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 직조술의 수선실
밤 열시. 골목 어귀에서 휴대폰 화면을 든 은혜의 손가락이 저렸다. 화면 위의 글자들이 자꾸만 흐릿해졌다 또렷해졌다. 시각이 흐려지는 신호였다. 손님들의 옷을 받으며 쌓인 감정 과부하가 신체에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자신의 수선실 사진 아래 붙은 댓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더나은미래'라는 닉네임의 메시지가 가장 위에 있었다. "이런 컨셉, 요즘 뜬다고 했는데! 상담 한 번 받아보세요. 이 공간, 정말 수익화할 가치 있어요." 손가락이 화면을 누르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새벽 여섯 시 반. 수선실 앞에 누군가 있다는 뜻이었다.
은혜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골목을 빠르게 걸었다.
수선실 문을 열자마자 박현숙이 보였다. 어제 새벽에 검은 실크 원피스를 들고 들어왔던 그 중년 여자.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옷을 들고 있었다. 빨간 드레스. 새틴 소재의 그것은 햇빛을 받으면 산호처럼 반짝일 법한 색이었다.
"어제는 정말 감사했어요." 박현숙이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제와는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긴장? 아니면 희망? "이거, 봐줄 수 있을까요?"
은혜는 빨간 드레스를 받아들었다. 손에 닿는 순간, 색깔이 그녀의 시야를 붉게 물들었다. 설렘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 누군가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 한때 누군가는 이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섰을 것이다. 얼굴에 핏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 옷이 자신을 다시 만들어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은혜는 드레스를 내려놓고 박현숙을 바라봤다. "이 옷을 입던 날은 어땠어요?"
박현숙의 입이 열렸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두 번의 시도 끝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입었던 날을 기억할 수 없어요."
은혜는 그 말의 의미를 천천히 이해했다. 이 옷을 입었을 때 자신이 누구였는지, 무엇을 원했는지를 박현숙은 잊어버렸다는 뜻이었다. 아니, 애초부터 알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더 컸다. 이 빨간 드레스는 누군가가 박현숙이 되어주기를 바랐을 때의 옷. 그러나 박현숙 자신은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은혜는 천천히 박현숙에게 물었다. "계속 버리고 싶은 옷인가요?"
"네." 박현숙의 대답이 빨랐다. "그런데 버릴 수가 없어요. 입으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입고 나면… 여전히 같은 저인 거 있죠. 그래서 자꾸 이 옷을 탓하게 돼요. 내가 이 옷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러면 또 버리고 싶어지고."
은혜는 박현숙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느꼈다. 옷 속의 감정은 읽을 수 있다. 설렘도, 기대도, 절망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을 만든 사람의 상처까지 고칠 수는 없었다. 박현숙이 자신을 버리는 습관을 고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옷을 고쳐드릴게요." 은혜가 말했다. "하지만 옷을 고친다고 해서 다른 게 되는 건 아닐 거예요."
박현숙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뭘 해야 돼요?"
은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저 손에 들린 빨간 드레스를 보았다. 이 옷은 누군가의 설렘을 담고 있었다. 누군가의 변화를 바라는 마음을. 은혜는 그것을 존중하기로 했다.
"일단 앉아 있어도 괜찮습니다."
박현숙은 수선실 한구석의 낡은 의자에 앉았다. 창밖으로 가을 낙엽이 소복이 내렸다. 빨간색, 노란색, 갈색. 계절이 자신을 버리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다시 받아주는 봄의 약속. 은혜는 재봉틀 앞에 앉았다.
드레스의 허리 부분이 헐거워져 있었다. 소매 끝이 해져 있었다. 내피가 벗겨져 있었다. 은혜는 한 땀 한 땀을 놓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빨간 실이 드레스를 따라갔다. 설렘을 다시 정렬하는 작업이었다.
몇 시간이 지났다. 햇빛이 높아졌다. 을씨년스러운 새벽의 수선실이 어느 정도 온기를 되찾았다. 은혜는 마지막 바느질을 마쳤다. 드레스는 새것처럼 빛났다.
박현숙이 일어섰다. 드레스를 들고 광을 향해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 잠깐의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곧 사라졌다.
"얼마예요?" 박현숙이 물었다.
"봄이 오면 함께 입어보시고 그때 정산해도 괜찮습니다."
박현숙의 눈이 흔들렸다. "뭐라고요?"
"봄이 올 때까지 이 드레스를 입을 준비를 하세요. 그리고 봄이 오면 함께 입어보고 나서 계산하셔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은혜가 말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할머니의 말투가 나왔다. 할머니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나중에 돼도 괜찮아. 이웃이 필요한 건 돈이 아니니까.'
박현숙은 한 발 물러섰다. 드레스를 품에 안으며 은혜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뭔가 흔들리는 것이 있었다. 감사인지 불안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감정.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감사합니다." 박현숙이 중얼거렸다.
문을 나가면서 박현숙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은혜는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빨간 드레스가 골목빛에 흔들렸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은혜는 알고 있었다. 박현숙은 여전히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것을. 옷이 고쳐져도 마음은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다면 '봄이 오면'이라는 약속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박현숙에게 닿았을까.
은혜는 재봉틀 옆에 앉았다. 어머니의 청바지가 여전히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주머니 안쪽의 '은혜'라는 글씨. 한 땀 한 땀, 누군가의 손으로 수놓아진 그 글씨를 바라봤다.
어머니도 나를 필요로 했던 걸까?
그 생각이 떠나지 않고 있을 때, 수선실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엔 낡은 셔츠를 들고 온 남자였다. 서른 중반으로 보였다. 얼굴이 딱딱했다. 눈빛이 차갑다. 그의 이름은 이준호였다.
"옷을 고쳐주시나요?" 남자가 물었다. 목소리는 건조했다. 감정이 없었다.
은혜가 셔츠를 받아 들었다. 순간, 손끝이 얼었다. 이 옷은 다르다. 박현숙의 드레스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어머니의 청바지는 미안함과 사랑으로 무거웠다. 그런데 이 셔츠는—
공허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감정을 모두 빼낸 듯.
"특별히 손상된 부분은 없네요." 은혜가 셔츠를 다시 살펴봤다. 정말로 특별히 손상된 게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더 슬펐다. 이 남자는 옷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버려진 것 같아서 옷까지 버리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은혜는 천천히 이준호를 바라봤다. 차가운 눈빛 아래 숨겨진 것들이 보였다. 절망? 아니면 불신? 더 깊은 무언가.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는 마음.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옷일 거 같아요." 은혜가 천천히 말했다.
이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뭘 말하는 거죠?"
"이 셔츠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돈 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준호의 목소리가 더 차가워졌다.
은혜는 그 눈빛을 바라봤다. 차가움 아래에는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절망? 아니면 불신? 아니, 더 깊은 무언가.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는 마음.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걸 어떻게 증명받고 싶으세요?" 은혜가 물었다.
이준호가 멈췄다. 그 차가운 눈이 흔들렸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나중에 정산해도 됩니다." 은혜가 말했다.
이준호는 한참을 바라봤다. 그 다음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다른 데서 고쳐주겠습니다."
"잠깐—" 은혜가 손을 들었다. "당신은 옷이 필요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걸 느끼고 싶으신 거 같아요. 그런데 그걸 옷으로 증명받으려고 하니까 자꾸 거절하시는 거 아닐까요?"
이준호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 차가운 눈이 은혜를 향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미 무언가 깨진 것 같았다.
"당신도 누군가에게 필요해지고 싶으세요. 그런데 그걸 받아들이는 게 무서운 거죠. 만약 필요하다는 걸 받아들이면, 버려질 때의 상처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이준호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셔츠를 바라봤다.
"이 셔츠를 고쳐놓겠습니다." 은혜가 다시 말했다. "당신이 준비될 때까지."
이준호는 한참을 서 있다가 문을 나갔다. 은혜는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여전히 차갑고, 여전히 외로워 보였다. 하지만 무언가 다른 것도 있었다. 아주 작은, 거의 보이지 않는 무언가. 혹시 희망이었을까.
은혜는 셔츠를 재봉틀 옆에 놓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준호의 거절은 은혜의 거절이기도 했다. 그의 공허함을 감지했으면서도, 은혜는 그것을 채워주지 못했다. 옷만 고칠 수 있을 뿐. 그것이 은혜의 한계였다.
누군가에게 필요해지고 싶다. 그것이 이 남자의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을 외면한 것은 은혜였다. 은혜는 자신을 물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필요한가. 할머니에게는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 은혜가 누군가에게 필요해질 수 있을까.
수선실이 갑자기 좁아 보였다. 벽에 붙은 옷걸이들, 정렬된 바느질 도구들, 낡은 재봉틀. 모두가 은혜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은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가.
휴대폰이 울렸다. 메시지였다. '더나은미래'라는 닉네임에서.
"안녕하세요! 어제 수선실 사진 봤는데 정말 멋있어요. 혹시 상담 가능할까요? 제가 이 공간을 정말 잘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연락 기다릴게요."
은혜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 순간, 어머니의 청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고쳐진 주머니 안쪽의 '은혜'라는 글씨. 편지.
"고쳐줄 수 있니? 미안해."
그 글씨 위에 은혜는 손가락을 얹었다. 어머니는 무엇이 미안했던 걸까. 은혜를 버린 것? 아니면 버리지 못한 것? 그리고 누구의 미안함이 더 큰 걸까. 은혜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다만 느껴질 뿐이었다. 어머니의 손길이 만든 죄책감이. 그리고 그것을 받아주지 못한 자신의 죄책감이.
그때, 수선실 문이 또다시 열렸다. 이번엔 회색 스웨터를 들고 온 젊은 여자였다. 스무 살 즈음으로 보였다. 얼굴이 창백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엄마가 만들어줬는데…" 여자가 말을 시작했다. "필요가 없어진 것 같아요."
은혜의 손이 멈췄다.
엄마가 만들어준 옷. 그것을 버리려는 누군가.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마치 누군가 은혜의 마음을 들여다본 후 이 여자를 보낸 것처럼.
은혜는 회색 스웨터를 천천히 받아 들었다.
회색 스웨터의 무게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하지만 손끝이 닿는 순간, 은혜는 알았다. 이 옷은 무겁다는 것을. 어머니의 손길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한 땀 한 땀, 누군가를 생각하며 지어진 것들. 그 안에 담긴 것은 사랑만이 아니었다.
죄책감도 있었다.
은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젊은 여자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손가락을 꼬고 있었다.
"이름이 뭐예요?" 은혜가 물었다.
"정수예요."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엄마가 날 버렸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엄마가 만든 이 옷도… 저도 필요가 없어진 것 같아요."
은혜의 손이 떨렸다. 그 떨림이 고스란히 스웨터로 전해졌다. 정수는 그것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은혜의 눈을 봤다. 그 눈빛에는 물음이 가득했다. 혹시 이 사람은 이해할까? 혹시 이 사람도 같은 마음일까?
은혜는 정수를 수선실 안쪽 의자에 앉혔다. 낡은 의자였다. 할머니가 앉던 그 의자.
"엄마가 이 옷을 만들 때 생각했을 거 같아요." 은혜가 천천히 말했다. 회색 스웨터를 두 손으로 펼쳐 들며. "누군가는 이것을 입고 따뜻할 거라고. 누군가는 이것을 필요로 할 거라고."
"그게 뭐 어때요?" 정수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엄마는 나를 버렸잖아요. 옷이 아니라 나를."
창밖으로 가을 낙엽이 소복이 내렸다. 은혜는 그 낙엽을 바라봤다. 버려지는 계절이었다. 여름 옷들이 치워지고, 낡은 것들이 버려지고, 누군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옛것들을 손에서 놓는 계절. 은혜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 계절에 모인 옷들의 이야기를.
"옷은 사람을 대신할 수 없어요." 은혜가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옷이 사람의 마음을 담을 수는 있어요. 엄마가 이 스웨터를 만들 때의 마음처럼."
정수가 눈을 깜박였다. 그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런데 난 그 마음을 받을 준비가 안 돼 있어요." 정수가 중얼거렸다. "만약 받으면, 엄마가 나를 버린 이유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은혜는 정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서 자신을 본다. 어머니의 손길을 받지 못한 자신. 그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
"나도 아직 준비 중이에요." 은혜가 천천히 말했다. "어머니 청바지를 고쳐놨는데, 그 마음을 받을 준비가 안 돼 있어요. 그래도 여기 있어요. 그 옷이."
정수의 눈이 은혜를 향했다. 그 안에는 이제 물음만 남아 있었다.
"봄이 오면 함께 입어보자." 은혜가 천천히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 마음을 받을 준비가 생길 때까지. 그때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정수가 일어섰다. 수선실 창문을 통해 골목의 풍경이 보였다. 낙엽이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그 낙엽 위로 누군가의 발자국이 찍혔다 지워졌다. 모두 버려지는 것 같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다시 필요로 할 수 있었다. 은혜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배웠으니까.
"고쳐주셔서 감사해요." 정수가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지만, 조금은 다르게 들렸다. 마치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의 목소리처럼.
은혜는 정수에게 스웨터를 건넸다. 손을 내밀 때, 손가락이 떨렸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정수가 스웨터를 받아가는 순간, 은혜의 눈물이 흘렀다. 이것이 필요해지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손을 내밀고, 그것이 닿을 때 느껴지는 연결. 그것이 은혜가 할 수 있는 전부였고, 그것이 충분했다.
"받아가세요. 봄이 올 때까지."
정수가 나간 후, 은혜는 회색 스웨터가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관절에서 굴렸다. 허리 위까지 올라오는 피로감. 이미 여섯 시간을 일했다. 어머니의 청바지, 박현숙의 드레스, 그리고 정수의 스웨터. 세 옷이 모두 은혜의 손을 거쳐 가고 있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전화였다. 모르는 번호였다.
은혜가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 최은미라고 해요. 어제 SNS에 올린 사진 봤어요. 정말 좋은 공간이네요." 여자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아래에는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흐르고 있었다. "혹시 지금 시간 되세요? 직접 뵙고 싶은데."
은혜의 손이 멈췄다.
"지금이요?"
"네, 골목 입구에 있거든요. 5분이면 될 것 같은데."
전화는 끊어졌다. 은혜는 수선실을 둘러봤다. 벽에 붙은 옷들, 정렬된 바느질 도구들, 낡은 재봉틀. 모두가 은혜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무엇인지, 누구의 것인지, 왜 자신이 지켜야 하는지.
수선실 문이 열렸다. 여자가 들어섰다. 회색 정장 바지, 검은색 블라우스. 손에는 노트북 가방을 들고 있었다. 얼굴은 밝았지만, 눈빛은 차갑게 주변을 재고 있었다.
"와, 정말 예쁜 공간이네요." 최은미가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말했다. "이런 감성을 상업화하면 정말 잘될 것 같은데. 요즘 이런 빈티지 감성, 재활용 문화 되게 핫거든요."
은혜는 침묵했다.
"저 생각엔 이 공간, 너무 아까워요. 그냥 여기서만 옷 고쳐주고 있으면 안 되고, 온라인으로도 확장하고, SNS 마케팅도 좀 하고, 나아가서는 대량 생산도 가능할 것 같아요. 사실 버려진 옷들 많잖아요. 그런 걸 모아서 고쳐서 팔면—"
"안 됩니다." 은혜가 말했다.
최은미가 멈췄다. 그 눈이 은혜를 향했다.
"뭐가 안 돼요?"
"이 일은 그렇게 하는 일이 아니에요."
"왜 그래요? 돈도 버는데?" 최은미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 아래에는 화가 흐르고 있었다. "당신, 혼자 여기서 뭐 하려고? 이렇게 하면 영원히 작은 가게일 뿐이에요. 버려진 옷을 고쳐주는 게 뭐가 대단해요? 그냥 비즈니스일 뿐인데."
"옷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주는 일이에요."
"이야기?" 최은미가 비웃음을 쳤다. "이야기를 받아주는 게 뭐해요? 돈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은혜가 회색 스웨터를 들었다. 손가락으로 그 헐어 있는 목 부분을 만졌다. 누군가 엄마가 만든 이 옷을 다시 입을 날이 올 거라고 은혜는 말했다. 봄이 오면. 그 약속이 돈이 될 수 있을까. 버려진 것들을 다시 필요하게 만드는 이 일이 상품이 될 수 있을까.
"제가 도와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은혜가 말했다.
최은미의 얼굴이 굳었다. 그 눈빛이 변했다. 부드러움이 사라졌다. 그 아래 숨어 있던 것들이 드러났다.
"알겠어요. 하지만 당신 혼자 이렇게 할 순 없어요." 최은미가 가방을 들었다. 그 손에는 한 장의 서류가 들려 있었다. "이 골목도 재개발 대상이거든요. 정부에서 이미 계획을 세웠어요. 당신이 거절한다고 해도 누군가는 올 거예요. 더 큰 제안을 들고."
최은미는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놨다. 그 위에는 '골목 재개발 사업 안내문'이라는 제목과 함께 도시 계획도가 인쇄되어 있었다. 골목의 현재 모습과 개발 후의 모습을 비교하는 이미지.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골목은 사라진다. 수선실도 지도에서 사라져 있었다.
"생각해봐요. 당신 손에 들려 있는 옷들, 그거 다 처리하려면 몇 년이 걸릴까? 그동안 당신은 뭐 할 거고? 혼자 여기서 죽을 때까지 옷만 고칠 거고?"
그 말이 은혜의 심장을 찔렀다. 사실이었다. 은혜는 손님들의 옷을 받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옷들을 모두 고칠 수는 없었다. 능력의 한계가 있었다. 너무 많은 감정을 한 번에 받으면 며칠간 자신의 감정을 잃고 멍하니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최은미의 말은 그 두려움을 정확히 겨냥했다. 은혜가 할 수 있는 게 정말 이것뿐일까. 혼자 이 골목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옷을 고치는 것뿐일까. 그것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일일까.
은혜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최은미의 협박이 귀를 때렸다. 재개발.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은혜는 알았다. 은혜가 이 일을 포기하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공간을 차지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할머니가 만든 이 수선실을. 이 일을. 은혜의 손이 서류를 집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생각해봐요. 나중에 연락 주세요."
최은미가 나갔다. 수선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가을 낙엽이 내리고 있었다. 은혜는 손에 들려 있는 서류를 바라봤다. 골목이 사라지는 지도. 수선실이 지워지는 이미지. 그 안에 담긴 위협의 구체성.
최은미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재개발. 누군가는 올 거예요. 그렇다면 은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공간을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손을 놓아야 하는가. 그리고 그 선택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선택이 될 수 있을까.
그때, 수선실 벽에 붙은 어머니의 청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고쳐진 그 옷. 주머니 안쪽의 '은혜'라는 글씨. 편지.
"고쳐줄 수 있니? 미안해."
누구의 미안함인가. 어머니는 왜 미안했는가. 은혜를 버렸으니까? 아니면 버리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은혜 자신은 누구에게 미안해야 하는가. 할머니에게? 아니면 자신에게?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누군가에게?
수선실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엔 흰색 셔츠를 들고 온 중년 남자였다. 얼굴은 지쳐 보였다. 손가락 끝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손에는 셔츠 말고도 뭔가 묵직한 것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슬픔이었다.
"이 셔츠, 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입던 옷이에요."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고쳐주실 수 있을까요?"
은혜가 셔츠를 받아 들었다. 손끝이 얼었다. 이 옷은 다르다. 정수의 회색 스웨터도, 박현숙의 빨간 드레스도, 어머니의 청바지도 아니었다.
죽음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 속에는 미완의 관계가 있었다. 아직 나누지 못한 말들. 아직 전하지 못한 사랑. 그것들이 옷 속에 가득했다.
은혜의 눈이 떨렸다. 손에 들린 셔츠가 무거워졌다. 이준호의 거절, 박현숙의 의심, 정수의 상처, 최은미의 협박. 그 모든 것들이 이 죽음 앞에서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필요해지고 싶다는 욕망. 그것이 은혜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그 죽음을 받아내면, 은혜는 누가 될 것인가.
은혜는 천천히 남자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물이 맺혀 있었다. 아직 흘리지 못한 눈물. 아직 할 말이 남은 눈빛.
"아버지가 이 셔츠를 입고 어디 가셨어요?" 은혜가 물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