느질했다.

정수는 내일 올 것이다. 모레도 올 것이다. 그리고 은혜는 그 아이를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최은미의 말도 떠나지 않았다. '당신의 능력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나뿐만 아니야.'

은혜의 손가락이 멈췄다.

창밖으로 눈이 계속 내렸다. 하얀 눈이 골목을 덮으며,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누군가는 자신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 수선실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은혜는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정수가 들어온 것은 오후 세 시쯤이었다.

은혜는 정수의 발소리를 들었을 때 처음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발소리가 주저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도, 작은 발걸음으로 안쪽으로 들어올 때도. 마치 이곳이 자신의 집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안녕하세요."

정수가 인사했다. 평소처럼 작은 목소리였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눈이 밝았다.

은혜는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정수는 양손으로 낡은 스웨터를 들고 있었다. 회색이 바랜 것. 실이 여기저기 풀려나온 것. 하지만 분명히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입었던 것.

"이건... 제 할머니가 입던 스웨터예요."

정수가 스웨터를 건넸다. 은혜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손가락이 천에 닿는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

따뜻함이었다. 하지만 그냥 따뜻함이 아니었다. 기다림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천 한 올 한 올에 박혀 있었다. 할머니가 손자를 기다리며 입던 스웨터. 손자가 올 때까지 무언가 해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것.

은혜의 눈이 촉촉해졌다.

"고쳐주실 수 있나요?"

정수의 목소리가 물었다. 은혜는 천천히 스웨터를 탁자에 펼쳤다. 소매가 헤져 있었다. 목 부분도 늘어나 있었다. 왼쪽 주머니 위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할머니가 많이 입었던 흔적들이었다.

"충분히 고칠 수 있어."

은혜가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며칠 있으면 돼."

정수가 옆에 앉았다. 은혜가 스웨터를 다시 집어들 때, 정수도 함께 보고 있었다. 어린 손가락으로 구멍을 가리켰다.

"할머니가 여기서 자주 손을 넣어요. 뭔가 자꾸 만지작거리셨어."

"그렇구나."

은혜가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그 구멍을 손가락으로 다시 만져봤다. 묵직한 감정이 전해졌다. 할머니가 외로워할 때마다 손을 넣던 그 주머니. 무언가를 찾던 손. 찾지 못해 계속 만지작거리던 손.

은혜는 고개를 들었다.

정수는 은혜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에는 뭔가 새로운 것이 떠있었다.

"당신을 보니까..."

정수가 말을 시작했다. 천천히. 마치 처음 하는 말인 것처럼.

"저도 누군가에게 필요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은혜의 손가락이 멈췄다.

"무슨..."

"당신처럼."

정수가 계속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은 여기 있고, 사람들이 와요. 옷을 가지고. 그리고 당신이 고쳐주니까, 사람들이 다시 와요. 당신이 필요해서. 그래서..."

정수가 스웨터를 만졌다.

"저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필요할 수 있을 것 같아. 당신을 보니까."

은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 몰랐다. 감정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슬픔도 아니고, 기쁨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 둘을 함께 안고 있는 뭔가였다. 설렘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름을 가진 것일까.

"고쳐달라고 해도... 돼?"

정수가 묻었다. 마치 거절당할 준비를 한 것처럼.

"응. 물론이지."

은혜가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며칠 있으면 돼. 할머니를 다시 입을 준비를 해주고 있을 테니까."

정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모습이 은혜의 가슴을 친다. 버려진 아이라고 생각했던 그 얼굴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밝아지는 모습.

정수는 한동안 더 옆에 앉아 있었다. 은혜가 바느질을 시작하자, 정수도 그것을 지켜봤다. 바늘이 천을 관통할 때마다 정수의 눈이 따라갔다. 마치 그것이 마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정수가 일어섰다.

"다시 와도 돼요?"

"응. 언제든."

은혜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너는 여기서 필요한 사람이야."

정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기쁨이었다. 그 아이는 문을 열고 나갔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은혜는 정수가 떠난 후에도 한동안 바느질을 멈추지 않았다.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마음은 어디론가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그 순간, 수선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최은미였다. 이번엔 옷을 여러 벌 들고 있었다. 검은색 정장, 흰색 셔츠, 회색 팬츠. 모두 낡고, 모두 누군가의 감정이 묻어 있을 것 같은 것들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이것들을 봐주고 싶어요."

최은미가 옷들을 탁자에 내려놨다. 은혜는 고개를 들었다. 최은미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조금 더 부드러웠다. 마치 친구처럼.

"이 옷들을 한 번에 봐줄 수 있어요? 당신의 능력으로 이 옷들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은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최은미가 계속했다.

"내가 당신을 도와주고 싶어. 당신의 능력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게. 그럼 당신도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지 않아?"

"아니야."

은혜가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는 돈이 되는 곳이 아니야. 감정을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야. 그런데 만약 이게 유명해지고, 돈이 되고, 상품이 되면? 그럼 이건 더 이상 그런 곳이 아니야."

은혜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야. 당신은 그걸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최은미가 은혜를 노려봤다. 그 눈에는 처음으로 감정이 보였다. 분노였다.

"알겠어. 그럼 이 옷들을 가져가야겠네."

최은미가 손을 뻗었다.

은혜가 빠르게 탁자를 밀었다. 최은미의 옷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은혜와 최은미가 마주봤다. 한 템포의 침묵.

"조금 있으면 후회하게 될 거야."

최은미가 말했다.

"아니야."

은혜가 단호했다.

최은미가 돌아섰다. 문을 열며 중얼거렸다.

"당신의 능력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나뿐만 아니야. 곧 알게 될 거야."

문이 닫혔다. 은혜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에 흩어진 옷들을 봤다. 절망, 외로움, 분노. 모두 누군가의 감정이었다.

은혜는 천천히 몸을 굽혔다. 하나하나 집어올렸다. 조심스럽게. 마치 누군가를 일으켜세우듯이. 옷들을 정리했다. 옷걸이에 걸었다. 정수의 할머니 스웨터 옆에. 박현숙의 검은 원피스 옆에. 어머니의 청바지 옆에.

그리고 천천히 한 걸음 물러섰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 눈이었다. 하얀 눈이 골목을 소복이 덮고 있었다. 은혜는 그 풍경을 봤다. 버려진 것들도, 버린 것도 모두 같은 눈 아래 누워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들을 다시 필요로 할 거라는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은혜는 손을 모았다. 가슴 앞에서.

그 순간, 창밖의 눈이 더 소복이 내렸다. 옷걸이에 걸린 옷들이 희미한 불빛에 비쳤다. 각각의 옷이 가진 색깔이 드러났다. 회색, 검은색, 파란색, 흰색. 모두 다른 색이었고, 모두 같은 따뜻함을 담고 있었다.

은혜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번엔 슬픔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 그렇다면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말.

은혜는 재봉틀 앞으로 다시 앉았다. 정수의 할머니 스웨터를 다시 펼쳤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한 땀, 한 땀. 그 손이 비로소 자신의 손인 것 같았다. 누군가를 위한 손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손. 자신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손.

밤이 깊어졌다. 수선실의 불은 계속 켜져 있었다. 알록달록한 실타래들이 창에 비쳤다. 그리고 그 불빛 아래, 은혜는 계속 바느질했다.

정수는 내일 올 것이다. 모레도 올 것이다. 그리고 은혜는 그 아이를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최은미의 말도 떠나지 않았다. '당신의 능력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나뿐만 아니야.'

은혜의 손가락이 멈췄다.

창밖으로 눈이 계속 내렸다. 하얀 눈이 골목을 덮으며,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누군가는 자신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 수선실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은혜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느질을 계속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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