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루프 7회차, 20시 02분.

은지가 눈을 뜰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손이었다. 왼손의 약지가 반투명했다. 오른손은 더 심했다. 검지와 중지가 유리처럼 흐릿해 있었고, 손가락 사이로 차량의 조명이 비쳐 보였다. 손을 들어 비추면 손톱이 없었다. 아니, 손톱이 아예 사라진 게 아니라 몸에서 분리되고 있는 중이었다.

"타임백을 사용할 때마다."

은지가 중얼거렸다. 기억이 파편화되는 건 아니었다. 기억은 오히려 선명했다. 손가락이 사라지는 것. 그것이 대가였다. 타임백 하나마다 한 손가락씩. 6회차까지 사용했으니 6개. 남은 건 엄지손가락 두 개뿐이었다.

차량이 흔들렸다. 조명이 한 번 깜박였다.

도연이 은지에게 다가왔다. 할머니 같은 부드러운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이미 어딘가 멀리 가 있었다.

"내가 다음이야."

도연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했다.

"난 알아. 이제 패턴이 보여. 루프 7회차부터 루프 9회차까지, 내가 세 번 죽었거든. 매번 같은 시간에, 같은 고통으로."

은지가 입을 열려 했지만, 도연이 손을 들어 막았다.

"이전 루프에서 넌 나를 살리려고 했어. 그럼 최수진이 죽었지. 그 전 루프에서는 준호를 살리려다 또 다른 누군가가 죽었고. 계속 이 악순환이야."

도연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몸은 벌써 투명해지고 있었다. 혈관이 푸르게 떠올랐고, 피부가 왁스처럼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제발."

도연이 말했다.

"제발 나를 살리지 마."

은지의 손가락이 떨렸다. 엄지손가락 하나가 반짝거렸다. 타임백 버튼. 아직 6회 남아 있었다. 아니, 이제 6회였다. 6회차 사용으로 6개의 손가락을 잃었으니, 다음 타임백을 누르면 엄지손가락도 투명해질 것이다.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죽고 싶어."

도연의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이 악순환을 끝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은지가 한 발 나아갔다. 손을 뻗었다. 도연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도연이 몸을 날렸다. 은지의 팔을 피해 차량 벽으로 몸을 던졌다.

"아니!"

은지가 외쳤다.

도연의 몸이 더욱 투명해졌다. 뼈가 보였다. 근육이 보였다. 더 이상 인간의 형태가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 도연의 손이 올라왔다. 은지를 향해.

그것은 용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계속해.'

도연이 완전히 사라졌다. 남은 것은 그녀가 입던 옷과 가방뿐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은지의 손에는 타임백 버튼이 있었다.

은지가 무릎을 꿇었다. 도연이 있던 자리를 만졌다. 따뜻했다. 아직 따뜻했다.

"미안해."

은지가 외쳤다.

아무도 들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계속 중얼거렸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차량이 흔들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조명이 꺼졌다. 완전한 어둠이 내려왔다.

그리고.

루프가 끝났다.

---

루프 8회차, 20시 02분.

은지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타임백 버튼이 여섯 번 눌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엄지손가락이 거의 투명했다. 손톱뿐만 아니라 관절까지 반투명해졌다. 손가락을 구부리면 마치 유리가 부러지는 것처럼 소리가 났다. 아, 아니다. 그건 소리가 아니라 감각이었다. 몸이 흩어지는 감각.

도연이 없었다.

그 자리에는 새로운 승객이 있었다. 은지는 그 사람의 이름을 모르고,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그 사람이 도연이 아니라는 것만 알았다.

최수진이 은지에게 다가왔다.

"도연 누나는?"

"모르겠어."

은지가 대답했다.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 도연을 왜 살리지 않았는지. 그 선택의 이유가 사라져 있었다. 기억은 있었다. 도연이 투명해지는 모습. 도연의 마지막 손짓. 하지만 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선택한 게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을 통해 선택한 것처럼.

"은지."

유진이 나타났다. 그의 옷은 깨끗했다. 얼굴도 깨끗했다. 매 루프마다 그는 항상 깨끗했다. 마치 루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이제 넌 3회만 남았어."

유진의 목소리가 속삭임처럼 들렸다.

"마지막 선택을 준비해."

은지가 유진을 바라봤다. 그의 눈이 이상했다. 동공이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검은색이 아니었다. 마치 구멍처럼 보였다. 그 구멍을 통해 다른 무언가가 보고 있었다.

"넌 내 루프 속에서 자신이 '선택지'였다는 걸 알고 있냐?"

유진이 다시 물었다.

"루프 1회차에서 뭘 했어? 기억나?"

은지의 입이 떨렸다. 루프 1회차. 기억이 없었다. 아니, 있었던 것도 같고 없었던 것도 같았다. 마치 꿈처럼 희미했다. 누군가를 살렸던 것 같은데. 누구였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람이 사라진 후 누가 죽었을까? 그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3회."

유진이 반복했다.

"3회만 남았어. 그 다음엔?"

그 다음은 뭘까. 은지가 자신의 손을 들어다봤다. 엄지손가락 한 개만 남아 있었다. 반투명한 엄지손가락.

"그 다음엔?"

유진의 속삭임이 더욱 작아졌다.

"그 다음엔 넌 사라져."

차량의 조명이 깜박였다. 그 순간, 은지는 벽에 새겨진 글씨들을 봤다. 이전 루프들의 기록. 손톱자국으로 새겨진 절망적인 글씨들이었다.

'루프 37회차 — 누가 죽었는지 기억 안 남'

'루프 43회차 —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루프 46회차 — 기억이 안 난다'

그 아래에는 새로운 글씨가 하나 추가되어 있었다.

'루프 7회차 — 도연. 자발적 소멸.'

그리고 그 아래에는 다른 필체로 쓰인 한 줄.

'이제 누가 남을까?'

은지는 그 글씨를 읽으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도연도, 유진도 모두 그 운명의 일부였다.

차량이 다시 흔들렸다.

조명이 깜박였다.

그리고 루프는 계속됐다.

루프 9회차, 20시 02분.

은지가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것은 자신의 손이었다. 엄지손가락이 완전히 투명했다. 손가락 뼈가 보였다. 아니, 뼈도 아니었다. 그냥 허공이었다. 손가락이 있었던 자리에 공기만 남아 있었다.

"루프 9회차입니다."

유진의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유진은 보이지 않았다. 차량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였다.

은지는 손가락을 펼쳐보려 했다. 펼쳐질 것이 없었다. 손가락 다섯 개 중 네 개가 이미 사라졌다. 남은 건 검지손가락 하나뿐이었다. 반투명하고, 부서질 듯이 가느다란 그 손가락.

"3회."

차량 곳곳의 스피커에서 유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3회만 남았습니다."

최수진이 은지에게 다가왔다. 그 아이의 얼굴에는 이미 절망이 가득했다. 아니, 절망이라기보다는 체념이었다. 자신이 다음 루프에서 죽을 것을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은지 언니. 이제 우리 중 누가 살 거야?"

은지가 대답할 수 없었다. 검지손가락 하나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타임백 버튼도 누를 수 없었다. 아니, 누를 수는 있겠지. 하지만 누르면 어떻게 될까. 손가락이 완전히 사라질까. 아니면 자신이 사라질까.

박준호가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다. 피부가 회색으로 변해 있었고, 눈이 움푹 패여 있었다. 아내와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집착이 그의 모습까지 변형시켰다.

"은지. 제발."

박준호가 무릎을 꿇었다.

"내 가족을 살려줘. 다음 루프에서 내 아내가 나타나면 살려줄 거지? 약속해줄 수 있어?"

은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박준호의 아내가 이 차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은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내는 루프 밖에 있다. 루프는 폐쇄된 시스템이고, 밖의 사람은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은지는 그것을 깨달았지만, 박준호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알면 자신이 미쳐버릴까봐.

"내가 죽는 대신 누군가를 살려줄 거지? 그게 규칙 아니야?"

박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사라지면 누군가는 살겠지. 그럼 내 아내도 여기 올 수 있겠지?"

은지가 고개를 저었다. 아주 천천히, 명확하게.

"안 돼."

박준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여긴 다른 루프야. 다른 세계야. 밖의 사람은 안으로 못 들어와."

그 순간, 박준호가 소리를 질렀다. 동물처럼 울부짖는 소리였다. 그 울음은 차량 전체에 퍼졌다. 승객들이 귀를 막았다. 하지만 울음은 계속됐다. 박준호는 계속 소리를 질렀다.

조명이 깜박였다.

박준호의 울음이 공기를 진동시켰다. 그 울음의 강도에 반응하듯 차량이 흔들렸다. 한 명의 승객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박준호가 아니었다. 루프 8회차에서 도연의 자리에 나타났던 새로운 승객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박준호가 그 승객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투명한 몸을 통과했다.

"내가 아니라 내가 아니라!"

박준호는 계속 소리를 질렀고, 그 사람은 계속 사라졌다.

그 승객의 몸이 천천히 희미해져 갔다. 처음에는 피부가 반투명해졌다. 그 다음 혈관이 드러났다. 뼈가 보였다. 내장기관이 윤곽을 드러냈다. 마지막 순간, 그 사람의 눈이 은지를 바라봤다. 분노였을까. 원망이었을까. 은지는 그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그 눈이 희미해지다가 완전히 사라질 뿐이었다.

새로운 빈 자리가 남겨졌다.

박준호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아내를 살릴 수 없다는 절망이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아직 18시간이 남았어."

이상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남자는 차량의 한 구석에 앉아 있었다. 자신의 턱을 치며 웃고 있었다.

"18시간. 누가 죽을까? 누가 살아날까? 아, 재미있네."

이상민이 일어섰다. 그의 눈이 은지를 향했다.

"넌 3회 남았지? 그럼 넌 누구를 선택할 거야? 나? 이 아이? 그 할머니?"

그는 차량을 돌아다니며 손가락으로 각 승객을 지적했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마치 이것이 그에게 오락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 근데 선택할 손가락이 하나밖에 없네."

이상민이 은지의 손을 봤다. 검지손가락 하나.

"그럼 한 명만 살릴 수 있겠네. 나머지는? 나머지는 다 죽는 거지?"

은지는 그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바라봤다. 그 손가락이 너무나 가늘고, 너무나 약해 보였다.

"은지."

최수진이 다시 말했다.

"나 다음에 누가 죽을 거야?"

은지가 최수진을 봤다. 그 아이의 눈에는 이미 죽음이 비쳐 있었다.

"모르겠어."

"거짓말하지 마. 넌 알아. 넌 루프를 돌면서 봤잖아. 패턴을."

최수진이 맞았다. 은지는 패턴을 알고 있었다. 루프 9회차에서는 최수진이 죽을 것이다. 그 다음은 박준호. 그 다음은 이상민. 그 다음은... 은지는 자신이 마지막일 것을 알았다. 타임백이 남아 있지 않으면, 자신이 사라질 것이다.

"3회."

차량의 스피커에서 다시 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3회를 어떻게 쓸 거야? 이 아이를 살릴 거야? 그럼 다른 누군가는?"

유진의 목소리가 은지의 뇌를 관통했다.

"아니면 아무도 살리지 않고 지켜만 볼 거야? 그럼 넌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은지가 눈을 감았다. 유진의 말이 맞았다. 아무도 살리지 않으면, 자신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살리면, 다른 누군가가 사라질 것이다. 어느 쪽이든 누군가는 죽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니다.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바로 선택 자체를 거부하는 것.

은지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검지손가락 하나만 남은 그 손을. 그리고 그 손가락을 차량의 벽에 들이댔다. 손톱 대신 손가락 끝이 벽에 닿았다. 그곳에 글씨를 새기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이상민이 물었다.

은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손가락으로 벽을 긁었다. 손가락이 부서지는 감각이 들었다. 손가락 끝의 피부가 벽에 닿으면서 벗겨져 나갔다. 뼛속까지 닿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계속했다.

손가락이 투명해지면서 자국이 남았다. 피가 흘렀다.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붉은 액체가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지막 터치감. 손가락이 벽과 만나는 마지막 감각이었다.

'루프 9회차 —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다.'

마지막 글자를 새기는 순간, 은지의 검지손가락이 완전히 사라졌다.

손이 없었다.

손목 너머는 공기였다.

그리고 그 순간, 차량이 흔들렸다.

조명이 깜박였다.

여러 명의 몸이 동시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최수진. 이상민. 그리고 루프 8회차에서 도연의 자리에 나타났던 새로운 승객. 모두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은지는 그들을 바라봤다. 최수진의 몸이 먼저 희미해졌다. 그 아이의 피부가 반투명해지고, 혈관이 드러났다. 뼈가 보였다. 마지막 순간, 최수진이 은지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이해가 담겨 있었다. 자신이 왜 사라지는지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상민도 함께 투명해졌다. 그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의 얼굴이 희미해졌다. 마지막에 그는 은지를 향해 손가락을 구부렸다. 조롱하는 제스처였다.

그리고 새로운 승객도 사라졌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명소리, 울음소리, 절규. 하지만 그 소리들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은지!"

최수진이 마지막으로 외쳤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 거야?"

은지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정말로 죽는 건지, 아니면 다른 루프로 옮겨가는 건지.

그들이 모두 사라졌다. 선택 대상이 없는데도 루프는 계속됐다. 은지는 이해했다. 누군가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행동도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더욱 참혹했다. 선택 대상들이 모두 동시에 소멸했다. 루프의 규칙을 거부한 대가였다.

차량에는 은지와 박준호만 남았다.

박준호가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부가 회색으로 변해 있었고, 눈이 움푹 패여 있었으며, 입에서는 기계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음 루프에선 내 아내가 여기 있을 거야. 그리고 넌 그 사람을 살려줄 거야."

박준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왜곡되어 갔다. 마치 녹음기가 손상되는 것처럼. 음성이 끊기고, 반복되고, 중첩되었다.

"약속했잖아. 약속했잖아. 약속했잖아."

루프가 반복될 때마다 박준호는 변했다. 손가락이 없는 은지와 달리, 박준호는 신체적 변형을 겪고 있었다. 루프 시스템이 그의 집착을 물리적으로 각인시키고 있었다. 매 루프마다 그의 몸은 더욱 기계화되어 갔다. 마치 루프 자체가 그를 프로그래밍하고 있는 것처럼.

은지는 박준호에게서 눈을 돌렸다. 차량의 벽을 봤다. 거기에는 새로운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루프 9회차 —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다.'

그 아래에는 다른 필체로 쓰인 글씨가 있었다.

'선택을 거부하면 모두가 사라진다. 하지만 루프는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또 다른 글씨가 있었다.

'루프 10회차 — 박준호. 여전히 살아있음. 기억 손상 진행 중.'

은지는 그 글씨를 읽으며 이해했다. 선택해도 루프는 계속되고, 선택하지 않아도 루프는 계속된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사라지고, 누군가는 변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변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사라지는 것만이 아니라, 기억도, 도덕도, 인간으로서의 무언가도 함께 소멸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은지는 정확히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몇 시간인지, 몇 분인지. 박준호의 기계음 같은 중얼거림만이 계속됐다.

그리고.

루프가 끝났다.

---

루프 10회차, 20시 02분.

은지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손이 없었다. 두 손 모두 손목 너머는 공기였다.

"루프 10회차입니다."

유진의 음성이 들렸다.

"2회만 남았습니다."

차량 안을 보니, 새로운 승객들이 앉아 있었다. 은지는 그들의 이름을 모르고,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이들이 이전과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만 알았다.

하지만 한 명이 있었다.

박준호가 있었다.

그는 여전히 앉아 있었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루프가 반복되어도 그는 변하지 않았다. 마치 그가 루프의 일부인 것처럼.

박준호가 은지를 봤다. 그의 눈에는 인간의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음 루프에선 내 아내가 여기 있을 거야. 그리고 넌 그 사람을 살려줄 거야."

박준호의 목소리는 이제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기계가 반복 재생하는 음성처럼 일정한 음정과 속도로 반복되고 있었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는 감정의 흔적이 없었다.

"약속했잖아."

그 말은 더 이상 호소가 아니었다. 단순한 데이터의 반복이었다. 루프 시스템이 그의 집착을 프로그래밍으로 변환한 것이었다. 매 루프마다 박준호의 신체는 더욱 기계화되어 갔고, 이제 그는 거의 완전한 자동 장치가 되어 있었다.

은지는 박준호에게서 눈을 돌렸다. 차량의 벽을 봤다. 거기에는 이전 루프들의 기록이 가득했다.

'루프 37회차 — 누가 죽었는지 기억 안 남'

'루프 43회차 —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루프 46회차 — 기억이 안 난다'

'루프 7회차 — 도연. 자발적 소멸.'

'루프 9회차 —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다.'

그 아래에는 새로운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선택을 거부하면 모두가 사라진다. 하지만 루프는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또 다른 글씨가 있었다.

'루프 10회차 — 박준호. 여전히 살아있음. 기억 손상 진행 중. 신체 기계화 진행 중.'

은지는 그 글씨를 읽으며 모든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왜 이 루프에 있는지. 왜 타임백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왜 손가락을 잃어버렸는지.

벽의 글씨들이 은지의 눈에 들어왔다. 루프 37회차부터 46회차까지. 그 이후 루프 7회차부터 10회차까지. 손톱자국으로 새겨진 절망의 기록들이었다. 그 글씨들을 읽으며 은지는 깨달았다. 자신 이전에도 선택지가 있었다는 것. 그들도 손가락을 잃어버렸다는 것. 그들도 이 루프 속에서 죽음과 선택 사이에서 헤맸다는 것.

그리고 그 중 한 명이 이제 유진이 되었다는 것을.

유진이 나타났다.

은지는 유진을 봤다. 그의 눈이 이상했다. 동공이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검은색이 아니었다. 마치 구멍처럼 보였다. 그 구멍을 통해 다른 무언가가 보고 있었다.

"이제 2회만 남았어."

유진이 말했다.

"남은 2회를 어떻게 쓸 거야?"

은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손이 없었다. 손목에서 끝나는 팔.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손가락도, 손톱도, 선택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남은 선택이 뭔지."

유진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넌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이 은지의 기억을 깨웠다. 루프 8회차에서 유진이 한 말. 그때 유진은 자신이 '선택지'라고 했다. 그리고 이전 루프에서 벽에 남겨진 글씨들. 루프 37회차부터 46회차까지의 기록. 그것은 이전 능력자들의 기록이었다. 루프 43회차부터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글씨가 반복된 것. 루프 46회차부터 '기억이 안 난다'는 글씨만 있었던 것.

그들도 자신처럼 선택 앞에서 마비되었던 것이다.

그들도 자신처럼 손가락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이 이제 유진이 되었던 것이다.

"혹시 넌..."

은지가 유진을 봤다.

"이전 루프의 능력자야?"

유진이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따뜻했다. 마치 친구를 보는 것처럼 따뜻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구멍처럼 검었다.

"맞아. 난 너와 같은 사람이야."

유진이 답했다.

"너처럼 루프를 돌았던 사람. 너처럼 선택 앞에서 마비되었던 사람. 너처럼 손가락을 잃어버렸던 사람."

은지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난 이제 루프의 주인이 되었어."

유진이 은지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이 완전했다. 열 개의 손가락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루프를 초월했다는 증거였다. 아니, 루프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증거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포기했어. 기억도, 감정도, 인간으로서의 것도."

유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이제 난 루프를 통제할 수 있어. 누가 들어오고, 누가 나가는지.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는지."

"그리고 넌 내 루프 속의 '선택지'야."

유진이 은지의 귀에 속삭였다.

은지는 그 말을 들으며 모든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누군가의 루프 속의 선택지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유진이었다. 루프의 규칙을 초월한 자. 루프의 주인이 된 자.

"마지막 2회."

유진이 은지의 귀에 속삭였다.

"어떻게 쓸 거야? 넌 나를 살릴 거야? 아니면 너 자신을 살릴 거야? 아니면..."

유진이 박준호를 바라봤다.

"그 남자를 살릴 거야? 그럼 다음 루프에선 그 남자가 주인이 될까?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가?"

차량이 흔들렸다.

조명이 깜박였다.

"선택해봐."

유진의 목소리가 은지의 뇌를 관통했다.

"2회. 그 2회가 남은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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