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손가락이 하나씩 투명해지고 있었다.

은지는 자신의 손을 들었다. 엄지손가락부터 새끼손가락까지, 다섯 개 모두 반투명한 유리처럼 빛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공기 중에서 희미하게 흔들렸다. 손목 너머는 여전히 불투명했다.

루프 11회차. 시간은 20시 02분.

은지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차량이 미세하게 울렸다. 옆에 앉아 있던 박준호는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밖에는 내 아내가 있어. 그 사람은 이 차 안에 없어." 목소리는 이미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기계음처럼 반복되는 절망.

은지는 응급문으로 향했다.

차량 뒤쪽 빨간 손잡이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은지는 손가락이 투명한 손으로 그것을 움켜잡았다. 손가락이 잡히지 않았다. 손잡이를 통과했다. 은지는 다시 시도했다. 이번엔 손 전체로 밀었다. 팔이 손잡이를 밀어냈다. 손잡이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어."

유진이었다. 유진은 응급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유진을 본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필요할 때마다.

"루프 10회차에서 당신은 마지막 타임백을 사용했어. 모든 루프를 동시에 되감으려고." 유진의 얼굴은 흐릿했다. 투명한 얼굴이었다. "그건 규칙을 깨뜨리는 거야."

"규칙?" 은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이게 무슨 규칙이야? 누구를 살릴지 선택하고, 누군가가 죽고, 손가락이 사라지고..." 은지는 투명한 손을 들었다. "이게 규칙이야?"

"그래. 그리고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어." 유진이 한 발 가까워졌다. "당신은 루프 1부터 이 구조를 깨닫고 있었어. 왜 그렇게 오랫동안 버텼는지 알아?"

은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진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나를 위해서였어. 나의 루프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유진의 투명한 손이 은지의 팔을 잡았다. 만져지지 않았지만 무게가 있었다. "나는 루프 2의 선택자였고, 당신은 내 루프 속 선택지였어. 루프 1, 루프 3, 루프 4... 모든 루프의 당신들이 내 루프를 지탱했어. 내가 선택을 할 때마다, 당신들이 대신 투명해졌어."

은지의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터지는 것이 아니라 투명해지는 느낌이었다. 내부부터. 팔꿈치까지 투명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선택했어. 계속 누군가를 살렸어. 그리고 계속 당신이 투명해졌어. 루프 2에서 루프 3으로, 루프 3에서 루프 4로. 당신은 내 루프를 지탱하기 위해 계속 옮겨 다녔어."

응급문이 열렸다.

은지는 몸을 날렸다. 유진이 손을 뻗었지만, 은지의 투명한 팔을 통과했다. 은지는 문을 통해 넘어갔다.

밖은 하얀 복도였다.

병원 복도 같은 공간. 양쪽 벽은 희고, 천장도 희었다. 형광등이 점멸하면서 리듬감 있게 깜박였다. 복도의 끝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그 문들은 모두 다른 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LOOP 1 — LOOP 2 — LOOP 3 —

은지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투명한 발이 바닥을 치지 않았다. LOOP 4의 문 앞에서 은지는 멈췄다. 문은 열려 있었다.

안에는 지하철 차량이 있었다.

같은 차량. 같은 승객들. 하지만 배치가 다르고, 표정이 다르고,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은지는 문을 닫았다. LOOP 5. 또 다른 차량. 또 다른 은지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 은지는 양손이 투명했다.

루프 1의 은지는 할아버지를 살렸다. 대신 박민지가 사라졌다. 루프 3의 은지는 박준호의 아내를 살리려고 했다. 대신 최수진이 사라졌다. 루프 5의 은지는 도연을 선택했다. 대신 이상민이 사라졌다. 루프 7의 은지는 선택 자체를 거부했다. 대신 여섯 명이 동시에 사라졌다. 루프 9의 은지는 벽에 글을 새겼다. '누구도 죽이지 않겠다.' 하지만 벽은 그 글을 지웠다.

은지는 LOOP 10의 문을 열었다.

지하철 차량. 응급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응급문 앞에는 또 다른 은지가 서 있었다. 그 은지는 손가락이 하나도 없었다. 투명한 손가락이 완전히 사라진 은지.

"안녕." 루프 10의 은지가 말했다. "나는 너의 다음 루프야. 그리고 너는 내 이전 루프야. 나는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계속 기다렸어."

"왜?" 은지의 목소리는 떨렸다. "왜 나를 기다렸어?"

"유진이 나한테 말했어. 루프 2의 진실을 다 말해줬어. 그리고 나는 알았어. 우리가 뭔지.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 루프 10의 은지가 한 발 가까워졌다. "우리는 선택자가 아니야. 우리는 선택지야. 누군가의 루프를 지탱하기 위한 도구야."

"이게... 뭐야?" 은지의 목소리는 떨렸다. "우리가 죽는 게 아니라 옮겨가는 거야? 다른 루프로?"

"그래.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가 선택을 할 때마다 우리가 옮겨가는 거야. 누군가를 살릴 때마다 우리는 투명해지고, 손가락이 사라지고, 결국 다음 루프로 이동해." 루프 10의 은지의 검은 눈이 은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다음 루프에서는 또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선택지가 돼."

"그럼... 우리가 살린 사람들은? 할아버지는? 박민지는?"

"그들도 다른 루프로 옮겨갔어. 그리고 그 루프에서는 그들이 선택자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가 선택지가 되는 거지. 루프 1의 할아버지는 지금 루프 12의 선택자야. 루프 2의 박민지는 루프 8의 선택자가 됐어. 모두가 누군가의 루프를 지탱하고 있어."

은지는 무릎을 꿇었다. 응급실 바닥이 차갑지 않았다. 모든 것이 투명해졌다. 손가락 끝부터 팔꿈치까지, 팔꿈치부터 어깨까지 투명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루프 10의 은지는 여전히 완전히 투명했다. 얼굴도, 목도, 몸도. 오직 눈만 검은색으로 남아 있었다.

"이게 끝나는 거 아니야?" 은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한테 타임백이 1회 남았어. 그걸 사용해서..."

"모든 루프를 한 번에 종료시킬 수 있어."

은지는 고개를 들었다. 루프 10의 은지의 검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안도가 없었다. 오직 피로만 있었다. 10번의 루프를 돈 사람의 피로.

"그럼 모든 선택지가 동시에 소멸하고, 모든 선택자도 해방돼. 루프의 순환이 끝나는 거야."

응급실의 벽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벽 너머로 또 다른 공간이 보였다. 지하철 차량. 그 너머로 또 다른 지하철. 그 너머로 또 다른 응급실. 무한히 겹쳐진 루프들의 층위. 각 층마다 다른 은지가 있었다. 각 층마다 다른 선택지들이 있었다. 모두 투명해지는 과정 중이었다.

은지는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여섯 개 남아 있었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 그리고 하나 더. 그 하나는 뭔가 다른 형태였다. 빛나고 있었다. 타임백. 마지막 능력.

"기다려." 은지가 일어났다. "박준호는? 도연은? 유진은?"

"그들도 다른 루프로 옮겨갔어. 루프 11의 박준호는 루프 9의 선택자가 됐어. 루프 5의 도연은 루프 3의 선택자가 됐어. 그리고 유진은..." 루프 10의 은지가 멈췄다. "유진은 루프 2의 선택자야. 계속 루프 2에 머물러 있어. 루프 2를 지탱하기 위해."

"그럼 이게 계속된다는 거야? 영원히?"

루프 10의 은지가 투명한 손을 내밀었다. "아니야. 이제 끝낼 수 있어. 넌 선택자가 될 수 있어. 마지막 타임백을 사용해서 모든 루프를 동시에 되감으면, 모든 루프가 붕괴해. 그럼 우리가 모두 해방돼."

은지는 손을 잡았다. 투명한 손과 투명한 손이 맞닿았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그런데 온기가 흐르고 있었다. 따뜻함이 아니라 열기. 손가락 끝에서 손목으로, 팔뚝으로 흘러내리는 따끔거린 온기. 누군가의 온기인지, 자신의 온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미 경계가 사라졌다.

은지가 마지막 타임백을 사용했다.

모든 루프가 동시에 역행한다.

LOOP 1의 할아버지가 다시 일어난다. 투명해졌던 몸이 다시 실체를 얻는다. 하지만 얼굴을 못 본다. 은지가 보는 것은 할아버지의 손. 그 손이 흔들리고 있다. 거기 또 다른 은지가 있다. 루프 1의 선택자. 손가락이 여섯 개다. 그 은지는 할아버지를 보며 눈을 감는다.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LOOP 2의 박민지가 나타난다. 침대에서 일어난다. 그 옆에 또 다른 은지. 손가락이 다섯 개. 그 은지의 얼굴에는 절망이 아닌 다른 감정이 있다. 자신이 선택자가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

LOOP 3의 최수진이 투명한 손으로 벽을 짚는다. 벽에 손톱자국이 새겨진다. "LOOP 8"이라고 적혀 있던 그 벽에. 또 다른 자국이 추가된다. 손가락이 사라진 은지의 손톱이. 그 은지는 최수진을 보며 입술을 깨문다.

LOOP 5의 이상민이 소리를 지른다. 그의 몸이 투명해지지 않는다. 살아 있다. 하지만 그 옆에는 또 다른 은지가 소멸하고 있다. 손가락 하나만 남은 채로. 이상민은 그 은지를 보며 손을 뻗지만, 투명한 손을 통과한다.

LOOP 7에서 사라진 여섯 명이 한 번에 나타난다. 도연, 준호, 상민, 수진, 그리고 이름 모를 승객들. 그들의 가슴에는 모두 같은 표정이 박혀 있다. 선택당한 자의 표정. 그리고 각각의 루프에서 각각의 은지가 손가락을 하나씩 잃고 있다. 루프 7의 은지는 여섯 명을 바라보며 비명을 지른다. 자신의 선택 거부가 초래한 결과를 목격하면서.

LOOP 11에서 박준호의 아내 은지가 눈을 뜬다. 손이 완전히 투명하다. 하지만 그녀도 다른 루프의 선택지였다. 그 루프에는 또 다른 선택자 은지가 있다. 마지막 타임백을 들고. 박준호의 아내 은지는 그 선택자 은지를 보며 미소한다. 슬픈 미소가 아니다. 그냥 피로한 미소다.

그리고 모든 루프가 멈춘다.

시간이 멈추지 않는다. 시간이 역행하지도 않는다. 모든 시간이 한 점으로 수렴한다. 모든 지하철이 한 대의 차량으로 겹쳐진다. 모든 응급실이 한 개의 공간으로 붕괴한다. 모든 은지가 한 명의 은지로 겹쳐진다.

아니다. 겹쳐진 게 아니다.

모든 은지가 동시에 소멸한다.

그리고 모든 루프가 동시에 생성된다.

은지는 깨어났다.

강남역 플랫폼이었다. 아침 햇빛이 플랫폼을 비추고 있었다. 시간은 08시 47분. 은지가 처음 지하철을 탔던 그 시간이었다. 은지의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모두 있었다. 투명하지 않은 손가락들. 열 개 모두.

하지만 타임백은 없었다. 능력을 사용해보려고 해도, 아무것도 되감기지 않았다. 손가락에서 나오던 그 빛나는 감각이 사라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이제 다른 루프의 선택지가 되었다는 것을.

플랫폼의 왼쪽 끝에 여자가 서 있었다. 회색 양복을 입은 여자. 나이는 서른 즈음.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지만, 그 손에 빛이 있었다. 열 개의 손가락에 각각 하나씩. 타임백의 빛. 그 여자가 은지를 보고 있었다.

은지의 심장이 멈췄다.

그 여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아니다. 그게 아니었다.

그 여자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이었다.

은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플랫폼 전체를 훑었다. 왼쪽 끝의 여자. 오른쪽 끝의 또 다른 여자. 계단 위의 여자. 벤치에 앉은 여자. 모두 같은 얼굴이었다. 모두 은지였다.

그들의 손에는 각각 다른 개수의 손가락이 빛나고 있었다. 한 명은 열 개. 한 명은 아홉 개. 한 명은 여덟 개. 한 명은 일곱 개.

또 다른 루프의 또 다른 선택자들이었다.

은지는 발을 옮겼다. 지하철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2호선. 강남역에서 신논현역으로 가는 열차. 은지는 열차에 탔다. 문이 닫혔다.

차장이 없었다. 유진이 없었다.

대신 또 다른 은지가 서 있었다. 손가락이 아홉 개. 이미 한 번 선택을 한 은지. 그 은지는 은지를 보고 미소했다. 슬픈 미소가 아니었다. 동정하는 미소도 아니었다. 그냥 피로한 미소였다.

"어서 와." 그 은지가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지하철이 움직였다. 강남역을 떠났다. 신논현역으로 향했다. 그 사이의 터널에서.

차량 조명이 깜박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조명이 꺼졌다.

통신이 두절되었다.

은지의 손가락이 다시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엄지부터. 검지. 중지. 약지. 소지. 순서대로 투명해졌다. 마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벤치에 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박준호. 도연. 그리고 이름 모를 승객들. 모두 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들 중 누가 살아남을지 기다리며.

차량 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24시간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였다.

은지는 손을 들었다. 손가락은 여전히 투명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손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다.

타임백이 생성되고 있었다.

열 번의 타임백. 다시.

은지의 눈이 떠졌다. 벤치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누가 살릴 것인가. 누가 죽을 것인가. 그 선택은 또 다른 누군가를 다음 루프로 보낼 것이고, 그 누군가는 또 다른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은지는 손가락에 모인 빛을 바라봤다. 열 개의 타임백. 열 번의 기회. 그 기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알았다.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선택지로의 전환. 선택자가 되는 것도, 선택지가 되는 것도 모두 같은 루프 속 다른 위치일 뿐이었다.

차량이 터널을 빠져나갔다. 다음 역이 보였다. 신논현역.

은지는 누군가를 선택해야 했다.

박준호를 살릴 것인가. 도연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선택할 것인가.

손가락이 완전히 투명해지기 전에, 은지는 선택을 시작했다.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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