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프의 층위
루프 9회차. 20시 02분.
은지는 벤치에서 눈을 떴다. 손가락을 펼쳐 확인했다. 양손의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투명해져 있었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 떠 있는 자신의 손가락. 만질 수 없었다. 이미 다른 곳에 있는 것이었다.
은지는 천천히 일어났다. 몸이 무거웠다. 동시에 가벼워지고 있었다. 중력에서 벗어나가는 것처럼.
박준호가 응급문 근처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내... 아내는 어디야? 은지, 그 사람은 이 차 안에 없어. 밖에 있어. 밖에는 내 아내가..."
은지가 준호에게 다가갔다. "왜 자꾸 그 얘기를 해?"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초점을 잃고 있었다. "뭐?"
"밖의 가족, 아내. 넌 왜 계속 그 이름을 말해?" 은지의 목소리는 차갑게 흘러나왔다. "여기서 죽으면 다른 데로 간다고 했잖아. 그럼 그 사람도 이미..."
준호가 은지의 팔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은지의 팔을 관통했다. 투명한 손가락이 그냥 스쳐 지나갔다. "내 아내 이름은 은지야.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날 살려 줄 거야."
세상이 멈췄다.
은지는 동작을 멈추고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의 입술이 움직였다. 한 글자씩, 명확하게: 은지.
아내의 이름이 은지.
"뭐... 뭐라고 했어?"
준호는 은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내 아내 이름은 은지야. 그 사람이 나를 살려 줄 거야. 계속 그렇게 말했으니까. 아침에 문자도 보냈고. 'I will save you'라고. 그 사람은 날 구해 줄 거야. 이 차 밖에서."
은지는 뒷걸음질을 쳤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손가락 여섯 개가 떨렸다.
자신의 이름은 은지였다. 맞다.
그런데 준호의 아내도 은지였다.
그리고 준호는 이 차 밖의 그 은지에게 "날 살려 달라"고 했었다.
은지의 호흡이 빨라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 손가락 여섯 개가 떨려 투명한 자국을 남겼다. 자신도 누군가의 루프 안에 있는 건가. 그렇다면 자신은 누구인가. 이 차 밖의 그 은지는 자신을 구하려고 타임백을 사용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자신은 이미 죽어 있는 건가.
은지는 차량 한구석으로 몸을 밀어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호흡이 가빠졌다. 손가락 여섯 개가 떨렸다.
최수진이 은지 옆에 앉았다. "은지?"
"내가 정말 은지야?" 은지가 물었다.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내가... 누구야?"
최수진이 은지의 손을 잡으려 했다. 손가락이 은지의 팔을 관통했다. 최수진도 투명해지고 있었다.
"우리는 정말 죽는 걸까?" 최수진이 다시 묻기 시작했다. 이전과 같은 질문이었다. "아니면... 다른 데로 가는 걸까?"
은지는 응답하지 않았다.
대신 응급문 패널에 다시 접근했다. 손가락 여섯 개로는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손등으로 밀어냈다. 패널이 열렸다. 문서가 여전히 거기 있었다.
손가락 여섯 개로 종이를 집을 수 없었다. 입으로 집어 올렸다.
글자가 떨렸다. 은지의 시력이 아니었다. 손 자체가 떨리고 있었다.
**루프 종료 프로토콜**
**10회 타임백 사용 후, 최종 선택자는 루프의 규칙을 깨뜨릴 권한을 가짐**
**규칙 1. 선택자가 10회를 모두 사용하면, 루프의 투명화는 완성됨**
**규칙 2. 완성된 투명화 상태에서 선택자는 이전 루프로 돌아갈 수 있음**
**규칙 3. 또는 현 루프를 강제 종료하고 다음 루프로 이동할 수 있음**
**규칙 4. 강제 종료 시, 현 루프의 모든 선택지는 동시에 소멸함**
은지가 종이를 떨어뜨렸다.
자신이 마지막 타임백 2회를 남긴 이유가 선명해졌다. 10회를 모두 사용하면 투명화가 완성된다. 그리고 완성되면... 뭔가를 할 수 있다.
은지는 천천히 일어섰다. 균형을 잡기 어려웠다. 몸이 자꾸 떠오르려 했다.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이 있을 것이었다.
차량 내부의 거울은 작았다. 승객용 화장실 옆 벽에 붙어 있었다. 은지가 거울 앞에 섰다.
반사된 것은 반투명한 인간이었다. 몸의 절반이 사라지고 있었다. 얼굴은 아직 진했지만, 목에서 아래로는 투명했다. 양손은 완전히 반투명했다.
발도 희미해지고 있었다.
은지는 거울에 손을 대려 했다. 손가락이 거울을 관통했다. 거울에는 손자국이 남지 않았다.
그 순간, 깨달음이 밀려왔다.
자신도 이미 누군가의 루프 속 선택지였다. 투명해진다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이동이었다. 자신이 다음 루프로 이동한다는 뜻이었다.
준호의 아내 은지. 그 은지가 자신을 구하려고 했다. 이 차 밖에서, 다른 루프에서.
자신은 그 은지의 루프 속 선택지였던 거다.
은지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완전히 투명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깨달음이 밀려왔다.
자신에게는 타임백이 남아 있다. 마지막 2회.
10회를 모두 사용하고 투명화가 완성되면, 이 루프를 강제 종료할 수 있다. 그리고 강제 종료 시, 현 루프의 모든 선택지가 동시에 소멸한다.
즉, 다음 루프의 주인공이 되지 않고, 이 루프 자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디로 간다는 건가. 규칙에 명시되지 않은 그 이후의 것.
은지는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의 반투명한 자신이 거울 속의 반투명한 자신을 바라봤다. 무한 반사. 루프 안의 루프.
은지는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차량 내부를 바라봤다. 박준호는 여전히 응급문 근처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최수진은 벤치에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유진은 어딘가에서 은지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을 구할 수 있을까. 아니, 먼저 자신을 구해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은지가 투명한 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은 반투명했다. 하나, 둘, 셋, 넷... 여섯 개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타임백은 2회.
10회를 모두 사용하면 투명화가 완성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모든 선택지가 소멸한다. 박준호도. 최수진도. 이상민도. 유진도.
은지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 거울 속의 반투명한 자신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낯선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전 루프에서 본 여자. 자신과 같은 옷을 입고 있던 여자. 자신과 비슷한 얼굴의 여자.
그 여자가 누구였는지, 은지는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량의 조명이 깜박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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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10회차. 20시 02분.
은지는 벤치에 누워 있었다. 손가락 여섯 개. 몸 절반이 반투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앞과 달랐다.
응급문 앞에 유진이 서 있지 않았다.
투명한 여자가 서 있었다. 은지와 같은 옷을 입은 여자. 은지와 비슷한 얼굴의 여자. 은지와 같은 손가락을 가진 여자—하지만 이 여자의 손은 완전히 투명했다.
그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안녕, 은지."
여자의 목소리는 은지의 목소리와 같았다. 하지만 거기엔 무언가가 더해져 있었다. 루프를 거쳐 온 무게.
"난 루프 11의 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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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지의 세상이 멈췄다.
"루프... 11?"
은지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움직임이 둔했다. 몸이 반투명한 탓이었다.
"그래. 나는 너의 루프 밖에서 타임백을 사용했어. 그리고 너를 구하려고 했어."
루프 11의 은지가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 투명한 손가락들이 공기를 가르며 움직였다.
"하지만 너는 내 루프의 선택지가 되어 버렸어."
은지의 손이 떨렸다. 여섯 개의 손가락이 모두 떨렸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공포가 온몸을 휩쌌다. 자신이 정말 누군가의 선택지라는 게 확정되었다. 자신은 은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루프 안의 데이터일 뿐이라는 뜻이었다. 자신의 모든 기억, 모든 감정, 모든 선택이 누군가의 타임백을 위한 도구였다는 뜻이었다.
"그럼 내가... 정말 죽어 있는 거야?"
"죽어 있는 게 아니라 이동 중이야. 너는 루프 11의 선택지가 되고 있어. 그리고 루프 11에서 누군가는 너를 구하려고 할 거야. 그 다음 루프 12에서는 또 다른 누군가가 루프 11의 선택지를 구하려고 할 거고. 계속 반복돼. 루프 13, 루프 14, 루프 15... 영원히."
루프 11의 은지가 웃었다. 비명 직전의 웃음. 그 웃음 속에는 절망이 있었다.
"멈춰야 한다. 이걸 멈춰야 한다."
은지가 일어섰다. 균형을 잡기 위해 벤치에 손을 짚었다. 손가락이 벤치를 관통했다. 벤치에는 손자국이 남지 않았다.
"나한테 아직 타임백이 남아 있어. 2회. 10회를 모두 사용하고 투명화를 완성시킬 수 있어. 그럼 이 루프를 강제 종료할 수 있어."
은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 안에는 결연함도 있었다.
"규칙 6에 따르면, 루프를 강제 종료하면 모든 선택지는 상위 루프로 귀환한다. 너도 포함해서."
루프 11의 은지가 은지에게 다가섰다. 투명한 손가락들이 은지의 팔을 향해 뻗어왔다. 손가락들이 은지의 팔을 관통하려 했다. 그것은 물리적인 접촉이 아니었다. 차원 간의 터치. 루프를 넘나드는 손의 감촉.
"너는 날 막을 수 없어. 나는 이미 완전히 투명했거든. 그리고 너는 내 루프의 선택지야. 나는 너를 지배할 수 있어."
은지는 몸을 날렸다. 루프 11의 은지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다. 은지는 차량 통로로 몸을 굴렸다. 투명한 몸이 바닥에 부딪혔지만 통증은 없었다. 이미 물질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은지는 응급문 쪽으로 달렸다. 박준호가 응급문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 은지는 박준호를 밀어냈다. 박준호의 투명한 몸이 벽에 부딪혔다.
응급문 패널을 다시 열었다. 문서를 입으로 물었다. 규칙들을 다시 읽었다.
**규칙 5. 10회 타임백 사용 후, 최종 선택자는 루프의 규칙을 깨뜨릴 권한을 가짐**
**규칙 6. 루프 강제 종료 시, 모든 선택지는 상위 루프로 귀환함. 다음 루프는 생성되지 않음**
상위 루프.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곳이 이 악순환의 끝일 수도 있다. 아니면 또 다른 루프의 시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선택지는 명확했다. 루프 11의 은지에게 당하거나, 아니면 이 루프를 강제 종료하거나.
은지는 결정했다. 타임백 2회를 모두 써서 10회를 완성시키고, 이 루프를 강제 종료하겠다.
첫 번째 타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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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10회차. 20시 02분.
은지는 벤치에서 눈을 떴다. 손가락 여섯 개. 몸 절반이 반투명했다.
이번엔 다르게 움직였다. 은지는 벤치에서 일어나자마자 응급문으로 달렸다. 응급문 패널을 열었다. 문서를 입으로 물었다.
**규칙 6. 루프 강제 종료 시, 모든 선택지는 상위 루프로 귀환함**
상위 루프. 그 말의 의미가 명확해졌다. 이 루프의 모든 것이 그곳으로 돌아간다. 박준호도. 최수진도. 유진도. 그리고 루프 11의 은지도.
은지는 문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결정했다.
두 번째 타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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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10회차. 20시 02분.
은지는 벤치에서 눈을 떴다. 손가락 여섯 개. 몸 절반이 반투명했다.
이제 남은 타임백은 0회.
투명화는 완성되었다.
은지는 천천히 일어났다. 몸이 거의 완전히 투명했다. 얼굴만 아직 진했다.
응급문 패널 앞에 섰다. 문서를 다시 읽었다.
**규칙 3. 또는 현 루프를 강제 종료할 수 있음**
은지는 규칙을 깨기로 결정했다.
"루프 강제 종료."
은지가 말했다.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투명한 목에서 나오는 음성.
차량이 흔들렸다.
박준호의 비명이 들렸다. 최수진의 울음이 들렸다. 유진의 웃음이 들렸다.
그리고 루프 11의 은지의 비명도 들렸다.
"아니야! 아니야!"
하지만 너무 늦었다.
루프 10은 붕괴되고 있었다. 모든 선택지가 동시에 소멸하고 있었다. 박준호도. 최수진도. 이상민도. 유진도. 루프 11의 은지도.
차량이 빛으로 가득 찼다. 흰 빛. 루프를 넘나드는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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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11회차. 20시 02분.
은지는 눈을 떴다.
손가락을 확인했다.
없었다.
열 개의 손가락이 모두 없었다.
은지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손목에서 끝나 있었다. 손가락이 없었다.
그 순간, 기억이 밀려왔다.
자신이 이 차 안에서 준호를 구하려고 했다. 타임백을 사용했다. 루프 9에서 루프 10으로, 루프 10에서 다시 루프 9로. 계속 반복했다. 손가락을 하나씩 잃으며.
그리고 루프 10에서 만난 은지. 자신과 같은 이름, 같은 얼굴의 은지.
그 은지가 루프를 강제 종료했다.
모든 선택지가 상위 루프로 귀환했다.
자신도 포함해서.
은지는 주변을 둘러봤다. 차량이 아니었다. 어두운 공간. 벽도 없고 바닥도 명확하지 않은 곳.
그곳에 사람들이 있었다.
박준호가 있었다. 최수진이 있었다. 이상민이 있었다. 유진이 있었다.
그리고 루프 10의 은지도 있었다. 손가락이 완전히 투명한 채로.
루프 10의 은지가 은지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차갑고 명확했다.
"이제 이해했지?"
루프 10의 은지가 말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루프 속 선택지였어. 그리고 루프를 강제 종료하면, 모두 상위 루프로 귀환한다. 하지만 상위 루프도 또 다른 루프 속에 있을 수 있어."
은지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도 누군가의 루프 속에 있는 거야."
루프 10의 은지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절망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우리를 구하기 위해 타임백을 사용하고 있어. 지금 이 순간에도."
은지는 주변을 다시 둘러봤다. 어두운 공간. 벽도 없고 바닥도 명확하지 않은 곳.
그곳에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자신과 같은 옷을 입은 여자. 자신과 비슷한 얼굴의 여자. 손가락이 완전히 투명한 여자.
그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안녕, 루프 11의 은지."
은지는 깨달았다.
자신은 루프 11의 은지였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죽어 있었다.
더 정확히는, 루프 12의 누군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타임백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도 루프 13의 누군가에게 구원받고 있을 것이다.
무한 반복. 루프 안의 루프. 선택지 안의 선택지.
은지는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절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