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한 시가 넘었을 때 은혜는 청바지를 다시 꺼냈다.
휴대폰 화면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댓글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더나은미래'라는 닉네임의 메시지들. 상업화. 가능성. 수익화. 단어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은혜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아래로 밀었다가 멈췄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청바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낡은 청바지는 수선대 위에 펼쳐져 있었다. 어제 밤새 손을 댔던 곳이다. 은혜는 천천히 다가가 청바지의 바지 다리를 들었다. 안쪽 주머니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어두운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 끝이 무언가에 닿았다. 거친 질감. 마치 누군가 작은 바늘로 섬세하게 새겨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은혜가 청바지를 역광에 들어올렸다.
빛이 안쪽 주머니를 비추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그녀는 글씨를 보았다. 아주 작은 글씨로 손으로 수를 놓은 흔적. 한 글자 한 글자가 정성스럽게 새겨져 있었다.
'은혜.'
자신의 이름이다.
은혜의 손가락이 떨렸다.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이 청바지를 만들 때, 이 안쪽 주머니에 자신의 이름을 수놓았다는 뜻이었다. 누구도 볼 수 없는 곳에. 어머니만 알 수 있는 곳에.
그것은 무엇인가. 표시인가. 아니면 기도인가.
손가락은 여전히 청바지 위에 있었다. 이제 그녀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옷이 만들어지던 시절로. 더 멀리. 아주 먼 시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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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은혜는 할머니 손을 잡고 골목을 헤맸다. 여름이었나, 가을이었나. 계절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할머니 손의 온기와 그 손이 집어 올리던 것들이었다.
"버려진 것도 누군가는 필요로 할 거야."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손으로 주운 폐지 위에 할머니의 손이 얹혀졌다. 하얀 손가락이 종이를 쓸어내렸다. 할머니는 버려진 것들을 대할 때 항상 그렇게 했다. 마치 누군가의 얼굴을 쓸어내리듯이.
"우리가 받아주면 된다."
할머니의 집에는 주워온 것들이 가득했다. 누군가 버린 컵, 누군가 버린 옷, 누군가 버린 신발들. 할머니는 그것들을 정갈하게 정렬해놓았다. 그리고 언젠가 그것을 필요로 할 누군가를 생각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린 은혜의 눈에는 할머니만 있었다. 할머니의 손, 할머니의 말, 할머니의 웃음.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려고 하지 않았다.
할머니 옆에만 있으면 충분했다. 할머니가 있으면 자신도 버려지지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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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눈을 떴다. 손은 여전히 청바지 위에 있었다.
수선실 책장 위에 낡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와 어린 은혜가 함께 있는 사진. 할머니는 웃고 있었다. 어린 은혜도 웃고 있었다. 사진 속 배경은 이 수선실이었다. 지금보다 더 어수선했지만, 그래도 이곳이었다. 그리고 사진의 한쪽은 텅 비어 있었다. 누군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은혜는 천천히 청바지 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편지가 다시 만져졌다. 종이는 여전히 따뜻했다. 글씨는 여전히 흔들려 있었다.
'은혜. 이거 고쳐줄 수 있니?'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옷을 고쳐달라고만 했다. 왜 그랬을까.
은혜는 편지를 다시 읽었다. 글씨가 떨려 있었다. 이 떨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은혜는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미안함. 죄책감. 그리고 사랑.
은혜는 청바지를 다시 펼쳤다. 이번에는 더 세심하게. 여기저기 해어진 곳들. 색이 바랜 무릎 부분. 오른쪽 옆주머니의 거의 떨어져 나갈 뻔한 모서리. 모든 것이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손가락이 천에 닿는 순간 세상이 조용해졌다.
어제와는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더 진하고, 더 따뜻하고, 동시에 더 무거웠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팔로, 가슴으로 퍼져나가는 그 감정은 마치 누군가의 숨결 같았다.
검은 색 천 위에 바늘이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규칙적인 리듬 아래 불안감이 깔려 있었다. 누군가가 옷을 만들며 떨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마음이 떨렸다. 그 떨림이 바느질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고르지 못한 땀의 크기. 가끔 삐쳤던 바늘의 궤적. 모든 것이 말해주고 있었다.
*고쳐달라.*
그게 무슨 뜻인지 은혜는 알 수 없었다. 옷을 고쳐달라는 건가. 아니면 자신을 고쳐달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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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 시, 은혜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청바지의 감촉만 계속 느껴졌다. 주머니 안쪽의 손수 놓인 글씨. '은혜'. 어머니의 손이 몇 번을 그었을까. 몇 번이나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수선실로 내려갔다. 계단을 밟는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밤새 닫혀 있던 공간은 차갑고 고요했다. 창밖으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골목의 가로등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
청바지는 여전히 수선대 위에 있었다. 은혜는 그것을 바라봤다. 편지는 어디에 뒀더라.
주머니 속이었다.
은혜는 편지를 꺼냈다. 손이 여전히 떨렸다. 글씨를 다시 들여다봤다. 어머니의 글씨는 처음부터 떨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용서를 빌 때의 손처럼.
'고쳐줄 수 있니?'
그 아래.
'할머니께 받아달라고 부탁했어.'
그리고.
'미안해.'
은혜의 손가락이 글씨 위에서 멈췄다. 미안해. 무엇이 미안한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글씨 끝에는 작은 얼룩이 있었다. 눈물인지 잉크인지 알 수 없는 자국. 어머니가 이 편지를 쓸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은혜는 편지를 내려놓고 청바지를 다시 들었다. 주머니를 안쪽으로 뒤집어 '은혜'라고 수놓은 부분을 확인했다. 글씨가 정말 작았다. 누군가 숨기고 싶었던 것처럼. 아니면 누군가 자신만 알고 싶었던 것처럼.
은혜는 수선실 한쪽 벽에 있는 낡은 책장에 손을 뻗었다. 책장에는 책 대신 사진들이 꽂혀 있었다. 오래된 사진. 색이 바래진 사진. 그 중에 한 장이 있었다.
할머니와 어린 은혜가 함께 폐지를 주우며 웃고 있는 사진. 할머니는 은혜의 손을 잡고 있었고, 은혜는 할머니의 치마 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사진의 배경은 도시의 변두리. 곧 버려질 것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빈 자리가 있었다. 어머니가 들어갈 자리.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은혜는 사진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할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할머니는 웃고 있었다. 순수하고 따뜻한 미소로.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버려진 것들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필요해질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그 믿음이 자신에게 전해졌었나.
은혜는 사진 속 빈 자리를 바라봤다. 어머니가 거기 있었어야 했다. 할머니 옆에, 자신 옆에. 하지만 어머니는 그 자리에 서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은 어머니를 그 자리로 부르지 않았다.
왜였을까.
할머니의 손이 따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머니의 손이 떨렸기 때문일까. 어머니가 자신을 잘 안아주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어머니를 안아주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일까.
은혜는 사진을 책장에 돌려놓았다. 하지만 그 빈 자리는 계속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빈 자리는 이제 자신의 마음속에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할머니를 택했던 자신의 선택이 만들어낸 빈 자리. 어머니를 외면했던 자신의 손가락이 파낸 상처.
수선대로 돌아갔다. 청바지를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더 오래, 더 깊이 손을 댔다.
감정이 밀려왔다.
먼저 따뜻함이 들어왔다.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바느질하던 때의 따뜻함. 손가락이 바늘을 들 때마다 느껴지는 작은 기쁨. 이 옷이 누군가의 몸을 감싸줄 거라는 기대감. 그 기대감에 담긴 사랑.
하지만 그 따뜻함 아래에는 다른 것이 있었다.
불안감.
깊은 불안감이 층층이 깔려 있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라는 절망감.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 깊고 무거운 죄책감.
은혜의 눈물이 떨어졌다.
청바지는 어머니의 손으로 만들어진 마지막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사과였다. 수년간 외면했던 것들을 담은 사과. 자신이 주지 못했던 모든 것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라도 무언가를 주고 싶었던 절박함.
은혜는 청바지를 가슴에 안았다.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은혜가 열 살 정도였을 때. 어머니가 집에 왔었다. 오랜만에. 은혜는 할머니 손을 잡고 있었다. 할머니가 은혜의 머리를 쓸어주고 있었다.
어머니가 말했었다.
"엄마 손을 잡아봐."
은혜는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의 손이 더 따뜻했다. 할머니의 손이 더 익숙했다.
어머니의 손은 흔들렸다.
"미안해, 은혜."
그게 어머니가 한 마지막 말이었나. 은혜는 기억하지 못했다. 대신 기억하는 것은 할머니의 온기뿐이었다. 자신이 외면했던 것들. 자신이 외면하고 싶었던 것들.
그리고 지금, 청바지 속에서 느껴지는 것도 그것이었다.
어머니의 온기. 어머니가 남기고 싶었던 따뜻함. 하지만 줄 수 없었던 것들. 그것이 모두 이 옷 안에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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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은혜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새벽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아직 수선실 문은 열지 않았다. 아직 손님이 오는 시간이 아니었다.
은혜는 천천히 일어섰다. 발걸음을 옮겼다. 문의 작은 창을 통해 바깥을 봤다.
서 있는 사람은 중년의 여자였다. 화장이 짙었고, 옷은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눈 아래는 검었다. 마치 밤을 새운 사람처럼. 아니, 밤을 새워도 되지 않는 사람처럼.
은혜가 문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너무 이른 시간에..."
여자가 말을 시작했다. 목소리는 밝았지만,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절실히 감추고 있는 사람처럼.
"주머니를 맡기고 싶은데요."
여자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꺼냈다. 가방이 아니라 옷이었다. 검은색 원피스. 실크로 만들어진 옷이었다. 빛이 나는 검은색.
은혜가 옷을 받아들였다. 손가락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천에 닿는 순간, 무언가가 울렸다. 깊고 오래된 울음이 천 속에서 울려 나왔다.
"이 옷... 제 것이 아니거든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아주 작게.
"하지만 제가 입어야 할 것 같아서요. 수선할 수 있을까요?"
은혜는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낮에는 밝은 사람이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이 여자는 누군가를 잃은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면 누군가에게 버려진 사람처럼.
그 얼굴에서 은혜는 자신을 보았다.
여자가 이름을 남겼다. 박현숙. 그리고 전화번호. 손이 떨려서 숫자가 삐뚤어졌다.
그 아래로 한 줄의 메모.
'이 옷이 저를 다시 만들어줄 수 있을까요?'
은혜는 옷을 들었다. 손가락이 천에 닿는 순간, 세상이 다시 조용해졌다.
검은 실크 안에 갇혀 있던 것. 수년간 누군가가 삼켜 온 울음. 그것이 한 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은혜의 온몸이 떨렸다.
이 울음은 자신의 울음과 같았다.
버려진 자의 울음.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에게 필요해지고 싶은 자의 울음. 그 울음이 이 검은 옷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은혜는 옷을 더 강하게 안았다. 박현숙의 울음을 받아 안았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울음도 함께 품었다. 이 여자의 절망 속에서 자신의 절망을 보았다. 이 여자의 필요함 속에서 자신의 필요함을 보았다.
책임감이 가슴을 눌렀다. 이 옷을 고쳐야 한다는 책임감. 이 여자를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 그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약속이었다.
박현숙이라는 여자는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대답을 기다리고 있듯이.
"네, 괜찮습니다."
은혜가 말했다.
"이 옷을 고쳐드리겠습니다."
여자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고개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작은 울음이 새어 나왔다.
"감사합니다. 정말..."
여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섰다. 골목 어귀로 사라져 갔다.
은혜는 검은 원피스를 들고 수선실로 돌아갔다. 어머니의 청바지 옆에 그것을 놓았다. 두 옷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청바지는 밝은 파란색이었다. 원피스는 깊은 검은색이었다. 하나는 사랑이고, 하나는 절망이었다. 하나는 주고 싶었던 것이고, 하나는 받고 싶었던 것이었다.
은혜는 두 옷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두 옷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필요해지고 싶지만, 자신이 얼마나 불필요한지 아는 자들의 이야기를.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자들의 이야기를.
창밖으로 골목이 천천히 밝아오고 있었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은혜는 수선대에 앉았다. 청바지를 다시 들었다. 안쪽 주머니의 '은혜'라는 글씨를 다시 만졌다. 어머니의 손길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옆에 놓인 검은 원피스. 박현숙의 절망이 담긴 옷.
은혜는 천천히 바늘을 집어 들었다. 실을 꿰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이제는 거기에 힘을 주기로 했다. 이 떨림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기로 했다.
바늘을 들어올렸다. 청바지의 해어진 자락을 향해 내려찍었다. 첫 땀이 박혔다.
그 순간이었다.
어머니의 손이 느껴졌다. 가늘게 떨리던 그 손이. 한 땀 한 땀을 박아내던 손의 기억이. 그리고 동시에 박현숙의 울음이 들렸다. 검은 원피스 속에 갇혀 있던 울음이. 수년간 누군가가 삼켜 온 절망의 울음이.
은혜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다시 바늘을 들어올렸다. 내려찍었다. 또 들어올렸다. 내려찍었다.
한 땀 한 땀.
어머니의 손길을 따라. 할머니가 버려진 것들을 받아주던 그 손길을 따라. 그 손길 속에 자신의 손을 겹쳐놓으며.
아침 햇빛이 수선실의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